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석] 181005
2023 허우석 교류회 제출 원고
2023년 4월 22일 허우석 교류회 용으로 쓴 원고입니다.
2021년 2월 우석도윤 포스타입 온리전 당시 만들었던 미궁게임 스토리의 리메이크이나, 커플링 글은 아닙니다.
제목은 정하기 귀찮아 대충 붙여 둔 것이 맞습니다.
1
대기실 안의 공기는 싸늘했다.
아직 생방송이 시작되지 않은 만큼 길게 보면 예선이었고, 예선 참가자들에게 독립된 대기실 같은 것이 주어질 리 없었으므로, 모두가 떠난 제법 넓은 대기실 구석을 말없이 차지하고 있는 꼴이 되었다.
사실은 명백하게, 예상 범위 안의 일이었다. 팀 단위 참가자들의 일부만 합격시키는 일도 드문 일은 아니었고, 밴드 오디션 프로그램이 아닌, 일반적인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면 밴드 참가팀에 맞춘 대우를 해 줄 리도 만무했다. 그리고 주목받는 것은 으레 보컬이기 마련이다. 밴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밴드란 보통 보컬과 세션들 정도의 감상이니까. 유명 밴드들도 그러한데 대중을 상대로 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이에 반박해봤자 씨알도 먹힐 리 없다. 전국민이 보는 지상파 예능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허우석이 지금 멤버들에게 들을 수 있는 말은 뻔했다. 자신의 들러리로 세우기 위해, 자신이 돋보이기 위해 반대를 무릅쓰고 멤버들을 끌고 나왔냐는 것. 밴드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렇게 싸웠던 것이 오로지 자기 혼자 성공하려는 것이었으며, 명목은 구차한 변명일 뿐이었다는 것. 허우석은 존나게 이기적인 새끼가 되어 있었다. 유태희는 질렸다는 표정이다. 김주용은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거 같은 모양새다. 허우석의 행동에 힘을 실어주었던 황익선은 말이 없다. 허나 김주용을 뜯어말릴 의사는 없어 보였다.
숨이 막힐 정도로 밀도 높은 정적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황익선이었다.
“야, 축하한다.”
황익선의 발화이기에 빈정거리는 투는 아니다. 그로서는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는 게 맞았겠다. 그가 취했던 스탠스 때문이든, 리더의 위치이기 때문이든,
“이런 기회 흔치 않잖아. 당연히 잡아야지. 우리도 본선 직전까지 온 거면 방송 많이 탔고. 네 덕분이다.”
제법 진심어린 축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라는 말로 선을 긋는다. 황익선은 여태껏 허우석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너는 우리랑 다르게 잘 될 것 같았어.”
마지막 문장은 명백하게 비꼬는 것이 맞다. 그러니까 허우석은, 모두의 머릿속에서 이미 ‘그럴 만한 놈’ 이었다. 그 명제만으로도 정리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성공에 개새끼 타이틀이 따라온다면 고민하지 않고 개새끼를 자처할 놈. 이미 허우석은 그럴 만한 놈이었다.
그러니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정적.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어?”
굳은 표정으로 조용히 앉아 있던 한도윤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모두가 알지만 굳이 다시 묻지 않았던 것이다. 화를 낸다기보단 짜증이 조금 섞인 어조였다.
이러한 발화는 대개 질문보다는 단정 내지는 선언에 가깝다. 이미 판단이 끝난 후에 나오는 문장이기에 반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물며 한도윤이 한 선언이다. 이는 마스커레이드의 선언이나 다름이 없다.
“뭘 기대했어?”
이럴 땐 차라리 악역을 자처하는 편이 낫다. 반론해 보았자 변명이 될 뿐이고 변명은 할수록 구차해질 뿐이다. 원래부터 그랬던 놈으로 모두를 납득시키는 편이 상황을 빠르게 넘길 수 있다. …어차피 이제 좋게 다시 보기는 글렀으니까.
