물한잔

500자 챌린지

글 재활

2023.02.22~2023.03.10 - (총 14일/휴식 이틀 제외)의 글을 1차 백업 해둡니다.

물한잔장르 모두 섞여있습니다. #베스타 #회색도시 #검은방 

53. 그림자

그림자는 좋다. 그 아래에 있으면 제 그림자도 숨길 수 있었다. 그렇게 속마음도 쉽게 숨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정은창의 마음을 김성식에게 들킨 순간 아무 의미 없는 바램이 되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김성식과 아는 사이가 되면 안됐었다. 내 팔자도 개팔자인데 뭐가 좋아서 저새끼를 신경쓰고 그랬을까. 정은창은 심술이 날때면 괜히 애꿎은 김성식의 그림자만 꾹꾹, 꽉꽉 밟았다. 김성식을 밟을 수가 없으니 그 대신이었다. 김성식은 쓰레기다. 저 새끼는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나를 줘팼고 나중에는 이용하기에 이른다. 시발새끼. 내가 자기 얼굴 때문에 좋아하는 줄 아나? 나도 왜 하필 다른 놈도 아니고 저놈을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디가 좋은지 나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좋아하게 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김성식의 말이면 온갖 욕을 삼키고 끄덕일 수 밖에 없다. 저런 놈을 친구로 둔 내가 전생의 죄다. 김성식놈. 머리나 잔뜩 벗겨져라.  

02.22 / 허우석-한도윤 (도윤우석도윤)

“왜 하필 베이스야?” 허우석은 악보를 넘기며 물었다. 오선지 위로 빼곡하게 채워진 음표들은 그려놓은 사람의 내면을 닮는다. 반듯하고, 정신없다. 한도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하니까.” 거짓말. 믿을만한 말을 해야지. 베이스를 좋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들 하지 않으려고 했겠지. 친구들이랍시고 각자 하고 싶은 걸 양보한 뒤 남은 악기를 들었을 뿐이면서. 허우석은 한도윤이 이렇게 대답할 줄 알고 물어봤었지만, 정말 예상했던 대답 그대로 돌아오면 속이 베베 꼬인다. 멍청한 한도윤. “다른 악기도 다룰 줄 알잖아.”,“말했잖아. 베이스 좋아한다고.” 그걸로 충분해. 라고 대답하는 멍청이의 얼굴을 보며 허우석은 다시 악보를 내려다본다. “… ….” 안 되겠다. 악보를 두고 그는 손에 잡히는 쿠션을 아무렇게나 쥐고 한도윤의 뒤통수를 퍽 하고 내려쳤다. 악! 저항 없이 고꾸라진 한도윤 위로 쿠션을 몇 번 더 내려쳤다. “무, 뭔데! 갑자기!” 당황스러워하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분이 풀릴 때쯤 되면 한도윤의 머리칼은 엉망이었다. “…아니, 대체.” 허우석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짜증 나서.”라고 이야기하는 목소리엔 개운함이 묻어났다. 대체, 뭔데…. 한도윤만 억울했다. 

02.23 / 주정재-누아남 (정재누아)

습관을 버리기는 쉽지 않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고 무심코 반복하는 행동을 사람들은 습관이라고 불렀으니. 그래서 주정재는 이렇게 생각에 잠긴다. “뭘 봐.” 남자의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따라 올라간 입꼬리를 시선이 쫓는다. “왜, 내가 뭘 보든 뭔 상관이래. 닳냐? 어 닳냐고?”, “어. 닳아.” 하여간 말이라도 못하면 밉진 않지. 꼬박꼬박 돌아오는 말대꾸를 흘려들으며 커피잔 위로 설탕을 퐁당퐁당 빠트린다. 한 번 피어오른 의심은 꺼질 생각 없이 끊임없이 타오른다. 그리고 주정재는 자신의 의심을 한 번도 허투루 생각한 적 없었다. 모든 것은 생존으로 이어지는 예민한 감각이었다. 낮은 숨을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시선이 남자를 훑어내린다. 그 그림자에서 조금이라도 낯익은 ‘그’를 찾아낸다면…. 주정재는 갈등한다. 의심되는 상황을 뒤로하고 무시하고, 모른 척 눈을 감아 현재를 손에 쥘 것인지. 불안의 싹을 잘라낼지. “야, 주정재.” 주정재. 비슷하게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를 떠올린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02.24 / 김성식-정은창 (성식은창)

