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녹으면
전력도시 2회 / 검은방 / 키워드 : 겨울 #전력도시_120분 #전력도시_힘껏_뛰어보자
겨울은 춥다. 땅이 얼고, 물이 얼고, 바다가 언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처럼 서늘한 냉기가 심장을 죄여온다. 아, 너무 추웠다. 손끝이 하얗게 일고, 내뱉는 숨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퍼렇게 질린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추워….”
귓가에 닿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그것이 삶의 소리였다. 장혜진은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손끝, 발끝의 감각은 서서히 사라진다. 이것이 죽음의 과정일지도 몰라.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고통 없는 죽음 따위 없다. 죽음은 그렇게 소리 없이 천천히, 느리게 그녀를 죄여왔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눈을 감았다. 다가오는 죽음을 벗어날 힘은 그녀에겐 없었다. 이런 마지막을 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후회란 늦었다. 눈을 감고, 어둠을 맞이해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그저 지독하게도 씁쓸했다.
“혜진씨!”
그때, 그가 그녀의 이름 석 자를 불렀다.
장혜진이 눈을 번쩍 뜨고, 숨을 급하게 흡 들이마신다. 폐 가득 채워지는 산소가 급하게 맥박을 뛰게 했다. 떨어져 가던 의식이 올라오고, 느려지던 심장이 쿵쾅거린다. 혈액이 돌고, 얼었던 손끝이 따갑다. 생명의 신호, 생명의 반응. 장혜진은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세요, 혜진씨?”
그곳엔 그가 있었다. 흠뻑 젖은 모습으로, 자기도 추위에 덜덜 떨고 있으면서 누굴 걱정하는지 불안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웃는 한 멍청한 남자가. 심장이 이미 한번 쿵 떨어졌다가 다시 붙은 듯한 기분이 들어, 장혜진은 떨리는 숨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당신…….”
장혜진은 그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유일한 이레귤러는 그녀였다. 모든 것을 알고 미궁에 들어온 사람을, 그는 바보같이 자신의 손으로 구해준 것이었다. 아, 장혜진의 겨울은 그 순간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냉기가 누그러진다. 매서운 바람이 서서히 잦아들고, 얼어붙었던 땅이 부드러워진다.
“다행이에요, 무사하셔서…….”
그의 목소리가 세상을 무너트린다. 내뱉는 숨이 이제는 하얗게 얼지 않고, 시리도록 춥지도 않다. 따끔따끔 얼었던 피부가 얼면서 살아있음을 그녀에게 계속 상기시킨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의 서준용을 그녀는 가만히 바라봤다.
아아, 들린다. 그의 숨이 꺼져가는 소리가.
그의 생명이 끝에 도달하는 소리가.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려온다.
“바보 같아.”
장혜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대꾸한다. 말 그대로 바보같이 웃는 멍청이를 두고 걸음을 옮긴다. 언제나 새하얀 눈밭을 밟던 발은 이제 눈이 녹아 진흙탕이 된 땅을 밟았다. 마르지 않은 땅은 질척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낡은 엘리베이터를 강제로 열고, 그 문을 다시 닫으며 장혜진은 다시금 욱신거리는 심장에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귓가가 울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고마워요.”
“네?”
그녀는 그래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양심 일부분을 그에게 내어주었다. 서준용이 미소를 짓는다. 별것도 아닌데요. 라며 대답하는 얼굴에 그녀는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애써 감췄다. 불이 꺼진다. 자신을 살려주었던 이를 직접 죽음으로 몰아넣는 순간은 짧고 빠르다.
‘미안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에게, 그녀는 사과를 건넨다. 불이 켜지고, 엘리베이터가 작동을 멈춘다. 동요의 비명 속에서 퍼렇게 질린 장혜진의 얼굴은 아무도 의문을 건네지 않는다. 미궁을 헤매고, 또 헤매는 순간 속에서도 끊임없이 겨울은 녹아갔다. 얼음이 물이 되고, 젖은 땅이 마르기 시작한다.
색이 없던 세상에 푸른 싹이 돋았다.
장혜진은 그것을 희망이라고 불렀다.
희망은 다른 이름으로 삶이 되었다.
“멍청한 사람….”
유일하게 남은 그의 흔적을 그녀는 손안에 쥐고, 한참을 내려다봤다. 보잘것없는 안경이었다. 낡고, 저렴해서 안경알도 깨끗하지 않았다. 얼마나 관리를 하지 못했는지 안경알에 자잘한 스크레치도 많았다. 다리는 왜 이렇게 휘었는지 잠깐 써보자 맞지 않는 도수에 눈이 핑 돌고, 안경이 너무 벌어져서 제대로 걸쳐지지도 않았다. 장혜진은 헛웃음을 지으며 안경을 벗었다.
“하하…….”
바보 같아. 바보는 자신이었다. 마음대로 자신의 겨울을 무너트리고, 제게 겨울을 뺏어간 남자가 애석하다. 하지만 유일하게 남은 그의 것을 그녀는 버릴 줄 몰랐다.
눈이 녹아 봄이 된다.
그녀에게 봄을 알게 해준 그 남자의 것을, 그녀는 버리는 방법 따위 모른다.
봄의 흔적이었다.
“책임져야죠, 내게 이런 걸 깨닫게 했으면….”
아무도 쓰지 못할 안경을 조율하고, 닦아 케이스 안에 넣곤 뚜껑을 닫았다. 그녀의 세상은 이제 겨울이 없다. 따듯한 바람이 불고, 새싹은 자라 가지를 뻗고, 풀잎이 돋아 꽃을 피웠다. 아리는 추위는 없고, 다정한 온기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이젠… 내가 할게요.”
당신에게 받은 이것은 또 다른 이름으로 구원이라 그녀는 부르리라.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그것은 그녀의 삶과 교리에서 없던 문장이었으나 선명하게 새겨진 것은 그녀의 뇌리에 박힌다. 봄을 따라, 그녀는 자신보다 더한 겨울 속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 위로 과거의 자신이 비친다.
당신만큼 해낼 자신은 없지만, 나 역시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살아남을 거에요. 그리고 언젠가 먼 미래에 당신을 만나서 나도 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해줄게요. 그리고 미안하다고 다시 당신에게……. 장혜진은 안경을 끌어안으며 다짐했다. 이 봄을 지킬 수 있도록, 당신이 내게 찾아준 이 봄을 지킬 수 있도록.
아, 눈이 녹으면 봄이 오는구나. 봄이 오는 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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