한도윤은 이번에는 나에게 배신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애초에 신뢰하지 않았으니 배신당할 것도 없다,입맛이 썼다.
촬영장 뒷문 앞은 암묵적 흡연구역이었다. 바닥에는 담배 꽁초들이 수두룩했고, 대체로 방송 스탭들의 흔적이었으나 허우석 또한 이에 일조했다. 보컬이 담배? 원래 그러려니 하는 거다. 많이들 그러니까. 촬영이 끝난 후 정리가 한창이었기에 흡연구역은 한산했다. 그리고 한도윤이 있었다. 촬영이 시작된 이후로 자주 보는 일은 아니었다. 이제 끝이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허우석에 대한 불만의 표시일지도 모른다.
주머니를 뒤졌다. 라이터가 없다. 조금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불 좀 빌려 줘.”
한도윤은 의외로 순순히 라이터를 건넸다.
“의도하지 않았어.”
한도윤은 대답이 없다. 말한들 좋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안다. 그래도 한도윤에게는 말하는 쪽이 차라리 편할 것 같았다.
“...적어도 너는 같이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위로라고 하는 말이라면 틀렸어.”
“화난 거 아냐.”
“화 안 났어.”
“그러면,”
“잘 해 봐. 애초부터 네가 틀렸던 셈 치고.”
“뭐가 틀렸는데.”
“나는 같이 올라갈 줄 알았다며. 결국 우리도 나도, 이용해먹으려 했던 거 맞잖아. 백업 세션마냥,”
“말 다 했어?”
“아니.”
“니는 대체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건데?”
“나는 그중에서도 좀 더 이용해먹을 가치가 있었고?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어?”
결국 이 멘트가 또 나왔다. 언성이 점점 격해졌고, 정작 빌런 포지션이 된 허우석이 좀 더 흥분한 것이 패착이라면 패착이었다. 애초에 질 수밖에 없는 언쟁이고, 이겨서도 안 되는 입장이었다. 이는 허우석도 잘 알았다. 허나 열이 받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결국 허우석 혼자 대부분의 성을 다 내는 모양새가 되었다.
“좋게 생각하려고 했어. 신뢰를 잃은 건 너고.”
“신뢰한 적이나 있어?”
“전에는.”
“그래, 말 잘 했다. 애초에 내가 멤버라는 자각은 있었고? 나 혼자 나쁜 놈 만들고 빠져나가는 거 니 특기였잖아. 이번에도 그러시려고? 방송 나가자고 최종적으로 애들 설득한 건 너야. 내가 나빴다고 말 할 거면 너한테도 책임 있어.”
“허우석,”
“내가 뭐 죄 지었어?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겠냐고. 방송 내가 만드냐?”
“마스커레이드 이름으로 나간 거야. 허우석 네 이름이 아니고. 착각하지 마.”
“어, 그래. 어차피 나는 깍두기였으니 이제 니들끼리 원래대로 지지고 볶고 하면 되겠네. 달라질 것도 없겠다. 왜, 이제 와서 나 혼자 놀면 아쉽냐?”
“본선 직전까지 올라가니까 우리 다 기대했었어. 방송 나가자고 한 네 덕분에.”
“그놈의 우리. 그럼 나는 우리가 아니야?”
“구차하게 굴 거면 얘기 그만 하자. 바뀌는 건 없잖아. 너도, 나도.”
말을 끊은 것은 한도윤이었다. 한도윤은 이내 질린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차라리 화를 더 내는 쪽이 좀 더 속이 좋았을 법도 했겠다.
