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어긋남

주정재, 권현석 / 정재현석

너무 구태의연한 표현이라 몇 번이고 삼켰던 말임에도 불구하고, 소화불량을 야기하는 느낌에 뱉어내고야 말았다. 제 입에서 내뱉어진 단어와 문장들에 잠자코 듣고만 있던 너의 표정이 굳어짐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뒷머리를 쓸었다.

“지금 방금…?”

“…하아.”

낮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안다. 믿기지 않겠지. 아니면 믿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직장동료가, 그것도 같은 성별의 사람이 내뱉은 말이었으니까. 괜히 시선을 피하려 그가 아니라 그의 뒷배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 누가 어디서 나타날지도 모르는 곳임을 아는데도 섣부르게 왜 입을 열었을까, 딴 생각이나 하고 앉았다. 불과 몇 분전의 내가 참 멍청했지.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거란 생각이 무심코 꺼내버린 말은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지금에라도 농담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넘어갈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다. 이미 꺼낸 말은 진심의 조각이었다.

“거, 참. …현석, 네가 즐겨하던 그 말 있잖냐. 선택과 집중.”

결국 다시 내뱉기로 한 감정은 두서없이 흩어졌다.

“이 주정재가 권현석, 너를 선택하고, 너만을 집중하려는 거야. 아직도 이해 못하겠어? 젠장, …이렇게 까지 말하면 좀 알아들어라! 권현석! 내가, 빌어먹을…, 널 좋아한다고. 어? 시발….”

원래부터 곱지 않던 말투가, 금방 언성이 높아졌다. 다소 신경질 적으로 내뱉어지는 말은 날 없이 무너진 진심이었다. 눈 딱 감고 외쳐버린 후 주정재는 낮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었다. 절대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상대는 남자였다. 무엇보다 애도 있다고 했다. 이미 부인이 있던 사람이다. 넘볼 수 있을 리가 없다. 감정을 자각한 이후로 진심을, 표현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도 수십 번인데 결국 이렇게 꼴사납게 내뱉는 꼴 하고는. 속으로 자학하며 짧게 웃었다. 좋아하게 된 계기라던가, 별로 생각나지 않으면서, 정신 차리고 보니 좋아하게 되어버린 후라는, 진부한 이야기다. 청춘 연애 물도 아니고, 우습게도 그랬다.

권현석 경감은 서 내에서 언제나 중심이었다. 사건을 직접 지휘하는 것도, 직접 현장에 뛰어 들어가는 것도 서슴없이 해내곤 했다. 인망도 좋고, … 누가 봐도 좋은 사람이었다. 별 거지 같은 게 달라붙어도 그 따듯한 모습을 갖다버리지 못했다. 천성이 바보 같은 사람이라서, 무섭게 냉철해지는 한편 금방 바보 같이 헤실거리는 게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오는, …

누구에게나 존경 받고 신임 받는 권현석 경감.

그런 그가, 다름 아닌 그가 제 앞에서 곤란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서 있다. 그것도 제가 내뱉은 말 때문에. 그 사실은 저를 조금 유쾌하게 만들었다. 말 내뱉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 후회였는데 이러고 있자니 마냥 후회로 남을 것 같지는 않았다.

또 다시 그의 뒤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사람이 복도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젠장…. 이왕 내뱉을 거, 가망도 없는데 좀 멋지게, 어? 좀 그렇게 해볼걸. 서 내의 복도에서 무드도 없이 내뱉은 과거의 제가 시발이다, 시발. 일부러 한 발짝, 그에게 다가갔다. 움찔…. 나는 두 손을 들어서 터덜 웃어 보였다. 본인이 움찔 해놓고서는 아차, 하는 표정도 적나라하다. 어지간히 동요했구나 싶었다. 이 모습도 참 귀여워 보여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글러 먹었지.

 “…정재야.” 

가라앉은 목소리도 참 좋지. 이렇게 당황하니까 간만에 이름도 불러주는구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그의 뒤를 다시 바라봤다. 복도로 들어오던 남자는 금방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조금 여유가 생겼다. 어색하게 목덜미를 쓸고는.

