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유료

환상통

전공필수: 밀실 탈출 / #뭐긴뭐야재수강이지

'검은방' 포스타입 온리전 참여작입니다.

'검은방4'의 트루엔딩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 부탁드립니다.

바닥을 덮은 철판이 추락하고, 세상이 진동으로 흔들렸다. 바쁘게 오가는 목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길 반복한다. 그 속에서도 류태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바로 찾았다.

“류태현…!”

허강민이 그의 이름을 외친다. 또다시 그가 행하려고자 하는 위선에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자신을 붙잡고 있는 이 손이 끔찍하다. 가증스러운 위선자.

“이거, 놔!”

애초에 류태현은 그를 오래 붙잡고 버틸 수 없다. 여기까지 오기의 시간과 과정이 류태현의 체력을 잔뜩 갉아먹은 후였다. 그러나 그는 허강민을 붙잡은 손에 힘을 뺄 수도,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이미 살릴 수 있었던 사람에게서 눈을 돌린 과거의 죄가 여기 있다. 그 죄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류태현의 숨통을 조였다.

“날 용서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당신이 죽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류태현은 소리를 삼킨다. 허강민이라는 망가진 괴물이 만들어지게 된 과정에 류태현이라는 이름을 결코 지워낼 순 없을 테니. 그는 미끄러질 것 같은 손을 고쳐 잡았다. 자기만족이라고 해도 좋았다. 허강민이 원치 않는다고 해도 류태현은 반드시 그를 살릴 것이다.

“류태현, 너는…….”

허강민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의 오만과 이타적인 면모가 지긋지긋했다. 좋은 사람인 척, 순고한 사람인 척, 모순덩어리. 류태현이란 인간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이젠 궁금하지도 않았다. 나이프가 살을 꿰뚫는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힘으로 허강민은 몇 번이고 이 가증스러운 위선자의 손을 향해 나이프를 내려쳤다. 아, 피가 튄다. 비명과 함께 안경을 더럽힌 이물질이 시야를 가린다.

“내가… 이겼어!”

허강민은 웃어 보인다. 승자는 자신이었다. 류태현이 원하는 결말과 미래 따윈 절대 안겨주지 않으리라. 하, 하하하! 웃음소리가 허공에 그렇게 흩어지고 그의 몸은 아래로 추락한다. 위선자의 손을 거머쥔 채 그는 잔해와 함께 바닥으로, 더 깊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

진동이 끝나자, 무너진 건물은 고요했다. 생존자들은 안전한 곳으로 급히 자리를 옮겼고, 이곳엔 ‘그들’ 뿐이었다.

“이쪽으로….”

추악하게 생긴 노인들이 뒤를 따르고, 그 앞을 다수의 사람이 움직였다. 성별도, 연령대도 통일성 없는 그들은 엉망이 된 길목을 정리하고, 건물 잔해를 옆으로 밀며 무언가를 계속 찾는 것처럼 보였다.

“빨리 찾아야 해.”

“더 늦어지기 전에.”

“우리가 그것을….”

노인들이 끊임없이 재촉했고, 사람들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제대로 된 도구 없이 맨손으로 잔해물을 치우면서 망가지는 손은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빨리, 그저 빨리 찾아야 한다는 조급함이 가끔 엿보였다.

“아…!”

어떤 이가 탄성을 내뱉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로 향했다.

“찾았습니다.”

각자 치우던 잔해를 내버려 두고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 주변의 잔해를 걷어내고자 이곳저곳에서 손을 뻗었다. 철근과 구조물이 옆으로 밀리고 그 아래에 깔린 것이 하늘 아래 드러났다.

“오, 오오….”

그건 낯익은 손이었다. ‘낯익은 손’을 쥐고 있는 손이라고 표현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노인들이 사람들을 밀어내고 더 가까이 다가왔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들이 지나갈 길을 만들어주었다.

“이것이야.”

“그토록 원하고, 원했던 원념 그 자체.”

“이토록 진실 된 것이 얼마 만인가.”

그들의 입에서 추악한 냄새가 난다. 잔해물 사이로 튀어나온 팔이 놓지 않고 쥐고 있는 것은 엉망으로 피투성이가 된 사내의 손이었다. 우리는 이것이 낯익을 수밖에 없다. 사람을 끝까지 살리고자 했던 정의로운 이의 손과 정의로운 이를 나락으로 끌고 내려가려고 했던 이의 집념 어린 손이 그것을 끝까지 붙잡고 있다.