반도 채 태우지 않은 담배가 그저 재가 되어 떨어졌다. 진심이었는데. 씨발 나는 존나게 진심이었는데.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2
허우석은 어째서 방송이 - 신승연 PD가, 다들 그렇게 말했지만 허우석은 최고 권력자의 이름으로 그의 이름을 대는 것을 꺼렸다. 그걸 인정하면 더욱 이상할 것 같아서 - 자신을 본선 진출자로 살려 두었는지 종종 이해할 수 없었다. 별 거부감도 카메라에 비춰지지 않은 채 단독 진출한 이상 허우석에 대한 여론은 불 보듯 뻔했고, 나쁜 놈 기믹, 그 정도는 허우석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실제 방송 또한 그렇게 나갔다. 실력은 있는데 성격이 나쁜 케이스의 표본. 다른 참가자들과의 마찰. 락 장르 담당은 둘째치고 그런 캐릭터가 필요해서 남겨 두지 않았나 싶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완전 밷애스로 밀어 주든가.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일찍 퇴장하겠거니 싶었던 예상과는 다르게, 허우석은 탑10 경연을 통과했다. 얼떨떨했다. 허우석이 자신의 실력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이렇게까지 먹힐 수 있을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탑5 경연을 앞두고는 정말로 이번이 마지막이겠다고 직감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예상보다 오래 살아남은 것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좋았다. 아무리 나쁜 놈 캐릭터로 밀고 나간들 오디션 프로그램 팬덤이 늘 그러하듯, 안티가 는 이상으로 개인 팬도 많이 생겼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한 번씩 더 천운에 기대하며 조금씩 욕심도 생겼다. 마스커레이드 멤버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소리지만, 방송에 나오길 잘 했다고, 혼자 본선에 진출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마스커레이드라는 그룹의 이미지가 아닌 개인의 캐릭터를 더 살릴 수 있으니. 그거면 대성공이었다.
고교 동창들끼리 결성한 밴드에 들어가선 보컬로서 혼자 주목받고, 단물만 쏙 빼먹은 다음 버린 쓰레기. 힘들게 이어 오던 밴드를 제 손으로 파탄낸 배신자. 전자는 납득할 수 있었는데, 후자는 제법 아이러니했다. 밴드의 누구도 나에게 배신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정작 한도윤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방송은 마스커레이드에서 내가 차지하고 있었던 위치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다. 그 편이 스토리를 만들기엔 더 나았기 때문일 테다.
신승연 PD는 쇼가 끝난 뒤엔 배신자가 아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세요. 배신자 이미지가 필요하면 그렇게 이용하시고, 그 이미지를 벗기는 스토리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세요. 근데 저희 멤버들이 제일 협조 안 할 걸요. 저는 애초부터 배신자가 아니었거든요. 물론 이 말을 육성으로 뱉지는 않았다. 제 상황이 조금은 우스웠다. 애초에 믿었어야 배신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저 나쁜 놈 맞아요.
역시, 무대는 좋았다. 대체로 작은 무대에서만 노래해 왔는지라 넓고 화려한, 속되게 말하자면 자본이 들어간 티가 확 나는 무대는 익숙하지 않았다. 작은 무대에서는 먹히는 퍼포먼스가 넓은 무대에서는, 또한 방송 카메라와 화면을 거치는 무대에서는 또 다르게 보인다는 것 또한 익혔다 - 허나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무대 퍼포먼스에는 딱히 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점에서는 확실히 허우석에게 강점이 있었다. 거진 오프닝이었다고는 하지만 락 페스티벌 무대에도 서 봤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역시, 어찌됐든 무대는 좋았다.
노랗게 물들인 머리에 화려한 피어싱, 남의 손을 탄 화장과 스타일링, 그런 차림새로 그 무대 위에서 헤비메탈 대신에 락 발라드를 불렀다. 그렇게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다고 느꼈던 대중성의 맛은 자본과 방송 논리의 힘으로 생각보다 쉽게 만들어졌다. 많이 타협하고, 많이 추구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애초에 인디밴드 바닥에서 메탈하는 놈의 사고방식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이었나 보다. 그런데 이런 90년대 락발라드는 나보다 머리 긴 놈이 더 어울리지 않나. 하긴 한도윤처럼 대중성의 대척점을 달리는 놈을 그 모습 그대로 본선 무대에 세우지는 않았겠지. 무의식적으로 한도윤도 이 무대에 서는 모습을 생각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결국 무대에 남은 것은 난데.