 “뭐어, 됐어. 괜찮아. 대답을 바라고 이야기 한 건 아니었으니까.”

“없었던 거로 치자고, 우리. 어? 괜히 불편해하지 말고.”

“아무리 그래도…!”

“거참, 정말 괜찮대도. 너도 알잖냐. 앞으로 몇 주 후면 나도 '그쪽'으로 투입된다는 거. …그래서 던져본 말이야, 어? 까닥하면 뒈지는데 말이라도 해놓고 뒈져야 좀 시원하지.”

망설이는 눈동자가 안경 너머로 보였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무작정 부정 않고, 혐오의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지 않은 그 시선에 도리어 감사했다. 흔들리는 눈동자 너머로 그래도 저를 배려하려는 그의 배려가 느껴져서 기분 나쁜 것도 없었다.

그래, 괜찮다. 

애초에 마음을 전하기라도 한 게 어디겠냐,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없었던 걸로 치자. 그게 제일 어? 적정선이라고 생각했다. 고백 비스 무리한 걸 한지 겨우 10분 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도 고백한 놈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게 좀 우습기도 하겠지만. 제 말 반 이상은 다 진심이었다. 곧, 경사 주정재의 행적은 모두 지워지고 깡패 주정재만이 모든 기록으로 남을 터였다. 몇 주 남지 않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초조해졌던 거라고 애써 다독였다.

 “정 안되면 친한 친구라도 하자고, 어? 뭘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해? 어어어, 어쭈? 그 표정 뭐야. 지금 나랑은 친구 하기 싫다는, 그런 거야? 왜 이래~, 이래 보여도 나도 인기 있는 사람이야, 어? 천하의 주정재를 뭐로 보시고?”

애써 가벼운 말로,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띄웠다. 굳은 권현석의 표정이 풀리는 게 보였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제 진심으로 가볍게 넘겼다. 현석이도 금방 제 페이스를 되찾는 게 느껴졌다. 이걸로 정말 괜찮다. 지금의 관계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관계만이라도….

*

 “리트머스 용액에 담가보면 알랑가?”

 - 리트머스, 새로운 정보원이 합류할 거라는 연락이 들어왔다. 거 새끼들 줄기차게 줄어들고, 늘어나는구먼. 실제로 본 정은창이라는 놈은 첫인상이, 글쎄. 배짱 하나는 정말 두둑한 새끼라고 생각했다. 또 입 하나는 정말 잘 놀리는 새끼라고도 생각했고. …거참, 무작정 황도진의 경호원에게 칼질을 해버리지 않나, 그래 놓고서는 잘도 살아남아서 다리 풀려 주저앉는 꼴 하고는.

 어쨌든 새 배우는 현장에 잘도 적응하고, 적당히 헤집어 놓았다. 상경해서 바닥 기던 게 엊그제 같은데 금방 조직 내에서 승승장구 하는 꼬라지가 눈에 보였다. 그만큼 그 녀석이 흘릴 수 있는 정보도 많아졌다. 경찰들 쪽이던, 깡패들 쪽이던 예쁨 많이 받는 새끼였다. 김성식에 훌륭한 투견이, 알고 보니 박쥐라는 사실도 옆에서 보니 참 코미디가 따로 없다.

 그리고 모든 일에는 계기가 있기 마련이었다.

 솔직히 이 작전도 몇 년째 이러고 있는지 이제 감이 잡히지 않았다. 처음에는 1년이었나? 아니 그보다 더 짧았을지도 모른다. 장기적인 작전이 아니었다. 금방 끝날 거라고 모두가 이야기했고 그래서 호기롭게 자원했었다. 가족도 없겠다, 책임질 사람도 없겠다. 잠깐만 깡패 노릇 하고 한 건 크게 올리면 앞으로의 경찰 인생 쭉 펼 거라고 생각했다. 진짜 제대로 한몫 딱! 하면, 주정재 인생 꽃피게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다 던지고 몸을 던졌는데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작전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 긴 시간 동안 같은 편이 얼마나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나 말고 여기에 경찰이 더 남아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일개 현장 배우들에게는 아무런 정보도 제대로 쥐여주는 게 쥐뿔도 없고, 어떻게든 정보 쥐여주려는 쥐새끼들만 똥줄 타게 움직일 뿐이지.

