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2018 김정교류회 참여작 / 성식은창
원작과 상이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에 불편하신 분은 열람을 삼가주세요.
2018 김정교류회 참여작 / 성식은창 / 어떤 의미로는 노쾅인 세계관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내가 여기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또다시 묻는다.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는가.
우리는
조용한 연못에 돌을 던졌다. 잔잔한 수면의 고요함이 깨졌다. 잔물결이 연못의 위를 어지럽혔다. 잠자던 개구리가 깜짝 놀라 개굴개굴 울며 도망간다. 풀잎이 힘없이 흔들리고 유유히 헤엄치던 물고기들도 바쁘게 흩어지며 깨진 고요함에 소란스럽다. 돌, 무척이나 작은 조약돌. 겨우 그 하나만으로도 연못의 평화를 깨진다. 고의든 타의든 누군가의 평화를 깨버리는 것은 그만큼 쉬운 일이다.
겪기 전에는 모른다. 그게 인간이고, 사람이다.
정은창은 내키지 않은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쇳덩이가 양쪽 발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식은땀이 나는 손을 애써 바지에 닦아낸다. 어차피 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데, 이렇게 불안한 기분을 가질수록 자신만 손해다. 미리 안달복달 날 필요는 없다. … …그 사실을 알면서도 생각을 고치지 못하는 게 문제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오늘따라 복도에 유독 사람이 없어 걸음을 늦출 마땅한 핑곗거리도 없다. 새끼들, 필요할 땐 안 보이고…. 썩 듣기 좋지 못한 비속어가 말 뒤를 이었다.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을 무심코 입 밖으로 꺼내어, 저도 모르게 움찔한다. 누가 본다면 꽤 멍청한 짓이었음을 자각하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젠장, 뭐 하는 거야.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곤 착, 소리 나게 뺨을 쳤다. 정신 차려….
똑똑.
노크 소리. 그의 방문을 두드릴 때면 언제나 가볍고, 맑은소리가 났다. 건물 자체가 새 건물이 아닌데 유독 그의 방은 새것의 느낌을 준다. 이 문도 그랬다. … … 안에서 대답이 없다. 정은창은 심호흡을 짧게 하고 문을 다시 두드렸다. 똑똑똑. 횟수가 한 번 늘었다.
“형님, 정은창입니다.”
목소리가 조금 잠긴 것 같다. 목을 다듬고 말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는 짧다. 문을 사이에 두고 내뱉은 목소리니까 큰 차이 없이 들렸으리라 생각해본다. 또 조용하다. 정은창은 조급함에 다시 손을 들자, 그제야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들어와.
대답 참 빠르다. 곱지 않은 생각이 삐죽 튀어나온다. 손잡이를 잡아 돌리는 순간에도 생각은 바쁘게 흘러간다. 그래도 다시 노크하기 전에 들려서 다행이지 않나. 세 번째 노크까지 했다면 분명 그의 분노가 선명하게 드러났을 게 분명했다. 정은창이, 정신이 있어, 없어? 겨우 그것도 못 참아서 노크를 해대? 어쩌고저쩌고. 생각만 해도 싫다. 잡생각을 애써 지우며 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시커먼 놈들이 벽에 줄줄이 서 있다. 무슨 소시지도 아니고 시커먼 놈들을 저렇게 딱 세우는지 정은창은 매번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다 작은 형님, 아니지. 이제는 형님이다. 다 형님이 사사건건 예민해서 그렇다. 취향도 참 예스럽다. 놈들에게서 시선을 치우고 앞을 바라봤다.
김성식은, 언제나처럼 사나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괜히 이야기하자면 그는 원래 좀 사납게 생긴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험악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라, 평범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둥이를 함부로 털 수가 없었다.
“너 이 새끼. 부른지가 언제인데 재깍재깍 안 오고 뭐 해?”
“죄송합니다.”
거친 음성이 뱉어지듯 자신의 위로 떨어졌다. 상체를 깍듯이 숙였다. 가타부타 말을 덧붙였다가는 폭력이 돌아온다는 것을 학습한 지 오래였다. 이것도 학습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나? 어찌 되었든 반복으로 인한 학습의 축에 끼워두자 싶다. 정은창은 상체를 숙인 채 그대로 기다렸다. 그가 고개를 들어도 된다고 하기 전까지 들 수 없었다. 1분 채 지나지 않았는데 허리가 아팠던 정은창은 빨리 김성식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새끼, …요새 사는 게 좀, 편하지?”
오늘은 썩 좋은 날은 아닌가 보다. 고개 들어.라는 말이 들릴 법도 한데 돌아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젠장. 어떤 놈이 일을 친 거야? 분명 자신이 오기 전에 어떤 놈이, 우리 예민한 형님 심기를 좆나게 어지럽혀 놓은 게 분명하다. 어떤 뇌 빈 놈인지 나중에 만나면 뒤통수라도 한 대 거하게 쳐버려야 속이 풀릴 것 같다. 정은창은 결단코 자신이 그렇게 만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쭈, 내가 이렇게 예뻐해 주고 있는데 불편하단 말이지?”
“…아닙니다.”
“왜 그래, 섭섭하게. 응? 정은창이, 요새 잘 해내고 있잖아?.”
그의 손이 정은창의 뺨을 툭툭 쳐댄다. 그가 손을 거둬갈 때쯤에야 조용히 상체를 일으켰다. 눈치를 살피니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라 속으로 안심을 하며 허리를 곧게 폈다. 살짝 숙이고 있었을 뿐인데 척추가 옅게 떨리는 기분이 든다. 옛날부터 험하게 다뤘던 몸이 벌써 아우성들이다. 불편한 기색을 비쳤다가 돌아올 반응이 걱정되어 욱신거리는 고통을 애써 무시한 채 꼿꼿이 섰다.
“다 형님 덕 아니겠습니까.”
잘도 입에 발린 말을 내뱉는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내뱉은 말이 그는 마음에 들었는지 유쾌하게 웃어넘긴다.
“크큭. 이 새끼, 떠드는 것 하나는 아주 예술이야, 예술. 역시 내가 보는 눈 하나는 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
정은창은 눈동자를 굴렸다. 그는 결국 자화자찬을 하는 중이었다. 따라 저 역시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것도 지긋지긋한 애정이다. 김성식은 정은창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정은창이란 말 잘 듣고, 말하지 않아도 주인의 눈치를 살살 살피는 쓸모 있는 개새끼였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는데. 의심과 불신의 김성식에게 있어서 정은창 역시 그렇게 봐야 할 놈 중에 하나에 불과했다.
그 관계가 변한 것은 그 날이 기점이었다. 조직 체계가 뒤집혔던, 쿠데타의 날.
정은창은 김성식의 뒤를 바라보며 떠올렸다.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기억이다.
모든 이야기의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려고 한다면 너무나도 먼 시점으로 돌아가야 했다.
은서를 잃고 홀로 살아남아, 다른 사람을 나락으로 빠트리는 일을 하고, 밤만 되면 악몽에 시달리고, 갖은 폭력과 욕설에 무방비하게 방치되었던 울산에서의 시절. 갑자기 모두 모이라는 소집 연락이 돌아 그 역시도 억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체 무슨 일인데. 튀어나오는 불만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비죽 내밀고 있으려니 형님들이 갑자기 놀란 듯이 누군가에게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댔다.
정은창은 흘러가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이 황도진이라는 것을 들었다. 황도진! 이름을 듣고서야 기억 속에 희미하던 얼굴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색을 띄운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오다 가라앉았다.
“아, 그러니까 왜 이렇게 중요한 상황에서, 다른 놈들도 아니고 굳이 저희가 울산에 내려와야 하는 거냐고요!”
“시끄럽네, 야, 김성식! 임마! 계속 그렇게 투정 부릴 거냐?”
“하, 이 형님 봐라. 투정? 투정? 투정?”
황도진의 옆을 누군가 같이 걷고 있었다. 묵직한 목소리와 그 목소리에 비하면 가볍지만, 세워진 날만큼은 무척이나 날카로운 목소리가 공간을 찢었다. 김성식. 이 자리에 있어선 안 될 인물들이었다. 울산에서 시작된 조직, 서울로 끌고 갔던 놈들이 갑자기 울산에 나들이라도 하러 왔냐고. 주변에서도 들리지 않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은창은 시선을 돌렸다. …멈칫했다. 황도진과 이야기하던 김성식과 시선이 마주쳤다. 짧은 시간이었을 게 분명한데, 정은창에게는 무척이나 긴 시간처럼 느꼈다. 진득하고, 섬뜩한 시선이었다. 잠깐 마주쳤을 뿐임에도 자신을 속속히 파헤치는 것 같은 시선. 침을 꼴깍 삼켰다. 그들의 걸음은 빠르게 움직였고, 생각에 잠길 적 어느새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황도진과 김성식이 자리를 옮긴 듯 했다. 그 덕에 쥐 죽은 듯이 입을 다물고 있던 덩치 놈들이 뒤늦게 풀린 입을 열심히 쥐 떠들어대고 있는 탓이었다. 왜 그들이 울산에 굳이 방문했는지, 신나게 떠들어댄다.
황도진과 김성식이 울산을 조용히 왔다 갔다. 왜 방문했는지 결국 제대로 된 이야기는 없었다. 다들 여러 추측을 떠들다 결국 쉬쉬하고 만다. 우습게도 그들이 울산을 방문하고, 머지않아 울산 조직이 무너졌다. 어디서 숨어 있던 짭새가 이리저리 찔러놓은 틈으로 순식간에 우르르 무너졌다. 그가 살아남은 것은 우연의 산물이었다.
결론적으로 정은창은 그 탓에 서울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맡겼다. 원하던 일은 아니었지만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울산에서 정은창이 있을 곳은 없었다. 경찰은 숨어 있는 쥐새끼들을 아주 완벽히 몰살시켜버릴 생각인지 눈알을 무섭게 치켜뜨며 골목골목을 뒤져댔다. 도저히 숨는 것도 마음대로 안되는 상황이었다. 정은창은 없는 돈 있는 돈 털어 겨우 서울로 상경하는 방법밖에 생각나는 게 없었다. 젠장. 욕설을 읊으며 눈을 감았다. 정은창은 벌써 무너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억지로 움직여야 했었다. 생각지도 못한 울산의 몰락은, 그의 계획을 어지럽혔다. 그는 쥐새끼가 아니었다.
서울의 첫인상은 참 삭막한 도시였다. 짐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었기에 가벼운 손으로 서울역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저를 맞이하러 온 핸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소형, 소완국이었다. 변치 않고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가 선명했다. 아니, 조금 다르다. 이질감이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듣자 하니 마산 조직도 풍비박산이나 그 역시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고 했다.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정은창은 그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몸을 기대어 무거운 눈을 감았다. 소완국이 이끈 낡은 창고에서 웃기지도 않은 꼴을 당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반기는 김성식의 모습에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김성식의 뒤에서 낄낄거리는 소완국이 더 짜증났다.
“테스트야, 테스트. 표정 꼴이 왜 그래. 인상 펴! …그러니까, 정은창이라고 했나?”
그의 꾸짖는 목소리에 억울함이 올라왔다. 그러나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 올렸다. 정은창입니다. 갈라진 목소리가 썩 듣기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이 낡은 공장에서 소완국과 똑같이 생긴 놈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시간을 보냈다. 옷도 먼지투성이고, 타인의 피가 이곳저곳 튀어있었다. 애초에 자신과 인사를 했던 소완국은 처음부터! 처음부터 소완국이 아니었다. 시발. 시발! 정은창은 짜증이 났다. 차에 탈 때부터 뭔가 이상했었다. 정은창은 촉이 좋았다. 그래서 조심하려고 했다. 빌어먹게 폐공장에 들어서자마자 상대 놈이 칼을 들고 다짜고짜 설쳐대니 조심할 기회도 없던 게 빌어먹을 이었다! 욕설을 몇 번이고 외치고 주변의 것들을 휘두르며 어떻게든 도망친 끝에, 빼앗을 칼로 상대방의 모가지를 찔러서야 숨을 겨우 돌렸다. 느리게 들려오는 박수 소리에 본능적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칼을 고쳐 잡았을 때, 모습을 드러낸 사람에 의해 몸이 절로 굳었다.
그래. 김성식이었다!
시발 새끼.
테스트였다며 웃어 재낀다.
소완국 개새끼. 김성식의 뒤를 따라 들어왔을 때 진심으로 죽여 버리고 싶었다. 소완국은 살아있었다. 똑같이 생긴 가짜 놈이 바닥에 엎어져있을 뿐이었다. 단순한 고깃덩어리가 된 것에 소완국은 시선조차 주지 못하고 시퍼런 낯으로 자신의 시선을 피했다.
피투성이가 된 옷과 몸이 찝찝했다. 떨리는 손을 숨기고자 했을 때 쉴 틈도 주지 않고, 김성식 라인 면접시발이 이어졌다. 잠깐이라도 대답이 늦어지면 그의 가슴팍에 고이 놓여있는 금속 덩어리가 전등 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무언의 협박에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토하듯이 대답을 뱉어내었다.
“저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땐, 몸이 떨렸다. 그랬다. 정은창은 동생을 잃었다. 사고라면 사고였다. 지독하고, 재수 없는 사고. 그 탓에 정은창인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맞지 않는 주먹을 휘두르고, 칼을 휘두르는 짓거리를 하는 것이었다. 몇 번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서서히 지쳐가는 정신이 선명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을 때, 정은창을 잡는 손길이 있었다. 김성식이었다.
“이봐, 어린놈이 뭐가 이렇게 비실비실해?”
생각 이상으로 단단한 손이 자신을 붙잡는다.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바라보니 제 상체가 비이상적으로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진짜 쓰러질 뻔했던 것 같다. 뒤늦게 고개를 흔들며 상체를 바로 일으켰다. 죄송, 죄송합니다, 제가, 그게…. 횡설수설하는 말이 정신 사납게 흘러나왔다. 위에서 낮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려 정은창은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몸이 굳었다. 눈동자만 굴려 정은창을 머리서부터 살피는 시선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깊게 숨을 들이켰다.
김성식은 정은창을 잡던 손을 놓고 뒤를 돌아봤다. 자신이 죽인 놈의 얼굴을 뜯어고쳤다는, 노구치라는 놈에게 난장판이 된 바닥을 가리키며 정리하라는 말이 이어졌다.
“이놈, 숙소로 옮겨.”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하니 공간에 울렸다. 한 달 전에 들었던 목소리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들려왔다. 소완국이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히 제 몸을 일으키는 것을 멍청하게 바라만 보다가 뒤늦게 무릎을 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곧게 폈다.
“형, 형님.”
“축하해. 정은창. 합격이야.”
“믿, 믿어주시는 겁니까…?”
“믿어?”
코웃음 치던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타인의 담배 향은 흡연자라고 해도 썩 좋은 냄새는 아니었다. 그가 뱉어낸 연기가 제 얼굴 앞에 머물다 흩어졌다. 소완국이 침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천하의 떠들이, 소완국도 김성식 앞에서는 얄쨜없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믿을 수 있게 잘 해봐. 나는 인재는 언제나 환영이니까 말이지.”
그의 목소리에 웃음이 서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더 말을 하지 않았고 가보라는 듯 신경질적인 손짓이 이어졌다. 소완국이 쓸데없이 그만 떠들고 가자며 자신을 끌었다. 건물을 벗어나서야 소완국은 그답게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이야~, 정은창! 많이 컸다?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 형님과 똑같은 얼굴인 놈을 죽일 수가 있냐! 잔혹한 새끼. 어? 이 귀엽고 잘난 얼굴을 보고도 칼질이 하고 싶디? 네가 죽인 놈, 작은 형님의 최측근이었는데 짭새라는 게 들켜서 저 꼬라지잖냐. 어우 씨, 하필 왜 내 얼굴인지 내 기분이 더 이상하단 말이야.
“어, 어. 그래.”
정은창은 조금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저 주둥이가 김성식의 기분을 거슬리게 한 게 분명하다고. 지갑도 걸 수 있었다. 물론 지갑은 오늘 누군가에게 기부하긴 했지만. 떠들어대는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우 씨, 저 입은 안 힘든가? 억지로 끌려가는 내내 잠시도 쉬지 않는 목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소완국이 안내해준 자신의 방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문을 닫고, 주변을 살폈다. 찝찝한 기분에 곳곳을 뒤져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을 때야 안심을 하고, 피에 젖은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두고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은 날이었다. 서울에서 보낸 첫날이, 어떻게든 지나갔다.