김성식의 곁에 서면 가끔 바다 짠 내가 났다. 그럴 리가 없는데. “…….” 지금도 그랬다. 독한 향수와 연초의 향을 뚫고 정은창의 후각을 건드린다. 혀가 말릴 정도로 짜고,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비린……. 그런 냄새가 김성식에게서 났다. 처음엔 착각이라고 여겼다. 두 번째에도 착각이라고 여겼다. 세 번째엔 그러지 못했다. 그의 살갗은 바다였다. 피가 흐를 동맥엔 바닷물이 흐르고, 뛰어야 될 맥박 대신 파도가 쳤다. 바다였다. “정은창.” 그는 다른 말 없이 이름 석 자를 불렀다. 집중하지 않은 이에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도록 정은창은 이미 교육되어있었다. 마르고, 섬뜩한 손이 정은창의 뺨을 쥔다. 강제로 턱을 벌려 벌어진 입안은 시뻘겠다. 숨이 닿으면 파도 소리가 이번엔 귓가에서 들려온다. 살덩이는 징그럽고, 숨은 끔찍하다. 타액은 바닷물이 되고 목 안은 끊임없이 메말라간다. 울산을 등지고, 바다를 지긋지긋하게 여기던 사내는 아무것도 벗어나지 못한 채 바다가 되어있었다. 김성식이었다. 김성식은 바다였다. 정은창의 숨이 끊임없이 잠겨가는 지옥 같은 바다.

02.25 / 신승연-장세일 

 장세일은 손목시계를 본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 이쯤 되면 한 번 불릴 법도 하다. “장세일.” 봐라, 지금처럼.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고 서류를 확인하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장세일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앉아있던 작가가 그에게 묻는다. “그, 오늘은 제가 다녀올까요?” 그보다 한참은 늦게 들어온 막내 작가였다. 입술을 일자로 말렸다. “됐어요. 제가 다녀올게요.” 쓸데없는 배려다. 무안해하는 얼굴을 뒤로하고 카드만 손에 쥐고 아린 속을 오늘도 눌렀다. 이름만 불러도 이것저것 알아서 척척 뒷바라지 하는 신승연의 개. 그게 지금 자신의 위치였다. 반년, 일 년,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도 계속…. 오늘은 그만둬야지, 내일은 그만둬야지. 끊임없이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고마워.” 커피를 받으며 한 의미 없는 한마디에도 발목이 붙잡혀서 결국 장세일은 오늘도 그만두지 못한다. “장세일.”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부름에 바짝 긴장한 채 고개를 돌렸다. “잘했어.” 생각지도 못한 칭찬이 날카롭게 올라왔던 불안정한 감정을 누른다. 아…. 장세일은 그만둘 수 없었다. 결국 오늘도 그녀가 부리면 부리는 대로, 하하. 빌어먹을. 이미 길들어졌다. 

02.26 / 허우석-한도윤 (도윤우석도윤)

꿈을 꿨다. 할 말이 있어. 어울리지도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제게 말 걸어오는 네 표정을 보며 허우석은 그 순간 깨달았다. ‘아, 이건 모두 꿈이구나.’ 그러지 않는다면 네가 이렇게 말을 걸어올 리가 없을 테니. “…뭔데. 말을 해.” 대답을 기다리며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동자가 기분 나쁠 정도로 시꺼멓다. “우석아.” 허락을 구해야만 그것은 입을 열었다. “미안해.” 타인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꼴로 그것은 사과를 꺼낸다. “내가 잘못했어.”,“네가 했던 말이 모두 맞았어.” 그는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내가 잘못한 거였어.” 진심하나 담기지 않은 말은 허우석이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 동시에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다. 아, 참담하다. 비참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된다. “거짓말.” 허우석은 비명을 지른다. “미안해.”,“사과하지 마!” 비명을 지른다. “네가 선택한 길이면 당당해!” 사과하지 마. “내가 잘못한 것처럼 만들지 마!” 차라리 떳떳하라. 허우석이 비명을 지를 때마다 꿈은 깨진다. 눈을 뜨고, 아무것도 없는 현실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는 얼굴을 쓸어내린다. 안하무인이어도 좋다. 자신이 듣고 싶어서 하는 말만 반복하는 한도윤은 필요 없다. 그러지 않기 때문에 한도윤이었다.

