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의 초고
우석도윤
들어가기전에.
-이게아냐2024(베리드스타즈 배포전)에서 발행한 정精의 초고입니다. 버려진 원고지만 아쉬워서 올려봅니다. 어쩌면 이야기 속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해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해당 문장들은 수정되어 본 원고에 삽입 되기도 하였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저물어가는 가을의 끝자락. 제대 축하 파티라며 술집에 끌려온 허우석은 밀려드는 술잔들을 꾸역꾸역 목구멍 아래로 밀어 넣었다. “미친 새끼들아, 적당히 좀 해!” 내뱉는 숨까지 알코올로 절여진 기분에 목소리를 높였지만, 기회다 싶은 술꾼들은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술잔을 보다 높이 들었다.
“우리 우석이의 무사 제대를 위하여!”
이미 제대했는데 뭘 위하냐고 버럭거리는 소리는 뒤따라 ‘위하여!’라 외치는 목소리에 묻힌다. 잔이 서로 부딪치며 맑은소리를 퍼트리고 애정담아, 가득 채운 술잔은 감당하지 못하고 술을 아래로 흘려버린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미 술기운이 취한 이들은 그마저도 즐겁다. 위장에 음식이 가득 차고, 술기운도 오르니 담배가 땡긴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허우석은 옆에 앉아 있던 이를 툭 친다. 왜? 담뱃갑을 들어 보인다. 어우 추운데. 얼렁 갔다 와. 허우석의 눈썹이 비뚜름해진다. 다른 녀석들을 둘러보다가 에이씨,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석이 어디가?”
“어어, 한 대 피우러 간대.”
“도망치면 안 된다. 우석아~!”
씨팔. 허우석은 뒤로 중지를 펴 보이곤 가게 밖으로 나왔다. 후끈하게 오른 내부 온도와 다르게 바람이 차가웠다. 멀리 움직이지도 않고 가게에서 두세 발짝. 맞은편 담벼락의 가로등 아래에 섰다. 숨을 쉴 때마다 알코올 냄새가 목구멍 안에서 올라온다. 술을 마신 건지, 술이 자신을 마신 건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타들어 가는 연기를 깊게 마시면 그래도 숨통이 트인다.
“미친놈들….”
축하 파티는 무슨. 자신을 핑계로 술을 마시기 위해 모여서 죄다 눈이 뒤집혔다. 쓰읍…. 언제쯤 어떻게 도망갈지. 그런 것들을 셈하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저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움찔한 허우석은 고개를 돌렸다. …남자?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위아래를 훑는다. 단발, 비슷한 시선의 위치, 납작한 가슴. 다시 아래에서 위로. 상당히 무례한 시선임에도 불구하고 인지하지 못한 채 상대방을 살핀 후에야 눈을 마주친다.
“왜요.”
퉁명스러운 목소리. 상대방은 그런 그의 태도에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허우석은 그 목소리를 다시 듣고 나서야 ‘아, 남자네.’라고 구경을 끝냈다. 왜 사람을 놀라게 하고 난리야. 인기척 좀 내고 다니지. 속으로 투덜거리며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남자는 작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인기척만큼이나 조용하네.’
음침하게 머리나 기르고…. 딱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군대는 갔다 왔나? 생각이 길어지면 거기까지 흘러갔지만 곧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라며 담뱃재를 털어내고 시선을 돌렸다.
…칙, …칙. ……칙.
“……….”
허우석은 그 기운 빠지는 소리를 듣고 다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삐딱하게 서선 남자가 하는 꼴을 가만히 바라봤다.
…칙.
일회용 라이터를 제대로 써본 적이 없는 걸까. 부싯돌이 그의 손끝에서 계속 헛돈다. 불꽃은커녕 옅은 스파크만 튀어 오르자 남자는 괜히 라이터를 흔들어보고 다시 부싯돌을 돌리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손 아프겠는데.’
아니, 그보다 불을 못 피우겠으면 도와달라고 하던가. 목 아래까지 올라오는 것은 이제 술기운이 아니라 답답함인 것 같았다.