정은창은 그 첫날이 액땜이었는지,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특별한 일은 없었다. 황도진을 만나러 그의 방에 갔을 때 외딴 놈이 그 의자에 앉아 있어, 칼을 휘두르다 좆 될 뻔했지만 결국 어떻게든 해결되어 흘러갔다. 오히려 골 때리는 새끼라고 이야기하면서 웃어 재끼는 김성식이 있었다. 노구치를 처리하라는 황도진의 말에 분노하다가도 그렇게 쳐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김성식이 정신이 제대로 어떻게 된 건 아닌가 싶었다가 금방 지웠다. 실수로라도 내뱉었다간 자신이 골로 갈 게 뻔하다.
김성식은 미래를 언급했다.
처음에도 끊임없이 이야기했던 주제였지만 그는 권력욕이 심했다.
그는 끝까지 위로 가고자 했다.
스폰서? 좋지! 그렇지만 그게 우리의 목줄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야! 알겠냐. 정은창. 언제까지고 그놈들 구린 뒤 닦아주는 일만 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러게 살다간 결국 버린 말이 되는 거야!
아주 좆되는거지.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김성식은 무척이나 쉽게 반란을 이야기하고, 황도진의 죽음을 야기했다. 정은창에게 있어서 그러한 모습은 기이하고, 무척이나 이상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저 듣고 웃기만 할 뿐이었다.
짜식, 긴장 풀어 새끼야. 등을 퍽 치는 손길이 매웠다.
그렇다고 내색할 수 없어 입안을 씹었다가 하하…. 어색하게 웃음만 지었다. 방안은 조용했다. 큰형님과 작은형님. 두 사람 중에 김성식이라는 줄을 잡은 놈들이 방 안에 가득했지만.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정은창은 조용히 그의 근처에 딴 놈들처럼 뒤섞여 서 있었다. 장산 정신 병원, 기념적인 날이 될 거라며 술잔을 기울이는 김성식을 앞에 뒀다. 특별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안일한 생각으로 넘겨서는 안 됐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날이 흐리고, 어두웠다. 장산 정신 병원. 인적이 끊긴 지 오래된 이곳에서 정은창은 이번 일에서 김성식의 보조쯤으로 빠져있었다. 자처해서 가방 잡이와 길막이로 나섰던 새끼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살고 싶었기 때문에 위험한 곳에 직접 뛰어드는 건 이제 사양하고 싶었다.
정은창에게 있어 조금이라도 덜 위험한 선택지가 우선이었다. 목숨 걸고 먹고 사는 놈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정은창은 정말 위험한 일은 싫었다. 이번 일도 그랬다. 살기 위해서 김성식의 줄을 잡았는데, 굳이 위험한 길을 직접 고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 인원수와 김성식 뒤에 있으면 적어도 자신 대신 위험한 일을 해줄 놈은 많았다. 집합 때 위험한 역할에 자원했던 놈들을 떠올렸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새끼들. 혀를 찼다.
“목표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한 놈이 시작을 알리는 말을 내뱉었다. 정은창은 목을 만지다 김성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을 옮기니 너무 앞으로 와있었다. 조금 뒤로 갈까. 눈치를 살폈다. 그러던 중 김성식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이쪽도 준비 운동을 시작해보자고.”
모두가 그를 바라봤다. 정은창도 마찬가지였다. 물러나지 못한 걸음이 주춤였다. 그는 권총을 꺼냈다. 소음기가 번쩍거렸다. 레이더? 박쥐? 정은창 혼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기이할 정도로 뒤쪽이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은창은 눈동자를 굴려 뒤를 바라봤다. 누가 봐도 긴장한 얼굴들이 보였다. 김성식은 웃었다.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자신을 두고 총알이 발포된다. 소음기로 한껏 줄여진 총성이 무자비하게 몇 번이고 자신을 스쳐 갔다.
굳어서 움직이지 못했던 자신의 어깨를 스쳐 간 총알의 흔적이, 아직도 화끈거렸다. 아무렇지 않게 무참한 현장을 벌인 김성식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쥐새끼들은 깨작, 깨작 해치워봤자 사라지질 않아. 이렇게 가끔 청소를 해줘야지.”
죄책감 하나 없는 목소리는 서늘했다. 살아남은 건 총을 쏜 자신과 김성식밖에 없었다. 정은창은 바닥을 바라봤다. 널브러진 놈들이 시선에 닿는다. …전부, 박쥐였다고? 익숙한 얼굴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총알이 스쳐 갔는지 화끈거리는 팔을 쥐었다가 손바닥에 묻어나오는 피를 바지에 대충 닦아냈다. 이 정도 가지고 아프다고 징징거릴 시기는 옛적에 지나버렸지. 아픈 내색하지 않으며 김성식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큰 반응 없이 총을 갈무리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다. 뒤로 주춤, 물러서다 무언가 물컹거리는 걸 밟았다. 고개를 내렸다. 사람의 손이었다. 호흡 하는 법을 까먹는다. 주먹을 쥐었다. 비참한 개죽음이었다. 정은창은, 이런 죽음은 딱 질색이었다.
“이봐, 정은창이. 빨리 이리와. 뭐해, 지금. 농땡이를 피워?”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의 날 선 불음에 눈을 감았다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튄 핏자국이 신발 밑창에 쓸려 그대로 번진다. 제 죽음이 두려워 타인의 죽음을 회피했다. 눈을 감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었다.
김성식에게 다가가니 그는 짜증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다 아, 하고 짧은소리를 내었다. 통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이것도 계획과 다른 부분이었다. 다른 점은 김성식도 모르는 부분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새끼가 문을…. 안 되겠어. 좋지 않은 느낌이야.”
김성식의 표정에 초조함이 깃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터였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이렇게 크게 벌인 일, 제대로 끝내지 못하면 김성식도 좆 되는 입장이 될 터였다. 거기다 황도진이 건재하다면…, 정은창은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얹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윗사람들의 신경전 따위 자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자신을 챙기기 바쁜데 그들의 사정에 뭘 그리 신경 쓰려고 대가리가 멋대로 굴러가는지 모르겠다. 입술을 잘근 씹다가 김성식과 눈이 마주쳤다. 가뜩이나 험악하던 그의 얼굴이 더 찌푸려졌다. 씹던 입술을 놓았다. 혀 차는 소리가 들려 머쓱하게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간다 싶으면 셔터 때문에 길이 막혔고, 다른 복도로 움직이면 쓰레기들도 복도가 막혀있었다. 신경질적인 김성식의 목소리에 정은창은 아무 말 없이 혼자 눈치를 보며 짐을 치우고 굳게 닫힌 방문을 따거나 잔심부름이나 하는 처지였다. 움직일 때마다 진득하게 쌓여있던 먼지들이 풀풀 올라왔다. 이곳 지리를 모르는 놈이니, 정은창은 김성식이 가자는 데로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크게 돌긴 했지만, 계획했던 장소의 문손잡이를 열었을 땐 지긋지긋한 게 드디어 끝날 거로 생각했다. 아니었다. 끝나기는 무슨.
문손잡이를 잡아 돌리자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아 쇳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김성식은 한 발짝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은창은 짧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어젖혔다. 꿉꿉한 먼지가 일어났다.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피자 바닥에 널브러진 최재석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본능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동시에 옆에서 둔탁한 무언가가 정은창의 머리를 내려쳤다.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중심을 잃은 것처럼 그대로 바닥에 나자빠지고 시야가 흔들렸다. 정은창은 맞은 부위를 감싸고 헛손질을 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다른 곳도 아닌 머리였다. 아니 맞은 부위는 둘째 치고 아팠다. 무척 아팠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파서 정은창은 짜증이 났다. 기절하지 않는 것은 오기였다.
보이는 건 황도진이었다. 놈도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몸싸움이 있었는지 반듯하던 정장이 먼지투성이에다 헤져있었다. 애지중지할 총은 어디 갔는지 손에는 나무 조각이 있었다. 조각이라고 해도 되나? 저 구석에 쌓여있는 가구 일부를 때어온 것처럼 생긴 것이었다. 황도진은 자신이 내려친 놈에겐 전혀 관심을 주지 않고 김성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은창은 억울했다. 김성식도 잠깐 자신을 바라보다가 황도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찬밥신세다. 씨불.
“아이고, 형님. 꼴이 아주 말이 아니십니다. 그래.”
김성식 특유의 비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도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짧은 웃음을 내뱉었다. 정은창은 흔들리는 시야를 제대로 챙기기도 정신없었다. …알아서 대화하시든가 말든가. 아직도 욱신거리는 머리를 쥐었다가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살폈다. 조금 멀리 길막이 역할이었던 퍼런 놈이 쓰러져있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거 보니까 살아있는 것 같았다. 조금 멀리 가방 잡이 놈도 있었다. 황도진이랑 엎치락뒤치락한 게 이놈인지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살아있나? 엎드려있어서 분간이 안 된다. 옆에서 언성이 높아지는 게 들린다. 죽은 척 눈이나 감을까. 기절한 척…아, 젠장. 김성식과 눈이 마주쳤다.
“정은창이, …언제까지 그렇게 나자빠져 있을 거야? 일어나.”
황도진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 애써 무시하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습관처럼 안쪽 주머니를 만졌다. 익숙한 무게가 느껴졌다. 안심했다. 다시 김성식을 바라봤다. 황도진이 다시 김성식을 바라봤다.
“이 꼬맹이 하나 있다고, 어떻게 못 할 것 같니?”
그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고요한 공간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정은창은 침을 삼켰다. 황도진이 품에서 꺼낸 것 때문이었다. 총이었다. 시발, 총 없는 거 아니었어?
정은창 혼자 배신감이 들었다. 총 있는 놈이 왜 나무쪼가리를 들고 휘두르고 있던 거야? 김성식은 왜 총을 주머니에 모셔두고 꺼낼 생각을 않는지 모르겠다. 검은 총신이 자신을 향했다. 김성식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렇다면, 정은창은, …정은창은.
황도진이 다시 김성식에게 고개를 돌리며 무어라 이야기하는 사이, 정은창은 주저 없이 그에게 몸을 던졌다. 아주 완벽히 죽여 달라고 광고하는 거나 다름없는 행동이었지만 총은, 뺏어야 했다. 안쪽 주머니에서 선명하게 무게감을 드러내고 있는 칼을 떠올렸다. 정은창은 죽고 싶지 않았다. 뒤늦게 반응한 황도진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정은창의 귀 근처에서 들렸다. 정은창은 그의 앞에까지 와있었다. 눈먼 총알은 허공만 스쳤고, 주먹을 휘둘렀다. 깡패 짬밥으로도 비벼볼 수 없는 상대지만, 아무리 날고 기어도 나이는 독이었다.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 그랬다. 주먹을 휘둘렀다. 상대는 권총을 휘둘렀다. 맞을 수밖에 없는 공격이었다. 정은창은 금속 덩어리에 맞은 어깨가 욱신거렸다. 오늘따라 유독 고생하는 자신의 몸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를 꽉 물고 그의 손목을 쥐고 꺾었다.
“젠, 장!”
체격 차로 인한 힘 차이는 쉽게 이겨 낼 수 없었다. 정은창은 안간힘을 썼다. 계속 처맞았다. 자신이 잡고 있는 손은 한 손이었고, 그는 손이 두 개였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랬다. 이 새끼는, 뭐야! 고함이 내려쳤다. 그런데도 정은창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휘두르는 발길질에 다리를 맞아 몸이 휘청거리다 버텼다.
휘두르는 손에 얼굴을 맞아 입안에서 피 맛이 맴돌았다. 비렸다. 김성식 개새끼, 이럴 때 도와서 주머니 속에 있는 총이라도 좀 써봐야 할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있었는지 모른다. 젠장, 젠장, 짜증이 밀려왔다! 살기 위해 잡은 줄이 썩은 동아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조해진 정은창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때문에 힘에 훅 밀렸지만 상관없었다. 몸이 크게 기울었다. 정은창은 주저 없이 칼을 꺼내 들었다. 기울어진 몸을 한쪽 다리로 버티고 팔을 휘둘렀다. 황도진의 팔에 쑤셔 박았다.
썩 유쾌하지 못한 소리가 들렸다.
금속이 살을 뚫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 이 새끼가!!”
비명 하나 지르지 않고 분노를 토하지만, 그는 결국 총을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정은창은 칼을 꽂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뽑아내면서 거칠게 비틀었다. 말은 쉽지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정은창의 팔도 옅게 떨려왔다. 긴장한 상태로 짧은 시간에 강한 힘을 줬던 여파였다. 근육 사이에 박힌 칼은 잘 뽑히지 않았다.
황도진이 정신 차리기 전에 정은창은 서둘러 총을 주워들었다. 뚝뚝 떨어지는 것은 피였다. 피가 튀었다. 흘렀다. 붉은 것이 묻어났다. 이미 정은창은 의미 없는 죽음을 선명하게 마주한 뒤였다. 아직도 아른거린다. 정은창은 칼을 떨어트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손이 기분 나쁜 색으로 물들었다. 한 손에는 나이프를, 한 손에는 총을 쥐고 있는 것이 이도 저도 아니라 우스운 꼴이다.
하, 하고 짧게 웃은 정은창은 칼을 저 멀리 던졌다. 금속이 콘크리트에 부딪히며 날카롭게 들려왔다. 묻어있던 피가 흩뿌려졌다. 정은창은, 김성식을 바라봤다. 그는 웃고 있었다. 속으로 욕을 했다. 개새끼. 총을 바로 쥐었다. 진짜 총이다. 선명하게 들었던 총성 음이 아직도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래 살아왔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몇 번 잡아본 적 없는 총이다. 잡아본 적이 있더라도, 이런 상황을 마주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 무게는 무척이나 무거웠다. 금속 덩어리가 너무나도 무거워서 몸이 쏠릴 것 같았다. 정은창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숨이 막혀왔다. 힘들다. 긴장은 사람을 쉽게 지치게 했다.
“어디, 쏠 줄은 아나? 꼬맹이.”
황도진은 여유를 부렸다. 바닥에 뚝뚝 피를 흘리고 있으면서 기세는 전혀 죽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정은창의 모습이 하룻강아지가 벌벌 떨고 있는 모습으로 보일지도 몰랐다. 정말 그는 떨고 있었다. 아까 맞은 머리도 아팠고, 어깨도 아팠다. 귀도 먹먹했고 그냥 다 짜증이 났다. 그렇지만 정은창은 죽고 싶지 않았다. 그 생각으로 그는 권총을 쥐고 있었다. 그래서 서 있었다. 벌벌 떨려서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정은창은 그를 겨눴다.
“정은창.”
김성식이 그를 불렀다.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정은창의 시야에는 황도진만 보였다. 이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가 복잡했다. 쥐고 있는 쇳덩이가 무거웠다. 총알이 얼마나 장전 되어있고,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시야가 붉었다. 자신은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한데 황도진이나 김성식이나 너무 여유로운 모습도 이해가지 않았다. 정은창은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발버둥을 치려는데 두 사람의 태도에 자신만 멍청한 것 같았다. 황도진이 자신 쪽으로 한걸음 다가왔다.
“다, 가 오지 마!”
“어이, 내려놔. 쏠 줄 모르는 놈이 쉽게 들 만한 게 아니야.”
내려놓고 싶었다. 자신도 이런 쇳덩이, 쥐고 싶지 않았다! 이런 거 제대로 쥐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걸 내려놓으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앞은 황도진, 뒤는 김성식이었다. 내가 물러설 곳이 어디 있다고? 황도진의 팔을 바라봤다. 자신이 쑤셨던 팔이 다른 쪽에 비해 늘어져 있었다. 흘러내리는 피가 선명했다. 자신이 낸 상처였다. 총을 내리면, 상황이 뻔했다. 분명 자신을 죽일 터였다. 자신이 죽는다. …죽고 싶지 않다. 이를 위해 이 길을 걸은 게 아니었다. 정은창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황도진은 제 말에도 불구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와 동시에 높은 총성이 울렸다.
결코, 의도한 게 아니었다.
손이 떨려서, 방아쇠가 그대로 당겨졌다.
황도진의 얼굴에 처음으로 놀란 감정이 씌워졌다.
그의 복부에서 피가 흘렀다.
눈먼 총알은, 그대로 그의 몸에 파고들었다.
정은창은 숨을 죽였다.
“헉, …흐, 억.”
그런데도 터져 나오는 거친 숨은 감출 수 없었다. 식은땀이 마른 바닥에 툭, 툭 떨어진다. 자꾸 아찔해지는 시야를 억지로 잡으며 자세를 바로 세웠다. 무너질 수 없었다. 아니, 무너지면 안 된다. 겨우 이런 일 가지고 무너지려고 이제까지 버텨온 것은 아니었다. 움직여지지 않는 팔을 강제로 올렸다. 손에 쥔 금속 덩어리가 무거워서 금방이라도 휘청거릴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휘청거렸을지도 모른다. 이미 제대로 된 감각을 구분할 수 없었다. 바로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은창의 시야는 자꾸만 기울고, 휘어지고, 무너지고 있었다. 드러내지 않을 뿐, 이미 길을 잃은 상태였다. 그럴수록 쥐고 있는 권총을 바로 고쳐 잡았다.