02.27 / 박근태

 거실, 가장 넓은 벽면에 예전엔 그림이 걸려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장희준 회장의 애장품이었던 걸로 그는 기억했다. 결혼 선물이었다. 우연히 집에서 만난 손님이 그 그림을 보며 입을 떡하니 벌리던 것을 기억하니 꽤 고가품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그림은 이제 자리에 없다. ‘큰 그림을 보게나.’ 그렇게 이야기하던 회장의 목소리는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그의 사고에 영향을 끼친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망가지기 시작한 회장은 뒷방 늙은이가 되어가고 더는 박근태를 건들 수도 없었다. 하지만 박근태는 달랐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먹어도 정정하던 무렵의 장희준 그림자가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래서 그는 거실의 그림을 치웠다. 그림이 있던 흔적은 변색 된 벽지들로 남았다. 그림을 떼어내기 전보다 더 보기 싫은 꼴이 된 벽을, 이 집을…. 그는 집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걸음 하는 횟수가 서서히 줄었다. 자신을 닮지 않은 아이는 가정부가 돌보고, 백석의 사람이 돌봤다. 부모 노릇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빠.” 박근태는 읽을 수 없는 아이의 눈동자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사랑으로 낳은 아이가 아니니까. 그런 변명을 가져다 붙였다. 

말 그대로 변명에 불가한데.

02.28 / 양시백

가스레인지 위로 양은 냄비를 올린다. 탁, 탁, 불이 올라오고 물이 서서히 끓기 시작하면 라면 봉지를 뜯었다. 부서진 조각이 뜯은 틈새로 떨어진다. “정말….” 몸을 굽혀 떨어진 조각을 싱크대로 버리고, 팔팔 끓기 바쁜 물 위로 후다닥 면과 스프를 넣는다. 매콤한 냄새가 올라오면 젓가락으로 면을 휘젓다가 냉장고를 열었다. “계란이…, 아 있다.” 탁! 날계란이 끓는 라면 위로 톡 떨어진다. 투명한 부분이 하얗게 익어가고, 보글보글 올라오는 열기에 침이 절로 고여 꿀꺽 삼킨다. 냄비 뚜껑을 잠시 닫아놓고 불을 끄면, 옆 손잡이를 들고 빠르게 식탁 위로 올려둔다. “아, 아뜨뜨, 아뜨!” 냄비를 던지듯 내려놓고 두 손을 허공에 휘젓다가 귀를 만졌다. 아뜨, 뜨거워, 열이 잔뜩 올랐을 것도 생각 못하고 멍청하게 맨손으로 잡았다. 으으, 혼자 앓던 그는 냉장고를 열어 김치를 꺼내곤 식탁 앞에 앉았다. 냄비 뚜껑을 앞접시 삼아 잘 익은 면발을 건져 후후 불었다. 꼬들꼬들하게 잘 익은 면을 후루룩, 김치 얹어서 또 후루룩. 몇 젓가락 만에 비어버린 냄비 위엔 식은 밥을 넣고 숟가락으로 꾹꾹 누른다. 관장님, 관장님 없어도 양시백의 식탁은 변하지 않아요. 하지만 어쩔 수 있나요. 당신과 먹었던 그 라면이 그에게 있어선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는 걸요.

