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전환

주정재, 권현석/정재현석

- 권현석이 유상일 대신 잠입요원으로 투입되고, 수사팀엔 유상일 경위가 중심을 잡고 있습니다. 

- 주정재 또한 잠입팀으로 자원하고자 했으나 '꿈'으로 인해 핸들을 급하게 틀었습니다. 수사팀에 주정재 경사가 있고 권현석의 백업을 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있었다. 낡은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피우다가도 몇 번이고 손목의 시계를 바라본다. 작은 소리가 들리면 날카로이 반응하더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짜증 어린 한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주정재는 고개를 들었다. 낡은 전등이 깜빡깜빡 거리며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자신의 미래를 같이 희미해서 괜시리 짜증이 났다. 속 안쪽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내뱉어졌다. 아리다. 한가하고 지겹기만 한 기다림의 시간은 가끔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그날로부터.

선진화파 소탕 작전. 관련된 사항은 기밀이었지만사람들 속의 이야기다 보니 경찰 내에서도 일찍이 소문이 나고 있었다. 서넛이 모이면 이야기가 나왔다. 그거 들어봤어? 하고 운이 띄워진 이야기는 설마 진짜겠냐.로 끝이 나곤 했지만 모두 속으로는 어느정도의 신비성을 느꼈다. 선진화파가 윗선에게 있어선 오랫동안 골칫덩어리였다는 것도, 이번에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그 윗윗선들의 이야기도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충분히 그럴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정재 또한 그 이야기가 자신에게 닿았을 땐 뭐 그러려니 했다. 

"허, 씨. 그러니까 이게 괴담이 아니라 진짜라는 이야기지‥."

강요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주정재 자신의 의사를 존중하는 권유였다. 이야기도 썩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기간도 길지 않고, 잠깐 깡패 놈들 뒤를 닦아주는 일 하면 되는 일이었다. 간단하게 작전에 대해 적혀있는 서류를 쥐고 읽으며 주정재의 눈동자에 음습한 욕심의 빛이 돌았다. 이거 크게 한방 치면, 다이렉트 승진의 길이 보장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거다. 이거라고 생각했다. 위에서도 집중하는 이 일에서 자신이 딱! 멋지게 한 건 물면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좋은 기회였다. 주정재는 이 종이가 자신의 미래를 끝내주게 멋진 길로 이끌어 줄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거, 하루만 생각해봅시다. 비밀이란 거 인지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나도 생각은 해봐야 하지 않겠어?"

한 번은 튕겨야지 하는 심정으로 답을 미뤘다. 상대 쪽에서도 이해한다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정재는 뒤를 돌아 웃었다. 주정재 인생 꽃 좀 피워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신이 나서 퇴근하는 길에 편의점에서 소주를 사서 집에서 혼자 거하게 마셨다. 미리 하는 자축이었다. 술기운이 적당히 올라와 기분이 좋았다. 이런 날은 꿈도 좋은 꿈을 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잠드는 순간까지도 그는 웃고 있었다.

좋은 꿈은 개뿔. 우웨에엑. 

주정재는 새벽부터 변기를 붙잡고 속을 게워냈다.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손이, 몸이 떨렸다. 이미 게워낼 만큼 다 게워냈는데도 헛구역질이 멈추지 않았다. 목은 따가웠고 생리적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젠장, 젠장, 젠장! 이게 대체 무슨 꿈이야! 지독한 악몽이었다. 꿈의 시작은 선진 놈들 따까리가 된 자신이었다. 깡패 놈들의 라면 심부름이나 하고, 놈들이 부르면 꼬리를 신나게 흔들어야 하는 꼴로 처맞고도 실실 웃고 있었다. 시간은 금방 뛰어넘어갔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잠입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두워지기만 했다.

꿈 속에서 자신은 끝없이 망가지고 있었다. 결국 손에 피를 묻히고 살인을 저지르고 죄를 지은 자신을 3자의 시선으로 주정재는 바라보고 있었다. 돈 가방을 쥐는 자신을 향해 소리를 치기도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발버둥을 치던 꿈 속에서의 시간은 자꾸 흐르고 비참한 자신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몇 번이고 칼에 찔리고, 총알이 몸에 처박히고 넝마가 된 몸으로 혼자 있는 자신이 있었다. 얼굴이 지워진 이들이 스쳐 갔지만 그들도 하나둘씩 사라지고 꿈에서 깨어났다. 찬물로 세수를 하며 거울을 바라봤다. 퀭한 자신이 비쳤다. 주정재는 생각을 고쳤다. 이건 아니었다.