억지로 입안의 살을 씹고, 손톱 끝으로 손바닥의 여린 살을 긁었다. 하도 긁어서 붉다 못해 부어오르기까지 했다. 총알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를 것을 쥐고 그렇게 애를 썼다.
“하, 하하…. 김성식, 이 은혜도 모르는 놈.”
벽에 등을 기대며, 황도진은 입안에 고인 핏덩이를 쿨럭 내뱉었다. 핏덩이와 함께 내뱉어진 목소리는 끔찍했다. 누가 들어도 죽어가는 이의 목소리였다. 성대를 엉망으로 찢어놓은 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다. 그는 자신에게 총을 쏜 놈이 아니라, 이 상황을 만든 사람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눈이 마주쳐도 그 입에서 정은창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이름을 모르더라도 그에 대한 언급 또한 없었다. 알 수 없는 기분이 든다. 정은창은, 움직이지 않는 눈동자를 억지로 굴렸다. 또 김성식과 시선이 마주쳤다. 웃고 있나? 어지러운 시선으로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왠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젠장, 젠장. 정은창은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왜 일이 이렇게 됐는지 전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왜 김성식이 아니라 자신이 황도진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지, 왜! 왜!
“은혜라니, 은혜는 무슨. 제가 이제까지 조직을 위해 한 일을 생각해보시죠. 도진 형님.”
이 자리에서 제일 멀쩡한 사람은 김성식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망가져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가방 잡이 길막이는 말이 없었다. 눈을 뜨고, 귀가 열린 사람은 세 사람뿐이었다. 그중에 한 사람만 멀쩡했다. 정은창은 사실 자신이 똑바로 눈을 뜨고, 귀가 열려있는지도 긴가민가했다. 소음기가 달리지 않은 총이 몇 번이고 발포되면서 자신의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소리가 한 번씩 울리며 들려왔다. 속이 어지러웠다. 팔도 아렸다.
“정신 차려야지, 정은창이.”
날카로운 말이 자신을 향한다. 화들짝 놀래며 무너지던 팔을 고쳐 들었다. 어느새 김성식이 자신의 바로 옆에 있었다. 아니다, 아직 떨어져 있나? 아니. 바로 옆에 있었다. 어깨에 손이 닿는다. 김성식은 말랐다. 옷 위로 봐도 말랐다. 황도진과 비교해도 말랐고, 자신과 비교해도 마른 사람이었다. 뼈대에 살가죽을 붙여놓은 것처럼 손가락 마디가 가늘고 관절 부분은 선명했다. 그렇게 보여도 실제론 그렇게 마르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김성식은 정은창이 생각하는 것만큼 마른 사람은 아니었다. 어깨들 속에서 유독 말라 보이는 체격이었을 뿐이지. 아니 정은창에게만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니고?
“가만히 뭐 하는 거야, 마저 하던 거 해야지.”
어두운 그림자가 자신의 손 위로 얹어졌다. 아니 김성식의 손이다. 자신의 체온에 비해 훨씬 서늘한 온기가 닿는다. 침을 꼴깍 삼켰다. 침 넘어가는 소리도 유독 크게 들려오는 기분이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빌어먹을. 이미 자빠져 누워있는 이에게 원망을 내던졌다. 황도진을 막기로 했던 두 새끼가 왜 자빠져 있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지. 김성식은 자신을 위해서 벌인 일이면서 왜 자신에게 황도진의 끝을 내라고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형님도 감이, 많이 떨어지셨나 봅니다.”
종이 끊임없이 울렸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같이 울려댔다. 또다시 참상이 떠오른다.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겨우 자그마한 총알 하나로 숨이 멎어가는 것들과 신발 밑창을 더럽히는 끈적이고 기분 나쁜 붉은 핏덩이들. 꺼져가는 숨들과 코앞에 둔 죽음들. 그 자리에 서 있던 자신. 호흡이 가빠졌다. 정은창은, 쥐고 있던 총을 조용히 들었다. 힘없는 손이 장전하는 소리가 침묵을 깼다. 어지럽다. 아프다. 힘들다. 지친다. 아까 맞은 부위가 뒤늦게 더 심한 고통을 울려대고 있었다.
그런데도 살고 싶었다.
어디선가 쾅쾅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김성식의 목소리가 뒤섞인다. 쾅쾅 울린다. 황도진의 웃음소리도 들린다. 내가, 나는, 나는, …나는.
오빠!
눈앞이 번쩍거렸다. 선명한 목소리에 몸이 식었다. 내려가던 팔을 고쳐 들었다. 시끄럽던 소음들이 그대로 가라앉았다. 가라, 앉았다. 정은창은 낮게 숨을 내뱉었다. 모든 소리와 풍경이 느리게 흘러갔다. 정은창은 손가락을 굽혔다. 팔이 흔들리고 몸이 휘청거렸다. 지겨운 총성이, 마지막으로 울렸다.
황도진이 쓰러졌다. 김성식이 걸음을 옮겼다.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정은창은 총을 떨어트렸다. 멍했다.
“이야, 이놈 봐라? 대가리를 뚫어놨네?”
김성식이 유쾌하다는 듯이 웃어 재낀다. 어설프지만, 쓸 만한 놈이잖아! 웃음소리가 울렸다. 제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상냥하지 않았으나, 그것에 위로받는 알 수 없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굳이 몸을 굽혀 자신이 떨어트린 총을 주웠다.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총신을 닦더니 제 손에 다시 쥐여줬다. 주저 없이 그는 제게서 몸을 돌렸고 바닥에 자빠진 놈들을 발로 차 깨웠다. 그 소란 속에서도 움직임 없던 놈들이 일어났다. 개새끼들이다. 정은창은 아득해져 가는 정신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몸이 그대로 무너졌다. 눈을 감았다. 그저 악몽이라면 좋겠다. 그러나 현실이었으면 좋겠다. 왜냐면, 결국 자신은 살아남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살았다.
야, 너는 형님 곁에 왜 있는 거냐?
주정재라는 놈이 대뜸 그렇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정신을 잃었던 그 날, 결국 쿠데타는 성공하고 조직은 싹 갈아엎어졌다. 주정재 이놈은 가방 잡이로 자원했던 놈인데, 그날 아주 완벽히 줘 터지라 맞고도 아주 쌩쌩 돌아다니는 새끼였다. 줘 터지고도 나한테 헌혈해줬다며 생색내고는 핏값 핏값 주둥이를 털던 새끼였다.
“몰라. 살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지.”
“짜식, 그래도 그런 거 있잖냐. 이왕 이 길 걷게 된 거. 뭐라도 하겠다! 그런 거. 넌 없냐?”
술잔을 기울였다. 있을 리가. …있을 리가. 애초에 하고 싶어서 하게 된 일도 아니었다. 정은창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놈이었고, 학력은 쥐뿔에 돈도 없었다. 부모도 없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몸 쓰는 일밖에 없는 놈일 뿐이었다. 그런 놈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 거기서 거기지. 정은창은 쓰린 목구멍에 크으, 하고 짧게 숨을 뱉었다.
“없어. 똑같은 깡패 짓인데 뭘.”
“그래도 너는, 이후로 형님이 얼마나 아껴 하시냐. 아주, 부러워 죽겠어.”
비워진 술잔에 술이 채워진다. 아껴, 아껴. …그래. 그날 이후로 김성식은 정은창을 아껴 했다. 이번 일에 큰 공을 세웠다고 했다. 실질적으로 얼마든지 김성식 본인이 끝낼 수 있던 일이었고 자신을 밀어 넣었던 거면서 그렇게 자신을 추켜세웠다. 그 뒤로 맡게 된 일의 무게도 달라졌다. 그에게 큰 충성심이 있던 건 아니고, 그저 죽지 않기 위한 길을 선택하다 보니 그의 아래에 있게 된 거였는데.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 그의 아래가 아니면 안 됐다. 김성식의 아끼는, 김성식의 개새끼라는 이야기는 멀리 퍼졌다. 김성식이 맡긴 일을 하다 보니 적도 많아졌다. 살기 위해 잡은 끈이, 이제는 쥐고 있지 않으면 물러날 수도, 무를 수도 없는, 말 그대로 죽는 길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정은창은 끊임없이 스스로 되물었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야, 야! 정은창! 천천히 마셔 임마! 너 골로 가!”
어쩔 수 없는 충성을 바치며 지내면서도 후회와 불안과 초조함이 자신을 찔러대고, 누른다. 죄책감이라는 덩어리가, 제 눈앞에서 죽어 나갔고, 죽였던 이들이 발목을 잡아 왔다. 살았고, 살아남았으나 마음은 그날에 머물러있었다. 아니, 그날보다 훨씬 더 오래전 그 과거에.
-형님.
왜.
-저는, 지금 잘 하고 있는 겁니까?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걸 그렇게 지껄여? 정은창, 내가 우습지?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잘해. 지금까지도 잘 해왔지만, 앞으로도 더, 더! 잘하란 말이야. 성장하는 우리 선진을 봐봐. 딱 미래 스케일이 보이잖아. 그래. 이래야지.
-…예.
은서가, 보고 싶었다.
보이지 않는 목줄이 자신을 감았다. 갑갑한 시선들이 자신을 옭아매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자신에게 되묻고 대답하고, 부딪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어? 이건, 옳은 일이야? 이대로도 괜찮아? 정말, 나는 괜찮은 건가? 그러면 충성스러운 개새끼는 열심히 짖어댄다. 다른 생각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렇게 부딪힌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오고, 또 죽을 고비를 건너러 스스로 몸을 던졌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살아 돌아와 안심하며 자신의 행동에 회의감이 들었다. 한심한 행동이다.
그날도 그랬다. 방심. 안 좋은 방심으로 몸에 총알 받고 돌아오고, 김성식에게 또 깨졌다. 실망이야, 정은창이…. 깔끔하게 처리하고 왔어야지. 이 김성식의 개새끼라는 호칭 달고, 처맞고 와? 분명 낮에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이건 화풀이였다. 그가 조직의 대가리가 된 이후로 방안에 검은 놈들이 늘 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 김성식은 정은창이 자신의 개새끼라는 것을 이렇게 강조하는 일이 잦았다. 의문이었다.
“이봐! 노구치! 이놈 총알 좀 빼놓고, 멀쩡하게 고쳐놔!”
마지막은 들고 있던 잔을 바닥에 내던지며 그렇게 외쳤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산산이 조각난 조각들이 바닥을 어지럽혔다. 벽에 서 있던 한 놈이 무릎을 굽히고 조각을 손으로 줍기 시작했다. 정은창은 뒤돌았다. 문 입구 쪽에서 노구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성식을 한번 바라보다 상체를 꾸벅 숙이고는 문으로 다가갔다. 걸음이 묘하게 절뚝거렸다.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상처 부위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아직도 계속 화끈거리는 고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노구치가 먼저 앞장섰다. 꼴에 의무실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향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곳은 노구치의 방과 다름없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건물의 가장 안쪽, 구성의 문. 그곳이 의무실이었다. 실제로 드나드는 사람은 잘 없었다. 문을 열었다. 잠금장치 하나 없이 문이 열렸다. 휑한 내부가 자신을 반겼다.
싸고, 낡은 가구. 정말 방의 구색만 갖춘 인테리어였다. 노구치는 별말 않고 진열장을 뒤적거렸다. 정은창은 익숙하게 소파에 앉았다. 이런 상황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아, 악. 아파. 좀 살살 좀 해!”
곱지 않은 말투가 내뱉어진다. 노구치는 그를 한번 쳐다보는 것을 끝으로 다시 손을 움직였다. 배려심 없는 손길은 거칠었고, 자잘한 아픔이 이어졌다. 진통제도 마취제도 제대로 처방하지 않으면서 상처를 누르는 건 좀 살살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아무리 불만을 토해내도 제대로 반응이 돌아오지도 않는다. 정은창은 눈앞이 핑 돌아서 멀쩡한 손으로 눈을 덮었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시야를 가린 채 소리를 들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노구치 옆은 알게 모르게 안심이 되는 곳이었다.
“…이봐, 노구치.”
노구치가 고개를 들어 정은창을 바라봤다.
“넌 지금 이대로도, 괜찮냐?”
왜 물었는지 모르겠다. 정은창이 노구치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일본에서 김성식이 직접 사 온 놈이라거나, 생각보다 의료 기술이 나쁘지 않다던가, 사람 얼굴 고치는 일도 할 줄 안다. 그런 정도였다.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모든 게 노구치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일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의사소통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 상태로, 돈에 옆 나라로 팔리고, 또 하는 일은 얼굴 고치거나 시체 처리나, 깡패 놈들 치료다. 누구라도 썩 만족하지 못할 만한 상황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정은창은 단 한 번도 노구치가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대답을 바라고 물은 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반응은 있었다. 정은창의 팔을 닦던 손이 멈칫했다. 잠시 그렇게 가만히 있더니 마저 그의 피부를 닦아냈다. 더, 이야기해 볼까. 정은창은 고민했다. 그러다 노구치와 시선이 마주쳤다. 알 수 없는 감정이 흘러온다. 이건, 모르겠다. 무슨 감정인지 정은창은 알 수 없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이런 일투성이다. 이곳은 이상하다. 괜한 걸 물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쯤 되면 궁금하다. 답을 바라지 않았으나 답을 바라게 된다. 노구치의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그가 품은 감정은 궁금해지는 법이었다. 얼추 끝난 치료에 정은창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쏟은 피고 피지만, 정말 피곤했다.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꺼내 놓은 약품들을 정리하는 노구치를 바라봤다. 변덕, 그래. 변덕이다. 그래. 변덕이다.
“…필요한 일 있으면, 붙잡고, 도움을 청해. 도와줄 테니까.”
변덕의 이름이다. 자기 할 말을 끝낸 정은창은 그대로 의무실을 나왔다. 노구치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확인도 하지 않았다. 버리지 못한 정의 흔적이다. 동시에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으며 드는 생각은 깊고, 습한 생각이다. 내가, 내가 뭐라고…. 그를 동정하는가. 그렇다. 변덕이 아니라 동정이다. 지극히 이기적인 감정의 쓰레기다. 음습한 감정이 치솟는다. 잔잔하게 치던 파도가 높게 올라온다. 집어삼킬 듯 흐른다. 아, 정은창은 눈을 감았다. 은서, 은서가 보고 싶은 밤이다. 상처 부위가 욱신거렸다.
*
“술을 왜 이렇게 처 마셨어, 이놈은?”
아픈 몸을 굳이 이끌고 기분 전환 삼아서 나왔는데 만난 것은 주정뱅이 술꾼이었다. 유상일…. 얼굴을 많이 맞댄 사이였다. 같은 일을 맡은 적도 여럿 있었고, 사람이 나쁘지 않은 놈이었다. 왜 깡패를 하는지 이해 가지 않을 때도 있던 새끼였다. 그런데 왜 이놈이 길바닥에 앉아서, 쳐 울고 있는지.
정은창은 괜히 나왔다는 생각에 짜증 어린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주변에서 도와달라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랬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유상일도 이제 떨거지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에 서 있는 놈이었다. 이렇게 깡패 생활에 깊게 물들었다. 내가. 복잡한 기분이 들어 몸을 숙였다. 녀석의 뺨을 톡톡 쳤다.
“유상일.”
“아연이, …아연이 보러,”
“아연이?”
정은창은 고개를 기울였다.
“아연이, 우리 아연이…. 내 딸, 어여쁜…. 아연아, 아연아….”
부름은 울음이었다. 술에 취해 발음이 엉망으로 뭉개졌지만, 이름은 선명하게 들렸다. 이 녀석에게 딸도 있었나? 의아했다.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서로의 사정은 딱히 관여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찝찝한 기분을 뒤로하고 다시 유상일을 툭툭 쳤다.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놈을 보고 있자니 과거의 자신이 천천히 기어온다. 유상일의 옆에 앉아 똑같이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 은서야, …. 우리, 은서. 정은창은 손을 들어 제 머리를 헤집었다. 정신 차려, 정은창. 뭘 보는 거야. 고개를 흔들었다.
“아빠가, 미안해…….”
미안하면 미안할 짓을 하면 안 되지. 스스로도 우스운 소리를 내뱉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유상일과 자신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사사로운 것에 파고 들어가면 다른 점이 더 많겠지만 가끔 이렇게 알 수 없는 동질감이 성큼 기어오곤 했다. 유상일에 자신을 비춰보는 자신이 지긋지긋했다.
“잃기 전에, …후회하기 전에 잘 챙겨.”
