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하늘

인하도윤 / 오인하 / 한도윤 | 오인하 후일담 스포도 있음 

그의 눈동자에는 하늘이 있었다.

한도윤은 그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정말 불현듯 든 생각이었다.

평소와 똑같은 촬영, 연습, 그 속에 지긋지긋 할 정도로 이어지는 불화와 견제. 그 속에 언제나 혼자였던 한 도윤. 신승연 PD의 제안을 받아드린 것에 대한 후회를 하기도 했고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에 휩싸이던 밤도 있었다. 알게 모르게 속이 뒤틀리듯 무너지고 있었음을 한도윤 자신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무렵에, 한도윤의 시야에 갑자기 그가 시야에 들어왔다. 오인하…. 

리허설 임에도 불구하고 본무대였나, 생각이 들 정도로 선명한 색깔이었다. 무대를 휘어잡는 목소리와 눈빛. 뜨거운 방송 조명에 더욱 반짝이는 새하얘 보이는 머리카락이 움직일 때마다 살랑살랑 움직였다. 오인하가 움직이는 걸음에는 별이 통통 튀는 것 같았고 무게감이 짙기도 했다. 목소리가 가슴 한 켠을 휘어잡듯 휘몰아쳐, 한도윤은 처음으로 무대 위를 제대로 동경 하게 되었다. 

"부럽다." 

무심코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무척이나 작은 소리였고 그런 진심이었다. 한도윤은 아직 자르지 못한 머리카락 끝을 쥐었다. 신승연 피디는 [배신자]가 된 한도윤에게 이미지를 바꾸길 요구했다. 드라마틱한 반응도 요구했다. 더 환한 무대를 위한 첫 번째의 발걸음이 팀을 버린 것이라면, 그 이후의 첫 발걸음은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이었다. 아직도 제 머리카락을 휘어잡듯 잡아챘던 신승연 피디의 손아귀 힘이 선명했다. 완벽하게 납득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한도윤이 내뱉어야 하는 대답은 네.였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라며 리허설 이후 자를 예정이었고 당장 코앞으로 닥친 지금도 영 내키지 않은 기분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는데. 

오인하의 무대를 바라본 순간,

제가 고집스럽게 길렀던 이 머리카락이….

이렇게 보기 싫은 미련처럼 보였을까. 

미련? 미련보다도 더 질척이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감정이 머리카락에 덕지덕지 묻어있는 기분이 들었다. 제대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 무엇보다 지금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신승연 PD의 손을 잡았던가. 어떤 마음으로 팀을… 버리고 이 자리에 서 있었나. 

한도윤은 방송 너머의 오인하를 알았다. 촬영 카메라가 온전히  꺼졌을 때의 오인하.  

편집과 자막, 이어 붙이기 등으로 만들어진 오인하도 아니고, 방송 카메라가 돌고 있을 때의 오인하도 아닌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은 오인하를 알았다. 물론 그 모습 마저 온전히 그의 진 모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모습을 안다고 하기엔 그렇게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무대 위의 오인하 만큼은 그 본인 그대로였다. 

아, 나는 이 무대를 동경하고 동경하고, 또 동경해서 이 무대 위를 더 올라가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도 저렇게, 저런 무대 위를 직접 서고 싶어서 신승연 PD의 손을 잡고 남았는지. 

한도윤은 주먹을 꽉 쥐었다. 조명이 바뀔 때마다 오인하를 덮는 색상이 찬란하게 바뀐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무대 위에 서 있는 오인하와 어둠 밖에 없는 무대 아래에 그를 바라보는 한도윤. 그렇게 한도윤은 오인하를 홀린 듯 바라봤다. 오인하가 고개를 돌린다. 불이 들어온 카메라를 바라보던 시선이 무대 아래를 향한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잠깐. 눈 마주쳤다고 표현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찰나. 한도윤은 눈을 멍청하게 껌벅였다. 

하늘이다. 

