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석vs장세일] 대화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
안사님 커미션(기간 초과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분량 많이 오버)
허우석이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웬 맨바닥에서 누군가와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새하얀 방이었다. 그리 넓지도 아주 좁지도 않은 방에는 자신과 또 한 명의 사람, 그 외에는 아무런 가구도 없었다.
익숙한 얼굴이다. 그렇다고 딱히 잘 알거나 친한 사람은 아닌데. 그런데 왜 하필?
이거 장FD잖아. 방송 따까리 주제에 영 싸가지 없게 굴던.
허우석은 방을 조금 더 살폈다. 천장 구석에 CCTV가 달려 있다. 그 옆에는 작은 스피커도. 그리고 작은 모니터 하나. 밖으로 나가는 문은 있으나 잠겨 있다. 문을 몇 번 힘으로 밀어도 보고 세게 쳐 보기도 하였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영락없이 갇혔다.
허우석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쓰러진 듯 자고 있던 장FD, 이름이 뭐였더라, 장세일? 몇 번 몸을 움찔거리더니 신경질적인 소리로 웅얼거린다.
“아 거 사람 자는데 드럽게 시끄럽네…”
이 상황을 아직 인지하지 못한 상태임이 분명하다. 발로 한 번 걷어차려다 마음을 고쳐먹고 흔들어 깨웠다.
“어이 거기. 좀 일어나 봐요.”
“아이 씨 또 무슨… 오프인데 또 사람 부르냐고…”
“아니 저기, 일어나서 상황 좀 보라니까.”
“뭔데 그래요?”
장세일이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늘게 뜬 눈에 의문이 담기더니 이윽고 크게 떠졌다.
“아니… 그러니까… 이건 또 무슨 장난인데요?”
“그러니까… 지금 갇힌 상황이다 이 말이죠.”
“예 그렇네요. 문은 잠겨 있고.”
“문이 좀 뻑뻑한 것일 수도 있죠. 영 비실해 보이는데 그냥 그쪽 힘으로는 안 됐던 거 아니고요?”
“그럼 님이 밀어 보든지. 그쪽이야말로 툭 치면 엎어지게 생겨 놓고선.”
“은근슬쩍 말을 놓네?”
“그럼 ** 니도 놓든가. 내가 그쪽한테 좋은 감정이 있게 생겼냐고.”
장세일이 일어서서 문으로 향하려고 하자, 타이밍 좋게 천장 구석의 모니터가 켜졌다. 스피커에서 지직거리는 잡음이 들렸다. 그리고 모니터에 떠오른 것은,
- 10분간 대화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
이건 또 무슨 장난이야? 허우석이 장세일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 팟! 모니터의 글씨가 바뀌었다.
- 단, 한도윤과 관련된 말을 하면 10분 추가
아니 저기, 이건 또 무슨… 황당해하던 차에 한 줄의 글씨가 추가되었다.
- 욕설을 할 시 20분 추가
장난하냐고. 내가 지금 욕이 안 나오게 생겼나. 황당한 것은 장세일 또한 마찬가지인 듯 옆에서 짜증 섞인 중얼거림이 들렸다.
모니터의 글씨가 사라지고 타이머가 켜졌다. 10분.
“아무 대화만 하면 되는 걸까요?”
“그런가 본데.”
대화가 이어지자 타이머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이 없자 다시 스탑. 참 깐깐하네. 다행히 아무런 영양가 없는 말을 주고받아도 해도 대화로 쳐 주는 모양이었다.
“진짜 계속 반말 할 거예요?”
“너도 말 놓으라니까? 너 몇 살이야,”
“스물넷이요.”
“내가 형이네. 형이라고 불러라.”
“애도 아니고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성인들끼리 한 살 차이에 형은 무슨 형… 그렇게 치면 나 빠른 년생인데 맞먹는 걸로 쳐야 하지 않아요?”
“어쭈, 한도윤한테는 형이라고 잘만 부르더만.”
- 10분 추가입니다.
스피커에서 변조된 목소리가 들림과 함께 타이머의 숫자가 늘어났다.
“아이 **… 협조 좀 하시죠?”
- 20분 추가입니다.
허우석의 입에서 뇌를 거치지 않은 욕설이 튀어나오려다 목구멍 6부 능선에서 검열되었다. 아니 지금 욕이 안 나오게 생겼냐고. 그렇게 주어진 시간은 합계 40분이 되었다.
“내가 10분, 니가 20분이니 니가 두 배 더 잘못했다?”