“이봐요.”
참다못한 그가 남자를 불렀다. 네? 하고 고개를 드는 남자와 시선을 마주치기도 전에 그의 손에서 라이터를 뺏어 들었다. 가장 저렴한 싸구려 라이터가 한 번의 손짓으로 불씨를 터트린다. 뜨거운 불빛이 피어올라 퍼렇고, 붉은빛을 내며 시야를 잠깐 밝혔다가 사라진다.
“이거 하나 제대로 못 해요?”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허우석은 제가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으로 떨어트려 발로 비벼 끄곤 그에게 손짓했다.
“어….”
“불, 붙여 줄 테니까.”
그렇게 라이터에 다시 불이 붙고, 남자는 담배를 입에 물곤 불씨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참 담배 하나 불붙이기 이렇게 힘들어서야…. 희미하게 올라가는 연기를 바라보다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는다.
“됐죠?”
…콜록.
“감사합니다.”
방금 기침한 거지? 허우석은 남자를 다시 위아래로 훑다가 손을 휘저으며 다시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가게 안은 시끌벅적하고 열기가 후끈했다. 자리로 돌아가며 자리 비운만큼 어서 마시라고 내민 술잔들을 대충 밀어내며 자리에 앉자 무심코 창문 너머를 바라본다. 아까 자신이 서 있던 가로등 아래엔 아무도 없었다. …그새 갔나. 뭐 어때.
“자, 우석이가 다시 자리에 왔으니까 건배!”
허우석은 잔을 내밀었다. 쨍- 맑은소리가 뒤를 잇고 술을 목구멍 아래로 쭉 들이킨다. 새벽이 점점 더 무르익는다.
대전에 사는 고모의 아들놈도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입대한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었다. 심지어 친구 셋과 동반 입대하는 거라고 해서 ‘참 가지가지 하네….’라고 흘려들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그 이야기가 식탁 위에 올라왔다.
“그리고 보니 대전에 익선이 말이야.”
친구들이랑 동반 입대했다던.
생선 살을 바르던 허우석이 고개를 들었다. 어릴 때야 자주 봤지,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가선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해진 사촌을 떠올려보지만, 얼굴이 흐리멍덩하다.
“어, 근데 왜?”
생선의 잔가시가 왜 이렇게 많은지 다시 고개를 내려 마저 생선 살을 바르고, 뽀얀 흰쌀밥 아래 잘 발라진 살을 올려놓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입안에 넣으면 따듯한 쌀밥에 짭조름하고 부드러운 생선 살의 조합은 좋다. 씹으면 씹을수록 올라오는 고소함. 혼자 사는 자취방에선 쉬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이기에 이럴 때 많이 먹어….
“이번에 서울로 올라온다더라. 그러니까 네 자취방에서 좀 재워줘.”
…야 했다. 허? 허우석은 젓가락을 내려뒀다.
“왜, 싫어. 그냥 걔도 방 구하라고 해.”
“그러지 말고. 어차피 네 방 하나 남잖아.”
“그건 그거고, 왜 하필 난데?”
“그러면 친인척이라곤 우리밖에 없는 애를 그냥 냅두리?”
아, 싫다니까! 목소리를 높였지만, 효과는 없었다. 지금 지내고 있는 집의 보증금이 부모님 주머니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방 빼! 너도 집에 들어와!’라고 참다못한 어머니의 호령에 깨갱거리고 굽힐 수밖에 없었다.
“젠장… 빨리 취업해서 돈을 모으든가 해야지.”
창고로 쓰던 방을 정리하며 허우석은 이를 박박 긁었다. 혼자만의 자유는 참 짧았다.
“요.”
“요는 무슨.”
오랜만에 만난 사촌은 어렸을 때와 그대로였다. 나 이 방 쓰면 돼하면서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문을 열고 짐을 풀기 시작하는 녀석의 뒷모습을 허우석은 문에 기대 쳐다봤다.