과거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내뱉는다.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뭐 하는 짓이냐. 정은창은 몸을 일으켰다. 이놈은 안 돼. 손으로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덩치를 불렀다. 산만한 것들이 정신 사납게 눈을 굴려댄다.
“이놈, 사무실에 좀 눕혀 둬. 술기운에 정신 못 차리면 대충 맞아주고 나한테 돈 받아가.”
그제야 서넛이 붙어 술에 취한 유상일을 일으켰다. 술기운에 몸을 스스로 가누지 못해 휘청이는 유상일을, 가만히 바라봤다. 늦은 새벽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간판들과 불빛을 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뒤에서 눈치 보던 놈이 조심히 제게 다가온다.
저, 형님께서 부르십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인상을 찌푸린 채 놈을 바라봤다.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놈을 보다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퀴퀴한 담배 연기가 폐에 가득 차오른다. 김성식이, 그가 왜 나를 부르는 걸까. 담뱃재를 바닥에 털어내고는 아직도 옆에서 기다리는 놈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알았으니까 가봐.”
녀석은 한참 눈치를 보더니 상체를 꾸벅 숙이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저렇게 인사하는 꼬라지를 보고 있으니 어느 누가 봐도 자신은 깡패로 보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깡패 짓거리를 하는 건 맞았지만, 그냥 기분이 그랬다. 흩어지는 담배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타들어 가는 담배를 바라보다 바닥에 떨어트리고 신발 끝으로 밟아 불씨를 완전히 꺼트린다.
김성식, 그래. 우리 형님. 부르시면 가야지. 가야지…. 그래. 제기랄.
이 문이 왜 무겁고, 크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다. 이미 문 앞에 서 있는 주제에 다시 담배를 찾게 되었다. 목이 탄다. 마른 목을 애써 무시하고 목을 몇 번 가다듬다가 노크를 했다. 맑은소리가 들린다. 정은창입니다. 라고 말하기도 전에 안에서 늘 상 듣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조용히 문을 열었다. 방 안 풍경은 특별히 달라진 건 없었다. 애초에 몇 시간 전에도 여기 들어왔었는데 그사이에 달라질 게 뭐가 있나 싶다. 벽 쪽에 서 있던 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돌려 김성식 앞에 섰다. 그는 서류 보고 있었다. 제 인기척을 느낀 그가 펜을 내려놓았다.
“나가봐.”
“예, 예?”
정은창은 뭐 하자는 건가 싶었다. 불러놓고서 오자마자 나가라고? 그런 생각으로 멍청하게 보고 있자니 김성식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 또라이 새끼.
“정은창이, 너 말고 새끼야.”
“예?”
“하, 또라이 새끼.”
결국 음성으로도 듣는다. 정은창은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김성식은 옆을 손짓했다. 그러니까 자신보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 벽에 서 있는 놈들 이야기였다. 쪽팔리게 진짜…. 무안했다. 동시에 드는 기분은 좀 기이했다. 김성식은 대가리에 앉고 한 번도 경호원 놈들을 밖으로 보낸 적이 없었다. 언제, 어떤 일이 있어도 그의 벽에 서 있던 시커먼 놈들을 못 봤던 적이 없는데 갑자기 그들을 내보내고 자신을 들인 행동이 이상했다.
“앉아.”
김성식은 소파를 턱짓으로 가리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은창은 멍청하게 있다가 저를 노려보는 시선에 엉거주춤 일어나 그가 가리켰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가시방석이었다. 김성식은 진열장에서 병과 잔을 꺼내 탁자에 올리고 정은창의 맞은편에 앉았다. 정은창은 김성식을 살폈다. 안색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피곤해 보였다. 지금 시간이 새벽 3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여태 서류를 보고 있었다면 피곤할 만도 했다.
…쉬기는 하나? 문득 드는 생각이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셔.”
그의 말은 늘 간결했다. 목적이 뚜렷했다. 자연스레 스며든 명령조였다. 그는 투명한 유리잔에 술을 부었다. 술에 떡이 되었던 새끼를 보고 와서 그런지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공손하게 술잔을 받아들었다. 김성식은 늘 고급술을 찾았다. 결코, 싸구려 술은 입에 대려고 하지 않았다. 독하고, 쓰디쓴 술을 그는 즐겨 마셨다. 한번은 너무 독해서 콜록거리던 자신을 보며 웃었던 적도 있었다. 창피했었다. 이번에는 생각보다 그렇게 강한 술은 아닌 것 같았다. 목이 깔끔했다. 정은창은 조용히 김성식의 눈치를 살폈다. 계속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김성식은 계속 술잔을 기울이기만 기울이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부른 거야? 곱지 않은 생각이 비죽 튀어나왔다.
단순히 술 상대가 필요하다면 굳이 자신을 부를 필요도 없을 터인데. 술이 부드럽게 목 뒤로 넘어간다. 아딸 딸 한 술기운이 찬바람에 식었던 몸을 데웠다. 말이 없으니 술이라도 넘겨야지. 그렇다고 무식하게 마실 자신은 없어 홀짝이기만 하다 다시 김성식을 바라봤다.
“형님, …쉬기는, 하십니까?”
아까 전 생각의 연장이었다. 정말 뜬금없고, 앞뒤 없는 물음이다. 물어놓고 자신도 아차 싶었다. 정은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차마 김성식을 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술잔을 쥔 상태였다. 반쯤 남은 액체가 작은 움직임에도 찰랑거리며 움직였다. 웃음소리가 들린다. 괜히 혼자 움찔하며 잔 끝을 엄지로 쓸었다. 술은 차가운데 왜 몸은 뜨거워질까.
“정은창이, 많이 컸어. 형님 걱정할 줄도 알고?”
그 목소리가 생각보다 가볍고, 웃음이 서려 있어서 부러 하던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하, 하.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김성식이 다리를 꼬고 천천히 술을 넘기고 있었다. 그 상태로 시선이 마주쳤다.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자신이었다. 늘 그런 것 같다.
빈 술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맑았다. 그는 빈 잔에 술을 다시 채워 들었다. 호박빛이 달곰하게 흘렀다.
“은창이.”
“예.”
“내가, 너를 많이 아껴 하는 거. 알지?”
“…알다마다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기에 이해한다고 내뱉기도 무안하다. 대답하는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당당히 내뱉는 것이 우습다. 이해할 수 없지만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기에 틀린 답도 아니었다. 뭐라고 표현하기도 어렵다. 확실한 건 김성식은 자신에게는 많은 기회를 내려준다는 것이었다. 높이 올라갈 기회? 아니, 실수를 만회할 기회.
언제였는지, 까마득해진 옛날, 김성식은 정은창이 미처 죽이지 못한 놈의 머리채를 붙잡아 그의 앞으로 던져준 적이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하는 의문보다는, 우스워졌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정은창에게는 우습게도, 죽일 수 없어 놓아준 사람들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훨씬 더 엉망인 꼴로 자신 앞에 놓여, 직접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밀쳐졌다. 그 뒤로 정은창은 같잖은 동정심을 품지 않는 법을 배웠다. 이것도 아끼기 때문에 하는 행동인가? 정은창은 얼마나 많은 밤을, 자괴감과 구역질로 보냈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요새 쥐새끼들이 많이 들끓어. 그렇게 쳐내고, 쳐냈는데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고, 슬금슬금 기어오는 게 아주 미칠 지경이야.”
김성식이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힘이 실려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잔을 쥔 손끝이 하얗게 변했다. 김성식은 분노로 손을 떨고 있었다. 김성식은 쥐새끼를 싫어했다. 싫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쥐새끼, …. 문득 알싸한 알코올 향을 입안에 머금고 있으려니 싸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아는 것과 다른 것을 들었던 것을 천천히 떠올렸다. 아니겠지, 하면서도 작은 의심이 싹을 틔우는 순간 그것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제 표정의 변화가 있었는지 김성식이 흠? 하고는 바라본다.
뒤늦게 표정을 수습한다지만, 제대로 감춰질 리가 없다.
“짐작 가는 게, 있나 본데.”
“……확실하진 않습니다.”
“정은창이, 내가 원하는 답은 그게 아닌데. 알잖아? 내가 무슨 답을 원하는지.”
“…추려내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제야 김성식은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깊은 신뢰가 담겨 있었다. 정은창은 이해할 수 없는 신뢰다. 확실한 건 김성식은 이상했다. 차가운 공기를 폐에 담았다. 뭐가 그렇게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모두 다 이상했다. 전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느낌, 분위기, 사소한 손짓까지 모든 게. 김성식은 기이할 정도의 깊은 신뢰를 자신에게 내리고 있었다. 똑같은 깡패 중의 하나일 뿐일 자신에게. …처음부터, 쭉 그래왔다.
동시에 자신도 이상했다.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들었다.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앎에도 피하지 않고 끈을 쥐어 들고 잡아당겼다. 단둘이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갔다. 정은창은 궁금했다. 어째서 자신에게 이러한 신뢰를 품고 내릴 수 있는지. 김성식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의문만 품고, 늘고 그러한 해를 몇 해고 보냈다. 그렇게 옆에 있으면서 정은창은 스스로 김성식에게 벗어나지 못할 수령에 발을 적셨다.
모두가 정은창을 보고 김성식의 충실한 개새끼라고 손가락질하고 뒤에서 이야기가 흘러왔다. 정은창은 감히 자신이 부정할 수 있는가. 의문을 던졌다. 부정할 수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김성식이 물라고 하면 물고, 짖으라고 하면 짖는, 그래. 김성식의. ….
이제, 정말 정은창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쩌고 싶은 거지?
조직 내부가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한낱 따까리 놈들이 보더라도 조직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술렁거릴 정도였다. 그 분위기가 당연하겠지만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이게 다 쥐새끼들 때문이었다. 사소로운 일들에 쥐새끼와 박쥐, 아무튼 같은 쥐새끼 놈들이 갉아놓은 틈으로 물이 새버린 탓이다. 건물 안으로 물이 샌다면 부식은 순식간이었다.
김성식은 둘이 있을 때면 초조함과 분노를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화풀이의 폭력과 폭언이 돌아오기도 했지만 금방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시선으로 정은창의 몸에 남긴 자신의 흔적을 훑어 들었다. 새벽의 시간은 그의 것이었다.
“형님!”
그러던 와중에 노구치가 도망치다 잡혀 들었다. 일을 보고 하던 중이었다.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김성식이 찌푸리며 앞을 바라본다. 익숙한 덩치들이 노구치를 질질 끌고 와 김성식의 앞에 던졌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노구치를 바라봤다. 바닥에 널브러진 노구치는 꼬라지가 말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엉켜 들고, 옷도 먼지투성이에 드러난 피부들에도 온갖 멍과 상처투성이였다. 도망칠 거면 제대로 도망쳐야지. 정은창은 혀를 찼다. 김성식의 감정이 넘실거리며 제게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노구치는 신음을 흘렸다. 말이 되지 못한 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정은창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거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우스웠다. 그의 눈동자가 언젠가 보았던 감정으로 울렁거렸다.
“노구치, …내가 얼마나 아껴 했는데. 그걸 배신으로 돌려줘?”
분노한 목소리가 방안을 날카롭게 찢어댔다. 정은창의 발목에 질척거리는 감정의 덩어리가 매여 들었다. 기분 나쁜 느낌이 온몸을 기어왔다. 감히 입을 열지 못한다. 정은창은 고개를 돌렸다. 김성식은 조용히 손짓했다. 노구치를 끌고 왔던 덩치들이 그를 억지로 잡아 일으켜 세웠다.
“지하실로 처박아둬!”
그렇게 이야기하던 그는 아직도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 마냥 거친 숨을 내뱉었다. 보고하던 모습 그대로 멈춰 든 정은창은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직 물러가도 좋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해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도수 높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그는 정은창과 굳이 시선을 마주쳐 들었다.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리와. 정은창은 아무런 대꾸 없이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
더러운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다. 품은 의심은 짙어졌다. 그것은 썩 기분 좋지 않았다. 기분 좋아할 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확실히 정은창은 기분이 좋지 못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밤을 지새웠다. 지나가던 유상일이 제 어깨에 손을 올리며 걱정스레 묻는다.
“정은창, 요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안색이 너무 안 좋아.”
정은창은 그 손을 가볍게 내쳤다. 제 두통의 원인 중 하나가 잘도 걱정한다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좋겠지. 그래. 표정이 절로 구겨졌다. 썩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임에도 유상일은 잘도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미안, 참견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한숨을 쉬었다. 유상일의 딸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를 찾아봐도 알 수가 없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에 대한 흔적도 없다. 그래서 아무도 유상일에게 자식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술에 취한 날 밤. 정은창은 그가 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문제였다.
이 새끼가, 쥐새끼라면?
그날 밤, 술집 거리에서 스쳐 가며 들었던 생각이고, 김성식과 마주하며 떠올렸던 사람이었다. 정은창은 감이 좋은 사람이었다. 흔히 말하면 촉이 좋다는 것과도 같았다. 작은 의심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다. 차라리 정말 딸이 있다는 정보를 눈으로 직접 읽고 싶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편해질 것 같았다. 아, 새끼. 딸 있는 놈이 이런 일 해서 되겠냐? 하며 핀잔을 주며 어깨를 푹 치고 지나갈 수 있는 일로 해결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막상 찾아본 서류에는 어디에도, 그 어디에도! 녀석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한 줄도 없었다.
정은창은 유상일이 울면서 불렀던 이름을 떠올렸다. 아연아. 그 불음이 거짓 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이렇게 깨끗하게 조작된 서류들을 보며, 녀석을 경찰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가 있나? 소름이 쫙 끼쳤다. 이제껏 유상일과 같이 했던 일 중에 경찰이 끼어들었던 사건이 떠오른다. 그중에 또다시 거르고, 거른다. 아니겠지, 하고 넘어갔던 녀석의 기이한 행동들이 차례차례 이어진다. 생각의 끝은 결국 똑같았다. 유상일은, 유상일은….
“젠장, …나보고 어쩌라고.”
김성식에게 녀석의 이름을 꺼내야 할지 갈등을 품었다. 갈등을 품으면 안 될 문제라는 것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쉬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김성식과 단 둘이 있을 때마다 입을 열려다 주저한다.유상일을 보면 당장이라도 멱살이라고 잡고 호통치고 싶어졌다. 왜, 왜! 쥐새끼면, 쥐새끼답게 모든 걸 감췄어야지. 드러내지 말았어야지. 다 숨겼어야지! 꼬리를 하필, 왜 자신에게 들킨 거냐고. 정은창은 유상일에게 가끔 자신을 투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은서를 떠올렸다. 은서가 보고 싶었다. 울고 싶었다. 그러나 며칠이 채 지나지도 못해서 말하지 않는 자신의 노력에 의미가 없어졌다.
김성식은 굴을 파놓았다. 함정을 파놓고 일을 꾸몄다. 정은창도 눈치채지 못한 일이었다. 큰 건수의 일을 세밀하게 짜놓고, 그 그물에 벗어나는 쥐새끼를 잡기 위한 덫.
김성식은 모든 조직 놈들을 소집했다. 정은창은 낯익은 얼굴들을 훑었다. …유상일이 없었다. 십분, 이십 분, 한 시간, 그 이후에도 유상일은 결국 도착하지 않았다. 함정에 빠졌다. 유상일은, 그래. 결국 짭새였던 거였다. 김성식이 분노로 유상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코 앞에서 지켜봤다.
“그 새끼 오면! 당장, 내 앞으로 데려와!”
높은 언성이 모두에게 내려쳤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사무실로 들어서는 유상일을 잡았고, 머지않아 그는 지하실로 내려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정은창은 글쎄…. 느리게 주변을 훑었다. 아랫놈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대가 유상일이었으니까 그럴 법도 했다. 정은창,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조직에서 몸을 담갔던 놈이었다. 녀석을 동경하던 이들도 있었고, 형님, 상일 형님. 하면서 따르던 사내놈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근래에 이르러선 녀석도 조직 내에서 다져놓은 위치가 결코 얇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짭새라는 사실은 혼란을 줄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이러다 김성식도 짭새인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은근히 들렸다.
이것은 몰락의 길이었다. 정은창은 한숨을 쉬었다. 김성식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유상일, 이 멍청한 새끼….”
답답한 목소리가 연기와 뒤섞여 허공에 사라졌다.
지하실로 내려가자 꿉꿉한 냄새가 진동했다. 퀴퀴하게 쌓인 먼지가 숨 쉴 때마다 폐에 싸여가는 기분이다. 정은창이 지하실까지 내려가는 일은 별로 없었다. 몇 번을 와도 이곳은 매번 낯설었다. 손으로 낡은 문을 여니 바로 앞에 노구치가 있었다. 발목을 죄는 족쇄가 보였다. 누구의 취향인지 정말…. 움직일 때마다 부딪혀서 그런지 발목 안쪽이 쓸려있는 게 보였다. 혀를 차며 주변을 살폈다. 안쪽에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저기가 유상일이 있을 터였다. 안은 조용했다. 정은창은, …문을 열지 않았다. 다만 몸을 숙여 노구치와 시선을 마주했다. 노구치의 손이 자신의 옷을 잡는다. 그 손 역시 상처로 엉망이었다.