관련된 노이즈가 허우석에게 집중된 탓에 마스커레이드는 생각보다 대중들에게, 빠르게 잊혀졌다. 마스커레이드를 모르던 사람들에게는 보컬의 단독 진출은 딱히 예상 못 할 일이 아니었고, 기존 팬들도 허우석을 욕하기에 바빴지 마스커레이드의 존망에 대해서는 입에, 정확히는 손가락 끝에 올리지 않았다. SNS는 참 편리하다. 이것저것 추측으로 씨부린 말이, 자기가 몇 년간 보아 왔네 마네 하는 등 적당히 있어 보이는 전제만 있으면 정설이 되어 퍼진다. 물론 허우석 또한 그 영향력을 그간 제법 활용해 왔었기에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오히려 노이즈라도 있는 쪽이 나았다.
보는 놈들만 보는 방송도 아니고, 네 시즌째 황금 시간대 지상파 경연 예능이라는 건 온 국민의 화젯거리가 되는, 최소한 한 번쯤 언급은 들어 봤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허우석은 자신의 이름도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최소한 한 번쯤 언급은 들어 본 놈이 되었을까 궁금해했다. 어차피 대부분의 이목은 이규혁과 민주영에게, 셀프 어그로는 서혜성에게 다 쏠려 있긴 했다만, 어쨌든 허우석 또한 캐릭터 하나는 확실하게 잡혀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락도 아니었지만 나름 락 장르 담당이라는 것을 티내듯 징이 박힌 가죽 자켓. 진심인가. 시뻘건 색이 아니라 블랙인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겼다. 아무래도 방송에 서는 마지막 무대일 것 같은데, 멋있게 마치고 내려가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온전히 허우석의 의지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선곡에도 나름 힘을 주었다.
역시 정석 주인공들에게 범접할 없었다. 애초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 그 점에서 허우석은 자신이 나름 스스로에게 있어 객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분위기상 짐작하건데, 나쁜 쪽으로 이슈와 어그로가 집중되어 있는 쪽은 이번에 다 정리하고 가려는 모양이었다. 이제 효용 가치가 떨어진 거다. 방송은 시청률을 생각하고 이슈를 생각했다. 프로그램의 권위 - 그렇게 거창하게 말하기에는 우스웠지만 별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 에 해가 될 만한 것은 하지 않았고, 이는 노이즈를 장려하되 그 방향을 컨트롤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허우석의 마지막 방송이 될 터인 무대는 허우석의 기대보다 싱거운 반응으로 끝났다. 당연한 이야기다. 마지막인 것은 허우석이고, 그렇기에 허우석 본인에게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탈락이 확정되면 무언가 스토리를 더 붙여서 보내 주려나. 정말로 배신자 딱지를 떼어 주려 하려나. 전 회차와 비슷하다면 때 아마도 VCR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고, 그 내용은 본인에게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허우석에게 남은 것은 그저 처분을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어찌 되든 상관은 없었고, 허우석 본인은 나름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이 얼마나 객관적인 사람인지! 나는 방송에 휘둘리지 않았다. 나는 방송을 이용한 거다. 밴드 단물 뽑아먹고 혼자 나른 놈 답게 방송 단물 잘 뽑아먹고 갑니다. 그렇게 오만한 생각을 했다. 마치 아무런 욕심도 없었다는 것처럼.
