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생일 축하해, 주정재 생일

주정재 약간의 정재현석


생일 축하해,

그리고…

미안해.

총성이 울려 퍼진다. 탕! 총성이 계속 이어진다.

"─!"

주정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숨이 헐떡이고 식은땀이 등을 적셨다. 머리부터 차갑게 식어가는 기분. 이불을 쥐고 있는 손이 달달 떨렸다. 급히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2시. 8월, 26일. 연도까지 꼼꼼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크게 숨을 내뱉었다.

"젠장…."

빌어먹을 꿈이다.

교대근무하고 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오던 잠이 싹 다 날아가다 못해 속이 뒤숭숭해졌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주정재는 화장실로 향했다. 낡은 조명에 불이 들어오자 거울 속에 남자가 비친다. 나이 들고 평화와 비일상에 찌들어간 남자. 그는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곤 물을 틀어 찬물로 세수를 했지만 그런데도 거울은 변함 없다.

식은땀으로 젖은 티셔츠를 벗어 세탁기에 대충 던져놓곤 빨랫대에 걸려있던 티셔츠를 킁킁, 냄새를 맡았다. 별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을 확인해서야 대가리를 집어넣고 옷을 입었다. 잠은 글렀으니 테이블 위의 티비 리모컨을 쥐고 티비를 틀었다. 심야 예능프로그램이 재방송을 하고 있었다. 조용했던 집안이 금방 왁자지껄한 소리로 채워졌다. 티비를 뒤로 하고 냉장고를 열었다. 텅 비어있는 냉장고엔 맥주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나를 꺼내 들고, 유리잔을 하나 챙겨 들고 소파에 앉았다.

맥주캔을 따는 소리는 시원했다. 콸콸 유리잔을 채우는 맥주에 거품이 올라 흐르기 전에 겨우 한 모금 홀짝이고 티비 채널을 돌렸다. 심야 방송이라고 특별히 볼만한 것은 없었다. 24시간 내내 반복하는 뉴스나 홈쇼핑을 넘기다 결국 처음 켜졌던 채널로 돌아왔다.

티비 속 패널들이 우스꽝스러운 몸 개그를 하고 기계적으로 반복적인 웃음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흘러나온다. 맥주 한 모금 하며 실없이 따라 웃고 나중엔 서랍에서 감자 칩을 하나 꺼내 안주 삼아 집어먹었다. 맥주캔도 비우고 과자 부스러기 조차 남지 않았을 땐 광고가 흘러나오던 티비를 결국 껐다. 순식간에 집안이 침묵으로 잠겨 들었다.

적막이 싫었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고 자고 싶지도 않았던 주정재는 한참을 이미 꺼진 티비 화면만 바라보다 담배를 챙겨 집 앞으로 나왔다. 새벽 공기는 이제 가을이 다가왔다는 걸 이야기 하듯 쌀쌀했다. 여름이 끝나갔다. 담배 끝을 물고 불을 붙였다.

- 담배, 끊으라니까.

환청이 들린다.

폐 깊이 들어갔다 뱉어낸 연기가 흩어진다. 소음도 더 커진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들릴 리가 없는데도, 아주 깊은 과거 속에 묻어둔 망령의 목소리가 귀를 두드렸다. 이게 다 꿈 때문이었다. 꿈, 좆같은 꿈.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그날의 꿈. 빗소리와 총성들, 그것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쉽게 잊히지 않았다.

지긋지긋하게도.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잊을 수 없었다. 권혜연을 돌보며 그녀의 집에 갈 때마다 늙지 않는 권현석의 사진을 매번 마주했다. 늙어가는 주정재와 다르게 그 시간에 멈춰있는 권현석은 언제나 웃고 있었지만 주정재에겐 그 웃음이 자신을 향한 비난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혜연이를 돌보고 아꼈다. 처음엔 속죄의 의미였지만 점점 정말 친자식 처럼, 가족처럼 소중한 아이가 되었다. 가족을 가져본 적 없는 주정재에겐 권혜연은 너무 다정한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똑 닮아서.

그렇게 권현석과 닮아가는 아이를 보며 금방 깨닫는다. 나는 이 아이와 가족이 될 수 없다고.

"… …."

이제와서 다 의미 없는 후회고 생각이었다. 담배를 꺼트린 주정재는 금방 재떨이에 짤막해진 담뱃대를 던져두고 휴대폰을 들었다. 익숙한 번호를 누르고 전화 버튼을 누른다. 통화 연결음이 이어지고 연결이 되지 않으면 또다시 번호를 눌렀다. 세 번 정도 반복해서야 연결된 전화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누가 봐도 자다 깬 목소리였다.

"야, 너는 형님이 전화하면 재깍재깍 받아야 할 것 아니야. 어? 에이씨, 시간이 몇시든 늘 대기하고 있어야지. 뭣보다 지금 시간이 몇시야. 내가 분명 자정에 딱 전화하라고 했지. 뭐? 무슨 일이냐고? 벌써 까먹었어? 새끼야. 내가─"

주정재는 과거를 묻어두지도 못하고 현재의 목소리를 들으며 애써 생각을 돌렸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와 한참을 투닥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너 생일땐 내가 먹였으니까 내 생일엔 네가 날 먹여야지. 라는 등의 가벼운 목소리가 이어지고, 새벽이 밝아갔다. 실 없는 새끼. 다행히 오늘 비는 오지 않았다. 날씨는 맑음이었다. 흐리지도 않고 맑음. 매우 맑음.

정재야.

빗소리가 남자의 목소리를 채 지우지 못했다. 멎지 않은 피가 빗줄기를 따라 바닥에 고이고, 흐리고, 또 흘렀다. 피철갑이 된 얼굴에 깨진 안경을 얹어놓은 꼴로 남자는 주정재를 불렀다.

정재야.

기억 속 깊이 묻어두었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빗소리를 뚫고 또박또박 들여오는 목소리에 주정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들고 있던 총을 바닥으로 떨어트린다.

… 생일 축하해.

찰박, 그가 한걸음 옮겼다.

그리고…,

빗소리를 뚫고 총성이 들린다. 총알은 그렇게 남자의 몸을 꿰뚫고 피가 튀었다. 상체가 앞으로 넘어가려고 하면 다시 반대쪽에서 그를 향해 총알이 날아왔다. 말을 잇지 못하고 권현석의 몸에 총알이 한발, 두발, 세발, 연달아 박히고 총성이 주정재의 귀에 박힌다. 그만, 그만해. 미처 소리치지 못한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총성이 그치자 바닥은 피로 흥건히 고여 말 그대로 피바다였다.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피가 고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의 피를 쏟았다. 그런데도 권현석은 여전히 주정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이 뻐끔거린다. 피가 흘렀다.

미안해.

주정재의 손이 달달 떨렸다. 떨어트렸던 총이 어느새 다시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시이팔, 이런 안 좋은 꼴로, 축하하지 말라고. 이런, 이런, 이런, 좆같은 모습으로, 주정재의 의사와 상관 없이 손이 움직였다. 왜냐면 이것은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손가락은 방아쇠를 당기고 총알은 올곧게 권현석의 머리를 꿰뚫었다. 하지만 권현석은 여전히 웃었다.

너는 좋은 사람이야.

그 말은, 다른 사람을 향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꿈속의 망령은 주정재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주정재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들고 있던 총의 총구는 곧 그의 머리를 향했다.

하하, 좆같은 해피벌스데이네.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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