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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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타 / C루트 / 이규혁

어둡고 축축하다. 동시에 따듯하다. 나는 누구인지 상관 없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다. 사고 思考는 멈추고 새하얗게 물들었다가 시커멓게 가라앉는다. '그것'은, 아니 '이규혁'은 자신의 손바닥이었던 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 손에 무언가를 쥐었던 것 같다. 무언가는 무척이나 거칠었고, 그의 손바닥에도 상처를 남겼으나 이내 굴러다니는 돌무더기 속에 뒤섞였다. 몹시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에게 어떤 의미의 것이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괜찮아. 기억하지 않아도 돼.

따듯한 것이 이규혁을 뒤에서 감싸 안는다. 뒤를 돌아도 보이는 것은 없는데, 형태 없는 것은 자신을 따스하게 감싸 안는다. 두 손이 달래듯 등을 쓸어내리고 귓가에 속삭인다.

네가 어떤 인간인지 기억하지 마.

그것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다정하고, 상냥했다. 이규혁은 목소리를 되새긴다. 

이미 지나간 일이야. 

그것의 손이 그의 귀를 막는다. 그런데도 그것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닿는다. 마치 소리로서 전달되는 것이 아닌, 뇌 속으로 직접 전달되는 메시지처럼. 모든 것은 온기를 가졌다. 

"하지만 난 돌아가야 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뻗어졌던 그 손을 기억했다. 

정말 돌아가고 싶어? 

그것은 그에게 되묻는다. 이규혁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이미 귀를 막고 있는 손이 선명하게 느껴지는데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다른 손이 그의 손을 붙잡아온다. 두 손을 잡고, 손바닥을 하늘로 보이게 뒤집는다. 

이 손을 하고, 돌아가도 괜찮겠어?

이규혁은 아무 말 하지 못한다. 빛이 없는 공간에서도 손바닥을 더럽힌 시뻘건 액체가 선명하게 보였다. 아, 아…. 떨리는 입술이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빈 언어만 내뱉는다. 끈적거리고 더러운 피가 손바닥을 고이다 못해 바닥으로 떨어진다. 

도윤이가 널 구해내지 않았다면 저지르지 않았을 일이었는데.

기억해내고야 만다. 돌무더기 속에 뒤섞였던 피 묻는 콘크리트 조각을. 

잔해 속에 깔렸어야 했어. 어차피 의미 없던 삶이었으니. 

그것은 속삭인다. 마치 이브에게 선악과를 유혹하던 뱀처럼 진실에서 회피하고자 하던 이를 밀어내고 간지럽힌다. 

몇번이고 더 내려치고, 찍고, 찢어놓고 싶었잖아.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한다. 이규혁은 손바닥만 하염없이 바라본다. 자신을 끌어안은 품은 따스하고, 귀를 막고 있는 두 손도 따스하고, 자신의 손바닥을 받쳐 쥐고 있는 손도 따스한데 어디 한 곳에도 온기가 맴돌지 않는다. 

그 아이가 나를 어떻게 볼지 두렵지?

다정한 목소리가 그를 살살 달랜다. 품에 끌어당기는 힘이 좀 더 강해진다. 이규혁은 손가락을 벌려 손바닥에 고인 피를 전부 바닥으로 떨어트린다.

인정해도 괜찮아. 난 다 알아. 돌아가기 싫어해도 돼. 여기 나와 계속 같이 있어. 어차피 알고 있잖아, 나를 찾을 사람 따위 없단 걸. 내겐 아무도 없어. 모두 없던 일로 만들자. 

그는 이 목소리를 거부할 힘 따위 없었다. 몸은 점점 가라앉는다. 

"맞아, …난 영원히 나갈 자격이 없어…."

맞아.

가라앉고, 또 가라앉는 자신을 단단히 품는 그 온기에 형태 없는 얼굴과 시선을 마주한다. 이규혁은 눈을 감고 모든 진실과 현실에서 눈을 돌린다. 마주하고 싶지 않고, 견디고 싶지 않는 것들에게서 도망치는 그를 그것이 품는다. 

나와 같이 있자.

이규혁은 대답 않는다. 몸엔 힘이 서서히 빠지고,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될 무렵 희미하게 이 한 줄의 생각만이 남는다. 이의 목소리가 어쩐지 자신의 목소리와…… 참 닮았다고. 그렇게 그는 심연 아래로 가라앉는다. 모든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죽음은 그를 품에 안은 채 그와 똑같은 얼굴로 미소를 짓는다. 죽음만이 너를 받아들이리. 

도피. 

침식되어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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