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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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재 / 전력도시 / 키워드 - 연기

늙어간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살아남았기 때문에 죽은 자는 느낄 수 없는 노화를 신체적으로 경험한다. 기억 속의 이들은 나이를 먹지도 않고 여전히 20대에 멈춰있는데 주정재만은 달랐다. 거울 속의 자신과 시선을 마주한다.

‘늙었구만….’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과연 축복인지, 저주인지 속으로 가늠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다친 게 언제인데 아직도 붕대를 풀지 못한 덕에 걸음이 불편하다. 절뚝거리며 거실로 나간 그는 소파에 눕듯이 엉덩이를 붙였다. 깁스 해놓은 오른발이 무겁다. 

‘옛날 같았으면 진작에 붕대 풀고 좆빠지게 뛰어다녔을 텐데.’

별거 아닌 부상이라고 생각했다. 주정재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한 며칠 붕대하다 풀겠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뼈가 잘 안 붙는다는 이유로 깁스를 한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술도 안되고, 담배도 안 됩니다. 빨리 나으셔야죠. 땍땍거리던 의사의 목소리가 머리 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 이젠 건강에 신경 쓰셔야 하는 나이에요.

옘병, 그런 게 어딨어. 나는 아직 씨팔청춘인데. 

충고들을 뒤로하고 술 처먹다가 다친 부위에 염증이 생겨 대가리 깨질 듯 잔소리를 들은 이후론 여전히 착실하게 금주하고 흡연하고 있는 주정재는 참 많은 것이 억울했다. 이것도 다 영감 뒤 닦아주다가 생긴 부상이라는 것이 제일 좆같았다. 

사실대로 이야기 할 수 없으니 주정재는 술 먹고 계단에서 구른 놈이 됐다. 며칠 입원하는 동안 혜연이의 잔소리가 얼마나 억울하고 귀가 따가웠는지 모른다. 

“건강 신경 써야 한다니까요! 담배도 줄이고!”

환자복 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쏙 빼가는 손이 참 매서웠다. 

“혜연이, 너, 너 인마, 삼촌 주머니를 막 그렇게!”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노려보는 모습에 주정재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대체 누굴 닮았는지 애가 야무진 것도 참 야무진데 저렇게 잔소리가 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여튼 주정재는 억울했다. 

그 놈의 건강, 건강. 

이제 운동이라도 하지 않으면 몸을 유지할 수 없었고 신체는 조금만 나태해져도 쉽게 무너졌다. 굳이 찾아서 몸을 움직이지 않았던 젊은 시절과 다르게 이제는 시간 내서 하더라도 전과 같은 체력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턱 아래까지 올라오는 숨에 헐떡이며 띵한 머리를 잡고 있을 때면 현타가 왔다. 

‘씨이발,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많은 것을 누리겠다고 바닥을 박박 긁고 기어 살아남은 결과가 이거였으니 할 말 다 했다. 물론 그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그 시절로 남아있을 순 없다고. 한계가 올 것이라고 짐작은 했다. 그게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온 것이 문제지. 결국 주정재는 아직도 이룬 게 없는데. 

배신자 주정재는 여전히 박근태가 부르면 달려가야 하는 개새끼고, 씹새끼고, 여전히 경사 노릇하고 있는 뒷방 늙은이였다. 주정재는 다시 눈을 떠서 천장을 바라봤다. 그래도 죽은 것들보다 낫다. 아무리 더럽고 좆같아도 살아남아 있으면 뭐든 된다. 그게 이긴 거였다.

“새끼는 형님이 다쳤는데 연락도 없고.”

휴대폰을 열었다. 저장되어있지 않은 번호의 최근 기록을 뒤졌다. 2주 전을 넘어가는 것에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허, 허! 하고 내뱉는다. 

‘은혜도 모르고, 개새끼.’

그렇다고 먼저 연락하긴 자존심이 상해서 휴대폰을 닫는다. 

“하여간, 그 출신이 어디 가겠어.”

주정재는 중얼거리며 남자를 떠올린다. 우중충하고 나 사연있어요라고 광고하듯 시커먼 옷만 입고 다니고 남과 친해지려고도 안 하는 놈. 옛날부터 그런 점은 참 안 변했다. 