 어느 날 갑자기 이러다 죽으면 정말 개죽음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제대로 체감한 건 폐병원에서의 일이었다. 김성식은 단 한 점의 동정도 망설임도 없이 같이 있던 녀석들을 죄다 쏴 죽였다. 솔직히, 나도 죽는 줄 알았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놈들이 죄다 피투성이로 바닥에 널브러진걸 눈에 담았다. 이 중에 정말 경찰이 있었을까, 몇 명이나 있었을까.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지, 그래. 현장 직에게 최소한의 정보도 없었다. 유출 예방이라는 이름 하나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 불안감이 날로 커졌다.

정은창과 함께했던 그 거래에서, 현금 다발을 보여 흔들린 자신이 선명했다. 아직도 그 돈다발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돈 많은 새끼들의 뒤나 닦아주고 따까리 짓 하는 것도 한두 해야지, 이것도 몇 년째인데 상황의 진전은 없고 불쌍하게 죽어 나간 잠입 배우들은, 어? 아무런 보상도, 제 자리도 전혀 못 찾고 그저 깡패로서 묻히고 죽어 나갔다. 경찰 쪽에서도 그 죽음들을 아무렇지 않게 묻어버리는 것을 눈앞에서 봤는데, 신뢰라는 게 그렇게 한순간에 무너트릴 수 있다는 거, 새삼 깨달았다.

그나마 이 시궁창 같은 생활 속에서도 유일한 낛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현석이와 접선을 하기 위해 만나는 그 시간이었다. 녀석은 다른 놈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했다.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안심하기도 했다. 내가 죽어도 슬퍼할 놈, 경사 주정재를 기억할 놈이 한 명은 있구나, 그게 너구나. 안심도 했다.

“현석이, 좋은 녀석이지? 이 일 힘들어서 다 때려치우고 싶어도 그 녀석 이랑만 만나면 또 정의감으로 불타오른다니까. 하하.”

그게 억지로 자신을 다잡는 거나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대로도 괜찮은가, 몇 번이고 생각했다. 아예 이쪽으로 완전히 몸 담글까. 그러면, 그래도 내게 내려오는 게 있지 않을까. 돌아갈 자리를 생각해서 일부러 구린 일은 가급적 피하고, 혹여나 눈에 띄면 모가지 날아갈까 슬슬 길면서 지내왔다. 하지만, 정말 딱 자리 잘 잡으면 그 돈다발들. 내 손에 쥐어지는 거 아닐까.

탐욕이 일어났다. 매일 밤이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접선 일이 되어 현석이를 만나면 그동안 했던 갈등들은 금방 살살 풀어지고는 했다. 녀석은, 여전히 순둥이처럼 맹했고, 웃는 모습도 그대로였다. 일 이야기 할 때는 그렇게 진중하고, 무거운 표정을 짓다가도 금방 다른 이야기를 하면 그래도 쓴 표정을 지우고 웃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녀석이 웃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가벼워졌다.

오랫동안 안 보게 되면 마음을 접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정리는 할 수 있겠지. 잠깐 지나가는 감정처럼 정리되겠지. 안일한 생각들이었다. 가끔 보는 녀석을 볼 때마다 오히려 가슴 한쪽이 매번 아려왔다. 정리 할 수 없는 감정이다. 더러운 일을 하고 온 내가 오히려 비참해 질 정도로 녀석을 좋아하고 있었다. 아니, 좋아한다. 매번 깨달았다.

너만, 그 자리에 계속 있어 준다면, … 나는 괜찮다. 현석아.

방안에 혼자, 얼굴을 감싼 채 그렇게 생각했다. 제발 너만큼은 그대로 서 있어 주길 바랬다. 다른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무너지던, 고꾸라지던, 사라지던, 변하던 괜찮으니까 너만큼은 그 자리 그대로 있어 준다면, … 내가 돌아갈 자리가 되어준다면 다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변하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빌었다.