생각에 이어 또다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머리에서부터 전신으로 천천히 퍼진다. 꽃을 피우기 위해 땅 아래 씨앗을 깊게 심어두는 것처럼 작은 감정이 그의 머리에 자리 잡는다. 발아하여 아름다운 푸른 잎을 피우기 위해. 한도윤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노래는 끝이 나고 화려한 조명이 한두 개만 남기도 꺼진다. 눈 부시던 무대 위도 조금은 가라앉는다. 오인하가 누군가를 향해 끄덕이고 대답을 하더니 고개를 돌린다. 이번에는 우연이 아니라는 듯 한도윤을 향한 시선이었다. 한도윤은 멍청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만 그를 바라보던 오인하가 입꼬리를 씩 올려 웃어 보인다. 눈꼬리가 호를 그리며 휘고, 발간 웃음이 그의 얼굴에 만개하듯 피어났다. 한도윤이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오인하는 그걸 끝으로 몸을 휙 돌려 무대를 내려갔고, 무대는 다음 리허설을 위해 정비하는 스탭들이 바쁘게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아…."

어떡하지. 큰일 났다. 

무대가 무너지고, 보통의 상식에서 제대로 받아드릴 수 없는 일들이 한도윤에게 들이닥쳤다. 모두가 진정하지 못하고 각자의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한도윤은 몇 번이고 다 포기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왜? 내가? 분쟁의 횟수만큼 이런 생각도 끊이질 않았다. 자신을 감당 하기 어려운 것은 한도윤도 마찬가지임에도 어떻게든 구조가 되기 전까지 모두가 안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처해서 그들의 사이를 조율하기 시작한 지도 모른다. 

예전에 익선이 장난스레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리더는 나지만 애들은 도윤이 말을 더 잘 듣는다니까.  태희가 맞장구를 쳤었던가. 리더는 익선이지만 도윤이는 우리 보호자라니까.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다. 

습관처럼, 몸에 익은 것대로 움직인 건지. 

한도윤은 모두가 저를 보지 않을 때면 한숨을 쉬며 머리칼을 헤집었다. 두통이 이었다. 

몇 시간이지. 고작 몇 시간이었다. 무너진 하늘에서 환한 빛이 들어올 무렵엔 한도윤은 귓가를 찌르듯 들려오는 목소리들은 다 뒤로 했다. 체감은 몇 달은 이 곳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도윤은 희미하게 보이는 파란 하늘을 시야에 온전히 담았다. 어떤 소리도 뭐도 귀에 닿지 않았다.  그저 하늘이 정말 아름다웠다. 

그 뒤로도 정신이 없었다.  몰려드는 기자들과 방송국 사람들과 경찰과 구조자들. 누구랄 것 없이 살아남은 이들에 대해 떠들어댔고 한도윤은 질린 듯이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그 뒤로는 제대로 만지지도 않았다. 눈에 띄는 큰 중상은 없었으나 다른 이들보다 한도윤의 회복은 더뎠다. 한도윤이 보지 않으려고 해도 각종 언론에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댔고 이규혁의 범행에 잘난 전문가들이 너도나도 말을 얹었다. 불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옆 병실에 있던 서혜성은 틈만 나면 한도윤의 병실에서 내내 시간을 보냈었고 그런 방송이 나올 때면 온갖 짜증을 내며 채널을 돌리고 전원을 끄곤 했다. 본인이 티비를 틀었으면서 또 성내는 꼴이었다. 그 속내를 생각하면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도 퇴원을 하고 각자의 길과 속죄를 이어갔다. 

여전히 홀로 병실에 남아있는 한도윤을 제외하곤 모두가 각자의 길을 알아서 찾아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도윤은 코를 문질렀다. 투명한 창문 너머 공원 풍경이 한적했다.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갈피 조차 잡지 못한 자신은 아직 제자리걸음이었다. 하늘을 바라봤다. 푸르고 푸른 하늘에 떠다니는 하얀 구름이 한적했다. 

"야, 한도윤. 뭐하냐? 분위기 잡고?"

하늘이 이야기했다.

아, 아니지. 이건 오인하의 목소리였다.

한도윤은 고개를 돌렸다. 염색 물이 많이 빠진 머리카락 색이 먼저 들어왔다. 그 뒤 마주친 눈동자는 가을 하늘이었다. 본래의 색으로 돌아온 하늘의 색깔….

"분위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오인하가 건네주는 음료수를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 

"붕대 감고 난리가 났네. 미이라야?" 

