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인간

한없이 초록빛을 띠는 저 과거 속으로

나의 꿈 by 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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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배가 불렀다. 일주일째 배를 곯아 아사하기 직전 잠이 든 그는 배가 불렀다. 이상한 일이었다. 태어나자마자 길바닥에 버려진 그는 이 생소한 느낌이 정말 배부름이 맞는지 한동안 고민해야만 했다. 마지막 기억은 등에 달라붙은 뱃가죽을 만지작거리며 죽음을 기다리던 것이었다. 그래, 여긴 꿈 아니면 저승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결론 내린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 수 없는 이 세상은 끔찍하리만큼 현실과 닮아 있었다.

시끄러운 정적이 새벽 도시를 가득 채웠다. 어두운 하늘 사이 별들처럼 빛나는 인공 빛들. 그 빛을 바라보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포만감이 느껴졌다. 그는 이것을 새로운 종류의 감정으로 치부했다.

한동안 도시의 길거리를 걷던 그는 저 지평선 끝으로 작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완전한 태양 빛을 받은 그는 그제야 자신의 피부색을 인지했다. 터질 듯한 핏줄이 영롱한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오늘 이 일출을 평생 잊을 수 없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태양과 함께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세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초록 인간』

요즘 따라 이상한 일이 많이 발생했다. 한밤중 산소 중독으로 응급실이 미어터진 건, 산소 중독으로 인해 한국에서만 5만 명 이상이 사망한 건 이상한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였다.

산소 중독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간 그날, 인터넷에 한 글이 올라왔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다는 글이었다. 평소 같더라면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그대로 묻힐 글이었지만, 그날은 달랐다. 마침 같은 처지였던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 동의한 것이다. 어느 사람은 하루종일 바깥을 뛰어다녔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건 단지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프리카에서의 아사자가 줄었다. 고작 몇백 명 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사라졌다. 기적이었다. 굶어 죽던 아이들은 살이 쪘다. 배가 고파 움직이지 못했던 아이들은 마을 전체를 활보하고도 힘이 넘쳤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전문가들은 심각하게 논쟁했다. 이건 단순히 기뻐하기만 할 문제가 아니었다. 에너지가 갑자기 생겨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에너지를 빼앗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인지, 이 변화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인지 하는 것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산소 중독 대참사가 벌어진 그 다음 날. 우리의 피부가 초록색으로 변한 건 그 한밤중에서였다.

떠오르는 해가 그 사실을 알린 순간, 세상은 폭발했다.

[모든 인간의 피부가 초록색으로 변하는 괴현상이 전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인간에게 식물과 같은 엽록체가 발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럴듯한 수백 가지의 인류 멸종설이 마치 진짜인 듯 뉴스에 발표되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것은 인간 식물화설이었다. 인간이 광합성을 시작한다. 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인가!

저명한 연구소에서는 앞다투어 인체 실험을 진행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의 혈액에서 엽록체가 검출되었다는 소식이 여러 외신에서 보도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초록 인간이 됐습니다. 아무래도 '식물인간'이라는 단어를 재정의할 필요가 있겠군요!]

건물 밖이 온통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하루 종일 방 안에만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히키코모리가 드디어 창밖에 손을 내밀었다. 피부 속에 자리 잡은 기공은 깨끗한 물과 산소를 내뱉었고, 사람들은 그날따라 투명했던 하늘을 그저 한없이 바라보았다. 태양 빛을 받은 초록빛 피부는 에메랄드처럼 환하게 빛났다. 그 절경을 만끽한 대부분의 사람은 우리가 식물처럼 변했다는 것에 환호했다.

그야말로 대혁명이었다.

그 혁명은 비단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학계에서도 이 사실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인간의 광합성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었던 것이다.

요식업계가 완전히 무너진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인간의 광합성으로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줄고 산소가 대량 생산되며 지구온난화 문제가 일부 해결되고 있었다. 태양 빛으로 모자라 인공 빛까지 과도하게 맞은 인간들이 산소 중독으로 죽어 나간 것 때문에, 야근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해가 진 뒤 인간이 일하지 않자 화석 연료의 사용 또한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지구는 안정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 이제 나무 같은 건 있을수록 더 손해 아니야? 지구온난화도 해결됐고 광합성도 우리가 충분히 하고 있는데, 이 이상으로 산소 농도가 높아지는 건 좀 위험할 것 같은데.]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수긍하여 더 이상 식물을 소중히 여기지 않게 되었지만, 지식인들은 생각이 달랐다.

[식물들은 동물들에게 서식지를 제공하고, 무엇보다 식량의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식물이 없으면 생물들은 아예 자랄 수가 없어요.]

그들은 식물의 중요성을 몇 번이고 언급했지만, 그 말을 주의 깊게 듣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최소한의 식물만 정부가 관리하면 되는 거 아니야? 우리가 먹고 동물들이 먹을 정도로만 보관해 두면 되잖아. 나무를, 숲을, 자연을 밀면 우리가 확보할 수 있는 토지가 몇 배는 더 많아질 거야! 태양 빛도 훨씬 잘 들어올 거고!]