 

 03.01 / 회도1 이후의 오미정-서재호

겨울이 끝날 무렵, 세상엔 봄이 찾아온다. 천천히 돌아온 봄은 올해도 어김없이 꽁꽁 얼었던 땅을 천천히 녹이고 푸릇한 새싹들을 일깨운다. 따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모두의 겉옷도 가벼워질 때, 여전히 꽁꽁 얼어 한겨울의 가운데에 있는 여성이 있었다. “이봐, 미정이. 언제까지 그렇게 꽁하게 있을 거야?” 서재호는 투명한 아크릴 너머,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는 그녀를 향해 투덜거린다. “그러게, 누가 와달래요? 싫으면 가던가?”,“이야~ 드디어 대답해주네!”,“나 참….”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가 돌아와도 서재호는 거리낌 없이 웃는다. “그래서 또 왜 온 거예요? 할 일도 없어요? 기자란 다들 원래 그런가?”,“이거 섭섭하게 이야기하네~? 내가 얼마나 바쁜 몸인데. 어? 자네도 소식은 들었을 거 아니야. 무대가 무너진 사건. 그것도….” 기다렸다는 듯 줄줄이 이어지는 말을 오미정이 손을 든다. “그래서 진짜 용건이 뭔데. 쓸데없이 떠들려고 온 건 아닐 테고. 듣고 싶은 게 있는 거죠?” 그녀의 시선은 아주 오래전 버렸다고 생각했던 젊은 시절의 총기를 닮아있었다. 서재호는 그 속에서 낯익은 모습을 엿보며 머 쩍은 듯 웃었다. 아이, 참…. 딴소리를 못 해요. 아주. 혀를 끌차던 그는 가방에서 서류를 한 장 꺼냈다. 얇은 판 너머 오미정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인다. “서재호……. 당신.”,“말하지 않아도 알지, 내가 뭘 이야기하려는지.” 침묵 속에 눈동자가 마주친다. “진심이에요? 그때도 건들지 못했던 걸, 지금….”,“오히려 지금이니까.” 서재호는 그렇게 서류를 다시 집어넣는다. “그러니 미정이, 자네의 도움도 필요해. 알잖아. 유상일 선배도, 그들도, 그렇게 흘려보낼 수 없다는 걸.” ……침묵이 맴돈다. 면회가 끝났다는 알림이 울린다. “가요.”,“다음에 또 오지.”,“오지 마요. 와도 내가 해 줄 말은 없어요.”,“또 올게.” 바보같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 뒷모습을 오미정을 바라본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유일한 사람. 그가 보여주었던 서류를 떠올리며 눈을 감는다. 상일 선배. 저는…….

03.02 / 회도1 시작 전의 오미정-유상일

“오랜만이군.”,“상일…선배?” 들고 있던 머그잔이 바닥에 떨어진다. 날카로운 파편 음이 귀를 찢는다. 오미정은 떨리는 몸을 겨우 일으키며 현실감 전혀 없이 맞은 편의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정말, 상일 선배예요?” 삐끗거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심정을 드러낸다. 아! 뒤늦게 산산조각이 난 머그잔이 시선에 들어온다. 세상 모든 것이 멀어졌던 사람처럼. “죄, 죄송해요. 잠시만요. 금방 치울게요.” 다급히 몸을 숙여 파편을 줍는 손길을, 그가 막아섰다. “맨손으론 위험하잖아. 손을 쓰는 직업인데.” 기억 속보다 지치고, 가라앉은 목소리는 변함없이 다정했다. 오미정이 사랑했던 다정이었다. 파편은 빗자루에 쓸려 쓰레기통에 쏟아붓고 문을 닫은 미용실의 안쪽에서, 이번엔 깨질 일 없는 종이컵을 서로 하나씩 앞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았다. “…….” 잘 지내셨어요? 오미정은 그런 말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초췌하게 마른 얼굴은 지난 세월을 이야기해주었다. 입에 발린 말이라도 잘 지냈냐고… 도저히 물어볼 수 없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유상일이었다. “미정이, …나 좀 도와줘.”,“상일 선배.”,“갑작스러운 건 알지만, 네 도움이 필요해.” 고개를 숙이려는 그를 그녀는 막아섰다. 아…. 오미정은 미소를 지었다. 떨리는 입꼬리가 진정되지 않는다. “그러지 마세요, 선배.” 아…. “선배가 바라신다면 무엇이든 도와드릴게요.” 그것은 잊어버리지 못한 과거,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속죄의 하나다. “말씀만 하세요. 상일 선배.” 당신을 도움으로써 오랫동안 떨쳐내지 못한 이 죄책감을, 그리고…… 사랑을. “아니, 원하는 대로 저를 이용하세요.” 그녀는 웃고 있었다.