“섭섭했다면 미안해, 상황이 급하잖아. 혹시 전에 말했던 건 조사해 봤어?”

저를 보자마자 안부의 인사 없이 용건을 이야기하는 네 목소리에, 자신의 어딘가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선명했다. 피가 식는다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짧게 웃었다. 내 안부는 관심이 없으신가 봐? 목소리에 삐딱함이 베였다. 잠깐의 침묵 후에 그럼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하고 되돌아오는 물음도 우스웠다.

“꺼내줘.”

“…그,”

“안되지? 아니, 못하겠지.”

그의 모습을 보니까 현실이 새삼스럽게 더 와 닿았었다. 겨울의 찬바람이 피부를 베어가는 것 같다. 바람이 차가운지, 제 주변만 유독 차가운 건지. 눈을 조금만 돌려도 주변의 낡은 폐기물들이 시선에 닿았다. 떠올렸다. 정은창. 나는 이렇게 밖에서 뺑이 돌리고, 찬밥신세면서, 그 새끼는 뭐가 예쁘다고 집에까지 데려가서 따듯한 밥을 먹였냐. 현석아. 가슴 한켠이 또 욱신거렸다. 억울했다. 뒤탈 없도록, 그걸 위해서 그와 만나는 일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경찰인 그의 얼굴을 아는 조직원들은 많았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게 몰래 만나왔는데,

왜 나 말고 그 새끼만 특별대우 해주는 건지.

나는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제자리에 돌아갈 수는 있는 건지.

쌓아왔던 불만들이 차곡차곡 쌓이다 무너질 듯이 휘청 인다. 몇 번의 대화가 더 오가지만, 제대로 된 대화가 오갈 리가 없었다. 자신의 일방적인 날 선 물음과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답변 몇 마디. 신경질이 났다. 지긋지긋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 제 일방통행의 마음이었다. 보답은 바라지도 않았다. 솔직히 나를 좋아해달라는 과분한 생각도 없었다. 권현석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차별 대우는 해선 안됐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욕만 좀 하고 끝냈을 거다. 기분 더럽다고 생각하며 아예 등을 돌렸을지도 모르는데,

권현석, 네가 나에게 그러면 안 되지. ….

왜 하필 그 깡패 새끼였는지 알 수가 없다. 차갑게 식었던 기분이 반대로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짧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지막으로 말을 잘리고, 넋을 잃은 권현석이 보였다. 이런 제 모습이 지독하게 낯설다는 것을 너무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표정을 보고 있자니, 옛날의 네가 생각났다. 제가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던 그 복도에서 짓던 표정이, 선명했다.

안되겠다, 현석아. 너는 어찌 된 게 아직도 그렇게 감정을 못 감추냐.

“그럼, 충성~. 수고하쇼. 경감 나리.”

…주정재!

뒤에서 저를 부르는 불음을, 들었음에도 고개를 저었다. 됐다, 이걸로 됐다.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은 기분이었다. 나는 확실히 좋은 사람은 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오르지 못할 꿈나무였고, 제가 오를 나무는 제 앞에 있었다.

나는 변하지 않았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성실하고, 바른 것과는 거리가 먼….

미안하다, 현석아. 근데, 네가 나빴다. 속으로 변명을 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골목을 나와도 여전히 으슥한 곳이었다. 가로등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어서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조금 더 걸어 나갔다. 나는, 내가, 내 목숨이 더 소중했다. 이 줄을 쥐면 그것만 보장되는 게 아니라, 내 지위, 내 돈, 내 미래! 그게 보장이 되는 거였다.

사랑에 연연하는 애새끼는 진즉에 뒈졌다. 그런 거에 매달리기에는 옛적부터 너무 큰 사람이었고, 그런 걸 꿈꾸기에는 더러운 것을 이미 많이 본 상태였다. 괜찮다. 그러니까 다 버려두련다. 가볍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입가에는 웃음을 지었다. 됐다. 이걸로. … 이걸로. 