그는 눈으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서 삶을 보았다. 옆에 과거의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살고 싶어 하는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정은창은 별말 없이 손을 뻗었다. 능숙하지는 못해도 서툰 손이 그의 족쇄를 천천히 풀었다. 노구치가 눈을 휘둥그레 뜨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도와준다고 했잖아.”
노구치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기억 못 할 게 분명한 과거의 일이다. 정은창은 조용히 주소 하나를 불러주었다. 외워. 일단 외워. 녀석이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모른다. 알아서, …도망쳐. 정은창이 변덕으로 부리는 동정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이었다. 자신과 연관되어있다는 흔적도 없는, 그러한 곳. 노구치는 안쪽 문을 바라봤다. 무언가 눈치 보는 듯하더니 녀석은 몸을 꾸벅 숙였다. 절뚝거리는 걸음은 급했지만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조심스러웠다. 정은창은 조용히 왔던 흔적을 지우고 위로 올라갔다. 길은 침묵이었다.
노구치가 사라졌다. 그 사실은 가뜩이나 잔뜩 상한 김성식의 속을 긁는 사실이었다. 김성식은 몇 번이고 잔을 깼고, 당시 자리를 비웠던 녀석들을 조졌다. 더 조진 놈들을 고칠 수 있는 놈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유상일을 패대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지하실에 걸음 하는 횟수 자체도 확연히 줄었다. 좋은 일인지 모르겠다.
“정은창이, 유상일 그놈, 겉만 대충 번듯하게 만들어둬.”
다음 거래에, 써야겠어. 그렇게 이야기하며 김성식은 술을 들이켰다. 허공에도 알코올이 퍼진 착각이 든다. 정은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단둘이 자리하는 것은 이제 예삿일이 아니었다. 몇 년 동안 이어진 일상이었다.
“후…. 은창이, 내가 기대하는 거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만큼만 해. 괜히 껄떡거리지 말고.”
서로 술기운에 취하고,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분위기에 취하고 그렇게 새벽을 보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밖에서 도는 소문이 있었다. 치졸하고 더러운 소문이었다.
그러나 정은창은 생각한다. 그게 전부 거짓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김성식이 손짓한다. 다가갔다. 볼을 쓰는 손길이 섬세했다. 눈을 감았다. 깊은 새벽이었다. 다정하면서 서늘한 온기가 닿았다.
*
“따까리, 뭐해?”
백석의 여자다. 피우던 담배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별로 타들어 가지 않은 담배를 신발 끝으로 비벼 껐다. 강재인이 바닥을 한번 바라보더니 씩 웃는다. 적당히 마신 술이 몸을 데웠다.
“뭐야, 답지 않게 배려해주는 거야? 이거 고마워서 어쩌지.”
“배려는 무슨….”
김성식이 백석 저택으로 향할 때 동행하는 인원은 거기서 거기였고, 정은창은 웬만하면 고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백석의 비서인 그녀와도 얼굴 맞대는 일이 잦았고 말을 트게 된 사이기도 했다. 일방적으로 상대 쪽에서 먼저 튼 거였지만. 이제 그녀가 이쪽에서 백석에 심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 그렇게 죽을상이야?”
“내가 죽을상 하든 말든, 그쪽이 무슨 상관이야?”
“어머? 사람이 신경 써서 말 걸어줬더니, 대답하는 것 좀 봐!”
높은 목소리가 귀를 울린다. 여자의 목소리는 늘 높았다. 아니, 비서일 때는 정말 같은 사람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공적이고, 딱딱한데 사적인 상황에서는 이렇게 텐션이 잘 오르고, 가라앉는다. 매번 볼 때마다 신기했다. 솔직히 귀찮기도 했다. 화려한 조명 따라 그녀의 밝은 머리카락 색에 다른 색이 입혀진다
“…야.”
“따까리. 누구 보고 야래?”
“그러는 그쪽은, 누구보고 따까리래?”
아 젠장. 이렇게 말싸움하자고 불렀던 게 아닌데. 꼭 한마디를 얄밉게 해서 다른 곳으로 이야기가 빠지게 만든다 진짜. 그녀를 흘겨보던 정은창은 제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손길에 짜증이 서려 있었다. 표정에 답답함이 물든다. 강재인은 그를 가만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한숨을 푹 쉰다. 어쩔 수 없지. 하고 중얼거리던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 …됐어.”
“설마 삐졌어? 따까리 속도 콩알만 해?”
“야, 너 진짜!”
욱하던 그가 금방 손을 내렸다. 얼굴을 한번 쓸다가 아예 그녀와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진 않고 끝을 잘근 씹었다.
“…너는,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냐?”
다짜고짜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는 표정으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표정으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말로 뱉어내려다 언뜻 보이는 그의 표정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강재인은 머릿속에서 최근에 보고 받았던 정보들을 끌어올렸다. 무너져 가는 선진의 빛. 그녀는 잠시 말이 없다가 그의 등을 퍽 쳤다.
“그걸 나한테 왜 물어? 네가 생각하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니야? 해왔던 대로 해! 네가 옳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까지 해왔던 거 아니야? 으이그, 답답이!”
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 또한 그를 바라봤다.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그녀와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가끔 보이는 행동은 밥맛이지만. 정은창은 짧게 웃으며 맞은 부분을 쓸었다.
“손 드럽게 맵네.”
“뭐? 야! 따까리!”
거리의 소음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뒤섞인다. 웃음소리와 욱하는 소리가 뒤섞이고, 오가는 말들에 묻힌다. 밤은 물들어가고, 날은 지나고, 새벽은 사라졌다. 정은창은 여전히 품은 의문을 정리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받아들였다. 괜찮겠지.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거겠지. 그래. …그래.
“형님, 성식 형님! 조심하셔야 합니다. 조심하실 땝니다!”
드물게 정은창의 입에서 언성 높인 소리가 내뱉어진다. 둘밖에 없는 방 안에서 그의 목소리가 벽에 닿아 울려 돌아온다. 그의 목소리는 절박함을 품고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더더욱 이해 가지 않았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 내가! 조심해야 한다는 거야, 정은창!?”
김성식 역시 언성을 높였다. 움직이던 펜을 쾅, 소리 내며 책상에 놓았다. 순간 움찔하던 정은창은, 숨을 들이마시더니 고개를 저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왜 자신이 이렇게 그에게 언성을 높이고 있는가. 왜 자신이 이렇게 소리를 치고 있는가. 숨이 떨렸다.
“압니다. 알지만! …”
“알아? 아는 놈이 그딴 소리를 지껄여? 나를, 뭐로 보고!”
“지금은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이러다 진짜 사달 납니다!”
조직이 기우는 상황에서, 김성식은 꿋꿋하게 위험을 넘나드는 거래를 계속해왔다. 마치 외줄 타기를 하는 것 마냥,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에서도 선택한다. 경찰 낌새가 심상치 않음에도 김성식은 거래를 확정 지었다. 영호 퍼시픽 호텔, 마지막으로 장소까지 바꿔서 계획을 이어갔다.
애초에 유상일이 짭새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부터 짜놓은 시나리오라고 그는 이야기했다. 노구치만 있었다면 얼굴을 갈아엎어 데려갔을 텐데,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정은창이, …내가 아주 우습지? 우스워? 우습냐고!”
김성식의 마른 손이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강한 힘이 그의 목을 쥐었다. 순식간에 갑갑해진 숨에 정은창의 표정이 하얗게 변했다. 어째서, 어째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 씨발. 김성식은 그런 놈이었지. 언제나 자신의 이해를 벗어난 사람이었다. 정은창은 시선을 내렸다. 김성식은 하, 하고 짧게 웃으며 정은창을 밀 듯 놓았다.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고 넥타이를 고쳤다.
“하, 이번 일에서 너는 빠져있어, 정은창!”
쓸모없는 놈은, 필요가 없지. 안 그래?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알았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이 소리치며 그를 말릴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그가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깡패 놈에 불과했다. 넘을 수 없는 담이었다. 거래 날짜도 일주일째 남지 않았다. 이제 와서 바꿀 수 있는 일은 결국 없는 것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재촉하는 그의 목소리에 겨우 뒤늦게 예, 예…. 하고 뒤늦게 대답했다. 다가오는 그 날이, 정은창은 무척이나 불안했다. 김성식은 손을 뻗었다. 정은창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차가운 손이 닿았다 떨어진다. 눈을 감았다. 수렁으로 떨어진다.
영호 퍼시픽 호텔, 거래 당일. 정은창은 찝찝한 기분을 결국 버리지 못하고 내내 시계를 바라보다 결국 한숨을 푹 쉬었다. 사무실 내 밖은 어수선했다. 인원 대부분이 차출되어 이번 거래에 투입되었으니 남아있는 녀석들도 정신없을 법도 했다. 지난 며칠간 그는 내내 불안감을 느껴왔다. 하는 일도 많지 않은데 얼굴에 스며든 피곤이 짙었다. 계속 잠을 설치고 있었다. 한 시간만 지나면 거래 시간이었다.
“괜찮아, 괜찮겠지….”
자신을 제외한 웬만한 간부들이 자리했을 터였다. 잘못될 일은 분명 없을 거다. 몇 번이고 자신을 다독였다. 피가 차갑게 식다가 다시 반대로 열이 올랐다.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초조하게만 느껴졌다. 약속 시각을 10분 남겨두고, 복도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신경 쓰지 않으려던 정은창이 결국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쾅 열었다. 지나가던 덩치를 잡았다.
“뭔데 이렇게 소란스러워?”
“! 형님, 형님! 큰일 났습니다!”
“…뭐?”
시끄러운 발걸음이 모두 제 살길을 찾아 헤매는 소리였다. 김성식이, 경찰에, 당해? 들어오는 소식들은 전부 다급한 이야기들이었다. 정보가 새어나가 경찰이 난입했고, 난전이 이어졌으며 패닉 룸으로 이동했으나 작동하지 않는 탓에 결국 경찰에 제압. 유상일 뿐만이 아니라 주정재, 최재석, …그 외에도 많은 놈이 짭새였다며,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하고 외치고는 덩치도 바쁘게 걸음을 움직였다. 이곳에도 곧 경찰이 들이닥칠 예정이라는 소리가 쩌렁쩌렁 들렸다.
미끼였던 유상일이 김성식을 붙잡고,
주정재가 도망치던 김성식을 붙잡고,
…최재석은 정보를 흘렸다고.
하, 하하! 시발,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개새끼들. 사방에 도망치는 목소리들이 귓가에 선명했다. 정은창은 크게 문을 내려쳤다. 주변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의 눈치를 보며 다들 빠르게 짐을 정리하고, 발걸음을 움직였다. 정은창은 인상을 찌푸린 채 걸음을 옮겼다. 김성식의 집무실은 아예 잠겨있지도 않았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텅 빈 그의 집무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상했다. 김성식이 없는 공간은. …정은창은 떨리는 손으로 책상 위를 쓸었다.
나는,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지?
흔들리는 시선으로 자신은 살고 싶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자신이 잡았던 줄이 끊어진다면, 자신 역시 떨어질 게 뻔했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의자에 앉았다.
…김성식이 늘 앉아 있던 자리다. 자신이 앉아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책상을 쓸던 손이 서랍을 향했다. 그가 아끼던 총이 들어있었다. 아래를 열었다. 잠겨있었다. 정은창은 어설프게 손을 움직였다.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랍이 천천히 열렸다. 빼곡한 서류가 안에 있었다. 이건…. 잠시 고민하던 정은창은 서류를 모두 챙겨 들었다. 그답지 않은 감정이 시야를 넘실거렸다.
지난 1월 3일, 종로 영호 퍼시픽 호텔에서 “선진화파” 두목 김 씨(45)과 그 간부들이 일망타진의 쾌거를 이뤄냈습니다. 수년간의 위장 잠입 수사와 수사팀의 작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져 아직도 화제에 … (중략) … 한편 김 씨의 재판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법원 앞에서 시위가 이어지고 있어 … (중략) … 이번 작전에 큰 공을 세운 유상일 경위, 빠르게 현장에 복귀해, “남은 잔여 세력들을 잡아내는 게 총력을 기울일 것.” … (중략) … 오늘 오후 3시경, 징역 7년을 선고받아 항의하는 목소리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법원에서는 … (중략) … 중요한 거래 장부가 행방을 알 수 없어 수사에 진전이 없어, 유력 용의자로 추정했던 정씨의 시신으로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어 방향을 잃어, 수사 종료의 압박이 이어지고 있다고 … .
❝이해하지 못했다.❞
눈이 녹고, 새싹이 피어오른다. 깊은 밤이 물러가고 서서히 새벽이 찾아온다. 7년, 벌써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이었다. 김성식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입구는 조용했다. 뒤를 슬쩍 바라봤다. 낡고 오래된 건물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오랜만에 몸에 걸친 멀끔한 옷은 새삼 어색하게도 느껴져서 옷매무새를 다시 정리했다. 느린 발소리가 묵직했다. 지긋지긋한 감방 생활도 오늘로써 안녕이었다. 뒤로 보이는 풍경들이 삭막하기 그지없다.
“형님.”
김성식은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형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분명했다. 처음 보는 놈이었다. 오래 묻힌 기억을 뒤져봐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멀끔하게 생겨서는 얼굴에 피곤함이 제대로 서려 있었다. 턱 아래쪽에는 옅은 상처도 보인다. 딱 분위기 보면 이쪽 놈들이라는 것을 감추지도 못한다. 김성식은 남자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시선은 경계를 감추지 않은 채였다. 딱 한 걸음 정도 남았을 때, 김성식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는다. 그의 마른 손이 남자의 뺨을 툭툭 쳤다. 김성식의 입술이 비죽 올라간다.
“그딴 상판대기를 달고, 내 앞에 나타나나?”
남자는 볼을 긁적였다. 거센 음성이 귀에 콱콱 박혔다. 그런데도 남자의 얼굴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짧은 시간 침묵이 맴돌았다. 정확하게는 남자가 대답을 미룰 뿐이었다. 꺼림칙할 정도로 무표정이다. 내가, 몰라 볼 거라고 생각했나보지? 그는 시리도록 차가운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설마, 그럴 리가요. 알아보셨잖아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간다. 김성식은 기이함 뒤로 이질감을 느꼈다. 세월의 흐름? 단순하게 그렇게 치부해도 좋은가. 겉가죽만 바뀐 게 아니라 들리는 음성도 다르다. 처음 본다면 당연히 낯설기만 할 터지만 김성식은 친숙함 마저 느껴졌다. 하, 새끼….
“정은창.”
그는 이 세상에 없는 이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름을 가졌던 이와 남자는 닮은 곳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는 당연하다는 듯 부른 것이다. 교도소에 있다고 해서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다. 오히려 김성식은, 김성식이였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많은 것을 들었다.
정은창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그의 귀에 들려왔던 날, 그 말을 전해준 놈은 모가지에 젓가락이 쑤셔졌고 이제는 친숙해진 독방에서 웃음을 지었다. 그가 얼마나 분노라는 감정을 씹고, 목 뒤로 넘겼는가.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던 것의 상실은 옅은 분노가 아니었다. 자신이 일생을 바쳐 키운 조직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자신은 초라한 꼬락서니를 하고 있고. 제가 아끼며 키운 놈이 모를 이유로 뒈졌다. 그토록 긴 시간을 홀로 보내왔다. 알랑방귀 뀌어대는 놈들 적당히 내버려 두고, 삽 소리 지껄이는 놈들 적당히 예뻐해 주고 이렇게 세상에 나왔는데. 정작 나온 세상에 제가 쥐었던 것이 예쁘게도 멀쩡하게 제 앞에 서 있다. 웃음이 나왔다.
나는, 실패하지 않는다.
남자가 조용히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김성식은 유쾌한 기분이 든다. 누가 김성식이 실패했다고 떠드는가. 이것이 어딜 보아 실패인가.
“살아있었나.”
“죽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었다. 누구도 아닌 남자가 되어, 그는 계속 살아가고 있었다. 김성식은 소리 내 크게 웃었다. 자신의 말이, 개새끼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그것도 누구도 아닌 이로 지내며 다시 제 앞으로 돌아왔다. 그 사실은 김성식에게 오랜만에 주는 유쾌한 감정이었다. 낯짝을 바꿔오는 깜찍한 짓을 저질렀긴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노구치 역시 살아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이기도 했다. 누구도 아닌 놈으로 세월을 보내던, 다른 이름을 쓰며 살았던, 김성식 앞에 선 순간 남자는 정은창이 되었다. 정은창이다.
