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과거

검은방4 이후의 이야기 / 회색도시의 '그 남자'

류태현은 커피 향을 맡는다. 은은한 원두 향이 천천히 퍼지고, 카페 내부에 흐르는 클래식은 거슬리지도 않고 부드럽다. 커피잔을 쥔 손을 내려다본다. 계절감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장갑의 움직임은 꽤 자연스럽다. 어색하고 삐그덕거리던 것은 어느 거짓보다 더 진실하도록 보일 정도로 류태현의 시간은 '그날'로부터 끊임없이 멈춤 없이 계속 흘러갔음을 이야기한다.

유리창 너머 거리를 바라본다.

지나가는 사람을 저마다 바삐 걸음을 움직이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았지만, 반 이상의 사람들이 조그마한 기계에 빨려 들어갈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 또한 세월의 흐름이다. 스마트폰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기계 대신 여전히 반으로 접히고, 키패드가 있는 구형이 된 휴대폰을 내려다본다. 멈춤 없이 흘러간 시간 속에서도 아무 이유 없이 시큰거리는 손목의 통증이 느껴질 때면 류태현은 생각한다. 과거에 멈춰있는 것은 자신 뿐이다.

"어머, 태현씨."

"아, 사장님."

적막을 깬 건 여성의 목소리였다.

"오늘은 혼자네, 전에 그... 탐정 사무소라고 했던가? 다들 어디 가시고?"

"쉬는 날이에요."

"세상에, 부러워라. 월요일에 쉰다니. 정말 황금 같은 휴일이겠네. 아, 잠시만."

재잘재잘 웃으며 떠들던 목소리가 곁을 떠나 바쁘게 카운터를 향한다. 다시 돌아오는 그녀의 한 손엔 테이크아웃한 커피가, 다른 한 손엔 쿠키가 쥐어져 있었다. 그 쿠키는 류태현이 앉아있던 테이블 위로 내려왔다.

"어."

"선물. 행복한 월요일이 돼요. 태현씨."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그렇게 테이블엔 반쯤 식어가는 커피와 반가운 사람이 선물해주고 간 쿠키가 남았다. 햇볕이 느슨하게 기울고, 그림자가 길어진다. 느릿, 느릿. 가장 태양이 뜨거울 시간을 지나면 거리는 조금 더 한산해진다. 그는 아직 다 비워내지 못한 잔을 손으로 문질렀다.

- 설마, 아직도 그 자식을 떠올리고 있는 거야?

투덜거리는 안승범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지나간다. 이따금 손목의 통증을 느낄 때마다 지긋이 바라보던 시선. 평소엔 그렇게 눈치 없다고 타박을 들으면서도 이런 부분에선 누구보다 예민히 느껴 제게 꼭 한마디 해오는 것은 안승범다웠다.

- 그럴 리가요.

류태현은 늘 아무렇지 않게 부정을 내뱉었지만 미심쩍은 시선이 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럴 법도 했다. 뭐, 넘어가 줄게. 하지만 이제 슬슬 과거는 정리하는 게 안 낫겠어? 그 말을 듣고 류태현은 지워내지 못한 의문을 퐁 떠올린다.

하지만, 과거는 꼭 정리해야 하는 건가요?

이 환상통은 속죄였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흘러도 해결 할 수 없고, 정리 할 수도 없는 그의 유일한 숨구멍. 이 통증만이 끊임없이 과거를 되새기게 하고 떠올리게 한다. 환상통과 같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 왜, 나를 만들었나!

- 내가, 이겼어!

손목을 붙잡고 웃음 짓던 얼굴이 쉬이 잊히지 않는다. 무수히 스쳐 갔던 죄인들 중 시간이 흘러도 뇌리 속에 가장 깊이 자리 잡아버린 그, 허강민.

'당신은 영원히 늙지 않겠죠.'

류태현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과 눈이 마주친다. 과거에 머물러있지만 세월을 따라 흘러버린 낯이 선명하다. 어리숙하던 교통순경은 오래 전에 잃어서 중년의 나이에 가까워져 가는 남자가 유리창에 보인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미궁 속에 서 있는 것 같은데도.

커피는 이제 차갑게 식었다. 류태현은 잔을 들어 온기를 잃은 커피를 목뒤로 넘긴다. 아무것도, 아무런 계기도 없는 일상에서도 허강민은 이렇게 불쑥, 자신의 삶에 끼어들었다. 웃는다. 덕분에 저는 매일 살아있는 삶을 느낍니다. 이것이 다소 모순 같더라도.

카페 입구에 달린 종소리가 맑게 울린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그곳엔 낯익은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시커멓게 어둠에 집어삼켜진 남자. 희미하게 옅어진 상처에 시선을 닿았다가 눈을 마주친다.

"어. 안녕하세요."

류태현은 미소를 짓는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깊은 눈동자 뒤로 숨겨진 비일상을 그는 기민하게 느낀다. 드러내지 않으려 들지만 류태현에게는 너무나도 선명하고, 짙은 피 냄새. 시선을 마주칠 무렵이면 언젠가 한 번쯤 목도했던 절망을 품은 그녀의 눈동자가 생각난다. 당신은 또 어떤 나락을 걷고 있는가. 당신의 삶은, 어느 누가 망가트렸는가.

"커피 드시려고요?"

"...볼일 보시지?"

"이것도 인연인데 제가 사드릴게요. 마침 저도 오늘 다른 분께 선물을 받았거든요."

일상적인 대화 뒤로 꺼내지 않는 서로의 내면을 가라앉힌다. 남자는 류태현을 위아래로 훑는다. 그 시선은 매우 노골적이고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고, 류태현은 그것에 거리낌 없었다. 

하하, 과거에 멈춘 두 남자의 사이로 다시 짙어진 커피향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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