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허우석이 나오지 않는 허우석과 한도윤에 대한 이야기.
“어라, 이 악보들은 뭐야?”
빛바랜 종이가 그녀의 손에 들려있다. 상자 안에 물건을 차곡차곡 채워놓고 있던 한도윤이 뒤늦게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본다. 그 또한 물음표를 가만히 띄우고 있다가 뒤늦게 아, 하고 탄성을 내뱉는다.
“와, 엄청 음이 높네.”
악보 위로 그려진 멜로디를 흥얼거리던 그녀는 다음 장을 펼쳤다. 오랜 시간 쌓여있던 먼지가 일어났다. 빛바랜 악보들은 한두 장이 아니었다. 낡은 상자를 가득 채운 종이들이 전부 악보였다.
“밴드 할 때 썼던 곡이야?”
종이를 팔랑팔랑 넘기며 오인하가 그에게 물었다.
“응.”
대답은 그게 끝이었다. 흐음-, 하고 말을 늘리던 그녀는 세월의 흐름이 그대로 담긴 악보들을 내려뒀다. 빼곡히 채워가던 음이 도중에 끊기기도 하고, 혹은 전부 지워진 악보도 섞여 있었지만 대체로 많은 고심과 고민, 그리고 그의 시간이 담겨있다고 느껴지는 것들이 대체로였다. 어렴풋이 봤지만 경악스러울 정도로 높은 기교가 필요한 멜로디도 많았고.
“이거 부르던 사람이 걔지? 밴드 보컬로 같이 나왔던, …이름이 뭐더라?”
“허우석.”
한도윤은 그녀에게서 다시 몸을 돌려 마저 상자 안을 다시 채워 넣기 시작했다. 오인하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그는 생각한다. 짐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상자를 채우고, 또 채워 넣어도 끝이 없을까. 상자가 부족하진 않을까. 충분히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더 버려야 할까.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걔도 이 악보들을 봤어?”
궁금증이 끊이질 않는지, 도와준다고 온 사람이 손을 멈추고는 질문만 쏟아낸다. 흐르는 땀을 닦아내던 한도윤은 결국 한숨을 삼키며 들었던 책을 내려놓았다.
“당연하지.”
“이건 나도 부르기 힘들 것 같은데…. 뭐라 않던?”
“걘 할 수 있어.”
“와…, 뭐야 그 대답?”
그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녀의 말에 대꾸하곤 창가에 올려뒀던 물병을 열어 목을 축였다. 무심코 시선이 그녀가 쥐고 있던 악보를 향한다. 그래. 허우석은 부를 수 있다. 그럴 수 있다고 쓴 멜로디고, 허우석이 부르기 위해 쓴 악보였으니까. 모두 그랬다.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은 상자에 가득히 쌓인 악보들이 전부 허우석을 위한 악보들'이었다'. 미완성된 것도, 지워버린 것도, 결국 완성했지만, 미처 보여주지 못한 것들도 많았다. 그것은 한도윤의 미련과도 같았다.
일방적인 미련.
허우석과 한도윤. 두 사람은 평소에도 대화가 부족한 편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대화가 조금이라도 길게 이어질 법하면 머지않아 누군가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건 대체로 늘 누군가만 그랬고, 한도윤은 그런 패턴이 가끔은 질렸다. 사실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허우석을 제외한 모두는 한도윤이 하는 이야기에 그렇게까지 반박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야, 이걸… 나보고 지금 부르라고?
할 수 있잖아.
이 미친놈이……. 네가 부르는 거 아니라고 지금?
엄살 피우긴.
야, 황익선. 내가 지금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한도윤 지금 나한테 시비거냐?
하하하, 웃는 목소리가 기억 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 시간 속이 좋았다. 불평불만을 해도 결국 불러내는 허우석의 목소리가 좋았다. 그래서 한도윤은 멜로디를 채워가는 행위가 즐거웠다. 음악을 하고, 밴드를 하는 것에 대해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무대 위에 서서 유태희와 황익선, 김주용과 자신이 쌓은 멜로디를 따라 높게 올라가는 허우석의 목소리가 좋았다. 안된다고 하면서도 한도윤이 상상했던 그 소리를 내뱉는 허우석의 노래가 좋았다.
뮤즈? 그것과는 달랐다. 달랐지만… 즐거웠다.
불평을 늘어놓는 허우석의 목소리는 한도윤 자신도 몰랐던 승부욕을 피워오르게도 했다. 그가 아무말도 못할 정도로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허우석이 있음으로써 그의 음악은 더 성장하고, 단단해져 갔다. 결여가 채워진다. 누구도 채워주지 못한 결여가 허우석으로 인해…….
그랬는데. 한도윤은 이제 안다. 모든 것을 망친 것은 허우석이 아니라 한도윤 자신이라는 것을. 마스커레이드를 곯게 만들던 것은 다름아닌 멍청한 자신이라는 걸.
“…….”
이어지는 생각들에 고개를 저었다. 잡생각이 쉬이 끊이질 않는다. 한도윤은 빈 물통을 내려두고 다시 손을 움직였다.
“야, 한도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오인하는 상자를 그에게 밀었다. 고개를 내려 내용물을 보자 빛바랜 악보들이 새 상자에 다시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챙겨가야지.”
시선이 마주쳤다.
“왜? 설마 버릴 생각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상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소중한 거잖아. 새집에도 잘 챙겨가야지.”
한도윤은 그녀의 말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상자 안을 내려다봤다. 오래된 잉크 자국을 눈으로 훑는다. 주저하는 그의 모습에 오인하는 답답하다는 듯 상자를 닫아 테이프를 붙였다.
“멍청하게 굴지 말고, 그렇게 신경 쓰이면 이사 끝내고 연락해보던가. 너, 그 뒤로도 아직 안 했지?”
정확하겐 답장을 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후회하기 전에 연락해. 대화해야 뭐든 풀릴 거 아니야.”
대화.
한도윤은 아직 읽지 않은 톡의 숫자들을 떠올렸다.
“……알았어.”
쥐꼬리만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와서야 오인하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빨리 짐 정리 끝내자. 아니, 그냥 돈 좀 써서 사람 부르지. 오늘 안에 끝나긴 해? 그렇게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한도윤은 품에 안긴 상자를 더 끌어안았다. 생각보다 무겁다. 그동안 쌓아온 시간의 무게였다. 쉽게 버릴 수 없는.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른 뒤, 한도윤은 아주 오랫동안 휴대폰을 바라보다 고민 끝에 지워지지 않은 알림을 확인했고, 숫자 1이 사라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상대방의 말풍선이 하나 더 쌓인다. 드디어 읽었네. 뒈졌냐? 한도윤은 느리게 타자를 눌렀다. 왜. 읽는 건 바로였는데 답장은 오래걸렸다. 왜????? 한도윤은 텍스트상에서 허우석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들의 대화는 그렇게 다시 시작했다. 처음부터 다시 쌓듯,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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