김성식은 자연스럽게 남자가 몰고 온 차에 몸을 실었다. 뒷좌석에는 검은 비닐에 두부가 있었다. 김정식이 낮게 큭큭 웃더니 운전석을 발로 퍽 쳤다.
“새끼, 구닥다리도 아니고 두부가 뭐야?”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없었기 때문에 뒤를 살짝 보다가 시동을 걸었다. 옛날, 김성식이 타던 차만큼 좋은 차는 아니었지만, 썩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창밖을 훑었다. 남자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현재의 김성식 위치를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이가 갈렸다. 하, 짜증 어린 숨이 내뱉어진다.
남자는 운전을 하며 룸미러로 뒷좌석을 힐끔 바라봤다.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김성식이 보였다. 뒤바뀐 세상으로 적응해야 할 그가 신경이 쓰여, 준비해 놓은 핸드폰이었다. 어차피 사용하시게 될 거라며 그에게 쥐여 준 것은 신형이라기보다는 살짝 뒤로 물러선 제품이었다. 낯선 기기라 적응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는 나쁘지 않게 다루고 있었다. 신기한 기분이 든다. 남자는 기기를 쥐여 주면 다짜고짜 욕이라도 날아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예상외였다.
사회에서도 먹이사슬 위에 있던 그였으니 교도소 안에서도 비슷한 노릇이라도 했겠지, 그러다 접하게 된 거겠지. 그러한 생각을 하며 다시 앞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본 김성식에게서는 세월의 흐름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는 더 야위고 말랐다. 볼품없어 보이는 게 아니라 더 날카로워 보였다. 저도 모르게 또 힐끔거리다 거울로 시선이 마주쳤다. 다시 앞을 바라봤다. 차 안은 계속, 계속 조용했다.
운전대만 잡고 있으려니 답지 않게 과거 따위가 생각난다. 이게 다 긴 운전 탓이었다. 김성식을 만난 탓이었다. 그는 서서히 과거로 돌아갔다. 조직이 와해하기 직전이라는 상황에 몰렸던, 어린 날의 자신으로.
김성식의 사무실에서 발견한 장부를 쥐고, 그는 고민했다. 잘못된 말을 던지면 판을 뒤집었다. 판마저 일그러진다면, …말을 바꾸자. 거칠어진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극단적인 생각이었지만 정은창은 경찰 뒤에 있는 백석을 알았다. 완벽하게는 몰라도, 선진화파 마저 빌빌 기었던 큰 놈들이었다. 자신이 쥔, 이 장부는 그들의 목줄이기도 했다. 자신이 살아있다면 백석과 경찰, 양쪽에서 노려올 게 뻔했다.
노구치, 노구치가 떠올랐다. 김성식이 그토록 자랑하고, 믿던 노구치의 기술이 필요…했다.
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밖은 아직도 어수선했다. 빠르게 걸음 하는 자신을 막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정은창은 머릿속의 주소를 선명하게 떠올렸다. 제발, 제발. 몇 번이고 속으로 빌었다. 아직 그곳에 노구치가 있어야 했다. 정은창은 걷다가, 빠른 걸음으로 걸었고, 이내 뛰었다. 숨을 헐떡였다.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뛰었다. 뛰다가 도중에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일부러 비슷하지만 다른 곳에서 내려 다시 뛰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싶으면서도 결국 살기 위해서 뛰었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호수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초인종을 눌렀다. 숨이 막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헐떡이는 소리만 입 밖으로 나왔다. 안에서 반응이 없었다. 문을 두드렸다. 제발, 제발. 노구치, 제발, ….
“노구치, 제발, …제발 나를 도와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끊겨서 제대로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금장치를 온전히 풀지 않고 문이 살짝 열렸다. 불안한 시선이 마주쳤다. 하, 하. 다행이다. 다행, 이야. 정은창은 안심이 되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손을 뻗었다. 주춤하던 노구치의 옷자락을 잡고 몸이 무너졌다.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이번에는,”
네가 나를 살려줘. 떨리는 목소리가, 헐떡이는 숨과 뒤섞여 내뱉어졌다. 그것은 말이었고 겨우 문장을 이룬 것이었다. 노구치에게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정은창은 무너지는 정신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감기는 눈을 어찌하지 못하고 그대로 상체가 무너졌다. 차가운 시멘트가 바닥에 닿았다. 잠금장치를 온전히 해제하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누군가에게 들리고, 그리고,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땐, 천장이 보였다. 옆에 노구치가 있었다. 서로 아무 말 없었다. 서로 할 이야기가 없었다. 한참의 시간 동안 머물던 침묵이 익숙해질 무렵, 노구치가 일어나더니 정은창에게 따듯한 차를 건넸다. 정은창은 두 손으로 받아 목을 축였다. 몸이 따듯해졌다. 술이 아닌 것으로 몸이 따듯해지는 건 오랜만이었다. 노구치가 정은창을 톡톡 두드렸다.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시선이 마주쳤다. 오랜만에 본 노구치는 머리를 짧게 잘랐었다. 지저분한 수염도 정리한 상태였다. 뒤늦게 그의 변화가 눈에 들어온다. 노구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이었다. 정은창은 안심할 수 있었다.
새로운 얼굴은 한 번의 시술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그에 대한 적응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적응 기간, 부작용, 감정을 드러낼 때마다 일그러지는 얼굴. 모든 기술은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날은, 노구치가 잠깐 밖에 나갔던 날이었다. 서로 밖에 나가는 걸 꺼렸지만 나가지 않고서는 생활이 이어질 수 없었다. 꼴에 우습게도 서로 나가는 날을 정하는 등의 규칙을 두고 지내고 있었다. 정은창은 홀로 남은 방안에서 심심한 듯 눈을 껌벅이다가 바닥에 굴러다니던 리모컨을 쥐었다. 전원을 켜지 않은 텔레비전의 화면에 낯선 얼굴이 비쳤다. 익숙해져야 하는 얼굴이었다. 머 쩍은 얼굴을 보다 전원을 켰다. 금방 색색의 장면으로 바뀌었다. 한창 뉴스가 진행되고 있었다. 뒤늦게 시계를 보니 12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일부러라도 피하던 뉴스를 스스로 틀어놓고 있으려니 우스웠다. 뉴스에서는 재미없는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선진화파만 무너트린다면 세상은 범죄와 작별할 것처럼 기사를 내고, 광고를 때리더니 뉴스에서는 여전히 범죄를 언급하고 있었다. 지긋지긋할 정도다.
채널을 돌릴까, 하는 와중에 뉴스 아래 흘러가는 자막에 멈칫했다. 낯익은 글자가 보였다. 선진화파, 김씨, 재판, 결과, 잠시 후…. 정은창은 채널을 돌리던 손을 멈추고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괴었다. 재미없는 뉴스가 천천히 이어졌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재잘재잘 흐른다. 정은창은 거의 흘려듣고 있었다. 뉴스 화면이 바뀐다. 법원의 풍경이 담겼다.
“오늘 오전, 법원에서는 김 씨에게 7년 형을 내렸습니다. 법원에 모인 사람들은 인정할 수 없다며 … (중략) … 김 씨는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수송차에 이동되어 앞으로 한 시간 뒤면 … (중략) …”
띡. 전원을 껐다. 방안에는 고요함이 맴돌았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만 사라졌을 뿐인데 이토록 조용했다. 7년, 겨우 7년. 그러나 정은창에게는 너무나도 긴 7년으로 다가왔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길을 잃었다. 그는 가야 할 길을 알 수 없었다. 검은 화면에 다시 자신의 얼굴이 그대로 비친다. 차갑게 굳은 얼굴이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정은창은 자신의 시선을 결국 피하고 만다. 그대로 소파에 몸을 허물었다. 몸이 무거워졌다. 김성식에게 벗어난 것과 다름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 정은창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정은창이었던 것을 버리고 백석의 아래로 들어갔다. 백석 저택을 오가며 스쳐 가듯 만난 강재인은 당연하게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흠?”
알아보지, 못했을 터였다.
길게 시선이 마주쳤긴 했지만, …그대로 스쳐 갔을 뿐이었다. 그 외에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럴 법도 했다. 노구치의 기술은 그만큼 뛰어났다. 그 본인도 거울을 볼 때마다 한동안 기이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감정을 드러내지만 않는다면 당장은 누구에게도 들킬 일이 없는 얼굴이다. 부작용도 서서히 나아지고 있었다. 노구치의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남자에게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이라곤 몸에 베여있던 정은창을 버리는 일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살기 위함을 몇 번이고 되새기고 자신을 죽였다. 정은창을 죽인 남자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낯익은 놈의 아래에서 과거의 자신처럼 다시 밑바닥 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주정재, 씹새끼. 배신자 새끼. 경찰로 돌아가서도 박쥐 노릇 버리지 못하고 백석의 뒷돈을 받아 쳐먹고 있었다. 덕분에 얼굴 마주하는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지겨운 얼굴이 하나 더 늘었다. 지긋지긋한 일상이 계속 이어졌다.
지긋지긋한 일상과는 다른 이야기로, 그에게 있어 밤은 지옥이었다. 아니 하루하루가 다 지옥이었다. 남자는 시선을 돌렸다. 어두운 정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조금만 더 올리면 창백한 시선과 그대로 마주했다. 시발,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으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뒈진 것도 아니면서, …그만 찾아와!”
지친 목소리로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모른다. 김성식의 그림자는 늘 남자의 뒤에 있었다.
남자가 멍청한 선택을 할 때면 옆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착각이 분명했다. 분명 교도소에서 제 버릇 남 못 주고 있을 놈이 왜 자신의 시야에 아른거리는지 남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온종일 다른 사람으로 지내다가 밤이 되고, 홀로 남아 그림자와 같이 있게 될 때면 남자는 다시 정은창이 되었다.
시발, 시발. 시발!
그만, 나타나라고. ….
김성식이 죽었는지, 교도소에 면회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실행으로 옮기지 못한 생각이었다. 남자는 하루하루를 죽어가며 보냈다. 서서히 죽어가는 몸을 느리게 받아들였다. 동시에 삶을 붙잡으며 살아갔다.
살기 위해 발악했다. 7년, 7년 뒤를 바라봤다. …김성식이 출소하는 그날까지도 그의 그림자는 남자의 뒤를 따라왔다. 남자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우습게도 김성식과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지겹도록 따라붙었던 그림자는 서서히 사라졌다.
남자는 감정을 매듭짓기로 했다.
남자 스스로가 자각하지 못한,
그에 대한 감정이 만들어낸 환영이었다.
“임시로, …준비한 곳이라 불편하실지도 모릅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야경이 아름다웠다. 도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색색의 조명들이 어두운 도시를 빛내고 있었다. 남자는 준비한 옷을 탁자 위에 구겨지지 않게 올려두었다. 김성식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조용히 그를 불렀다. 김성식은 유리창으로 비친 남자를 힐긋 바라봤다. 어리숙했던 애송이가 이제 번듯한 티를 내는 꼴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알지 못한, 보지 못한 7년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오른다. 정은창, 네가 배신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지? 피어오르는 의심을 그는 결코 가만히 두지 않았다.
탁자에 놓은 옷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자신이 즐겨 입던 브랜드 마크가 보였다. 웃었다. 김성식은 겉옷을 벗어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교도소에서 입던 것에 비하면 좋은 재질이겠지만,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이다. 겉 재킷, 넥타이, 와이셔츠, 하나하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자는 곱게 손질되어있는 옷을 그에게 건넸다. 온전히 드러난 그의 몸은 남자가 기억하는 몸보다 훨씬 마르고, …흉터가 늘었다. 동시에 날카로움보다는 중후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는 변했다. 그 변함이 남자에겐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더 마른 몸에 옷의 치수가 살짝 맞지 않았지만, 매무새를 정리하고 나니 썩 나쁘지는 않았다. 김성식은 오히려 이 정도면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제법이야. 정은창이. …많이 컸네.”
그의 목소리에 웃음이 서려 있었다. 남자는 어색하게 목을 쓸다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필요하신 거 있으십니까? 알면서 왜 물어. 은창이. 남자는 눈을 껌뻑이고 배치되어있던 유선 전화를 들어 익숙한 술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즐겨 마시던 적당히 고급스러운, 술이었다. 김성식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타들어 간 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룸서비스가 도착할 때까지 방안은 고요했다.
김성식의 바로 한 발자국 옆에서 남자는 가만히 서 있었다. 김성식은 담배를 한 개비를 다 꺼트리고도 다시 하나를 입에 물었다. 이번에는 남자가 몸을 숙여 그 끝에 불을 붙였다.
“담배도 바꾸고. 응?”
김성식은 아까 남자에게 받았던 담뱃갑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겨우 한두 개비밖에 남지 않은 내부가 그대로 보였다. 김성식은 기이함을 짚었다. 그 당시의 두 사람은 피우던 담배의 종류가 달랐다. 김성식이 피던 것에 비해 정은창의 담배는 가벼웠고, 부드러웠다. 김성식의 담배는 묵직했고, 독했다. 정은창에게 억지로 입에 물려줬을 때 흡연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침을 몇 번이고 토해내던 모습이 선명했다. 그러던 놈이… 주머니에서 자신이 피우던 담배를, 그것도 반 정도가 빈 상태의 것을 내민 것을 봤을 때의 제 기분이 어쨌는지. 실룩거리는 입가를 숨기지도 않은 채 그는 남자를 바라봤다.
“…제 흔적을 감추다 그렇게 된 겁니다.”
남자는 시선을 돌렸다. 그의 앞에서 입만 열면, 과거의 정은창으로서 있는 기분이 든다.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지났는데 그에게 있어서 저는 여전히 정은창이었다. 그의 물음에 살기 위한 답을 어떻게든 떠올리고, 다급하게 외치던 어리숙함의 덩어리. 노크 소리가 들린다. 룸서비스다. 남자는 자신의 뒤로 집요하게 달라붙는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문을 열었다. 탁자에 간단하게 술잔과 술이 놓인다. 단순한 요깃거리가 옆에 곁들어졌다. 문이 닫혔다.
“우선은 앉아.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너는 어쩐지 몰라도 나한테는 꽤, 오랜만이거든.”
그가 가볍게 웃음을 흘린다. 잔에 흘러내리는 술이 조명에 은은하게 빛난다. 알코올 향이 천천히 공기 중에 뒤섞였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앞에 앉았다. 7년 만에 마주한다. 완전히 다른 상판대기를 달고서 일상이었던 그날의 새벽처럼 마주했다. 유리잔에 천천히 채워지는 술에 감각이 흘러간다. 가볍게 유리잔이 부딪치자 맑은소리가 퍼졌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알싸한 느낌은 과거의 추억이었다. 몇 번이고 잔이 비워지고, 다시 채워지기를 반복한다. 재떨이에 담뱃재가 쌓인다. 마지막 한 개비, 천천히 연기가 흩어진다.
“은창이, …동생이 있었다고 했던가?”
“…예. 죽었죠. 꽤 오래전에.”
“사고, …사고라고 했지.”
수면 위로 올라온 이야기에 남자의 손이 멈칫했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동요라는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행동이었다. 김성식이 고개를 기울인다. 어째서, 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지난 7년에 대한 시간도 아니고, 너무 옛적의 이야기가 이야깃거리로 올라온다. 남자는 한 박자 늦게 눈을 껌벅이고,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재수가, …없었죠.”
정말, 그 말로 끝낼 수 있어? 죽어있던 정은창이 남자에게 속삭인다. 맑은 목소리가 남자의 버린 이름을 부른다. 오빠! 까르륵 웃는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남자의 발목을 잡는 진득하고 습한 기운이 천천히 올라왔다.
“성일동, …우리 조직이 크게 뛰어오를 수 있었던 건수였지.”
“알고, 계셨습니까.”
“새끼, 내가 네 출신 하나도 못 알아냈을 거로 생각했냐?”
크큭 웃는 그는 술잔을 살짝 들어 조명에 비춰본다. 곧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것처럼 남은 술을 목 뒤로 넘긴다. 도수가 높은 술을 천천히 음미하던 그는 가끔, 이렇게 훅훅 넘길 때가 있었다. 그 스스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행동이면서 그랬다. 남자는 꽤 자주 보곤 했다.
“그 일에, …경찰 놈들이 껴 있었지. 아직도 기억나. 그 사건이 크게 올라오지 않은 이유가 그거야. 경찰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잠잠할 수밖에 없었거든. 그래, 경찰 뒤에도 백석 놈이 있었으니까. 우리야 수월했지.”
“……….”
“그 표정 뭐야, 이미 알고 있었나?”
“…예. 알고 있었습니다.”