“계속 그렇게 유치하게 굴 거예요?”
“어. 빡쳐서 말 뱉는 것도 대화로 쳐 주는 거 같으니 계속 긁을 건데?”
“네, 계속 해 보세요. 나라고 그 쪽 못 긁는 줄 알아요?”
“잘 긁긴 하더라. 피디 본인도 아니고 따까리 주제에 오만 참가자들 다 긁고 다니데.”
“그런 말 듣기 싫으면 좀 잘 해 보셨어야죠. 어차피 그런 말 내가 안 해도 방송 보는 시청자들이 더 할 걸요? 재능도 실력이고 얼굴도 실력이고 운도 실력인데 셋 중 하나도 안 되면서 본인이 가능성 있다고 착각하는 게 더 말도 안 되는 거죠.”
“말이 갑자기 길다? 찔렸냐?”
“맞는 말 한 건데 뭐 잘못했어요? 실력도 없고 뭣도 없는 허우석 씨.”
“그러는 너도 만만찮던데. 시즌 2 클립 돌아다니는 거 다 봤거든?”
“야.”
“니가 글케 신경쓰는 시청자들이 뭐라더라, 장세일의 장은 장문*의 장? 힙통령 락통령 다음은 실음과 대통령이라고 실통령?”
“야! 너 말 다 했냐?”
“어 이제야 말을 놓네. 잘 했다고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하나?”
“지ㄹ… 아니 님도 팀에 업혀서 슈퍼위크까지 간 거지 솔로였으면 3차 예선 쯤에서 나가리였어요.”
마스커레이드를 언급하는 것도 한도윤을 언급하는 것에 포함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마조마했으나 다행히도 여기까지는 아슬아슬하게 괜찮은 모양이다.
그 새 타이머가 5분 줄어들었다. 남은 시간 35분. 갈 길이 멀다.
“혼자였으면 베스타 같은 데 안 나왔지. 아싸리 슈*밴드 같은 데 나갔겠지.”
“어지간히도 착각 속에 사시네요. 다른 프로에 나간다고 실력이 달라지는 게 아닌데.”
“나 그래도 좀 친다? 나름 락페 무대도 서 봤는데.”
“님보다 잘하는 락 보컬 널렸어요. 솔직히 보컬이 그렇게 잘났으면 진작에 메이저 데뷔를 했겠지.”
“아니 그건 내 탓이 아니라고. 나는 데뷔할 수 있었던 게 빠그러진 건데, 못 들었냐?”
“네, 못 들었네요. 빠그러진 게 다 님 탓이라는 건 들었고요.”
한도윤 이 ***… 꼭 또 지 편한 대로만 말하지. 입으로 뱉으면 30분 추가다. 참자, 참아.
“그래도 너보다는 잘할걸?”
“이 ㅆ… 아니 진짜 사람 열받게 하네. 그쪽도 보컬 대결이니 고통 안 받는데니 밈 된 마당에 피차일반인 걸로 퉁치죠?”
“또 니 때문에 시간 추가되면 진짜 가만 안 둔다?”
“그 쪽이 더 위험하죠. 무슨 1마디 1욕설이더만. 님 때문에 마커레 연습화면 방송 나갈 거 반절로 컷된 건 알아요? 문신 가리느라 테이핑도 덕지덕지 해야 하고, 진짜 손 많이 갔는데 애초에 방송 부적격 인물이었다고요. 제작진이 좋아하겠어요? 애초에 대중 앞에 설 준비도 안 됐는데?”
“너 말 다 했냐? 몸의 대화도 대화로 쳐 주냐?”
- 폭력 사용 시 1시간 추가입니다.
뭔 조건이 이렇게 많아. 진짜 지랄이다.
“누가 들으면 편집 니가 다 한 줄 알겠다? 편집 컴퓨터 근처에도 못 갔을 놈이?”
“방송 만드는 일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안다고 멋대로 말해요?”
“그래서 편집 해 본 적 있어, 없어.”
“암만 FD라도 방송 4년 하면 뭐가 나가고 뭐가 못 나가는지 정도는 껌으로 알아요.”
“그래서 있냐고.”
“있겠냐고요…”
장세일이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타이머를 본다. 남은 시간 30분. 이거 진짜 언제 다 줄어드냐?
“이거 설마 중간에 마 뜨는 것도 카운팅 안 되나?”
“마 뜬다는 건 또 뭔 뜻인데.”
“거 봐요. 방송 하나도 모르잖아요.”
