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온기

한도윤 / 날조 다섯숟가락

비가 오면 종이가 눅눅해진다. 맨발로 장판을 밟으면 쩍쩍 달라붙는 것 같고 꿉꿉함을 전신에 두르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비가 오는 계절,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아무래도 악기 관리였다. 어떤 소재로 만들어졌든 간에 ‘악기’라고 불리는 것들은 물기에 약하다. 비에 약하고, 습기에도 약하다. 그래서 여름철 관리가 가장 힘들었다. 

비.

빗방울이 작은 창을 쉴 새 없이 두드린다. 하나의 멜로디 마냥 불규칙한 소리가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작년보다 유독 장마가 이르게 찾아온 것 같았다. 덕분에 지난주에 아르바이트 다니던 곳에선 더 안 나와도 된다는 말과 함께 주급을 입금 했다. 예상치 못한 많은 비 때문인지 어떤 까닭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으니 그 이유를 비로 탓해봤다.

“이번 달은 좀 빠듯하겠는 걸….”

통장 잔고와 나가야 할 지출을 비교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방학에 바짝 일을 해야 돈을 좀 모아둘 수 있으니까 무리해서라도 일을 구했던 건데 하나 줄었다고 그 공백이 참 아쉬웠다.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방학 기간의 아르바이트 자리는 경쟁이 많기 때문에 이제 와서 구해봤자 썩 좋은 자리는 없을 터였다. 그게 참 아쉬웠다.

‘연습실도 빌려야 하고, 또….’

고등학생 치고는 나가야 할 돈은 많다. 다른 까닭은 없었다. 한도윤은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봤다.

‘여기서 더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아.’

방문 너머로 들리는 생활 소음들을 들으며 몸을 웅크렸다. 아버지의 동생이라고 들었다. 전에 지내던 친척 집에 딸이 아파서 더 이상 자신까지 돌봐줄 여력이 없어 연락을 돌리다가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사람이라고 했다. 

“네가 한도윤이구나.”

오빠를 똑 닮았네. 만나자마자 여성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자신을 고모라고 했다. 한도윤은 아버지의 얼굴이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아서,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어찌 반응하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모가 사는 집은 작은 아파트였다. 검은 털을 가진 고양이가 거실 저 안쪽에서 멀뚱멀뚱 자신을 살폈다. 현관과 붙어있던 작은 방이 그의 방이 되었다.

“창고로 쓰던 방이라 부족한 게 있으면 이야기 해. 카드는 이거 쓰고, 더 필요하면 이야기하렴.”

“감사… 합니다.”

거쳐온 친척이라는 분들은 모두 친절했지만 늘 또래의 아이가 있었고, 한도윤에게 주어진 것은 작은 쪽방이거나 위층 침대였다. 그러나 이곳은 달랐다. 침대를 두고도 한참은 공간의 여유가 있는 방. 그녀와 자신 말고는 없는 작은 집. 오랜만에 ‘집’이라는 공간에 머물게 된 것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고모는 생활이 고요한 분이셨다. 출근은 이르고, 퇴근은 늦었다. 저녁이 아니라면 마주치는 일 자체가 드물었고, 학교 갔다 오면 맞이해주는 건 베란다 유리창 너머에서 꼬리를 흔드는 고양이 한 마리였다. 그런 생활이지만 이곳이 좋았다. 

그럼에도 이곳에 계속 머물 수는 없다. 

유독 얄팍하게 느껴지는 통장을 접었다. 고모는 자신과 아버지가 닮았다고 하지만 벽에 걸린 옛날 사진을 보다 보면 아버지와 고모가 훨씬 닮아 보였다. 그래서 한도윤은 가끔 거울을 보며 고모와 자신도 닮지 않았나라는 그런 헛된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고모와 정말 가족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도윤은 가족이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가족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나가야만 한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생각은 다시 떠오른다. 빗방울은 멈출 생각도 않고 창문을 두드리는데 이 또한 하나의 소리였다. 한도윤은 종이를 꺼내 새하얗던 종이 위로 흑연을 채운다. 톡, 톡톡, 톡톡톡. 그린 듯이 다정한 가정은 가질 수 없고,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여성 혼자 다 큰 아이와 사는 것은 부담이라고 고모를 말리던 친척 어른을 떠올린다.

- 네 오빠 애라고 해도 네가 어떻게 애를 키울래. 결혼도 안 한 애가 그것도 다 큰 남자애를! 차라리….

울그락불그락하던 친척 어른을 향해 고모는 어떻게 대답했던가.

- 괜찮아요. 

단호하던 그 목소리. 한도윤은 그 소리가 참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또렷하고 뭉개짐이 없는 발음. 거슬리는 것 없이 부드럽다. 

-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까 폭탄 돌리기 하듯 애를 이곳저곳에 좀 그만 보내세요.

처음으로 생긴 것 같은 내 편. 하지만 영원하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사람. 부담이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한도윤은 계속 종이 위를 채워 들었다. 귀로는 빗소리를, 머릿속으론 가족이고 싶은 사람을 떠올린다. 손은 음표를 그려내고 이내 한도윤은 헤드셋을 낀 채 베이스 줄을 하나씩 건드린다.

하나씩 소리를 낸다.

졸업식을 앞두고 독립을 하겠다고, 그간 감사했다고 이야기를 전하자 고모의 표정은 표현 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슬퍼 보이지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 낯익은 얼굴. 한도윤은 그녀가 아쉬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또 미안해한다는 것도.

“내가 널 맡는다고 해놓고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한 것 같은데.”

잠시만, 하고 일어난 그녀는 곧 서랍에서 통장을 하나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네 아빠가 보내온 돈 모아둔 거야. 거기에 나도 조금 보태고. 이렇게 빨리 나갈 줄 알았으면 더 챙겨두었을 텐데.”

좋은사람이었다.

“나가더라도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렴.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네 보호자가 되어줄게.”

이건 약속이라고 강조하던 목소리에 담긴 애정이 무거워서, 한도윤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혼자가 된 원룸 작은 방에 누워 눈을 감을 적이면 문밖에서 들리던 소음과 이따금 제게 다가와 고개를 내밀던 검은 고양이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런 생각들을 길게 했다.

비가 계속 오더라도 괜찮다. 이 한 번 겪은 온기가 남아있다면.


[괜찮니?] 1 

배신자라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더라도 버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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