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지 수록 원고들
유료

빛나는 것들

2023 <물한잔 치얼쓰> 발간, 베리드 스타즈 ncp 아포칼립스 트윈지 수록 원고

검회베 배포전 <물한잔 치얼스>에 발간했던 유안님과의 트윈지의 제 파트입니다.

파본대비 여분을 무지막지하게 얹어 준 인쇄소 사장님의 넓은 아량 덕에 재고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구매 의향 있으시면 @bs_extinct로 연락주세요. 

 세상이 눈에 묻힌 그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한도윤, 허우석, 민주영, 하수창, 오인하

책 원본에는 중간중간 이미지와 함께 편집이 되어 있으나, 레이아웃 문제로 웹발행 버전에는 싣지 않았습니다.

빛나는 것들

영원히 멎지 않을 것만 같았던 눈이 그쳤다.


세상을 모두 덮을 듯하던 눈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아직 날이 온전히 풀리지 않았기에 눈은 진창인 채로 얼었다 녹기를 반복했다. 그마저도 녹아 흐르는 날이 조금 더 많아졌을 때, 한도윤은 그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자 물이 되어 흘렀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기에 한참을 그렇게 걸었다. 묻혀 있던 것들이 눈이 녹으며 드러나는 광경을 보았다. 드라마틱한 구원, 생명의 힘, 그런 건 없었다. 

쌓인 눈은 얼어붙은 땅과 함께 뒤섞여 녹았다. 조금씩 제 모습을 드러낸 땅 밑은 이미 대부분의 것들이 형체를 잃은 후였다. 남은 흔적들은 찌꺼기가 되어 저 밑에 퇴적된 모양이다. 무너지고 파묻혀 생명을 잃어버린 것의 잔해들이다. 

시리도록 희게 빛나는 눈 사이에서 별빛은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별을 대신해 빛나던 눈송이가 잿빛으로 물들어 질척이게 변하는 과정은 썩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한도윤은 생각했다.

눈이 녹으며 빛나는 모든 것이 사라졌다. 한데 섞였을 뿐이다. 이 진창 안에는 별의 잔해도 있겠지. 꺼져버린 별의 잔해. 한 때는 별을 동경했고, 한 때는 별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 소망은 정 반대의 방법으로 이루어진 모양이다. 재난 앞에 모두는 평등한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최소한, 제가 갈망했던 것들은 이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한 때는 삶의 의미였던 것들이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한도윤은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한도윤은 눈에 덮여 의미를 잃은 것들, 이제 의미가 사라진 것들을 하나씩 정리해 왔다. 이제는 닿을 수 없는 갈망들을 정리했고, 이제 되돌아볼 수 없는 과거를 정리했다. 제가 쌓아왔던 것들을 정리했다.

눈이 그칠 즈음 한도윤의 방은 제법 많은 공간이 비어 있었다. 외롭지는 않았다. 그마저도 이제 정리하기로 한 감정이다. 채울 일 없이 비울 일만 남았다고, 영원히 눈이 그치지 않을 것 같았으므로.


그리고 눈이 그쳤다. 비운 것들은 비운 채로 남았다. 

한도윤은 제가 남겨둔 것들을 하나씩 찾기 시작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