“괜히 티내려고 뱉은 말 아니고?”
“입에 붙었죠. 님은 그런 거 없어요? 본인 일에 그만치도 전문성이 없나?”
“사회성 떨어진다는 말 자주 듣지?”
“그러는 님은 직장생활 해 본 적이나 있어요?”
“야, 대한민국에서 인디 밴드가 딴따라질로 벌면 얼마나 번다고. 알바는 뒤지게 해 봤다.”
“거 참 불쌍하게 됐네요. 뜨지도 못한 하꼬 밴드인 게 뭐 자랑이라고.”
“밴드씬 하나도 모르면서 막말하기는.”
“그러는 님도 방송판 하나도 모르면서 들먹거렸잖아요.”
“너 진짜 유치하다…”
“그쪽도요.”
“니가 더 유치하거든?”
“이런 거야말로 유치하다고 하는 거예요. 무지개반사도 아니고.”
유치한 말꼬리잡기가 한참을 더 오고갔다. 장세일의 말마따나 무지개반사 블랙홀반사 화이트홀반사에 필적하는… 다행히도 이런 의미없는 짓거리가 10분간 더 이어진 덕에 이제 남은 시간은 20분. 반절 가까이 줄이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원래 주어졌던 시간은 10분이었다는 데에서 안도감보단 열받음이 더했다. 저 새끼만 아니었어도 이 20분이 없었을 텐데. 본인 덕에 늘어난 10분은 마치 없었다는 듯 속으로 장세일을 탓했다. 허나 허우석이 장세일을 긁은 탓이었음은 명확했기에 서로가 적당히 긁는 선에서 암묵적인 합의를 보았다. 적당히? 서로 있는 힘껏 참고 있다는 말이 더 맞을 듯했다.
더 큰 문제는 이제 긁어서 대화를 이끌어 낼 레퍼토리조차 점점 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기야는 대화가 끊긴 채 2분 정도의 침묵이 이어졌다.
“너도 참 힘들게 산다.”
“그쪽이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해요?”
“4년 일했다며. 계속 그렇게 따까리질이나 하며 살았다는 거 아냐.”
“참 쉽게도 말하네요.”
“야, 나도 밴드씬에서 하꼬로 몇 년 구르면서 별 꼴 다 봤어. 근데 너 일하는 거 보면 보통 고생이 아닌 거 같던데.”
“쉽게 말하지 마요. 나도 이거 아니면 할 거 없으니까.”
마음에도 없는 좋은 말이라도 좀 해 주려고 했으나 전혀 먹히지 않는다. 위로를 받아들일 태도도 안 되어 있으면서 긁히면 성내는 놈이라니 참 힘들게 사는 놈이라는 말이 틀리진 않은 듯 했다.
“야 근데 4년이면… 너 군대는 갔다 왔냐?”
“그 얘기는 하지 말죠?”
“어쭈, 미필이었어? 어쩐지…”
“어쩐지 뭐요. 미필이면 뭐 달라져요? 군대 갔다 온 게 무슨 유일한 자랑거리라도 되시나?”
“나라면 베스타 클립 돌고 나서 군대런 했다. 잠잠해질 때까지.”
“…면제라고요…”
“어쩐지 좀 많이 비리비리하더라.”
“쉽게 말하지 말라니까요…”
“…미안하다.”
“알면 됐어요.”
“그래서 언제까지 존댓말 쓸 건데?”
“이게 더 편해요.”
“…힘내라.”
“뭐를요?”
“인생 사는 거.”
“…형도요.”
그렇게 남은 20분은 서로의 한탄과 되도 않는 인생상담으로 채워졌다. 의외로 대화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마지막 1분의 타이머가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지고, 드디어, 문이 열렸다.
“열렸다!”
“기쁘냐?”
“그럼 기쁘지 형은 안 기뻐요?”
장세일이 먼저 문을 열고 나섰다. 허우석이 그 바로 뒤를 바짝 따랐다.
“…고마워요.”
“어 그래 ***야. 너 나가서 보자.”
“이 *** ***… 야 너 말 다 했냐?”
“말로는 뭘 못해. 나가야 하는데.”
허우석은 다시 타이머가 돌아가기 전에 장세일을 제치고 열린 문으로 재빨리 달려나갔다. 장세일이 그를 쫓아서 고래고래 욕을 외치며 달려갔다.
그렇게, 이 말도 안 되는 장난의 주체가 누구였는지는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었다. 그저 열받은 사람 두 명만이 남았다.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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