성일동, 낡아 빠진 촌 동네에서 정은창은, 제 동생과 같이 살고 있었다. 재개발 언급은 몇 번이나 있었지만, 그들은 그곳을 벗어나면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에 속해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거친 소리가 하루에도 수십 번은 이어졌다. 정은창은 동생을, 은서를 안에 숨겨놓고 나갔던 날, 성일동은 말 그대로 싹 밀렸다. 늦은 밤, 뒤늦게 집이 있던 자리로 뛰어갔던 그가 본 것은 차갑게 비틀어진 아이의 팔이었다. 소년은 오열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유일한 가족이었고, …또.
다음날 소년은 경찰서로 향했다. 무너지지 않고 책상을 내려쳤다. 어째서, 왜, 하필 은서가! 버럭 외쳤다. 경찰이라면서요, 민중의 지팡이라며!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냐고! …왜, 왜야. 내 동생이, 동생이 죽었어. 이건 살인이잖아. 살인인데 왜 당신들은 가만히 있냐고! 분노를 터트리는 외침에도 경찰 쪽 반응은 전부 시큰둥했다. 소년은 무너지는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이번 사건은 이미 위에서 쉬쉬하는 일인데, 저렇게 떠들어봤자 해결되겠냐.”
“…그가 이번에 총대 메고 사건 묻고 있잖아.”
“어쩌겠어. 위에서 하라는 대로 까는 수밖에.”
“그런데 좀 찜찜하지 않….”
소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떠들던 경찰들이 그 시선에 멈칫하며 바로 입을 다물었다. 뭐? 뭐라고? 경찰이, 사건을, 뭐?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소년은 바로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책상을 크게 쳤다. 방금, 방금!
“뭐라고 했…!”
“어우, 시끄러워! 이 새끼는 또 뭐야!”
그대로 소년의 뒷덜미가 잡히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바닥에 부딪힌 등이 욱신거렸다. 소년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방금, 뭐라고 했잖아요! 버럭 외치는 소리가 실내를 쩌렁쩌렁 울렸으나 주변의 모두가 시선을 피하기만 하고, 제대로 소년을 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야. 너, 그래 너 이 새끼야. 이것도 공무집행방해야. 엄연히 범법 행위라는 건 알고 있냐? 대가리에 피도 안 바른 게 벌써 경찰서에서 횡포 질이야.”
그러나 소년의 말은 어른에게 닿지 않았다. 몇 번이고 발버둥 치고 소리를 쳐보았으나 돌아오는 것은 폭행과 무시, 폭언이었다. 경찰서 밖으로 또다시 내던져졌다. 완전히 먼지투성이가 된 채로 소년은 거리를 떠돌았다. 몸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머릿속에서는 은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미칠 지경이었다. 모든 일은 사고라고, 묻어갈 수 있는 이야기였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재수 없는 일의 하나가 되었을 터였는데, 소년은 어긋난 이야기를 듣고야 말았다. 닿아선 안 될 이야기가 닿았다.
…복수, 복수. 어렴풋한 이름이 맴돌았다.
“그러나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다시 돌아온 남자의 목소리가 잘게 떨려있었다. 처음으로 타인에게 이야기하는 심연의 이야기였다. 이렇게까지 감정이 자제 되지 않은 적은 없었는데, 남자는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남자는 말을 끝맺었다. 잔을 쥔 손이 가볍게 떨렸다. 복수를 품기에는, 그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을? 모든 것들에 대해.
허무하게 무너진 집, 허무하게 잃은 동생, 허무하게 잃은…. 그런 것들. 세상과 비교하면 자신은 너무나도 작고 초라했다. 그것은 두려웠다. 남자는 소년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혐오가 기어 올라온다. 김성식은 말없이 남자를 바라본다. 서로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도 드러내지 않은 자신의 치부를, …아니, 이걸로 전부 드러냈다고 이야기할 수 있나? 정말 그렇게 생각해? 과거의 정은창이, 소년이 남자의 앞에서 내려다본다. 서늘한 시선이 칼 같다.
그동안 자신을 억누르던 과거의 그림자가 서서히 일어난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웃음 짓는다. 오빠.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가볍고 부드러웠다. 사랑하는 목소리였다. 은서야, 남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린 날의 남자는 많은 시간을 후회로 보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 잠겨 보냈다.
“그래서, 네 동생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었지?”
김성식의 목소리가 느리게, 느리게 이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질문. 그러나 남자는 그 생각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질문에 대한 의미를 천천히 떠올리고 있었다. 열고 싶지 않은 서랍의 손잡이가 당겨진다. 꾹꾹 누르고 감춰뒀던 것이 꺼내진다. 그때의 나는 어떠한 기분이 들었던가. 어떤 생각을 했던가. 뜨거운 체온과 다르게 어딘가 정리되듯 식어갔다. 남자는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 서늘하게 굳은 팔에 얹으며 울던 자신은, 어떤 생각을 했던가.
“살고, 싶었습니다.”
은서의 목소리가 깔깔 웃는다. 그랬다. 소년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선명하다. 남자는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허무하게, 싸늘하게 죽은 동생 옆으로 자신이 보였다. 동생의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 그 옆에 자신도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먼저 튀어 올라왔다. 자신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덜덜 떨면서 기어오던 자기 혐오가 머리끝까지 덮어진다. 제 어깨를 짚는 손이 느껴졌다. 은서의 손이다. 그래서 어린 남자는, 굳이 경찰서로 가서 소리를 쳤다. 동생을 아끼는 오빠라면, 가만히 …있어선 안 되니까. 끔찍한 자신의 모습을 감추듯 억지로라도 그렇게 움직였다. 남자는, 정은창은 죽고 싶지 않았다.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초라하게 죽고 싶지 않았다. 은서의 손이 어깨를 지나 목을 감싼다. 한 번도 드러내지 못한 속마음이 흘러넘치다 못해 가라앉는다.
“저는, 저는, …저는, …살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처음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인간의 얼굴이었다. 전부 변명에 불가할 이야기다. 참회하는 남자가 앞에 있다. 그것은 참회라 불러도 좋은가 싶지만 비슷한 행위였다. 남자는 열이 올랐다. 살고 싶었다. 그래서 계속 움직였다. 살기 위해 깡패 짓을 하며 타인의 삶을 무너트렸다. 울산 조직에 숨어들었던 쥐새끼 때문에 도망치듯 서울로 상경하고, 테스트라는 명목으로 몇 번이고 벼랑 끝으로 내몰렸던, …안타까운 제 과거는 결코 동정받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이기적인 마음에서 시작된 어긋남이었다. 죄를 얘기하나, 정당성을 둘 수 없었다.
김성식은 가만히 남자를 바라봤다. 그뿐이었다. 그러나 남자에게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큰 위안이자 위로였다. 김성식은 남자를 비난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 저질러온 일을, 그는 그저 들어줄 뿐이었다.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렇게 따듯한 기분이었나. 술기운이 서서히 올라온다. 몸이 무거워졌다. 눈꺼풀이 자꾸 내려가서, 남자는 떨궈지는 고개를 제대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아니 정은창은, 아니 남자는, 정은창은, …탁자를 손으로 짚었다. 몸이 자꾸 앞으로 쓰러질 듯 기울었다.
“됐어, 괜찮아.”
그가,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 같다. 느린 숨이 이어졌다. 어떻게든 깨어있고자 잡고 있던 정신이 짧은 그 한마디에 서서히 잠의 수마에 빠져든다. 그것은 잠이었을까? 현실로부터의 회피일까.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남자는 눈을 감았다. 탁자에 얼굴을 기대었던가, 소파에 몸을 누였던가.
“축하해, 은창이. 원하는 대로, 이제껏 살아남았네.”
어렴풋이,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그것은 어떤 의미를 품은 말이었을까
*
“깼나?”
남자는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할 생각도 못 하고 눈을 껌벅였다. 잠에 취해 멍하고, 숙취에 머리가 자꾸 지끈거렸다.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김성식이다. 자신이 기억하던 김성식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반듯한 정장을 갖춰 입고, …뭐라고 표현해야 제일 잘 맞을까. 남자의 눈에는 완벽해 보였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더라도 충분히 그는 김성식이었다. 이러한 표현이 우습다는 것은 알지만 그 외의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는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넘기다가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뭐가 떨어진다.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겉옷이었다. 아마도 자신이 덮고 있었을, …그가 덮어준 건가? 묘한 기분이 든다.
“오래도 잔다. 해가 중천이야.”
그제야 남자는 시계를 바라봤다. 곧 있으면 정오였다. 남자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자본 적이 몇 년 사이에 있었나? 없다. 정말,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푹 자본 것 같았다. 피곤함 하나 남지 않은 개운함이었다. 물론 지끈거리는 머리는 똑같았지만. 젠장,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나는 것들은 다양했지만, 일단은 씻고 나오는 게 제일 먼저였다. 번듯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상태가 추해 보였다. 남자는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거울에 비치는 남자는 낯설면서 이제는 익숙한 자신의 얼굴이다. 차가운 물은 아직 추웠지만 그래도 정신 차리기엔 적당했다.
“머리 말리고 나올 줄 몰라?”
남자는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또 혼났다. 혀 차는 소리에 움찔하고 뒤늦게 머리카락을 열심히 털었다. 구겨진 옷을 대충 털어내고, 매무새를 정리했다. 남자에게 준비란 그게 끝이었다. 김성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남자의 머리끝부터 말끝까지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쉰다. 표정으로 욕하고 있었다. 남자는 할 말이 없었다. 김성식은 다 타들어 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창이, 운전대 좀 잡자.”
남자는 느리게 눈을 껌벅이다가 뒤늦게 예, 예. 하며 차 열쇠를 쥐어 들었다. 의아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날씨는 좋았다. 웬일로 날씨가 좋나 싶었다. 요 며칠 내내 하늘은 흐렸고, 맑아도 추웠고, 그래. 더럽게 추웠다. 오늘은 웬일인지 추위가 한풀 꺾여있었다. 겨울은 이제 거의 다 갔는데 차 문을 여니 서늘한 공기가 맞이하고 있었다. 남자는 손을 뻗어 히터로 돌려놓고 안전띠를 하며 뒤를 힐끔 바라봤다. 시동이 걸린 자동차는 조금씩 따듯한 공기가 맴돌기 시작했다.
“…어디로, 갈까요?”
“일단, 울산으로 밟아.”
울산, …지독하게 오랜만인 이름이었다. 갑자기 언급된 울산이 현실성이 없었다. 남자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네, 알겠습니다. 차가 부드럽게 주차장을 벗어난다. 조용히 달리는 차는, 천천히 시외로 향했다. 그 길 가는 내내 남자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피어오르면 더 피어올랐지. 왜, 갑자기 울산일까. 간만에 세상에 나와서 고향이 그립기라도 했나. 여전히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그는 늘 먼저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남자도 실제로 서울을 제대로 벗어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무엇보다 울산으로 돌아가는 길은 더더욱 오랜만일 수밖에 없었다. 상경하고 처음이었다. 남자는 김성식이 갇혀 있는 시간 단 한 번도 울산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정은창과 관여된 그 무엇과 벗어나려고 했던 행동이기도 했지만, 울산에 대한 그리움 자체가 남자에게는 없었던 것이 큰 이유였다. 고속도로 풍경은 상당히 지루했다. 지루할 수밖에. 같은 풍경이 끝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는, 그래도 상경 당시에 대하면 무척이나 잘 닦여있었다. 이곳에서 또 시간의 흐름을 선명하게 느껴버린다.
남자는 뒤를 힐긋 보다가 슬쩍 오디오를 틀었다. 지지직 소리가 잠깐 나다가 금방 깔끔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린다. 뉴스였다. 출소, …채널을 돌렸다.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자의 취향은 아니었으나 없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다. 곧 차 안에는 잔잔한 클래식이 흘러들었다.
김성식은 갑자기 들려온 클래식에 앞을 바라보다가 창가에 턱을 괴었다. 울산, 왜 울산을 갑자기 이야기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잠에서 막 깨어난 놈을 보고 있자니, 지난밤에 끝내 눈물을 흘리며 과거를 토해내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갑자기 울산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스운 소리였지만 정말이었다. 더는 울산에 연고도 없는데 왜 그 촌 동네로 가야 하나. 그 도시를 이야기했나. 김성식이 기억하는 울산은 정말 가난한 동네였다. 전부 뜰과 밭밖에 없었고 학교를 제대로 다니는 놈들도 없었다. 죄다 농사하거나 장사하는 사람들뿐이었고 지긋지긋하게 가난한 곳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더 우울했다. 비린내가 떠나질 않았고 가난은 끔찍했다. 그래서 그는 울산을 벗어났다. 서울에서 그는 모든 것을 손에 쥐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돌아간다. 그것도 모든 것을 잃어서. 우스운 상황이 되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회상 따위나 하면서 과거가 계속 툭툭 일어난다. 우습다, 우스워. 김성식은 흘러가는 풍경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잠이 오는 건 아니었지만, 눈을 감고 싶었다. 세상은 점점 고요함으로 잠겨 들었다.
한산한 오후의 고속도로는 뻥뻥 뚫려 밀림 없이 차가 나아갔다. 휴게소, 들릴까요? 그냥 밟아. 대화는 간결했다. 차는 끝없이 달린다. 대전, 대구 즈음 올 땐 김성식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휴게소, 들릴까요? 됐어. 그대로 가. 잠긴 창문 탓에 담배 냄새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그의 담배 향이 가득했다. 지나고, 지나고 보니 도로의 간판에 울산이라는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 주변은 조금씩 어둑어둑해졌다. 어두웠다. 정오가 지나서 출발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먼 거리다.
울산이다.
[ 울산광역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간판이 낯설기 그지없다. 광역시였다. 두 사람이 기억하는 울산은 촌 동네였고, 갈아엎기 바쁜 구석이었는데 어느새 번듯하게 광역시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오랜만에 걸음 하는 길은, 생각보다 잘 닦여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틀린 말도 아니구나 하는 촌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창문을 살짝 내리니 퀴퀴한 공기를 폐에 들어찼다. 김성식이 시트 뒤를 툭툭 쳤다. 남자는 수납공간을 뒤적거리다 새 담배를 꺼내 뒤로 넘겼다. 그가 찾던 게 맞는지 별말 없이 받아드는 것을 룸미러로 바라보다가 다시 앞을 바라봤다.
왜 울산으로 향한 건지 남자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김성식과 남자에게 울산이 큰 의미인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여도 큰 의미가 아니었기에 서울로 향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두 남자는 결국 울산으로 돌아온 것이라. 차는 부드럽게 도로 위를 달렸다. 고속도로로 이어진 길은 여전히 촌이었다. 울산은 산이 많아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방치하는 땅이 많다고 했다. 땅이 넓으면 뭐하냐. 광역시라고 불리면 뭐하나. 결국, 반이 촌인데.
꾸불꾸불한 길을 한참을 달려야 그나마 도시 행색을 하는 곳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느 동이었지, 남자는 도로 간판에 시선을 돌렸다. 고속버스 정류장이 한쪽에 있어서 그런지 큰 버스들이 왔다 갔다 하고, 로터리를 크게 도는 차들이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그동안 서울에서 차를 좀 몰았다고, 울산 도로는 별로 험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훨씬 도로 신호가 간단해서 나쁘지 않다는 생각마저 든다.
“어디로 갈까요.”
남자는 다시 뒤를 힐끔 바라봤다. 김성식은 담배를 피우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몇 개 피째인지 헤아릴 생각은 없다. 틈만 나면 그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쫓다 앞을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울산의 풍경은 남자보다 훨씬, 훨씬 많이 변한 상태겠지. 남자는 힐긋거리는 시선을 바로 했다.
도로가 너무 바뀌어서 남자도 길이 긴가민가했다. 남자가 기억하는 길이 맞는지 알 수 없어서 도로 간판만 열심히 노려보았다. 이름도 많이 바뀐 것 같다. 착각인가? 큰 도롯가를 달리며 무너지고 새로 올라가는 건물들이 휙휙 지나갔다. 남자는 조용히 차를 세웠다. 김성식은 주변을 훑었다. 태화강 변이 훤히 시야에 담겼다. 이곳으로 오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남자는 김성식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뒤로 섰다.
김성식이 기억하는 과거의 태화강은 훨씬 더럽고, 냄새나고, 지저분한 강이었다. 버스를 타고 지나갈 때면 강물 냄새가 너무 심해서 모두가 창문을 닫고 코를 막던 강이 이렇게 깨끗하게 바뀌었다는 것에 적응할 수 없었다. 태화강이라는 팻말에도 이해가 되지 않아 한참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는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황도진에 비해 그다지 고향이라고 애착 가진 적 없는 동네라고, 지긋지긋하게 구질구질한 동네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바뀌어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낯선 기분에 휩싸였다.