중간 결과가 발표되고 허우석에게는 4라는 숫자가 쓰여졌다. 재수 없는 숫자, 무심결에 생각했다.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3
무대가 무너졌다. 천장에서 파편이 떨어졌다. 현장은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명 소리가 들렸다. 현실감이 없었다. 꿈인가? 모든 것이 그저 환각이고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사항이었을 뿐인 꿈. 우습게도, 위험하다는 생각보다는 허탈감이 앞섰다. 자잘하게 떨어지던 파편은 이내 큰 조각이 되었고, 본인을 향해 직격으로 떨어지는 덩어리를 목격한 것을 마지막으로 허우석은 무슨 일인지 생각할 새도 없이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허우석은 잔해 더미 속에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을 보니 아주 많이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허나 갇힌 채로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언제 더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 여전히 현실감이 없다.
“거기 누구 없어?”
힘겹게 소리를 질렀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잔해의 틈새 너머로 얕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득한 액체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피다.
잔해더미를 헤치고 나가려 했지만 팔도, 다리도 깔려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도 허우석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 적을 만들지언정 동료를 만들지는 않은 탓이다. 대개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 탓할 곳도 없었다. 허우석 본인이 선택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 도우며 현장을 빠져나가고 있을까? 아무래도 다들 어느 정도 친분이 쌓인 것 같았으니 그럴 것이다. 주어진 캐릭터대로 - 혹은 본인의 의지로 - 나쁜 놈을 연기하고 있는 놈까지 위험을 감수하며 도와 주려 할 만큼 이타적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무대에 매몰된 것이 나 혼자가 아닌 다른 멤버들과 함께였으면 조금 달랐을까? 모두가 올라왔다면 서로 도와 주려고, 괜찮냐고, 많이 다치지 않았냐고 난리였겠지. 그 중에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주 후순위였거나. 이러든 저러든 상황이 별반 다르지는 않았겠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혹은 한도윤과 함께였다면? 아무래도 외면받지 않았을까. 본인이 자초한 일이니 억울해하는 것은 맞지 않았다.
기댈 곳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 왔다. 정확히는, 남에게 기대어 봤자 소용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인생은 각자 사는 것이다. 남의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불확실하다. 차라리 내가 이끌고 가는 쪽이 낫다. 그 결과가 이렇게 돌아왔다. 허나 그게 내 탓인가?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기대려고 해 보았자 돌아오는 것이 없는데. 소외될 바에는 차라리 원래부터 혼자였다고, 그게 맞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았는데. 허나 이런 비현실적인 일까지 상시 계산에 넣는 것 또한 터무니없는 일이다.
이대로 죽게 될까? 규격 외의 비현실적인 상황에서는 차라리 비현실적인 것에 기대는 것이 나았다.
허우석은 믿지도 않는 신을 찾았다. 한도윤의 얼굴이 떠올랐다. 신이 한도윤의 얼굴을 할 리가 없는데. 생각을 치웠다. 불쾌했다. 밖을 향해 몇 번을 더 소리쳐도 반응이 없자, 허우석은 다시 눈을 감았다. 살면 살고, 말면 말겠지.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부디. 아직 손에 잡지 못한 것이 많은데. 이럴 수는 없는데.
허우석은 다시 눈을 떴다. 눈을 뜨자, 허우석은 무너진 무대 위에 있었다. 빼곡하게 에워싸고 있던 잔해들은 없었다. 다친 다리로 비척비척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요했다. 허우석은 온전히 혼자였다. 본디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띠링, 손목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띠링 띠링, 워치가 있었지. 잔해에 맞지 않았는지 다행히도 워치는 작동했다. 이것으로 구조 요청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급하게 메뉴창을 열었다.
전화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다시 알림음이 울린다. 띠링 띠링 띠링. 페이터다. 전화가 되지 않는 마당에 인터넷은 된다는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완전히 고립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그 순간, 수많은 글자가 워치 위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팝업 알림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hmin_msq 제꺽 뒤졌냐?