03.04 / 허우석-한도윤 (우석도윤우석)

얘 또 이러고 자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대충 털어내며 욕실에서 나온 한도윤은 침대 위를 물끄럼이 내려봤다. 그 잠깐 사이 잠들어 버린 것은 둘째치고,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든 얼굴은 썩 편해 보이지도 않았다. 가끔, 혹은 자주 허우석은 잘 때 몸을 이렇게 말고 자곤 했다. 새우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고 무방비하고, 또 무방비하게. “…….” 허우석이 움찔거렸다.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미간을 찌 푸린째 입술이 뻐끔 움직이는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쭈그리고 앉아 잠든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렇게 자고 있을 땐 참 순해 보이는데.’ 투덜거리는 목소리도 없고, 새근새근 잠든 숨소리만 들린다. 손가락으로 그의 눈 아래를 문질렀다. 짙은 다크서클이 지워지지도 않는다. 잠귀가 밝은 그가 이래도 깨질 않는 것을 보면 확실히 피곤한 듯했다. 그럴 법했지. 한도윤의 고집 탓에 이번 일정이 많이 타이트했으니, 한도윤은 잠든 숨소리를 가만히 듣다 고민했다. 고민은 오래 길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전등을 끄고, 수건을 걸어둔 채 허우석이 누워있는 침대 위로 몸을 누웠다. “뭐야….”,“아니야, 더 자.”,“어….” 허우석은 한도윤의 온기엔 늘 무방비해졌다. 녹았고, 흐늘흐늘해진다. 한도윤은 자연스레 그를 당겼다. “따듯해….” 막 씻고 나왔던 터라, 평소보다 따듯한 그의 체온에 허우석은 목소리가 늘어진다. 다시 숨소리가 고르게 바뀌는 것은 금방이고,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한도윤은 마저 눈을 감았다. 덜 마른 그의 머리카락 위로 입을 맞췄다. ……잘자.

03.08 / 주정재-권혜연 

세상이 무너진다. 권혜연의 세상은 끊임없이 무너져간다. “다녀올게, 혜연아.”,“다녀오세요.” 언제나처럼 주고받던 인사가 마지막이 될 줄은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평소보다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혼자 거실에 앉아 의미 없이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고, 시계만 초조하게 확인하고 있을 때 울린 초인종 소리는 마치 총성과도 같았다. 오래전부터 발끝에서 맴돌던 불길함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문을 열자 낯선 사내가 서 있었다. “…경감님의, 따님이시죠?”,“네…?” 정신없이 질문하고, 또 질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권혜연은 정신없이 휘둘리다 집으로 돌아오면 매서운 현실을 마주해야했다. …불쌍한 우리 아빠. 진상과 사건 규명이 뭐가 중요하다고. “아빠…….” 대답 없는 사진을 끌어안으며 권혜연은 눈물을 흘렸다. 모든게 겉으론 정리된 이후, 그녀 역시 일상으로 돌아가야했지만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집은 더 이상 집이라고 오히려 꺼림직했다. 정리해야만 하는 짐들이 계속 눈에 밟혔다. 그러던 어느날, 권혜연은 그 사람을 만났다. “…누구세요?”,“이야, …아주 똑 닮았네.” 껄렁한 분위기의 낯선 남자. 권혜연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고, 남자는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그!!! …현석이의, 딸이죠?”,“……아빠를 아세요?”,“현석이의, …친굽니다.” 남자는 뒷통수를 벅벅 긁다가 주머니에서 경찰증을 꺼내 보여줬다. 주정재 경…사. “경찰…….”,“직장동료였고.” 주정재는 턱을 쓸었다. 생각보다 더 어려보이는 외형에, 권현석을 똑 닮은 눈동자. 괜히 만나러 왔나, 그런 후회가 들었다. 저 올곧은 시선과 눈이 마주칠때마다 울렁거림이 올라왔다. 동시에 주머니에 있던 그의 수첩을 떠올렸다. 그래, 최소한의 속죄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이것이 첫 만남이었다. 무너지기만 하던 권혜연의 세상이, 그 날로부터 무너지지 않기 시작했고, 무너지던 조각들이 하나씩 다시 붙어 새로운 세상의 형태를 갖췄다. 누가 뭐라고 해도, 주정재는 그녀의 새로운 가족이었다. ‘가족’이었다. “아저씨….” 가족을 또다시 잃는 것만큼은 겪고 싶지 않았는데. 수년 전, 이미 겪었던 서늘한 체온에 그녀의 세상이 흔들린다. 움직이지 않고, 대답하지 않는 주정재에 눈물을 흘린다. “아아…….”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03.09 / 이규혁-오인하 (#첫번째로_멘션온_캐릭터를_두번째로_멘션온_캐릭터가_죽인다.)