“정은창이, 너도 울산 놈이랬지."
“예.”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기억하는 울산과도 이곳은 많이 바뀌어있었다. 과거에 대한 생각은 남과 비교 할 수 없는 법이었다, 그 역시도 추억에 젖었다. 깡패 짓하고 동네를 떠돌던 어린놈의 그림자가 천천히 드리운다. 이 얼굴 가죽을 쓰고 울산에 발을 딛자니 정말 낯선 동네에 발을 붙인 기분이다.
다른 기분이 두 사람의 사이를 오간다. 남자는 김성식을 바라봤고 김성식은 남자를 바라봤다.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은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강을 시야에 담았다가 저 멀리 이어진 건물들을 훑어보았다. 새 건물들이 빼곡하게 있었다. 낮과 밤의 중간의 시간대에 바라보는 풍경은, 썩 괜찮았다. 노을이 져가고 노을 진 건물들은 하나둘씩 불빛을 내기 시작했다. 다리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건물들은 다른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저 멀리 관람차가 보인다. 관람차가 조명을 빛내며 천천히 돌아간다. 형님, 이제는 어디로, ….
“아는 곳 있냐.”
“아는 곳은, …없네요.”
그랬다. 아는 곳은 없었다. 남자나, 김성식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고향이었으나 고향이 아니었다. 아는 곳은 어디 있나? 기억나는 곳은 아직도 그 풍경을 그대로 가지고 있나? 자세하게 움직인다면 기억 속의 한 장면은 그대로 남아있을지도 모르지만, 구질구질했던 그 시절의 모습을 그렇게 굳이 찾아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정은창.”
김성식이 멈춰 섰다. 남자는 그 뒤에 따라 멈춰 선다. 어렴풋한 담배 향이 느껴지는 것 같다. 강이 천천히 흐른다. 남자는 눈을 굴리다가 예, 하고 나지막이 대답한다.
“넌 살아서 다시 이곳 땅을 밟은 거야.”
“……….”
“얼굴 가죽 어떤 거 뒤집어쓰고 있던, 네 녀석은 너야. 볼품없게 뒈지지도 않고 잘도 살아서 이 김성식이랑 다시 이곳에 온 거라고.”
“……예.”
고개를 숙였다. 김성식은 남자를 바라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친숙하디 친숙한 담배 향이 후각을 자극한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오르다가 사라진다. 남자는 이제 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오히려 친숙하기만 하다.
먼저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를 남자가 따른다. 두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자박자박 조용히 들려왔다. 강변길 따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운동하는 이들의 소리도 들린다. 자전거 여러 대가 그들의 옆을 지나가기도 하고 해는 저물었다. 어두워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노을은 온전히 지고 어두운 밤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누구도 차를 세워둔 방향으로는 걸음 하지 않았다. 발이 닿는 대로 움직였다.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 울렸다. 밤이 되어도 강변 근처에는 사람이 많았다. 오늘 유독 날씨가 한풀 꺾였으니 오히려 나오는 사람이 많은 터였다. 하늘은 맑았고 달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김성식은 남자에게 가벼운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남자는 느리게, 대답하며 과거를 내뱉었다.
노구치는 아직도 연락하고 지냅니다. 이쪽 일과 상관없는, 나름 평범하게 지내는 중입니다. 몇 달 전 마지막 시술이 있었습니다. 그 덕에 온전히 사람의 얼굴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일본에 돌아가는 것은 위험할 테니까요. 주정재, 압니다. 백석 아래서 놀고 있습니다. …강재인 말입니까? 예, 예. 맞습니다.
녀석은 알고 있습니다. 녀석도 알아보더군요. …세 번째 만남에서 대뜸 멱살 잡혔습니다. 웃긴 일이 아닙니다! 녀석, 얼마나 손이 매운데.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그러는, 형님은.
새끼, 교도소 생활은 물어서 뭐하게? 너도 한번 갔다 와 봐. 별 이상한 새끼들만 모아두는 곳이니까 너도 가면 딱 맞을 거다. 아? 그 표정은 뭐야. 쯧, …. 이상한 것 좀 그만 봐라. 실제로 그러겠냐. 그보다 노구치…. 새끼, 도망 네가 도와준 거였냐? 아니라고? 그럼 놈 소재지는 어떻게 알았어. 대답 똑바로 해, 정은창. …그래? 우연? 크큭, 우연이라. 참 운도 좋은 놈이야.
김성식은 짧게 말을 끊고 숨을 깊게 내뱉었다. 그의 눈동자가 허공을 향했다. 여러 이름이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김성식이 듣지 못했을 이들의 현황을 남자는 천천히 풀었다. 수사팀은 어떻게 되었다. 누가 진급하고, 누가 그만두고. 쥐새끼들은 어떻게 되었으며, 남은 조직원들은 어떻게 되었다. 김성식은 가만히 듣다가 욕을 하기도 하고, 비웃기도 했다. 우스운 꼴이 된 놈들이 많았다.
“이제 슬슬 들어가는 게 어떠세요. 늦었습니다.”
남자는 시계를 보았다. 저녁이 천천히 무르익어 밤이 되었다. 주변의 소음들도 잠잠해졌다. 김성식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긍정이었다. 딱히 어디를 정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한결 조용해졌으나 골목골목의 술집은 떠들썩한 말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곳곳에 술에 취해 흥겨움을 흘리는 이들도 많았다.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의 그림자가 짙고, 길었다.
“형님.”
“알아.”
일정한 발소리가 그들의 뒤를 따라왔다. 김성식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화려한 불빛에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길어졌다가 짧아지길 반복하는 그림자에 자꾸 무언가 끼어들었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남자는 뒤를 힐긋 보곤 고개를 저었다. 거리를 가볍게 걸었으나 근처에는 싸구려 모텔밖에 보이지 않았다. 호텔은 다리 건너에 있었다. 그렇게 멀다고 할 거리는 아니었지만, 김성식은 고개를 저었다.
키를 받았다. 주인장의 시선이 두 사람을 집요하게 쫓았지만 남자는 잠깐 바라보는 것을 끝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로 올라왔다. 2층, 3층, 숫자는 천천히 올라갔고 5층에 멈춰 섰다. 받은 키는 502호였다. 깔끔해 보였던 외견에 못지않게 내부도 깔끔했다. 김성식은 겉옷을 의자에 걸쳤다. 남자도 따라 겉옷을 벗었다. 작은 창문으로 밖을 바라봤다. 짧은 그림자가 지다가 사라진다. 남자는 작게 혀를 찼다.
“그만 신경 써! 붙은 놈, 건드려봤자 더 시끄러워져.”
김성식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내뱉었다. 남자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성식은 방에 딸린 작은 냉장고를 열었다. 물과 싸구려 맥주가 두 캔이 보인다. 그의 얼굴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빛이 서리다가 사라진다. 그는 술을 꺼내 들고 탁자에 올려둔다. 남자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품에서 쇳덩이를 꺼내 그의 앞에 내밀었다.
마가로프.
낯익은 쇳덩이가 조명에 훤하게 드러냈다.
김성식은 가볍게 쥐어 들었다. 오랜만에 쥔 총신은 무척이나 낯설면서도 낯익은 그리움이 느껴졌다. 김성식은 남자를 보았다. 이내 크게 웃어 재낀다. 또라이새끼. 썩 듣기 나쁜 어조는 아니었다. 남자는 알았다. 나름의 칭찬으로 부르는 어조였다. 남자는 그의 옆에 서서 내려다보았다.
“어쩌실 겁니까. 형님.”
“글쎄.”
남자는 솔직히, 그가 당장이라도 잃은 것을 되찾겠다고 이를 가리라 생각했다. 출소할 때부터 그러한 발언을 할 거라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다 돌아오는 반응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낯설었다. 언제나처럼, 남자는 도저히 그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기이할 정도로 그는 여유를 품고 있었다. 자신이 알던 그가 아닌 것 같아 방향을 잃었다. 아니면 남자가 그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걸지도 몰랐다. 김성식의 손이 자연스럽게 장전한다. 무거운 쇳덩이가 부드럽게 움직인다.
“다시 옛 자리에 올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지만 정은창, 생각을 좀 해봐. 시간이 지났어. 무려 7년이라는 시간이야. 혼자 죽지 않겠다고 같이 조지고 간 놈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래도 7년이면 긴 시간이지. …시대가 너무 빨리 바뀌었어. 이제 와서 새로 세우자니 너무 오랜 시간이 또, 또! 걸릴 게 뻔하잖아! 안 그래?”
김성식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어진다. 그는 총을 신경질적으로 탁자에 내려놓았다. 쾅!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탁자 위에 있던 것들이 흔들리다가 멈췄다. 김성식은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목 뒤로 넘어가는 소리가 시원했다. 남자는 그를 가만 내려 봤다.
“거래 장부, …제게, 제게 있습니다.”
손톱 끝으로 손바닥을 긁었다. 7년, 종이의 색이 바래고 낡아빠질 시간이었다. 그러나 종이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을 터였다. 김성식의 무덤덤한 시선이 남자를 향한다.
“다시, 시작하려고 하면…!”
“시작해서, 어쩔 셈이지?”
그는 조용히 말을 잘랐다. 남자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제, 이제 와서 다시 세운다고 해서 될 일이 무어가 있나. 그보다 남자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지난 세월의 영광처럼 이제는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다들 흔한 깡패였고, 동네 시장잡대들만 길거리에 깔렸다. 선진의 몰락은 그런 결과를 만든 셈이었다. 김성식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분노였다.
차게 식은 시선이 남자를 바라본다.
“…그럼 저는 이제, 필요 없으십니까?”
왜 굳이 물었는지 모를 질문이 입 밖으로 내뱉어지고 만다. 남자는 서 있었고, 김성식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시선이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김성식이 남자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인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몸을 숙였다. 무릎이 바닥에 닿았고 이제는 남자가 올려다보는 시선으로 뒤바뀐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것도 아닌 그의 곁에, 자신이 필요한가를 알 수 없었다. 목소리가 떨렸는지 모르겠다. 남자는, 그를 올려다본다. 일렁거리는 감정이 그대로 쏟아질 것 같았다.
김성식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남자는 그를 올려다보았고, 그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서로의 시선에 서로만이 담기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의 입술이 맞대어졌다. 거칠고 튼 입술이 부딪힌다. 잠깐 떨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맞춰온다. 숨이 뒤섞였다. 맞댄 입술은 뜨거웠고 거칠었다. 열린 틈으로 침범하는 살덩이 내부를 헤집었다. 도망가는 혀를 감싸 얽히고, 질척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방안에 흐른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남자는, 그에게 매달렸다. 마르고 긴 손이 남자의 목덜미를 쥔다. 서늘한 체온에 몸이 움찔한다. 상냥하게 얽혀오던 것이 치열을 천천히 훑고, 깊게 혀를 얽혀든다. 잠깐잠깐 뱉어내는 숨은 다디달았고, 열기를 품었다.
“…흐.”
남자는, 정은창은 가늘게 눈을 떴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시선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깊었고, 어두웠다. 바라보고 있자면 자신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어두운 시선이었다. 그 눈동자에 자신이 비췄다. 남자의 그림자에 정은창이 비친다. 일그러진 얼굴은 울고 있는지, 아니면 찌푸린 것뿐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엉망이었다. 애틋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입맞춤인가. 김성식이 남자의 입술을 콰득 물었다. 누구의 타액인지 모를 정도로 뒤섞인 것 사이로 붉은 피가 섞여 흐른다. 턱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은창은 인상을 찌푸리다 이내 입술을 핥았다. 피가 번져 입술이 붉다.
“너는 계속 내 손에 있어야지.”
김성식의 손가락이 번진 피를 따라 훑는다. 정은창은 입을 벌렸다. 손가락이 입안을 만져 들었다. 그 손가락 끝에 피가 묻어나왔다. 손톱 끝으로 상처를 긁었다. 피가 더 흐른다. 고통 서린 신음이 옅게 흘러나온다. 그런데도 그의 손가락을 물지 않고 그대로 제 피가 묻어나는 손가락 끝을 느리게 핥았다.
“이미 가져본 자리, 또 가져봤자 성가신 것들만 붙을 뿐이야. 보는 눈이 너무 많고, 잃는 게 많은데 굳이 가능성도 없는 도박에 베팅할 수는 없지. 안 그래? 응? 은창이.”
정은창에게서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그저 그를 올려다보며 그의 손끝에 입을 맞췄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손가락이 조명에 비춰 유난스럽게 보인다. 김성식은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만족인가. 어떠한 감정을 품은 웃음인가. 김성식이 고개를 낮춰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부 빗이다. 혀로 핥으니 비린 맛이 맴돈다. 피가 번진다. 립스틱을 바른 것처럼 더 붉게 물든다. 우리는 비틀린 관계였다.
“주인에게 돌아온 예쁜 개새끼를 내쫓을 이유는 없지. 이토록 기특한 짓을 하는 놈을, 누구한테 내어주겠어. …은창이, 내가 많이 아끼는 거 알고 있잖아.”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짓이 부드러웠다. 답지 않은 부드러움을 담고 있어서 정은창은 고개를 떨궜다. 그의 무릎이 이마에 닿았다. 비틀린 관계는 이해할 수 없는 길을 걷고, 걷는다. 김성식이라는 사람은 정은창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사람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고, 그것이 당연한 사람이다.
“형님.”
“왜.”
“…형님.”
“…….”
기이한 기쁨과 슬픔이 피어오른다.
길을 잃은 두 사람의 숨소리가 조용히 흐른다. 이제는 이해하기를 내려둔 서로의 관계는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손이 겹치고 시선이 얽히고 숨이 얽혔다. 정은창은 알 수 없는 이 기분이, 이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밤은 깊어서, 여전히 길을 모르지만, 그것에 의심하지 않는 밤이었다. 깊은 시간을 지나, 새벽이 지난다.
해가 뜰 무렵, 정은창은 눈을 떴다. 제대로 잠을 취한 것도 아닌데 눈이 떠졌다. 침대 맡에 김성식이 앉아 있었다. 싸구려 매트릭스는 작은 움직임에도 삐걱거리곤 했다. 떠지지 않는 눈을 애써 뜨고 그를 바라봤다. 그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방안에 담뱃불이 은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가 숨을 들이켤 때마다 빠르게 타들어 가는 그 끝을 시야에 온전히 담긴다. 김성식을 닮은 담배였다
“…형님.”
“더 자.”
갈라진 목소리에 낯선 다정함이 돌아온다. 다정한가? 다정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목소리인가? 정은창은 잠에 취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삐걱거리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낮은 숨이 천천히 내뱉어졌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어디로 갈 건지. …그것만이 아니라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늘 궁금했다. 지금도 그랬다. 답지 않은 다정한 손길이 그의 눈을 덮었다. 더 자도 괜찮다는 손길 같았다.
“… ….”
“정은창.”
“예에….”
이제 자신을 정은창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그만이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버렸던 이름이 그가 불러주는 순간 다시 나의 이름으로 돌아왔다. 우습게도 낯설지만, 과거로 돌아가는 기분도 들었다.
“그대로, 해왔던 대로만 해.”
그의 시선이 그대로 정은창을 향했다.
“머리 굴리는 소리 여기까지 들린다.”
“어떻게 그럽니까.”
담배 냄새가 훅 다가온다. 몇 년간 자신의 몸에 걸치고 살았던 담배 향인데, 김성식이 피운 향은 또 다르게 느껴졌다. 이상했다. 신기했다. 눈을 덮은 손의 체온이 기분이 좋아 정은창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감았다.
“이젠 나를 위해 살아. 네 전부를, 나를 위해.”
그의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린다. 나를 위해. 김성식을 위해. …김성식을 위해 살아간다. 낯선 단어들이 얽힌 것은 우습게도 마냥 낯설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지난 7년간, 자신이 무얼 위해 살려고 했나. 얼굴을 감추고, 이름을 지우고, 과거를 버리며 살아간 이유는, …정해져 있지 않나. 그의 말 없이라도 이미, 자신은.
“…이미, 모든 게 형님 겁니다.”
서서히 잠겨오는 잠의 수마에 정은창은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또 들렸던 것 같다.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가 떨어졌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에게 얽혀있었다. 언제부터, 라면 대답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김성식이라는 이름이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사랑이라 부르는 것을 감히 우리 사이의 이름으로 부르고자 함은, 이토록 이질적이었다. 이 온도에 너를 담아, 이름 없는 이는 다시 정은창으로 돌아왔다.
누구도 아닌 남자는, 정은창으로 돌아와 제 과거를 되밟았다.
다시 가야 할 길이 가시밭길이라더라도, 이제는 괜찮았다.
그랬다.
Fin
아래는 후기입니다.
많은 내용은 없으며 18년도에 쓴 후기를 그대로 넣어두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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