정부는 고민에 빠졌다. 이제 산과 나무는 더 이상 경쟁력이 없었다. 산소 과밀집으로 중독 증세가 나타나게 되어 산에는 아예 발길이 끊겼고, 산이 아니더라도 나무가 많은 지역에마저 가끔 산소 중독 환자가 발생했던 것이다. 식물이 많은 여러 국가는 이젠 산소로부터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 국가들은 결국 수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식물을 하나둘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식물 제거 국가는 체계적으로 식물을 모두 제거한 뒤 식물 생존 구역을 만들었다. 식물 생존 구역에는 밖에서는 보지 못하는 식물들이 즐비해 있었고, 그들과 함께 사는 여러 동물과 곤충이 뛰놀았다. 식물 생존 구역은 바깥과는 완전히 격리된 한 공간이었다. 어쩌면 사면이 바다로 덮인 한 무인도와도 같았다. 최소한의 생물 다양성을 위해 만들어진 그곳은 의외로 관광 명소로서 유명해졌다.

생각지도 못한 반향이었다. 식물 제거 국가는 관광객들 유치에 힘을 쏟았고, 큰 효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긍정적 효과는 대대적인 생물 제거 프로젝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국민들이 죽어 나가길래 피해도 감수하고 식물 제거 프로젝트를 진행했건만, 부작용도 거의 없을뿐더러 관광객까지 늘었다.

이를 모방한 프로젝트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자연 속에 살던 동물이 대부분 죽은 건 생각보다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인간은 고기 대신 섭취할 햇빛이 있었고, 식물 대신 광합성 할 엽록체도 있었다. 곤충도 마찬가지였다. 해충도 유충도 전부 죽으니 결국 돌아오는 건 없었다. 그 대신 하루에도 몇백 번씩 이산화탄소 마스크를 끼고 식물 생존 구역을 구경하는 손님이 생겼다. 우리들은 숲을 깎아 이용 가능한 공간을 넓혔고, 미관상으로도 도시적인 세계를 만들어냈다.

사소한 문제들은 존재했지만, 그 문제가 크게 대두되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한층 넓어진 세계에서, 한층 편한 자세로 이 세상의 문제에 유연하게 대처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한때 배고픔에 굶주려 살던 그는 오래간만에 그 시절의 꿈을 꾸었다. 산을 잘라 지은, 노숙자들을 위해 지은 주택에 들어서고 나서 그도 어느 정도 사람 같은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근처에 지어진 식물 생존 구역에서 손님들에게 동식물의 이름과 행동을 설명해 주는 가이드를 직업으로 삼은 그는 인간 식물화로 가장 큰 혜택를 본 사람 중 하나였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악몽을 꿔서 그런지 평소보다 에너지 소모가 심한 것 같다. 그는 침대 옆을 더듬거려 암막 커튼을 걷었다. 환한 태양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우자 그제야 잠에서 깬 기분이 들었다. 아침이 온다는 건 기분 좋지만은 아닌 일이지만, 매일 아침 태양빛이 찾아오는 건 감사할 일이었다. 그는 작게 미소짓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에 몸을 기댔다.

창문에 그의 실루엣이 그대로 비쳤다. 그는 몇 년 사이 변해버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노숙하던 그때의 얼굴이, 배고파 죽어가던 그때의 핼쑥함이 창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그는 당장이라도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졌다.

······이게 뭐지?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거지?

한동안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그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곤 절망했다. 이 모든 게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정말, 정말이지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색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오래 되어버린 살구빛 피부를 바라보며 그는 인류의 망가진 미래를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른 시간. 아직 잠에서도 깨지 못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직 막 해가 떠오르고 있을 때니까. 이 이변을 눈치채고 하루빨리 움직이는 사람이 몇몇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만큼 이 변화에 유리한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한때 거지로 산 적이 있는 그는 혹독한 환경에서 음식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식물 생존 구역 직원 전용 카드를 들곤 서둘러 식물 생존 구역으로 향했다. 부디 자신이 가장 먼저 일어난 직원이기를 간절하게 소망하며.

운이 좋게도 도착했을 때 식물 생존 구역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천천히 생존 구역에 발을 디뎠다. 이산화탄소 마스크 없이 이곳을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나무로 가득한 숲 사이로 산소 냄새가 풍겼다.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른 뒤 여유를 찾아 해가 떠오르는 생존 구역 밖을 쳐다봤다. 생명이라곤 찾을 수 없는 칙칙한 공간. 푸른 별이었던 지구는 어느 순간부터인지 갈색빛이 돌기 시작했다. 사막보다 더 사막 같은 이곳을 왜 아름답다고 생각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리는 그동안 최면에라도 걸렸던 걸까? 곧장 모두 타올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이곳은 망가져 있었다.

아직까지 잠에서 깨지 않은 사람들은 힘없는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게 될까. 뉴스조차 보지 않고 뛰쳐나온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지난밤 산소 중독으로 죽었다면 그것이 그에게는 더 행운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완벽하게 망가진 세상을 몇 번이고 되뇌며 숲속으로 발을 옮겼다. 더 이상, 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될 거라는 걸 알았기에.

그래, 마치 그날처럼, 그는 오늘 이 일출을 평생 잊을 수 없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태양과 함께 익숙한 멸망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그 절망을 지겹도록 겪었다. 그래서, 죽을 만큼 뛰었다. 한없이 초록빛을 띠는 저 과거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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