“어서, 어서! 빨리 내게 가져다 다오!”

한 노인이 손을 뻗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먼저 행동으로 옮겼다. 류태현의 손을 쥐고 있는 이의 팔을 잡았다. 강제로 손가락을 벌려 빼내려고 힘을 줬을 때 그는 화들짝 놀라고 만다.

“……!”

“왜 그러느냐.”

“살아, …살아있습니다.”

설계자가 살아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더미 속에 묻힌 팔을 향한다. 한 노인이 입꼬리를 올린 채 턱을 쓸었다.

“흥미롭구나.”

말은 그걸로 충분했다. 사람들은 알아서 남은 잔해들을 밀어냈다. 아래로 눌리거나 쓰러지지 않도록, 치워낸 잔해 아래엔 피투성이의 허강민이 하늘 아래 드러났다.

“숨을 쉽니다.”

“살아있습니다.”

여럿의 입이 전한다. 아주 미약하지만 들썩거리는 가슴을, 손을 쥔 채 끝까지 힘을 빼지 않으려는 허강민의 손끝에 대해 말을 전한다.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살려 보자꾸나.”

노인은 손을 뻗어 허강민의 손에서 강제로 류태현을 뺏었다. 피와 먼지로 더럽혀진 것은 사람의 손이라고 하기엔 모형보다 더 엉망이었다. 본래의 색을 찾을 수도,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은 그 손은 허강민이 빠듯하게 쥐었던 손자국만이 멍처럼 그대로 남아 뻣뻣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이보다 더 원념이 강한 것을 근래에 본 적이 있던가.”

“삶과 절망이 모두 담긴 것이야.”

“삶이 살리고자 절망을 붙잡았고, 동시에 절망을 살리지 못했던 삶의 손.”

“염원과 원념이 잔뜩 담긴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훌륭한 부적이 될 거야.”

“재미있는 구경거리였어.”

“원했던 결말은 아니지만.”

허강민을 살리고자 뻗었던 손, 동시에 허강민을 살리지 못한 손.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류태현의 원념이 담긴 손을, 노인들은 추악하게 평가하고, 떠들었다. 한 사내가 깨끗한 천을 그들에게 내밀었다. 류태현의 손 ‘이었던’ 것은 조심스레 그 위로 얹어졌다.

“설계자는 어떡할까요.”

누군가 어른들에게 묻는다. 노인들의 시선이 그에게 닿는다. 시체처럼 시퍼렇게 질린 그를 향해 한 노인이 손짓한다.

“거둬가자꾸나.”

“네. 알겠습니다.”

정돈되었던 잔해를 다시 쓰러트린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그들의 걸음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처음의 모습을 한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경찰과 구급대원들은 오랜 시간 수색을 하고 잔해를 거둬냈지만 결국 그곳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윗선에서 이 정도면 됐다는 명이 내려오자 모두 철수하게 되고,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가 된다.

“허강민의 시체는……찾지 못했다네.”

“네?”

“……나도 이해할 수 없다만, 이유를 알 수 없다는군.”

하무열은 깨어난 이에게 그가 잠든 시간 동안 세상에 드러난 이야기를 서서히 꺼내주었다. 시퍼렇게 질린 류태현의 낯을 이해했다.

“그럴 수가. …설마.”

“아니, 그건 너무 비약일세.”

그러나 그의 상상에 힘을 실어줄 생각은 없었다.

“허강민은 죽었어.”

“그래도, 시신이….”

“워낙 건물이 엉망으로 무너졌지 않나. 찾을 수 없었을 뿐이지.”

시신이 없던 것이 아니라고 하무열 자신도 납득 할 수 없는 주장을 꺼내고야 만다. 그 역시도 가슴 한구석 피어오르는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류태현에겐 이제 휴식이 필요했다. 허강민도, 백선교도 잠시 뒤로하고 쉬어야 할 때였다.

“일단 지금은 모두 잊고, 쉬게나. 잠들어도 좋고…. 그래, 더 자게나.”