서혜성은 협박 버프라도 있었는데 ***은 득표도 안 오름 ㅋㅋㅋㅋㅋㅋ 나 같으면 순위보고 자살한다 ㅋㅋㅋㅋㅋ
혹시나 아는 사람의 연락이 있을까 봐 멘션창을 열어보았다. 그런 건 없었다. 마스커레이드 공식 계정도 묵묵부답이었다. 애초에 허우석 본인이 관리하고 있던 계정이었으니 그럴 법도 한데, 멤버 모두가 아이디와 비밀번호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무도 들어와 보지 않는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멤버 개인의 페이터 아이디가 있지도 않다. 황익선은 있긴 한데, 계정만 생성하고 거의 방치 상태고. 한도윤? 연락이 올 리 없다. 계정도 없고, 높은 확률로 페이터를 사용하는 법도 모를 것이다.
빠르게 점멸하는 워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타임라인은 순식간에 욕설과 조롱으로 뒤덮였다.
니가 하는 말은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아 이 새끼야
누구 인성 보여준 거고 당연한 결과임.
***이 분위기를 읽으면 ***이 아니지
밴드도 박살내고 이제 자기가 탈락할 거 같으니까
그새끼는 사람 뒤통수치고 나갈 때도 쿨하기 짝이 없더라
남들이 소년가장 소년가장하니까 무슨 자기 1인 밴드인 거처럼 단단히 착각한 모양
첨엔 쿨해 보이는 척 하는 줄 알았는데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놈이더라고
꺼져 이 개새끼들아. 니들이 뭘 아는데. 나에 대해, 우리 밴드에 대해 뭘 아는데. 꺼져. 꺼지라고. 안 꺼져?
짜증이 솟구쳤다. 허우석은 워치를 벗어 콘크리트 잔해 위에 내동댕이쳤다. 액정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보이는 글자들이 어쩐지 익숙했다. 내가 이런 상황을 또 겪은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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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니들 같으면 이 기회를 그냥 날릴 거야? 내가 이거 따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나 해?”
“우리가 언제 그런 거 해 달라고 한 적 있어? 누가 그 고생 하래? 멋대로 진행해 놓고 생색 내면서 통보하는 게 무슨 소용인데?”
“야, 마스커레이드가 뜨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나라고 이게 마음 편할 줄 알아? 근데 암만 생각해도 이게 최선이고,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이게 맞는 거 같거든.”
“솔직히 말하자. 니들 이대로 계속 갈 수 있을 거 같아?”
“너 말 다 했어?”
“니들이 한도윤만큼 열심히 하기를 해, 재능이 있어? 니들 서로 죽고 못 사는 건 알겠는데, 그 죽고 못 사는 친구 인생 발목 잡는 건 좋아? 진짜 위한다면 잘 되는 거 도와 줘야 하는 거 아냐?”
“니는 안 버려지는 입장이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 우리 입장에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어?”
“니들이야말로 그건 니들 입장이지. 익선이도 동의했어.”
“황익선!”
저편에 서 있는 황익선은 말이 없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다.
허우석은 절박했다. 수 번의 노력 끝에 겨우 잡은 기회다. 애초에 인디 밴드가, 그것도 유행 지난 장르로 활동하던 인디 밴드가 메이저 데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바늘 구멍에 한도윤이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임을 안다. 허나 오히려 그렇기에 밴드의 스타일을 버리고 재구축하더라도, 이 컨셉을 유지하며 계속 인디 바닥에 붙어 있는 것보다는 당연히도 이 쪽이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 아니, 정말로 확실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마스커레이드 처지에 이 이상 좋은 기회가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당연히, 모두가 납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황익선과 한도윤은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익선은 제법 고민하더니 그렇게 하자고 했다. 제법 고민했다는 것이 허우석의 입장에서는 제법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나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허나 그런 눈치는 아니었다. 고생했다. 한 마디를 들었다. 그거면 되었다. 리더의 의견이니 다른 멤버들도 따를 것이다. 워낙 친하니까. 허우석 본인의 말이라면 몰라도 가족같은 친구의 말은 들을 것이다.
