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존재

주정재, 누구도 아닌 남자 / 정재누아

주정재,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엔딩 요소 있음.

노래 들으면서 썼답니다.


남자의 집은 어느새 두사람의 집이 되었다. 서랍장에 그의 옷이 하나씩 채워졌다. 욕실엔 칫솔 두 개가 나란히 걸리고, 홀수였던 그릇과 수저도 짝수가 되었다. 하나였던 것이 둘이 되며 완전해진다. 맨발로 바닥을 걸을 때마다 쩍쩍 달라붙던 노란 장판 위로 카펫이 깔렸다. 

"이런 거 필요 없는데."

"형님이 사주면 감사합니다,하고 받는 거야."

주정재의 취향이 들어간 것들이 남자의 영역에 침범하고 공간을 멋대로 차지했다. 남자의 집은 어느새 두 사람의 집이 되었다. 이 집 어디에도 주정재의 흔적이 남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물며 세탁기 위에 있는 섬유 유연제도 주정재의 것이었다. 그걸 넣고 빨래를 하면 그날은 온종일 집안에서 주정재에게서 나던 향이 났다. 이제 남자는 혼자 집에 있어도 주정재의 체취를 느꼈다. 짜증이 났다.

"야, 내 팬티 어디 갔냐."

"서랍 안에 있잖아."

"서랍 어디?"

"두 번째 칸."

"아, 어디!!"

남자가 서랍을 뒤지던 주정재를 밀어내고 서랍장을 뒤졌다. 바로 보이는 속옷에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있잖아. 주정재는 아무렇지 않게 어휴, 이게 왜 내가 찾을 땐 없냐. 라며 웃는다. 

"마누라가 살림하면 원래 남편은 집안일을 좀 모르는 법이야.'

"별 옘병 떤다."

"너는 어? 입 좀 곱게 써라. 어? 주둥이가 아주 자유분방해선. "

"적어도 너보단 곱지."

발끈하는 주정재를 귀를 후비며 무시한 남자는 기억을 뒤로 밀어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장을 열었다. 비어있던 서랍장은 주정재의 옷으로 꽉 차 있었다. 아예 서랍 채로 꺼내 그대로 뒤집었다. 차곡차곡 접혀있던 옷이 모두 바닥으로 떨어져 엉망으로 섞였다. 텅 빈 서랍장은 이렇게 가볍다. 남자는 서랍장을 다시 끼워놓고 큰 봉투를 들고 모두 일말의 망설임 없이 주워 담았다. 비어있던 봉투는 쓰레기로 가득 찬다. 

"이게 뭐냐?"

"물 달라며."

주정재가 어이없다는 듯 물이 담긴 그릇을 받아들였다.

"너는 무슨 물을 밥그릇에다 줘?"

"어쩌라고, 컵이 없는데. 꼬우면 가던가."

"허, 참. 무슨 사람 사는 집에 컵도 없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킨 주정재는 다음날 양손 무겁게 집에 침입했다. 싱크대 위로 그릇과 머그잔 따위가 쌓였다. 마지막으로 주방세제와 수세미까지 꺼낸 주정재는 소매를 걷어 그릇들을 전부 새로 닦은 후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뭐야, 남의 집에 뭘 멋대로 가져와?"

"웃기지말어. 이거 다 내꺼니까 마음대로 쓰기만 해봐. 알지?"

"? 그럴 거면 다시 가지고 가지? 아니, 애초에 내가 쓰는 건 또 어떻게 알 건데."

남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든 말든 주정재는 물 마신 컵을 다시 헹궈놓고 식기 건조대 위로 올렸다. 똑같은 모양에 색깔만 다른 머그잔이 나란히 세워졌다. 이제 물기는 다 말랐다.

이번엔 박스를 가져와 싱크대 위로 올려놨다. 낡은 박스 위로 한때는 새 것이었던 그릇들이 차곡차곡 쌓는다. 사용감이 쌓인 그릇들은 박스를 다 채우지도 못했다. 남자는 머그잔을 가만히 바라봤다. 한참 바라보던 그는 그것마저 박스 안에 집어넣고 닫았다. 공간이 남은 그릇이 계속 달그락 소리를 냈다.

쓰레기 봉투 안에 기억을 넣었다. 쓰레기로 버려진 기억을 주워 담아 버렸다. 이 좁은 집안에 주정재의 흔적이 담긴 것은 너무 많아서 채우고 채워도 봉투가 한참은 부족했다.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시켜도 날아가지 않는다. 어질러진 바닥에 주저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길게 내뱉으면서 문득 손에 쥐고 있는 라이터마저 주정재의 것임을 깨달은 남자는 그마저도 쓰레기통에 넣는다.

"독한 새끼."

남자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독하다. 정말, 독해. 담배 연기로 지워내려고 해도 이 집에 베인 주정재의 향이 날아가지 않는다. 쓰던 것들을 모두 내다 버려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 집은, 남자의 집이 아니었다. 주정재와 '누구도 아닌 남자'의 집이었다. 어디에 시선을 돌려도 그와 쌓은 쓸데없는 추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미 손에 그의 피를 또 다시 묻혔음에도 불구하고.

타들어간 담뱃재를 재떨이 위로 털어냈다. 벽에 기대 누렇게 뜬 천장을 바라봤다.

나는 아마 너를 평생 잊지 못하겠지.

우스운 말이다. 하지만 남자는 부정하지 못한다. '누군가'로서 쌓은 기억을 지워내고 '누구도 아닌 사람'으로서 쌓은 기억이 더 무게를 더한다. 주정재는 죽어서도 알지 못한 일방적인 감정이 쌓이고 또 쌓이고, 쌓여서 남자의 숨을 막았다. 남자는 그것을 주정재를 찌름으로써 뜯어 삼킨다. 씹고, 물어 뜯어서 목구멍 아래로 삼킨다. 

나는 아마 너를 평생 잊지 못하겠지. 

긴 시간 동안 남자의 영혼에 새겨진 그 어떤 이름들보다 깊게 새겨질 존재를, 주정재는 기뻐해도 좋다. 남자는 짧게 타들어 간 담배를 마저 빨곤 재떨이까지 모두 쓰레기봉투 안에 담아 버린다. 가구도 들어내고 남아있는 것 없는 집안을 둘러봤다. 여전히 주정재의 향이 남아있는 기분이 든다. 남자는 현관 앞에서 그 풍경을 바라본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커튼이 흔들렸다. 베란다의 얇은 창 너머 누군가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뒤돌아보지 않고 문을 천천히 닫았다. 끼이익, 낡은 쇳소리가 따라 천천히 이어졌다. 쾅, 문은 곧 틈 없이 굳게 닫혔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공간에 담배 연기가 흔들렸다.

 

나는 아마 너를 평생 잊지 못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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