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상실의 여정

2022 장혜진 생일 축하해 / 준용혜진, 혹은 강민혜진 요소

장혜진은 노랗게 염색 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기분 전환 삼아 탈색 한 머리카락은 손가락에 걸리는 느낌이 부스스했다. 어떤 사람은 한 번 탈색 한 것 정도론 손상이 별로 없다고 하는데 그녀는 그러질 못했는지 잔뜩 상해버린 흔적만 남았다.

- 어른들은 마지막 순간을 원한다.

"마지막 순간이라."

그녀는 걸음을 옮겨 책상 서랍을 열었다. 케이스 안에 있던 안경을 꺼내 들었다. 조명 아래 안경을 비춰보며 이제는 지나간 사람이 된 그를 떠올렸다. 동시에 그와 닮은 남자를 떠올린다. 자신의 방식으로 끝을 내겠다고 중얼거렸던 허강민. 그의 눈에 서려 있던 감정. 그것은 절대 타인의 감정을 흉내 내는 기계 따위가 아니었다. 류태현의 이름에 반응하던 표정을 떠올린다. 그는 기계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거울을 보며 안경을 썼다. 도수가 맞지 않아 시야가 어지럽게 핑 돌았지만 그녀는 안경을 벗지 않고 거울에 비친 자신과 시선을 맞췄다.

"어른들의 노리개인 건 틀림없죠."

부적이랍시고 가지고 챙긴 이 안경이 그 증거였다. 백선교에 '고용'된 그 남자와 자신은 애초에 시작점이 달랐다. 장혜진은 어른들의 부적을 떠올렸다. 원념과 집념, 절망이 담긴 손가락의 끝. 그따위 것을 부적으로 삼는 이들을 보며 자란 자신 역시 죽은 자의 것을 부적으로 삼아 지닌다. 엘리베이터가 떨어지기 전, 누구도 모르게 죽은 자의 유일한 것을 챙겨 멋대로 부적이란 이름을 붙였다. 다를 것이 없다.

백선교와 허강민은 다르다. 그러나 백선교와 장혜진은 같다.

그녀는 그들의 노리개였고 그들을 보며 자란 것이었다.

안경을 벗었다. 여전히 어지럽게 굴러가는 시야에 미간을 문질렀다. 진정될 때 까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 그녀는 안경을 조심히 책상 위로 올려뒀다. 무릎을 굽혀 안경과 시선을 맞춘다.

"당신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어도 나를 구해줬을까."

대답 할 수 없는 망자에게 물었다. 그날부터 그녀의 인생에 톱니바퀴가 계속 삐그덕거렸다. 그저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따르던 노리개가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전부 서준용, 그 사람 때문이다.

그가 그녀를 구하지 않고, 죽음이 그녀를 껴안도록 두었다면 아마도 그렇게 죽지 않았을 텐데.

의미없는 생각을 했다.

"준용씨."

장혜진은 안경테를 손가락 끝으로 툭 켰다.

"허강민씨는 당신과는 달라요. 그는 당신보다 훨씬 똑똑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죠."

플라스틱의 촉감은 차갑다. 동시에 따듯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을 보면 당신이 생각나요."

닮았지만 정반대의 두 사람. 허강민의 그림자에 자꾸 당신을 비춰보는 나도 아마 당신에게도, 그에게도 나쁜 짓을 하는 거겠죠. 장혜진은 느리게 눈을 껌벅였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 게임이 될 터였다. 어른들은 시간을 더 끌고 싶지 않아 했고 류태현이라는 희망과 허강민이라는 절망의 끝을 보고 싶어 하셨다. 동시에 허강민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즉 이 마지막 게임에 허강민의 생사 또한 걸려있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했다.

"원래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구경만 하겠죠. 애초에 제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안경 다리를 접어 다시 케이스 안에 넣는다.

"어쩐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그저 어른들의 노리개가 아니라는 걸 증명 할 수 있을 거라고. 

적어도 나 자신에게만이라도. 

내 손으로 직접 죽음으로 밀어 넣었던 당신과 닮은 그 남자를 구한다면. 

"미안해요."

장혜진은 시계를 바라봤다. 닿지 않을 사과를 하며 케이스를 뚜껑을 닫았다. 초침이 똑딱 굴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날짜를 확인했다. 자정. 날짜가 바뀐다. 10월 9일로 날이 바뀌는 날 그녀는 생각했다.

"오늘이 아니라, 다가오는 그날이 나의 새로운 생일이 되었으면 해요."

노리개가 아니라 사람, 장혜진이 새로 태어난 날이 되길 바랬다.

그래도.

"그래도 오늘도 생일 축하한다고 해줘요. 나는 욕심쟁이거든요."

장혜진은 서랍을 닫았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그녀는 거울을 다시 바라봤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다시 쓸어 넘기곤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뭐, 이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생일축하해. 장혜진.

그녀는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생일 축하해. 장혜진.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H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