한도윤 또한 비슷한 반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허우석의 평가에 따르면, 한도윤과 본인 둘만 남긴다고 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었다. 마스커레이드의 한도윤은 그런 존재였다. 허우석은 자신이 한도윤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는 말은 그렇지 않아 보여도, 한도윤에게는 욕심이 있다. 야망이 있다. 본인의 취향이라고는 해도 일부러 더 눈에 띄는 모습을 하고, 관객이 조금씩 늘어날 때마다 표정이 변한다는 것을 안다. 한도윤은 음악을 사랑한다. 그리고, 음악으로 주목받고 싶어한다. 허우석은 남들이 모르는 한도윤의 모습을 본인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실력이 떨어지는 다른 멤버들에게 맞춰 줄 필요가 없는 한도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런 한도윤과 함께 한다면 허우석 본인에게도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것은, 한도윤에게도 허우석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허나 한도윤의 생각은 조금, 아니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허우석은 한도윤을 잘못 봤다. 그리고 그런 한도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도윤은 격렬하게 반대했고, 고성과 욕설이 오고 갔다. 한도윤이 반대하자 유태희와 김주용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 황익선은 몇 번 설득해 보는 듯 하더니 이내 포기한 듯 방관했다. 급기야 주먹이 오고갔을 때에도 한도윤은 동의한다는 듯 저지하지 않았다. 문을 닫고 나가며 허우석에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배신자.”
애초에 허우석은 낄 수 없는 자리였던 모양이다. 허우석은 혼자 나쁜 놈이 되었고, 배신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허우석은 멤버들이 자신을 내쫓지 않은 것에 제법 의아해했다. 계속 불편한 채로 있으란 말인가. 내 앞길 막은 놈들과 같이 있으란 말인가. 제 발로 뛰쳐나갈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허우석 본인도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사실은 알았다.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다.
배신자, 허우석은 그 말을 곱씹었다. 배신감을 느껴야 하는 것은 난데.
허우석은 자신이 밴드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둘만 있었을 때, 한도윤은 허우석에게 왜 마스커레이드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는지 물었다. 사실 제법 의외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서, 잘 맞을 것 같아서라고 대답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는지, 그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 때의 한도윤은 성공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했었다. 아마도 둘 다 조금 취해 있었던 것 같다.
181005
사실 허우석은 이 지랄맞은 기시감의 정체를 알고 있다.
넌 끝까지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구나. 개새끼야.
다음 순간 허우석이 마주한 것은 가장 보기 싫었던, 허나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다.
한도윤. 파란 넥타이에 목을 매단 한도윤이다. 허우석이 보지 못했던 한도윤의 마지막이다. 한도윤은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손목의 워치만은 여전히 점멸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뒤덮이는 알림창 중에는 익숙한 텍스트들도 있었다.
@BS_handy 제꺽 뒤졌냐?
서혜성은 협박 버프라도 있었는데 한도윤은 득표도 안 오름 ㅋㅋㅋㅋㅋㅋ 나 같으면 순위보고 자살한다 ㅋㅋㅋㅋㅋ
니가 하는 말은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아 이 새끼야
한도윤이 분위기를 읽으면 한도윤이 아니지
그새끼는 사람 뒤통수치고 나갈 때도 쿨하기 짝이 없더라
첨엔 쿨해 보이는 척 하는 줄 알았는데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놈이더라고
적막 속에 워치의 알림음이 공허히 울렸다.
허우석은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본다. 비싸 보이는 협찬 의상들, 방송용으로 잘 세팅된 머리, 화려한 악세사리는 없었다. 염색한 지 제법 지나 검은 부분이 늘어난 머리는 푸석푸석했고, 옷은 평소에 입던 모습 그대로였다. 꿈에서 깨어났고 환각은 사라졌다. 다가온 것은 현실이다. 허우석이 저지른 - 혹은 더욱 비참하게도, 허우석이 탓이 아닌 - 일의 결과다. 허우석은 그 결과를 마주했다.
