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맞이
양시백, 최재석
얼음과 눈이 녹는다. 영하를 맴돌던 기온도 조금씩 올라가 10도를 훌쩍 넘어가고, 눈 대신 비가 며칠 내내 쏟아지는데, 때아닌 장맛비는 아니겠지. 흠뻑 젖은 땅을 바라보다 달력을 본다. 아! 봄비구나. 그래, 겨울이 잠들고 꽃 피어날 계절이 온다. 두꺼운 겉옷은 자연스럽게 옷장 제일 안쪽으로 밀리고 반팔티가 앞으로 꺼내지길 일주일째, 최재석은 소매를 걷어 올렸다.
"대청소다, 양시!"
"갑자기요?"
그렇게 어린이날을 두고, 태권도장의 문이란 문이 모두 활짝 열렸다. 구석에 있어 손이 잘 닿지 않던 창문마저 모두 활짝 열어두고 두 사내는 각자 걸레를 쥔다. 평상시에 손이 잘 닿지 않은 위쪽부터 먼지를 닦아내고, 마른걸레로 한 번 더 닦아낸다. 위쪽을 어느 정도 닦아냈다 싶으면 이제 아래쪽으로 떨어진 먼지를 가볍게 쓸어내고, 다시 걸레로 바닥을 닦아낸다. 왁스에 적신 대걸레로 바닥을 두어번 왔다 갔다 하며 닦아내면 바닥이 어찌나 맨들거리는지. 매트들도 밖으로 들고 가 먼지를 전부 털어내고, 바깥으로 뽀얀 미세먼지와 물 자국으로 얼룩진 유리창에 세정제를 뿌려 뽀독 닦아내기까지 하면 시간이 어느새 시간이 한참이다.
"어머, 도장이 아주 깨끗해졌네~?"
열린 문틈으로 한 여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여기도, 저기도 광이 난 도장을 보며 호호 웃는 여성은 안까지 들어오진 않고, 입구에서 서성거린다. 안쪽에서 거울을 닦던 양시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준이 어머니."
"지나가는데 문이 활짝 열려있길래, 세상에. 두 분이 이걸 다 청소하신 거에요? 남자 둘이 손이 참 야무지시기도 하시지. 땀 좀 봐."
양시백은 눈을 데굴 굴렸다. 다정하게, 친절하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어색하게 올린 입꼬리가 순식간에 험악하게 보인다. 여성은 멈칫하다가 다시 호호 웃는다.
"사범님도 참, 그렇게 웃으시면 무섭다니까요."
"윽, 죄, 죄송합니다…."
바로 풀이 죽은 목소리에 여성은 고개를 저었다. 안쪽 방을 정리하던 최재석이 재잘거리는 목소리에 그제야 밖으로 나온다. 오, 어머니! 하고 밝게 웃으며 다가오는 그를 향해 여성은 고개를 숙여 마주 인사해 보였다.
"아 맞아, 청소하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두 분 다 이거라도 드세요."
손목에 대롱대롱 달려있던 장바구니 안에서 여성은 오렌지주스를 꺼내 내밀었다.
"저희 준이가 얼마나 여기 도장을 좋아하는지 몰라요. 덕분에 집에 오면 파김치가 돼서 저녁만 먹으면 금방 잠든다니까요. 사고도 덜 치고, 덕분에 한숨 덜었어요."
"아이고,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고 꾸벅이는 덩치 큰 두 남자들에게 오렌지주스 병이 왠지 작아 보이기도 한다. 여성은 호호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가볼게요, 고생하세요. 최재석이 호탕하게 웃는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 뒤로 두사람은 선물 받은 오렌지주스를 쭉 들이키곤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여기도 반짝.
저기도 반짝.
거울도 먼지 하나, 손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 정도면 됐다, 양시!"
"근데 웬 대청소에요? 평소엔 그렇게 정리도 미루시면서."
"봄이잖냐. 어? 봄맞이 대청소! 얼마나 좋아."