“그건 또 뭐야. 기타?”
처음 봤을 때부터 눈에 띄던 짐이었다. 꼴랑 캐리어 하나만 들고 왔길래 생각보다 짐이 적네, 라고, 생각한 순간 등에 지고 있던 커다란 가방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어, 이모한테서 못 들었어? 나 밴드 해.”
“밴드?”
“엉.”
“무슨 밴드. 뭐, 학교 동아리?”
“아니, 그런 거 말고!”
황익선은 캐리어를 열어 가장 안쪽에 있던 CD 앨범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사나이라면 록이지!”
진한 화장에 화려한 치장을 한 남자 넷이 서 있는 CD가 눈앞에 내밀어졌다.
“…왜 사나이가 록인 건데.”
아니, 애초에 록이 뭔데. 허우석은 이해할 수 없는 분야와 맞닥뜨렸다. 앨범을 열어보고 수록곡을 읽어봐도 모르겠다. 그는 이미 록은 소리 지르는 노래라는 편협한 사고를 하는 상태였다.
“네가 뭘 모르나. 록이 진정한 간지야.”
너무 진지한 표정이라 이젠 이게 농담인지 진짠지 헷갈릴 무렵 황익선은 다른 짐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나온 건 대체 어떻게 챙겨왔을지 모를 여러 포스터와 CD들이었다. 이 밴드는… 저 밴드는…. 신나서 떠드는 모습을 보니 조금 질린 기분이 든다.
“아 됐고, 빨리 짐이나 풀어 새끼야. 하나도 안 궁금해.”
“왜, 이제 시작인데.”
황익선은 아쉬운 듯 이왕 꺼낸 김에 포스터들을 벽에 하나씩 붙였다. 테이프 자국 남기면 뒤진다. 네네, 걱정하지 마셔. 이런 건 다 비법이 있다고. 깨끗했던 벽면이 어지러이 채워진다.
“아 맞다.”
“또 왜.”
“우석이 너 내일 시간 있어?”
“뭐, 왜.”
“오늘 내 밴드 친구들도 서울 올라왔거든. 아마 걔네도 이삿짐 풀고 있을 텐데 시간 되면 내일 같이 밥 먹자고.”
‘밴드 친구들?’ …같은 날 서울 올라왔다고?
“내가 왜?”
“…매정한 놈. 얼굴 보고 인사하면 좋잖아. 친구 되면 더 좋고.”
별로 그럴 생각이 없는 허우석은 그저 시큰둥한 반응이다.
“네가 사주면 생각해 보고.”
…매정한 놈! 황익선은 지갑의 잔고를 고민하다가 에잇,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약속한 거다. 애들한테도 이야기한다?”
“그래라.”
대충 건성으로 끄덕이며 제 방으로 돌아간 허우석은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들었다. 별거 없이 SNS를 훑어보던 그는 문득 록밴드를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검색했다. 낡은 체크무늬 셔츠에 머리를 잔뜩 기른 남자들의 사진이 먼저 보였다. 벼락 맞은 것처럼 머리가 엉망이기도 하고, 오…. 사진을 옆으로 넘기니 체리필터의 사진이 떴다.
“체리필터도 록밴드야?”
록이 대체 뭔데. 점점 더 알 수 없게 됐다. 자신이 아는 록밴드라고 해봐야… 부활? 정도로 얕은 지식의 바닥이다. 이런저런 사진들을 바라보다 옆방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을 황익선을 떠올린다. 얘도 이러고 무대에 올라가나? 무대에 서나? 근데 무슨 무대? 쓸데없는 생각들이 이어지다 내일 만날 친구라는 녀석들의 모습이 걱정된다. 체크무늬 셔츠 입고 오는 거 아니야? 설마 화장은 안 하겠지? 쓸데없는 생각들이었다. 오랜만에 본 사촌놈이 좀 이상해진 것 같다는 결론을 지으며 허우석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야, 황익선. 저녁은 뭐 먹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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