하무열은 억지로 그를 눕혔다. 하지만, 하고 다시 입을 여는 류태현을 향해 하무열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 모습에 류태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은 그렇게 흐른다. 류태현의 손이 있던 자리엔 의족이 자리하고, 환상통이 이따금 그를 괴롭혔다. 그는 그것을 속죄의 하나라고 여기며 고통을 감내하고, 받아들인다. 하무열은 그 모습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하무열은 처음, 류태현을 만났을 때의 청년을 떠올렸다. 망가진 것은 허강민 뿐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침묵하기로 했다.

헤어질 것 같은 사람들이 다시 모이고, 한 공간을 이룰 때 그곳은 탐정 사무소라는 간판이 세워진다. 류태현은 그 시끌벅적한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일상을 찾아간다. 그 일상에서도 그의 밤은 언제나 악몽이 뒤를 따랐다. 미궁 속에서 눈을 뜨고, 허강민이 찾아와 자신의 죄를 묻는다. 그 뒤를 이어 자신이 흘려보낸 슬픈 인연들의 목소리를 듣다 깨어난다. 언제라도 백선교가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 같았고, 자고 일어나면 낯선 곳에서 눈을 뜰 것 같은 기시감을 지니며 지내기를 한 두 해. 류태현은 서서히 깨닫는다. 정말 모든 것은 끝났다는 걸.

아무런 접촉도,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했다. 류태현에겐 이제 ‘보통’의 기준이 남들의 ‘보통’과 달라졌다. 그 사실을 깨닫기도 오래 걸렸다. 하무열은 그에게 이야기했다.

“조급할 필요는 없네.”

압니다.

“자네는 지금도 잘 하고 있어.”

그러려고 노력하는 중이죠.

쓰게 웃는 하무열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류태현은 장갑을 쓴 손끝을 문질렀다. 사람의 손이 아닌 질감이 장갑 위로도 느껴진다. 류태현은 눈을 감았다. 시간은 계속 무책임하게 흘렀다. 그는 여전히 좋은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이웃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타인을 돕는다. 사라지지 않는 환상통은 끊임없이 허강민을 떠올리게 한다.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그는 나이를 먹어가는 자신과 과거에 멈춰있을 허강민을 생각한다.

“나쁘지만은 않아요.”

류태현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손목은 여전히 통증이 있나요?”

상담사가 그에게 물었다.

“…음, 아니요. 괜찮습니다. 전보단 덜해졌어요.”

그는 손목 위를 덮으며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좋아요, 나아지고 있다는 좋은 신호에요. 과거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는 거죠.”

상담사는 자신이 다 기쁘다는 듯한 얼굴로 모니터에 글자를 채워갔다. 류태현은 속으로 그에게 심심한 사과를 건넸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상담사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자신에게 변명했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흘러도 류태현은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럼 다음 예약 때 뵐게요.”

“네, 다음에 봬요.”

다음. 류태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원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제 막 정오가 지난 시간, 햇볕은 따사로웠고 거리는 한적하고 평화롭다. 까르르 웃으며 뛰어가는 아이들이 그를 스쳐 지나간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 뒤를 쫓다가 아무 이유 없이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평화로웠다.

사무실로 돌아가려던 걸음이 주저한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멀지 않은 벤치에 엉덩이를 붙어 앉았다. 옆에 심어진 나무가 시원하게 그늘을 내려주었다. 따스하지만 눈부시던 햇살이 가려지고, 가끔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다고 생각하며 그는 거리를 바라본다. 다들 각자의 이유로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더라도 변하지 않는다. 의미 없이 생각을 흘려보낼 무렵 류태현의 시선이 멈춘다.

“…어?”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던 입꼬리가 고장이라도 난 듯 삐거덕거렸다.

설마.

류태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갑자기 목뒤로 소름이 쭉 올라오고, 서늘해진다.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설마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그의 다리는 움직이고 있었다. 뛴다, 뛰고, 뛴다.

‘설마….’

설마, 말도 안 돼. 하지만….

많지 않은 인파 속에서 그 뒷모습이 가까워질 듯 멀어질 듯 눈앞에서 계속 아른거린다. 다른 것들은 전부 뒤로하고 그의 시선엔 오직 ‘그’를 향해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잠시….”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인파 사이에 섞여 들어간다. 멀리서 바라보던 뒷모습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드디어 시야에 온전히 들어올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되자 류태현은 팔을 뻗어 그를 잡는다.

허강민…!

그가 뒤를 돌아본다.

“예?”

아.