눈이 마주쳤다. “아.” 짧은 탄성. 오인하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며 움직였다. 예상하고 싶지 않은 시뻘건 액체가 시야에 가득하다. 무심코 그 흔적을 따라가면 바닥엔 서혜성이, 고개를 들면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대걸레를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따라 눈을 움직여서, 또다시 눈이 마주친다. “대체, 이게…….”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인, 인하야.” 이규혁의 목소리가 다급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만, 오인하는 동시에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그거, 그, 그거부터 내려놔!!” 비명처럼 질러진 말은 그녀 자신을 동시에 찌른다. 여전히 피가 뚝뚝 떨어지는 대걸레의 끝이 자신을 향해있는 것 같다. 오인하는 그의 위로 기억 속에서 지워내려던 사내의 그림자를 엿봤다. 내 이야기를 좀 들어줘, 라고 입을 열려던 이규혁은 갑자기 멈춘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불신과 불안, 그리고 뒤에서 워치를 만지는 듯한 움직임을 보고, 손이 다시 빠듯하게 막대를 쥔다. 이걸 내려놓는다면……. 이미 한 번 저지른 폭력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은 신체는, 뇌보다 빨랐다. “잠, 잠깐 너, 지금 눈이 완전 돌…!” 오인하는 다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도망가기엔 너무 늦었다. 둔탁한 소리와 묵직한 타격감이 손에서 팔로, 어깨로 이어진다. 이규혁의 귓가에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또다시 바닥에 피가 흐른다. 누군가의 피라고 구분할 수 없는 시뻘건 피. 이규혁의 구두를 더럽히고, 흐른다. “아.” 짧은 탄성. 깨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 이규혁은 그제야 쥐고 있던 것을 놓는다. 괴물이다. 괴물이 그 자리에 있었다.

03.10 / 한도윤 (결말 이후의 조각글)

뼈가 시릴 것만 같은 겨울이 지나간다. 한도윤은 두꺼운 겉옷을 옷걸이에서 빼고 차곡차곡 접어 상자 안에 넣어두고 얇은 옷을 꺼낸다. 작은 세탁기에 새 계절의 옷을 넣고 전원 버튼을 누른다. 오래된 세탁기가 웅웅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곤 이제 지난 계절의 옷이 담긴 박스를 빈 자리에 차곡차곡 쌓았다. “많네….” 겨를은 그렇다. 다른 계절보다 많은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마냥 아프지 않은 것은 찾아오는 계절이 다정하기 때문이겠지. 지잉. [ 야 ] 지잉. [ 한도윤 ] 지잉. [ 내일 잊지마라. ] 지잉. [ 알곘냐 이 배신자 ] 휴대폰 화면에 줄지어 올라오는 알림창을 바라보던 그는 한숨을 쉬며 애플리케이션을 열었다. [ 알아. 그리고 대체 언제까지 배신자라고 부를 거야. :( ] 천천히 채워진 문장은 보내자마자 1이 사라진다. [ 평생. ] 하여간……. 이젠 반쯤 포기한 상태지만, 어쩔 수 없다며 한숨을 푹 쉬곤 책상 위에 모아둔 악보를 팔랑거린다. 오직 내일을 위해 준비한 이 곡의 이름은 재회reunion 였다. 마스커레이드의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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