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BIRTHDAY TO. X

[허우석] 2022년 9월 13일

2022년 허우석 생일 기념 글

어차피 당신들은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게 참 적절한 표현인 것이, 얼굴을 구태여 기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억할 수 없어 하지 못하는 것이다. 당연하다. 내 얼굴은 무대 위에 선 적이 없다. 그놈의 무대, 많이도 섰다고 생각했다. 다만 내가 생각하고 겪었던 무대라는 것과,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관념적 의미의 무대 사이에는 나와 그 망할 배신자 새끼만큼의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무대에 오른 것들만을 기억한다. 무대 아래의 것들은 그저 무대를 위한 장치이고, 배경이고, 장식이다. 내 꼴이 딱 그러하다.

당신들은 무대 위의 한도윤을 살리기 위해 애쓰고, 한도윤이 옳은 선택을 하도록 애쓴다. 물론 한도윤이 당신들의 말을 잘 듣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 새끼는 원래 사람 말 더럽게 안 들으니까, 그렇다 해도 당신들이 어쩔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한도윤은 참여형 연극의, 무대 위의 주인공이라기엔 고집이 제법 강하다. 그렇기에 걔는 그 무대에 끝까지 남지 못한 거다. 무대가 무너지고, 모든 게 끝난 뒤에는 결국 무대 위에서 내려오게 되는 결말인 거다.

한도윤은 참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주인공이다. 헤매고 선택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바뀔 수 있는 것이 아주 없다면 당신들에겐 재미가 없을 테니까. 물론 선택은 한도윤이 했다. 당신들에게는 한도윤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적은 경우의 수만이 제시되었을 뿐이다.

무대의 막이 내리면, 한도윤도 이제 무대 아래의 것이 되지만, 나와 한도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위치에 서 있지 않다. 수어 번의 시도 끝에 그제야 살아남은 한도윤을, 그제야 진실을 찾은 한도윤을 보고 당신들은 박수를 친다. 앞을 보고 걸어가는 한도윤의 앞날을 응원한다. 그래서 뭐? 나는 늘상 앞을 향해 걸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지금도 걸어가고 있다. 누가 그 앞을 한 번 막아서서 그렇지.

물론 이제 와서 한도윤을 탓할 생각은 없다. 무대 장치, 배경, 혹은 장식이 주인공께서 가시는 길에 말을 얹으면 그것도 딱히 적절한 일은 아닐 테다. 무대 조명이 갑자기 제꺽 뒤졌냐? 하고 말을 걸면 아무래도 이상하겠지. 그렇다면, 무대 위의 한도윤을 만드는 데에 나도 조금은 일조한 셈이 되나? 그것 참 영광이다.

거꾸로 생각해 보자. 당신들이 수어 번 무대를 재시작하고, 무대 위의 것들이 변하도록 노력하는 동안,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대사 몇 마디가 변하는 정도일까. 나는 무대 밖에 있기 때문에, 당신들이 보는 나의 단편은 별반 달라질 것이 없다. 막이 내렸을 때 나의 모습은 좀 달라질 수 있겠다만, 어차피 그것은 당신들 눈에 보이지 않는, 무대 아래의 이야기니까. 당신들이 무엇을 한들, 나는 죽을 일도, 다칠 일도, 인생의 궤도가 송두리채 바뀔 일도 없다는 말이다. 그게 내 삶이다. 그래서 마이너리티인 거다. 박수를 쳐 주는 사람이 없어도, 응원하는 사람이 없어도, 당신들이 개입하지 않아도, 

그렇게 거창한 결말이 아니더라도. 크게 의미를 부여받지 않은 발자국일지라도. 나는 앞을 향해 걷는다. 그 앞에 한도윤도 있냐고? 그러니까, 주인공 좀 그만 찾으시라고.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