 꼬불거리던 머리카락이 쭉 뻗어 흔들렸다.  창문 너머로 햇볕이 따스하게 들어왔다. 

"또 바뀌어야지. 내가 진짜 바라는 모양으로."

"나, 무대 체질인 게 아니라 무대가 좋았던 거였어."

"공부를 해보고 싶어졌어."

한때는 동경을 했던 이는 이번에도 또다시 가만 주저 앉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런 그를 앞에 마주할 때면 한도윤은 여러 생각이 들고 기분이 들었다. 동경하는 하늘. 

"왜 멍때려? 내 미모에 영혼을 상실했어?"

어. 라고 대답했으면 어땠을까. 한도윤은 괜히 뒷머리를 매만졌다. 이어지는 대화는 무겁다가도 가벼웠고 조용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도윤이 문득 생각한 것은 아, 더는 무대 위의 오인하는 못 보게 되는 거구나.였다. 그건 조금 아쉬웠다. 조금, 많이. 해가 기울고 노을 진 하늘이 벽 한 면을 채워진다.. 오인하는 그만 일어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뒷모습에 아쉬움을 느낄 무렵 그의 마음을 알아챈 것 마냥 오인하가 한도윤을 바라봤다. 속으로 괜히 움찔한 한도윤은 왜, 하고 되물었다.

"돌아올 거지. 무대로? 널 위한 무대. 내가 까리하게 만들어줄게."

퇴원 기다릴게. 

오인하가 만드는 무대. 미래. 그 무대에 오를 즘에는 아직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이 감정을 그에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때엔 전해야지. 동경했던 무대를 좇아 다시 무대에 설 그 날에, 그래. 음악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러니까 한도윤은 할 수 있었다. 그가 가야 할 길은 아직 있었다.  

한도윤은 아직 하늘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은 병실의 벽을 바라봤다. 노을 진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해가 지는 것은 또 떠오르기 위해서니까 잠깐의 아쉬움은 금방 지나가겠지. 한도윤은 빈 음료수 캔을 정리하고 침대 등받이에 기댔다.

자신이 오인하가 만든 무대에 설 날이 올까. 

그 날을 상상하면 조용히 가슴이 뛰곤 했다. 

간만에 무대 하니까 어때, 내가 만든 무대. 까리하지? 어? 빨리 말해라. 이 누나의 무대에 감탄했지? 

오인하.

어? 어, 뭐야. 왜 그렇게 진지하게 불러. 

그, 있잖아….

뭐?

좋아해. 

어…?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네가 만들어준 이 무대에 서서, 내가 동경했던 네 무대에 뒤지지 않는 무대를 만들어서 부끄럽지 않게 이야기 하고 싶었어. 오인하. 좋아해. 

야, 야, 잠깐만 너무 갑작스럽잖아. 이런 타이밍에 고백이야?! 다음 무대 5분 전에?!

대답, 꼭 듣고 싶었던 건 아니니까. 네 꿈을 방해할 생각도 없고. 기다리라고 하며 기다릴게. …전하고 싶었던 것 뿐이니까.

…하여간, 무드도 모르는 게 한도윤 답네 진짜. 로맨스의 로도 모를 놈. 아, 잠깐만. 저기서 나 부른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 

……응. 

울상인 거 봐. 아직도 얼굴 못 감추냐? 아, 잠깐만. 이리 와봐.

오인하는 한도윤의 넥타이를 당겨 그 볼에 입술을 맞췄다가 그를 밀어냈다. 옅은색의 립이 그의 볼에 희미하게 남았다. 한도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스탭의 불음에 달려가던 오인하는 문득 걸음을 멈춰서고 그에게 크게 외쳤다. 야! 장미꽃 한송이는 준비해놔! 멍청아! 그 뒷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던 한도윤의 얼굴엔 금방 작은 웃음이 피었고 피어오른 웃음은 금방 소리로 퍼졌다. 입을 가리고 소리 내 웃던 한도윤을 누가 힐끔 쳐다보고 갔지만 그는 상관 없다는 듯 웃었고 웃음을 그칠 무렵엔 얼굴에 수줍은 감정이 남아있었다. 정말… 반하지 않을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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