*

이걸로 됐는데, 왜, … 너와 내가 총을 겨누고 있어야 하냐. 현석아, 응? 

바들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소리를 질렀다. 이 불안이 들키지 않길 바랐다. 그 와중에 또 네 옆에는 정은창, 그 새끼가 있었다. 그래, 나만 개새끼였다. 나만 나쁜 새끼고, 존 나게 나쁜 새끼로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똑같이 손 더럽힌 새끼인데 그 새끼만 특별대우냐, 왜. 속이 홧한 느낌이 들었다.

 너와 그저 친한 친구 사이로 마주한다는 것이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이었나.

 친구로나마 남는다는 게, 그게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나,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잠입 요원으로 지원 했던 것부터 잘못 되었던 걸까, 아니면 고백을 했던 거? 친구로 괜찮다고 했던 거? 애초에 선을 긋지 못한 거? ─그냥 내가 잘못됐던 건가?

“총, 내려…! 주정재!”

권현석의 목소리가 주변 소음에 뒤섞여 들려왔다. 짧은 숨을 내뱉으며 웃었다.

“그거 아냐, 현석아. 나는, 그냥 살고 싶었어.”

웃음 어린 목소리는 힘없이 떨어졌다. 흔들리던 팔을 바로 들었다. 총구가, 너를 향했다. 나를 향하는 총구를 바라봤다. 그래봤자 너는 나를 쏘지 못 할 거라고 알고 있었다. 눈동자에서 이미 다 보였다. 보통 사람들은 안경을 감정을 감추기 위해서 쓴다고들 하는데 어찌 너는 안경을 써도 그렇게 다 드러내면 어떡하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에서도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불안, 초조, 배신감, 그리고 동요.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인 눈동자가 나를 비췄다. 그래도 뭐 나쁘지는 않네, 이런 상황이지만 네 눈동자에 나만 담겨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지금만큼은 서로가 서로만을 보고 있는 거였다. 물론, 이런 분위기 말고 조금 더, 조금만 더 다른 분위기였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총구를 바라보다가, 정은창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움찔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총구로 그 녀석을 가리켰다가 다시 바로 쥐었다.

“현석아,” “그냥, 저 새끼만 죽이고 우리 도망갈까.”

힘 잃은 목소리가, 내 목소리였나 싶었다. 내리는 비가 시야를 가려서 짜증이 났다.

“무슨 소리야, …정신 차려!”

“나는 살고 싶다, 현석아. 근데, 너랑 저 새끼를 죽여야 내가 살아. … 밝은 데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라고.”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너와는 다르다. 이미 나는 손에 수명, 수십 명의 손의 피를 묻힌 후였다. 이 자리에서 너를, 권현석을 죽지 못한다면 박근태, 그 영감은 분명 다음으로 나를 죽일 거였다. 차라리 그렇게 될 거라면, 도망가자. 차라리 같이 도망가자. … 네가 마지막이라도 나를, 선택해줬으면 좋겠다.

“왜 모르는 거야,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모르는 건, 너야! 권현석!”

“너, 딸도 있다며! 지켜야지! 지켜야 한다며! 그들이, 네 딸도 그냥 둘 거 같아!?”

내가, 헛소리 하는 거 같냐고! 결국 또 언성이 높아졌다. 아니, 애초에 언성을 높이고 대화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젠장, 비 때문에 흐려진 시야가, 계속 거슬려서 고개를 돌리다,

움직이려던, 정은창이 눈에 보였다. 반사적으로 권총을 그쪽으로 겨눴다.

정은창이 움직이면, 자신이 위험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아쇠를, 당겼, …어?

총성이 들렸다. 어? …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피가 흐르고 있었다. 고개를 다시 들었다. 허망한 표정을 지은 권현석이가 눈에 보였다. 상황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총에, ?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로 어? 어? 거리기만 했다. 금방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크크, … 네가, 나를, 나를 … ! 배신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시간도 없었다. 복부에 알싸한 고통이 터졌다. 고개를 내렸다. 정은창이었다. 그렇게 잘 가지고 놀던 나이프로, 이제는 제 배를 찌르고 있었다.