“저, 무슨…”

낯선 얼굴, 낯선 목소리. 낯익었던 것은 뒷모습뿐이었는지, 당황스러워하는 상대방의 낯을 살필 틈도 없이 류태현은 그를 위아래로 한 번 더 훑어보고 나서야 착각했음을 깨닫는다.

“아, 죄, 죄송합니다. 아는 사람인 줄 알고, 착각을. …죄송합니다.”

남자는 불쾌하단 얼굴을 하며 류태현의 손을 뿌리쳤다. 몇 번이고 사과의 말을 전하며 상체를 꾸벅 숙여 보인 류태현은 금방 다시 혼자가 된다. 멍하니 길에 서서 류태현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한숨이 절로 나왔다. 타인의 말이 모두 맞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류태현뿐이었다.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살고, 시달린다. 하지만 그것이 뭐가 문제인가요.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를 청산하지도 못하고 죗값을 치르지도 못했어요.

“자네는 이미 충분히 죗값을 치렀어.”

그건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요?

답을 줄 이는 이미 없는데.

류태현은 따듯한 날씨에도 오한이 드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자. 아무것도 아닌 척,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자. 어쩐지 아까보다 훨씬 무거워진 몸에 겨우 발걸음을 떼어낼 무렵, 그의 시야에 다시 그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또, 닮은 사람인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상대가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모든 것이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느리게 움직였다.

아.

류태현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허강민….”

그의 이름을 부른다. 단순히 닮은 사람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류태현의 기억 속에서 나이를 먹지도 않고 20대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의 모습 위, 새롭게 덧칠한다. 허강민이 그때 그대로 살아서 나이를 먹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상상하곤 했던 그 얼굴이 현실에서 있었다. 망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강민이다. 허강민이었다. 류태현은 끊임없이 생각을 해야 했다. 착각인가, 환각인가, 혹은 그저 닮은 사람인가. 그를 생각하고 생각하다 못해 이제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그를 찾게 된 건가에 대해 사리 분별을 해야만 했다. 발걸음을 돌려 나왔던 병원을 다시 들어가야 하나에 대해서까지 고민할 때 손목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아니.’

지끈거리고, 욱신거리는 통증이 그를 부른다. 이것은 착각도, 현실도 아니라고 일깨운다. 류태현은 손을 내려다보고, 다시 고개를 든다.

저 멀리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허강민은, 그를 향해 입꼬리를 올려 웃음을 짓는다.

오랜만이군.

그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류태현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손목의 통증은 언제 있었다는 듯 서서히 사라진다. 미련처럼 매달려있던 것들이 하나씩 떨어진다.

“어, 태현씨!”

귀에 익은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지만,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낼 수 없었다. 허강민은 류태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서서히 몸을 돌린다. 뒷모습은 다시 인파 속에 섞여 사라지고, 쫓아갈 생각도 하지 못한 류태현은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 있다.

“태현씨?”

가까이 다가온 민지은이 대꾸가 없는 류태현을 조심스레 살핀다.

“반가운 사람이라도 봤어요?”

딱 그런 얼굴인데. 하는 목소리에 류태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무심코 대답해버린 것은 왤까. 입가를 매만지던 류태현은 평소처럼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에도 머릿속엔 오직 한 문장이 떠오른다.

허강민이 돌아왔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이 움직인다. 허강민은 스피커 너머로 들리는 혼란의 목소리들을 흘려들으며 고개를 들었다. 수십 개의 모니터가 벽 한 면을 빼곡히 채운다. 허공을 향해 분노하는 사람도, 겁에 질린 사람도, 혹은 미동이 없는 사람도, 모두 시선에 담은 허강민은 마이크를 누른다.

- 너희들은 죄를 지었다.

죽음으로 사죄하라.

그런 그의 시선이 문득 한 화면에 멈춘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시야에도 또렷하게 들어오는 그를, 일부러 다른 연결을 끊으며 그곳에 집중한다.

- 웃고 있군, 류태현.

마치 카메라 너머의 허강민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화면 속의 류태현은 숨겨놓은 카메라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닿을 수 없는 시선이 맞닿는다. 과연, 이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지옥 같은 미궁에서? 허강민은 웃는다. 죄인들을 몰아놓고 게임은 그렇게 또다시 시작된다. 이미 저물어버린 희망이라는 변수를 밀어 넣고 설계자의 판 위로. 배우는 다시 모였다.

- 아래엔 짧은 후기만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