꿈이 개꿈이던, 예지몽이던 주정재의 머릿속에서 이건 아니라는 말이 끊임없이 울려댔다. 그래서 주정재는 다음날 훨씬 수척해진 얼굴로 부정의 답을 내놓았다. 그러자 상대 쪽에서는 수사팀은 어떠냐는 답을 내밀었다. 권유하는 그의 어투에서 곤란함이 비췄다. 주정재는 느꼈다. 아, …인원이 좆나게 딸리는구나. 그럴 법도 했다. 말 그대로 사자 굴에 목숨 바치러 스스로 들어가는 꼴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순순히 수락할 이들은 많지 않았다. 거기다 경찰 짓 하는 사람 중에 친인척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나. 그의 얼굴에서는 초조한 빛이 흘렀다. 주정재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수사팀이면, 꿈속처럼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일이 잘 풀리면 그것도 한방 치는 게 아니겠나. 조금 더 안전하게 성공의 길로 가보자고. 주정재의 수락에 남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의 이름은 유상일 경위였다.

수사팀 인원은 느리게, 천천히 채워졌다. 작전 준비 기간도 길었다. 그러나 막상 주정재가 수사팀에 합류하고 보니 이미 잠입은 시작된 상태였다. 많은 이들이 이미 깡패들 속으로 걸어갔고, 자리를 잡고자 발버둥 치고 있었다. 주정재는 서류를 들고 웃었다. 골 때리네, 진짜….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프로젝트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되고 시작하고 있던 것이었다. 어마어마하게 거물이구먼. 앞으로 쌓여갈 일들에 주정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걸로 괜찮은 거겠지.

수사팀 모두는 나눠서 잠입 요원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자리 잡은 이들 중점으로 관리가 들어갔다. 자리도 잡지 못한 놈들을 괜히 건드려서는 꼬리만 잡힐 뿐이라고 모두가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주정재가 수사팀에 합류하고 몇 달이 지났나, 그에게도 몇 명의 인원이 나뉘었다.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권현석. 권현석? …아니겠지, 동명이인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접선 장소로 향했다.

낡은 코트, 부스스한 머리카락, 뿌연 안경, …마르고, 상처투성이.

접선 장소로 향하자 그가 있었다. 멀리서도 왠지 모르게 불쾌한 피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은 분위기가 눈을 의심하게 했다. 소리를 내며 다가갔다. 한참 바닥을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가라앉은 호박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났다.

 "…어."

시선이 마주치고 조금, 가라앉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렇게 만날 거라고 전혀 생각도 못했던 이였다. 상대 쪽에서도 당황한 기색을 보인다. 알아보네, 그런 생각을 하며 주정재는 어색하게 뒷머리를 벅벅 긁고 앞으로 다가갔다. 쓰레기나 낡은 풀떼기가 밟히는 소리가 자박자박 들린다. 거의 한 걸음쯤 다가갔을 때 숨이 트였다.

"권현석?" 이름 뒤에 붙는 직함을 겨우 삼켰다. 

"정재? 진짜 정재야?"

그의 앳된 목소리가 귀에 카랑카랑 들려왔다. 제 이름을 이야기하는 그의 뒤로 어릴 적 제가 알던 모습이 비친다. 과거의 인연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랬다. 한때 만나 장난질 좀 했던 사이였지.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어정쩡한 관계였고 그러다 보니 어영부영 헤어지고, 연락이 끊기고 그런 정도일 뿐인 인연이었다. 잊고 지냈는데…. 제 앞에 서 있는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오랜만인 그는 여전히 앳된 사람이었고 조금 더 깊이 있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몇 년, 만이지. …아 잠깐만, 정재. 네가 왜 여기, 아?"

"뭘 그렇게 혼자 버벅거려. 경찰 됐지. 지금은 엄연히 경사. 주정재 경사이올시다."

"하하, 세상에. 그 작았던 아이가 경사라니."

"어허? 작은? 작은? 이 주정재가 언제 작았던 적이 있었나? 거 누가 들으면 나이 차이 어마어마한 줄 알겠어."

권현석이 가볍게 웃어넘기고 주정재가 이어 짧게 웃는다. 주정재는 머릿속에 그에 대해 적혀있던 서류 내용을 천천히 떠올렸다. 권현석 경감. 직접 자원. 지는 벌써 경감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름표 달았었으면서 자신이 경사라는 사실에 저렇게 낯설어한다. 옘병할. 주정재는 담배가 땡겨 괜히 손을 움찔거리다 그를 보고는 애꿎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시시한 이야기가 오갔다. 간단한 안부 따위 뒤로 권현석은 굳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일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이었다. 그는 자잘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의외… 라는 생각을 했다. 깡패와 권현석이라니 붙여놓으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동시에 자신이 말을 걸기 전의 그를 떠올렸다. 조금,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

권현석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질척한 손이 기분 나빠 벽을 향해 손을 털어냈다. 벽에 검붉은 핏덩이가 튀었다. 뒤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선명해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안경 너머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자신이 죽인 사람이 널브러져 있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짓은 아니었지만, 결론만 생각하면 그래, 자신이 죽였다. 온기를 앗았다. 숨통을 끊었다. 살인자다. 구토감이 올라왔다. 하지만 시선이 있었다. 입술을 콰득 물고 멀쩡한 손을 주머니에 넣어 손수건을 꺼냈다. 털어내지 못한 핏덩이를 닦아내고 붉게 물든 손수건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버린 거다. 버렸다.

