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장마 준비

누구도 아닌 남자 /개인지 '장마'의 조각글

해가 갈 수록 여름의 온도는 높아진다. 모든 것을 다 버렸던 그 해의 여름은 뼈가 시릴 정도로 추웠던 것 같은데 이젠 그 모든 기억들이 녹아 없어버릴 것 처럼 뜨겁다. 에어컨 킬 여력도 없어 구석에서 먼지 쌓여 방치되어있던 선풍기만이 덜덜 소음을 내며 돌아간다. 바람을 일으키는 건지 먼지를 휘날리는 건지 구분 할 수 없었지만 그걸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습하네."

목소리에 힘이 없다. 요 며칠 제대로 먹은 것 조차 있나 모른다. 나이가 들면 들 수록 옛날과 몸 상태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있지만 그 뿐이다. 겁도 모르고 칼을 쥐고 총 따윌 쥐고 휘두르던 것은 젊은 날의 시대에 멈췄다. 굶어도 힘이 있는 것은 그 시절 뿐이라는 걸 그땐 몰랐지. 나이를 든 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무서운 일이라는 것 또한 몰랐지. 그래서 여즉 살아있는 것이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슬리퍼는 바닥의 먼지를 밀어냈다. 창문을 열자 습한 공기가 어디로 향하는 지도 모른채 오간다. 바람이 불어들어와도 후덥지근하니 의미가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흐린 구름만이 어둡게 껴있고 도시는 회색으로 물들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개피 꺼내 물었다. 담배가 물기라도 먹었는지 불이 잘 안붙는다. 세 번만에 불이 붙은 담배 연기를 폐 깊이 들이마쉰다. 회색 도시, 회색 하늘, 그 위로 흩어지는 회색 연기. 아랫층의 슈퍼에서 틀어놓은 라디오가 윗층까지 들려온다.

- 내일부터 장마전선이… 이번 장마는… 모두 건강관리에 유의…

뚝뚝 끊기는 음질은 썩 좋진 않았다. 캐스터가 마무리 멘트를 끝내자 신나는 노래가 이어 나오더니 광고가 이어졌다. 담뱃재를 털어냈다. 어쩐지 습하더라. 기분 찝찝한 더위의 이유를 알았으나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담배를 물고 벽에 달려있는 고물딱지 에어컨을 바라봤다. 옛날엔 분명 하얬으리라 싶은 누렇고 오래된 모델이다. 당연히 청소 한 적 없다는 듯 멀리서 봐도 먼지가 매달려있다. 이래서 아무렇게나 바꾸는 숙소는 안됐다. 그렇다고 장마를 코앞에 두고 바로 방을 옮길 수도 없으니 방도가 없다. 

이런 습함 속에선 남자는 버린 기억이 띄엄띄엄 떠오르곤 한다. 

돈이 없어서 전기 조차 제대로 마음 편히 못쓰던 시절, 그래도 '그 아이'가 있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시절. 그때도 이렇게 더웠던가. 마당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곳에서 그래도 웃으며 물을 서로에게 뿌리기도 했었지. 

아,

"……."

어떻게 생겼더라. 그 아이가. 그 아이, 남자는 손가락 끝으로 미간 사이를 문질렀다. 나이를 먹음으로서 차마 멀리하지 못한 것은 망각.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망각이었다. 남자는 너무 많이 나이를 먹었고 그러면 안됐지만 그들 중에서 마지막까지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더 잃은 것이 많았다. 이름, 이름. 은서, 아 그래. 은서였지. 은서. 그 아이의 이름은, 은서였어. 

자신을, '그것'을 버림으로서 의식적으로 남자는 '그것'에 대한 기억을 지워갔고 잊어갔다. 얼굴 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고 '그것'과 관련 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일부러 잊지 않으려고 늦은 새벽 아무것도 없는 벽을 보며 끊임없이 그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지 않으면 안됐다.

김성식, 주정재, 권현석, 유상일, 김성식, 권현석, 경찰, 선진, 박근….

밤을 지새우는 날이 늘고, 오랫동안 마음에 품은 복수라는 두 글자도 희미해질 즘. 남자는 깨달았다. 그것에 대한 것을 지워간다는 것은 자신이 버틸 이유도 지워지는 것이고, 그간 자신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도 지우는 것과 같다는 것을. 하지만 그걸 깨달은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지워낸 시간이었다. 복수심은 시간에 희석이 되고 그 풍파를 그대로 맞으며 깎여나갔다. 

그나마 간간히 얼굴을 보던 주정재가, 그 깎이고 깎인 마음을 막아주는 방패막이 되어줘서 마저 버틸 수 있었을까. 다 꺼트린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검은 아스팔트 위로 떨어진 것은 마지막 불씨를 태우며 여린 연기를 남기지만 보이진 않는다. 

하늘 위에서 빗방울이 한방울 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남자가 마지막까지 버텨가며 끌고왔던 것들이 끝맺어진지도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이 일에 엮인 젊은 사람들은 그들답게 제대로 밝혀지지 못한 과거의 찌꺼기를 파헤치러 다닌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최재석을 닮은 녀석과 어쩌면 유상일을 닮은 녀석들. 그들의 판에 어울려주기엔 남자는 이제 모든 것이 질렸고 지겨웠고 무뎌졌다. 권현석의 복수를 함으로서 남자는 다 했다. 말 그대로 다 했기 때문에 끼어들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그 쪽, 나 좀 도와줘야겠는데."

부러 잊은 벚꽃 잎이 여름 전 피어있지만 않았다면 좋았겠지. 그 벚꽃 향을 맡지 않았다면 더욱 더 좋았겠지. 회색으로 물든 과거는 온전히 그것의 티를 벗어내고 남자만을 남겼다. 그럼에도 아주 아주 작은 그것의 조작이 남아 남자의 숨을 잡았다.

이번 장마는 일찍 왔네.

그 어떤 여름보다 지독하게 길고, 지독하게 습한 더울 장마였다.

그래서 남자는 장마 준비를 해야했다.

남자인 자신 마저 잊지 않도록. 

이번에는 시린 여름이 오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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