빈 플라스틱병을 쓰레기통에 넣는다. 텅 비어있던 통에 빈 소리가 울린다. 어느 정도 환기가 끝난 창문들은 잊지 않고 꼼꼼하게 닫아두고 문득 최재석은 양 시백을 바라본다. 먼지투성이의 꾀죄죄한 모습을 한번, 거울에 비친 꾀죄죄한 자신의 모습도 한 번. 꾀죄죄한 두 사람이 여기 있다.
음.
"목욕탕이다"
목욕탕이요?
뜨거운 탕에 어깨까지 푹 담근다. 차갑게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식히고, 손가락이 쪼글쪼글해질 무렵 최재석은 그에게 때수건을 건넨다.
"뭐에요?"
의아하게 때수건과 최재석을 바라보던 양시백은 곧 그의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 뜨신 물에 푹 익은 피부가 때수건이 지나갈 때마다 더 붉어졌다 허옇게 된다. 한 번도 이렇게 바라본 적 없던 최재석의 넓은 등은 그동안 몰랐던 흉터들이 선명하게 있었다. 아닌 척, 눈으로 아무리 훑어봐도 그건 자상이었다. 양시백은 입이 근질거렸지만 결국 꾹 다물었다.
물어보면 대답해주겠지. 최재석은 그런 사람이니까.
그건 곧 물어보지 않으면 이야기 해주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양시백은 그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묻고 싶은 것은 언제나 많았다. 흉터? 뿐만 아니라 그가 자신의 보호자 노릇을 하게 된 이유라던가, 가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군번줄 같은 걸 빤히 바라보고 있는지. 하지만 그 표정을 바라보고 있으면, 결국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하게 된다. 아무것도 몰라도, 괜찮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엔 양시 차례라며 그에게서 때수건을 뺏어간 최재석은 이제 아이의 등을 박박 밀었다. 잘 먹이고, 잘 재우고 하니 제 아비보다 더 듬직해진 아이의 등이 언제 이렇게 커졌나. 손을 움직이며 그 생각을 했다. 성인이 되면, 사범이 되면, 그때가 되면 아이의 아버지에 대해 알려주겠다고 매해 다짐하는데도 미루기만 한다. 최재석은 무엇이 두려운지 몰랐다. 이젠 얼굴도, 목소리도 점점 희미해져 가는 그를 떠올린다. 부자지간이 얼마나 똑 닮았는지. 아, 그래서인가.
최재석은 가끔 그게 두려운 것 같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양시백이 복수를 하겠다고 나설까 봐.
그걸 자신이 말리지 못하고, 아이가 크게 다치는 길을 걸을까 봐.
양시백 마저 잃을까 봐.
그래서 이 평화 속에서 그저 아무것도 모른 척 방관하고 싶어지곤 했다.
뜨거운 물에 푹 익고, 피부도 시뻘겋게 달아올라서는 목욕탕을 나서는 두사람의 머리에선 김이 폴폴 올라왔다. 목엔 수건을 걸치고, 한손엔 바나나 우유가 떡 하니 쥐여있는 꼴이 웃기기도 했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걸음을 옮긴다.
"양시, 오늘 저녁은 뭐 먹고싶냐?"
"라면 밖에 없잖아요?"
"윽.... 그건, 오, 오늘은 외식이라도!"
"그럴 돈이.... 있어요?"
"양시!"
하하하, 웃음소리가 뒤섞인다. 최재석이 장난스레 그의 목에 팔을 걸고 조르는 시늉을 하자 엄살 서린 비명과 웃음소리가 뒤섞인다. 결국 간단하게 외식하기로 하는 그들의 뒤로 그림자가 길어진다. 양시백은 길어진 그림자를 힐끔 쳐다본다. 관장님, 관장님은 왜 제게 잘해주세요? 오늘도 꺼내지 못한 말이 노을과 함께 저물어간다. 돌아올 대답이, 이 목에 걸린 목걸이가 무거워서 대답지 못하고 지금의 평화에 만족한다. 양시백도, 최재석도, 현재의 삶이 좋았다. 이 평화가 계속 이어지길 바랬다. 계속, 앞으로도, 쭉, 이어지길 바랬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