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붕괴
검은방1,2 합작 엽서북 참여 글
배가 침몰한다. 아니, 배가 아니라 나의 육신이다. 침몰한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이것은 정녕 빗방울인 걸까? 이 또한 빗방울이 아닐지도 모른다. 거꾸로 흐르는 바닷물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다. 알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판단력이 흐려진다. 침몰하고 있기 때문인가? 아무도 모른다. 이제 내 곁엔 그것을 알려줄 사람이 없다. 없게 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오래되지 않았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있었다. 원망스럽고도 애정하던 남자. 그의 곁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불타오르던 복수심이 점점 꺾이고 진실 앞에서 눈을 감은채 현재에 머무르며 삶을 유지하고 싶어졌다. 길을 잃은 감정들은 때때로 죄책감과 후회를 불러와 나를 잠식했으며 그 끝에 결국 숨이 멎었다. 찌꺼기 같은 감정들을 박박 긁어모은채 생을 이어가던 내가 그 아래에서 방아쇠를 당기고 만 것이다. 그러니 나는 침몰했고 파도가 쳤다. 바위에 파도가 부딪히고 배와 부딪히며 깨지고 깨지고 또 깨지고 또! …깨지지만, 파도는 끊임없이 친다. 자연이란 그렇다. 양수연은 자연과 같이 침몰한다. 침몰하고 있지만 하고 있지 않다. 부서지는 파도에 육신은 일말의 반항도 해보지 못한 채 저 깊은 수면 아래로 깊이깊이 내려가고 있지만 의식만큼은 여전히 갑판의 위다. 부서지고 있는 육체를 바라보고 있는 정신이 공존하여 무너지고 있지만 무너지지 못하고 있다. 양수연은 시선을 돌린다. 안이하고 멍청했던 자신에게 총을 건네주었던 남자. 어쩌면 자신보다 더 ‘한 남자’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을 보이는 남자다. 그것을 감히 집착이라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으나 나는 마땅히 붙일 이름을 찾지 못하여 그것을 집착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어떠한 과거와 어떠한 인연이 있는지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실수로라도 그는 건드리지 않도록 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아니지, 그 또한 그의 운이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마음껏 해도 좋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죽여야 할 사람. 죽이면 안 되는 사람. 그 구분이 가장 어려운 사람이 있었다. 양수연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망연자실한 시선으로 바다를, 가라앉고 침몰하고 있는 그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바라본다. 그렇게 깊이 몸을 숙였다간 저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파도가 당신마저 집어삼킬 텐데도 어찌 그걸 두려워하지 않는지. 당신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두 손을 신뢰하고 있는 까닭일까요. 가녀리고 나약하지만 강인한 사람. 오랜 시간을 옆에서 지켜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확신 할 수 없지만 당신이야말로 선善한 사람이구나. 나는 그렇게 느꼈다. 가짜를 뒤집어 쓰고 거짓된 자신과 다르게 올곧게 앞을 바라보던 시선. 그 시선에 형사도 당신에게 이끌렸는지 모른다. 그 반대일지도 모르지만, 사연을 모르는 그녀는 그저 그렇게 짐작해 본다. 왜냐면 짐작하는 것은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고 변화시키지도 않을 것이며 그저 짐작으로서, 생각으로서 남기 때문이다. 왜냐면 양수연은 죽었으니까. 부서지고 가라앉는 육체는 저 깊은 바닷속에 침몰하여 차갑고도 어두운 바다와 하나가 될 테니 어찌 생각일 뿐인 게 문제가 되겠나. 양수연은 눈꺼풀을 닫아도 보이는 풍경을 그저 본다. 그러다 보면 일부러 의식 뒤로 잊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보인다. 파도처럼 무자비하게 당겨진 방아쇠에 눈을 감아버린 어리석고도 멍청한 남자. 어떤 진실도 이유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정확하게 표현될 수 없는 감정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을 감아버린 어리석고 멍청하며 아아, 나의 어쩌면 사랑이었을 남자. 이미 차가워진 육신을 영혼이 끌어안는다. 영혼이 빠져나가고 껍데기에 불과할 그를 부서져 가는 영혼이 끌어안는다. 멍청하고 가녀리고, 남자들은 다 그런 존재인 걸까. 살아있지 않은 존재가 된 양수연은 그저 아무런 감정 없이 그것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닿지 않을 온기, 얻을 수 없는 온기. 그 대신 삼켜버린 영혼. 죄를 지은 이들이 손을 잡는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닌가. 어떤 의미로든 피에 젖은 두 손이 겹친다. 이것인 비雨이자 동시에 바닷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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