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설계

전력도시 1회 / 키워드 : 무대 / 검은방


허강민은 도면을 펼친다. 책상을 가득 채우고도 부족해 조각조각 잘린 페이지를 벽에 붙였다. 각 층마나 나누어진 구역과 모든 방의 구조를 빠르게 눈으로 훑고, 손가락 끝으로 그려간다. 이어지는 벽을 따라 선을 긋고 어긋난 지점을 붉게 칠했다. 휘갈기는 글씨가 공백을 채운다. 시계조차 없는 공간은 끊임없이 그가 내는 소음들로 가득 찼다. 유일한 소음이었다.

“…젠장.”

손이 멈췄다. 한 지점을 그는 가만히 바라봤다. 고쳐도 고쳐지지 않는 오류가 그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종이를 꺼내 그 위로 덮고, 처음부터 다시 그려가기 시작한다. 해결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뒤엎고 처음부터. 오래 걸리더라도 결국 오류 없는 완벽을 위해 허강민은 제로(0)로 돌아간다.

이래서 누군가 만들다 만 미완성작을 손대는 것이 싫다. 갖은 오류와 불합리한 것들도 뒤덮인 그림을 모두 긁어 벗기고 그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야 했다. 인간이기 때문에 완벽할 수 없다 하여도 타인의 만들어낸 불안정함을 손보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다. 허강민은 완벽하길 바랬다. 적어도 자신의 손에서 짜이는 판은 어긋남 없이 완벽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미 변수로 둔 ‘그’를 제어 할 수 없었다.

류태현.

떠오르는 감정을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허강민은 손을 멈추고 비어버린 공백을 바라봤다.

“뭐가 잘 안되나 봐요?”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여성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온다. 허강민은 잠시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 공백 위로 겹친다. 빼곡하게 적힌 글자와 기호들을 두걸음 뒤에서 본 여성은 책상을 가득 채운 도면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 사람…. 잘도 협조를 해주겠네요.”

허강민이 시선을 힐긋 던졌다.

“그렇게 되도록 짜인 판이니까.”

그녀가 읽고 있는 서류를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번 판에서 만큼은 결코 관조자의 위치에 있을 수 없다. 같잖게 부리던 여유도 없다. 그 추락을 어른들께서 보고 싶어 하시니 그리하여 배우까지 직접 데려오지 않았나. 과거에서 도망치고, 현재로부터 도피하고 있는 남자를 친절히 찾아 모신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백선교에겐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었으니 무대는 차질 없이 준비된다.

“…무섭네요.”

“새삼?”

“…….”

장혜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백선교의 무서움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이렇게 그 실상을 눈으로 확인할 때면 피부에 와닿는 공기가 다르다. 더러운 진흝탕에 발을 딛고 있다는 걸 끊임없이 깨닫게 되는 그런, 추악한 것을. 우스운 이야기다. 그녀는 이미 진흝탕에 발을 딛다 못해 온몸이 더럽혀진 상태인데도. 더럽고, 냄새나는, 그녀 역시 죄인이다.

“허강민씨.”

“… ….”

“대답은 좀 해주죠?”

“왜.”

“이쪽에 관련 된 거 후회한 적 없어요?”

펜을 멈춘 허강민은 그제야 그녀를 돌아본다.

“넌 후회하나?”

“제가요?”

“네가 그래 보이는데.”

장혜진은 그럴 리가 있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제 삶은 쭉 백선교였는 걸요. 후회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어요.”

그래. 그럴 수 없다. 벗어날 줄 모르고, 다른 삶도 모른다. 어른들이 하라면 하라는 대로 몸을 굽히고 고개를 숙여 손바닥을 내보였던 삶. 잠깐의 빛을 보다 말았지만, 그 빛마저 꺼트려 버렸으니 후회라는 감정조차 깨달을 틈도 없다.

“이번 무대의 다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허강민은 한걸음 떨어진 채 미궁을 바라봤다.

“살아남는다면.”

공백은 어느새 새로운 판으로 빼곡하게 채워지고 허강민의 손이 닿은 새로운 미궁이 쭉 이어진다. 사소한 것 없이 어긋나지 않도록 짜인 길들을 보며 장혜진은 조금 질린 기분이 든다. 이 사람도 제정신은 아니다.

“그래요, 잘 해봐요. …어르신들께서 얼마나 더 기회를 주실 지는 모르니.”

무대.

그래. 모든 것은 무대다. 어떤 사람들의 사연과 과거와 감정이 얽혀있든, 저 높은 어르신들의 유희 거리를 위해 세워지는 무대. 그 내막도, 진실도 그들에겐 상관 없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던 그도 죽음으로 내몰렸지. 장혜진의 삶에 후회를 한 방울 떨어트려 버렸던 그 죽음.

그녀는 한 걸음 뒤에서 미궁을 바라보는 허강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초라하고, 볼품없는 그 뒷모습이 어쩌면 지쳐 보인다는 건 그녀의 헛짚음일까. 이번에도 이 무대가 끝나지 않는다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일어나지 않을 미래를 상상하지 말자. 잘 되고, 잘 끝나길. 그녀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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