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물장난

정은창, 정은서, 정남매, 단편 재 업로드

더워! 하고 소리치던 은서가 마루에 엎어졌다.

선풍기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여름은, 아직 어린 은서에겐 버거운 여름이었나보다. 

가만 생각하다가 잡동사니를 뒤졌다. 이거다. 

 

물장난

  

아, 덥다. 무척이나 더운 날이다. 따듯함을 넘어 뜨거운 날이라, 은서를 마루에 앉혀놓고 아주 오래된 물놀이 풀을 마당에 꺼내 놨다. 어릴 적 길바닥에 버려진 게 생각보다 상태가 좋아 주워 왔던 거였다. 그것도 꽤 오래 전이 되었다. 풀 안에 물을 채워 넣으면서 은서의 즐거운 목소리를 흘려들었다. 쨍쨍, 햇빛 소리가 시끄럽다.

“어, 야, 정은서. 장난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물 튀잖아.”

갑자기 제 등에 매달리는 무게에 기우뚱하다가, 몸을 바로 폈다. 생각보다 무겁게 실린 무게가 은서의 성장을 느끼게 해줬다. 얘, 또 살찐 거 아니야? 비뚜름하게 은서를 바라봤다. 은서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마당을 뽈뽈,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빠, 오빠! 여기 개미! 개미들이 줄지어서 가!”

“그래, 그래. 괜히 개미 괴롭히지 말고 마루로 가있어. 덥잖아.”

“~~~. 네에!”

부루퉁한 표정을 짧게 지어보이더니, 금방 또 해맑게 웃는다. 마루에 얌전히 앉으면서도 가만히 있기엔 심심한지 발장난 치는 모습을 보고 저도 같이 웃고 있었다. 은서와 간만에 같이 보내는 주말이었다. 괜히 기분이 좋았다.

이정도면 됐겠지, 어느 정도 물이 찬 풀을 보고 물을 잠갔다. 호스를 정리하고 은서에게 손짓하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으로 뛰어왔다. 덥긴 더운지, 물을 보며 눈을 빛내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제 들어가도 돼? 들어가도 돼!? 하고 아예 눈빛으로 물어보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천천히 들어가야 해. 서두르지 말고.”

“알아! 발끝, 손끝, 그리고 풍덩!”

“그래, 좋아. 이제 들어가도 돼.”

“와아!”

두 팔을 크게 들던 은서는, 조심스레 풀에 손을 넣고, 쏙 들어갔다. 이 풀을 언제 주워왔더라. 그때는 둘이 들어가도 충분할 정도로 큰 풀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은서 혼자 들어가기 딱이었다. …은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시원해! 오빠는 안 들어와?”

물장난 치면서 까르르 웃는 은서를 보고 있자니 마음 한 구석이 편해졌다. 이렇게나마 즐겁게 웃어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풀에 손을 담가 물장난을 치며 은서에게 물을 튕겼다.

“오빠는 됐네요.”

“앗, 차가워~! 푸하, 입에 물 들어갔어!”

젖은 손을 허공에 털었다. 만약 우리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분명 이보다 더 좋은 곳에서 언제든 은서를 이렇게 즐겁게 해줄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이 피어올랐다. 초라한 마당에, 낡고 오래된 풀의 배경을 뒤로 하고 즐겁게 웃는 은서를 바라봤다. 주변이 어떻든 환하게 웃는 은서가 제게는 위로가 되면서도 죄악감이 들곤 했다.

미안해, 은서야.

오빠가 더 잘해주지 못해서.

내뱉지 못하는 말은 늘 목 끝에서 맴돌고 사라진다. 지친 생각들을 애써 떨쳤다. 은서가 제게 이렇게 웃어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무겁게 느껴지는 짐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까르르, 웃는 은서의 목소리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애써 가라앉혔다. 물 위로 떠올라봤자 좋을 게 하나 없을 생각들이었다. 

물장난 치는 은서를 시선에 담궜다. 고작 초라한 풀에도 즐거운 듯 웃고, 팔다리를 쭉 뻗었다. 서서히 성인이 되어가는 은서는 제겐 아직도 아이였다. 더, 더 작은 아이. 어린 아이. 이제 은서는 자라지 않는다. 시선이 마주쳤다. 은서는 아무 말 없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날은, 평범한 날이었다. 기억 속에 아득히 묻힐, 그래도 불행한 나날 속에 어쩌다 있을 다정한 하루였다. 시간이 흐르고 추억인 빛이 바라게 되어, 이 하루도 묻어둬야 할 기억이 될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은서가 지었던 환한 웃음만큼은 시간이 지나더라도, 제 가슴 한 구석에 계속 남아있었다. 죄책감을 누르고, 안주하려던 자신을 깨우는 다정한 웃음. 은서야, …오빠가,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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