허우석에게는 파란 넥타이 따위 없다. 따라서 허우석이 목을 매는 결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허우석은 한도윤과 같을 수 없다. 허우석이었더라면 남들이 뭐라고 한들 아득바득 살아갔을 것이다. 그렇기에 허우석은 한도윤을 이해하지 못했다. 최소한 그렇게 가진 말았어야 했다. 이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성공하고 싶다며. 그 말은 결국 거짓말이 아니었잖아, 개새끼야.
건물이 울리고 구조대가 진입하는 소리가 들렸다. 허우석은 홀로 살아남았다.
떨어지는 잔해 속에서 허우석은 눈을 감았다.
2018년 10월 5일이었다.
허우석은 눈을 떴다. 식은땀으로 젖은 몸을 이끌고 일어나자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담배갑이 발에 채였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일상이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고, 휴대폰의 알림 팝업창은 깨끗했다. 허우석이 그 날 한도윤에게 쏟아내었던 것들의 업보로 허우석은 한동안 할 일도 없었고, 별 것 아닌 일을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날로부터 벌써 석 달이 지났다. 사고는 아직까지도 회자되었다. 사고의 법적 책임, 법률 강화, 다건의 사망, 전례 없이 충격적인 일들 사이에서 허우석은 빠르게 잊혀졌다. 아, 그 재수없던 한도윤네 밴드 보컬? 그 이상으로는 아무도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한 두어 달만 더 있으면 허우석이라는 이름을 대어도 그 사람인 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허우석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식음을 전폐한다거나, 몇날 며칠을 집에 쳐박혀 괴로워한다거나, 그러진 않았다. 물론 제법 괴로워하며 오래 반성한 것은 맞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까지 그러고 있기에는 허우석 또한 본인의 인생을 살아야 했다. 일어서야 했고, 나아가야 했다. 허나 가끔, 아니 제법 자주, 허우석의 꿈에는 한도윤이 나타났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럴 것이다.
한도윤을 만나러 가야겠다. 못 했던 말들을 털어내야겠다. 그저 본인이 편해지기 위한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허우석은, 허우석이어야 하니까. 한도윤과는 같을 수 없으니까.
후기
본 원고는 2021년 2월, 우석도윤 포스타입 온리전 당시 기념으로 만들었던 미궁게임 스토리의 리뉴얼입니다. 커플링 필터를 빼고, 기본 소재와 사건은 따라가되 내용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벌써 2년이 지났어요. 그 새에 캐릭터 해석이 제법 많이 바뀌었습니다. 허우석도, 한도윤도, 둘의 관계도요. 당시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읽어 보니 그 당시에 제 속의 허우석이 생각보다 로맨틱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제법 낯설어요. 제 안에서 몇 년 새 우석이가 조금씩 닳은 것도 같습니다. 굴러다니다 보니 모서리도 좀 깎여서 둥글어지고… 이번엔 우석이가 욕도 많이 안 합니다. 횟수를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요.
그래서 굉장히 즐겁게 썼던 것 같아요. 그 때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이 확연히 다른 것을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우석아 잘하자. 나 그래도 요즘 너의 미래를 좀 챙겨 주려고 하는 것 같다. 그치만 너도 먹고 살아야지. 안 그러냐. 새우 먹자 새우. 말하고 보니 저도 새우가 먹고 싶어졌어요. 오늘의 저녁은 버터갈릭새우.
허우석 교류회! 교류회를 정말 좋아해요.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꽤 여러 번 열었을 텐데 그러지 못 한 것이 정말 아쉬워요. 그래도 이렇게 모일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다들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다른 분들 작품 볼 생각에 벌써부터 두근댑니다. 정말 즐거워요.
모두 감사합니다! 새우 최고!
2023.04.14
사랑을 담아, 멸종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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