“면상을 갈고 올 거면 하는 짓도 좀 바뀌던가.”

이죽였다. 습관도, 어투도 애써 바꿔 남의 이름으로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그 녀석을 처음엔 그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냥 영감 놈이 이상한 새끼 하나 주워 왔다고만 생각했다. 지내면서 생각보다 손발이 잘 맞고 쓸만하다고 여기며 녀석을 살피던 어느 날.

‘잠시만….’

권혜연의 거처 근처에서 남자를 잡은 주정재는 그에게서 낯익은 그림자를 엿본다. 대가리 속에 한껏 미뤄두고 잊었던 이를 떠올렸다. 급히 과거의 뉴스와 기록을 살피며 ‘사체’가 발견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다시 남자를 살폈다. 일부러 멍청한 낯짝을 하고 남자의 반응을 살폈다. 주정재는 틀리지 않았다.

그는 기뻤다. 살아남은 것은 자신 밖에 없음에 통탄했었다. 감옥에 있던, 사회에서 떵떵거리고 있던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 제일 바닥 인생을 살고 있다고 여겼는데 자신보다 더 좆같이 사는 놈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저 녀석보단 낫다는 자기 위로를 하며 주정재는 웃을 수 있었다. 

남자는 끝까지 자신을 숨기고, 주정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숨겼다. 서로 광대 노릇을 하며 속으론 상대방을 비웃는 멍청한 행위들이었다. 그런데도 주정재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박근태가 자신에게 붙여준 놈이 하필 이놈이었을까. 누가 운이 없는지, 재수가 좋은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우스운 꼴에 놀아나 주기로 했다. 아직 받지 못한 피 값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비 오는 날이면 느껴지는 화약 잔향이 남자의 곁에 있을 적이면 사라졌다. 주정재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이번 그림만 끝나면.

얼마남지 않은 유상일의 출소일을 확인했다. 붕대도 그전에는 풀 테고, 이미 밑그림은 끝난 상태였으니 문제는 없다. 예상치 못한 부상은 충분히 커버 칠 수 있다. 며칠만 서울 외각으로 녀석을 돌려놓고… 다 끝낼 수 있었다.

주정재는 궁금했다. 자신을 알아봤을 때 보일 그 표정이, 완벽히 속였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을 깨달았을 때의 반응이. 

“짜식이, 그러게 형님을 어? 어떻게 보고….”

주정재는 입꼬리 올려 웃는다. 깁스한 발을 까닥이며 몸을 더 편하게 눕힌다. 너도 늙었다. 살아남았기 때문에 녀석 또한 세월을 이길 수 없었으니 똑같았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그렇지만─.

“너….”

이건 예상외였다. 방탄조끼 사이를 뚫고 살을 가르는 날카로운 고통은 지독하게 선명했다. 주정재는 이것이 드디어 삶의 끝임을 깨달았다. 분노가 치밀어올랐고, 이제 좀 팔자 펴보겠네 하는 것들이 쓰레기가 됐다. 

“이걸로 피 값은 갚았다.”

남자가 이야기했다. 

“살아있었냐, 정은….”

벌써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역류하는 피를 내뱉으며 시선을 애써 남자에게로 잡았다. 올라가는 입꼬리가 숨겨지지 않는다. 나는 다 알고 있었다고 비웃어줄 차례였다.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와 다시 속삭이기 전까진. 

“알고 있었으면서 그만하지.”

멀어지는 소리 속에 그 목소리만큼은 선명하고, 또렷했다. 서로의 기만을 마주한 순간 남자는 여전히 아무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웃지도 않는다. 헛웃음을 꺽꺽 삼켰다. 손이 떨렸다. 시야가 흐려지고, 비릿한 피 냄새마저도 멀어질 무렵 주정재는 생각했다.

아, 저 새끼 연기 좆나게 못한다고 이야기 해야 했었는데. 

씨이이이팔.

좆같은 연기. 

좆같은.

그렇게 주정재는 세월에게서 도망친다. 죽음으로 도망친 그는 이제 늙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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