어이가, 없네, 진, …짜.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의식은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거동하기가 어려웠다. 다급한 목소리들이 귓가에 흐리게 들려왔다. 어이가 없었다. 현석이, 권현석이 나를 쐈다. 결국,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의 선택에는, 내가 없었다. 선택지 자체에 내가 없던 것이었다.

권현석은 정은창을 선택했고, 그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대체, … 나오지 않은 눈물을, 비가 대신 흘러내렸다. 몇 번의 총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고개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마 그때 쯤, 이미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냥 잠이 몰려왔다. 현실을 피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정은창의 분노 어린 목소리가, 아, 그래. 들려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병원이었다.

권현석이 죽었다. 결국, 죽었다. 전해 들은 첫 이야기였다. 정은창은 행방불명에, 자신은 방호복 덕분에 겨우 목숨을 보전했다. ─나 혼자만 살아남았다. 다른 사람들의 소식은 TV만 틀어도 아주 생중계로 며칠간 내내 나왔다. 곧 박근태가 제 병실에 찾아왔다. 몇 마디 이야기 나눈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깨달았다. 아, 내가 계속 살아가려면 이 새끼에게 빌빌 거려야하는구나.

 깡패 짓 할 땐 김성식의 밑을 기어야 했다. 이제 햇빛 드는 곳에서 걸어 다니기 위해 박근태 밑을 기어야 했다.

 대체 달라진 게 뭐가 있지? 나는 이걸 위해서?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손으로 눈을 덮었다. … 정말, 의미 없는 일이 되었다. 내가 원하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 잃었다. 현석이도, 지위도, 지위? 시발, 개도 안 받을 지위, … 자유도, 아무것도 없었다. 욱 하고 올라오는 것은 눈물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폐공장에 다시 발을 디뎠다. 알싸한 고통이 움직일 때마다 느껴졌다. 하지만, 여기를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현석이의 죽음은 다르게 위장되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공장은 총알 자국도, 싸움의 흔적도, 죽음의 흔적도 없었다. 깨끗했다.

 … 네가 죽었다는 사실도, 이렇게 깨끗하게 지워진다면 좋을 텐데.

갑갑한 감정이 가슴을 조인다. 네가 서 있었던 위치쯤으로 걸어갔다. 잠깐 주변을 보다가 뭔가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이미 뒷정리는 했으니 원래부터 있었던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이미 손을 뻗은 후였다.

 수첩이었다.

 권현석의, 수첩.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 어어? 말도 안 돼.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다 조심히 내부를 훑어봤다. 현석이가 그간 조사하면서 의심스러웠던 점을 정리해놓거나, 딸. 권혜연에 대해 적혀져 있었다. 갑자기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혜연이, 권혜연. 권현석 경감의 딸. 잠시 숨을 멈췄다가 수첩을 급하게 주머니에 넣어뒀다. 안 된다, 현석이의 딸 만큼은 지켜야 한다. 그 생각이 들었다. 새하얗게 변했던 머리가 다급하게 돌아갔다. 절대, 절대 그 사람들은 현석이의 딸도 내버려 두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들 터였다.

지켜야 한다.

내가 지켜야 한다.

현석이를 선택하려던 내가, 도중부터는 다른 것을 잘못 선택하기 시작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거라면 지금 다시 선택해도 늦지, …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다. 혜연이를 지키는 것에, 선택하는 게 최소한의 내 속죄라고 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야 최소한, 훗날, 저승이든 어디든 만나게 되더라도, 네 딸은 그래도 내가 지켰다고 이야기 한다면 예전처럼 내게 다시 그 웃음을 보여줄 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현석아. 조금만 더 기다려줘라. 어? 내가 지금 따라가기엔, 좀 이른 거 같잖냐. 원망이나, 그런 거 다 나중에 들을 테니까,

 

 

 

 

 

“정재야." 

… 그만 사라져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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