"이름이, 권현석‥이었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권현석은 급하지 않게 몸을 돌렸다. 시선의 목소리였다. 빛이 가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누구나 알고 있는 남자였다. 알 수밖에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황도진. 지독하게 깊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본다. 애써 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째서 그가 이 자리에 서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두 걸음 거리가 좁혀진다. 두 걸음 정도 뒤에, 황도진이 멈춰 섰다. 손을 뻗으면 아슬아슬하게 닿을 거리였다. 그의 뒤에는 익숙한 경호원들이 서 있었다.

 "재미있는 녀석이 들어왔다고 해서 직접 와봤는데, 의미 없는 일은 아니었네."

황도진의 시선이 자신의 뒤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무엇을 보고 있는 지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안경에 튄 핏자국이 시야에 거슬린다. 손수건 따위로 닦아봤자 번지는 것밖에 못한다. 그래서 놔뒀는데 지금에 이르러선 가려지는 시야가 불편하기 짝이 없다. 권현석은 자신도 모르게 몸에 긴장이 돌았다. 감각이 예민해졌다. 이것은 다 갑자기 나타난 황도진 때문이었다. 김성식에 비하면 황도진은 정말, 정말 보기 힘든 자였다. 의심과 조심성이 많은 남자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 김성식이 불만을 토하던 것을 권현석은 기억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인가요?"

권현석이 입을 열었다. 유순한 목소리가 흘러간다. 황도진이 다시 그를 바라본다. 그는 생각했다. 정말 깡패랑 안 어울리는 놈이군. 권현석은 눈치 채지 못한 사실인지만 황도진은 처음부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준비된 공간에 모습을 드러낸 그 모습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 웬 허약한 놈을 여기다 밀어 넣은 거야?였다. 누가 봐도 깡패라고는 믿기지 않을 놈이었다. 겉모습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이 바닥에 멍청한 짓임을 알면서도 황도진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온몸에서 유순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일반인을 끌어들인 줄 알고 김성식에게 한소리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쯤, 비린 피 냄새가 났다.

 "하."

황도진은 오랜만에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한 자신을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권현석의 손길에는 자비가 없었다. 잔혹? 잔인. 그런 것들이 어울렸다.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서 그 힘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손쉽게 사람의 관절이 꺾였다. 비명이 귀에 찢어지도록 들림에도 불구하고 움츠러드는 것 하나 없었다. 뒷모습만 보였지만 왠지 표정이 상상이 갔다. 아무것도 띄우고 있지 않을 얼굴이. 그에게 있어 자비라고 이야기한다면 숨통을 깔끔하게 끊어주는 손길이 자비의 손길이었다. 사방으로 튀는 피가 그를 물 들였음에도 더럽다, 지저분하다, 그런 생각보단…. 그래, 시선을 끄는 사람이야. 황도진은 턱을 쓸었다. 좋은 인재다. 김성식이 그의 이름을 왜 꺼냈는지 알 것 같다. 저 가려진 얼굴 밑의 감정이 궁금하다.

 "부디 오래 살아남으라고. 현석이."

"…예, 형님."

뒤돌아 걸음을 옮기는 황도진의 뒤로 권현석은 고개를 숙였다. 상체를 숙였다. 가려진 얼굴은 일그러져있었다. 형님, 형님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쓰는 자신이 지독하게 낯설고, 혐오스럽다. 코끝에 걸쳐진 안경 너머 시야가 붉다. 진저리가 나도록 싫다. 이것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후회인가? 그렇게 장담해놓고 결국 하는 후회인가? 길어진 잠입 기간과, 제 어깨에 쌓여만 가는 쇳덩이에 숨이 막혀왔다.

애초에 권현석이라는 사람은, 깡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생긴 것도 순하고 아무 이유 없이 타인을 해치는 것 또한 쉬이 해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직접 자원했다. 모두가 작전이 빨리 끝내리라 생각했고 그 역시 그렇게 생각했으며 인원이 부족한 탓도 있었다. 직접 자원하던 유상일을 말리면서 일어난 결과이기도 했다. 권현석도 딸이 있었다. 혼자 키워낸 애지중지하는 어여쁜 딸이었다. 그렇기에 유상일을 사자 굴에 밀어 넣을 수가 없었다. 그의 딸은 더 어린아이였다. 작고, 아버지가 있어야 하는 나이였다. 그래서 권현석은 유상일을 말렸다. 그 자리에 자신이 들어왔다.

 "현석이 형, 아무리 그래도 형이 들어갈 필요는…!"

"됐어, 인력난이라는 거 내가 제일 잘 알아. 걱정 마. 유상일, 이건 내 선택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럼, 혜연이는! 형도 가정이 있잖아!"

"혜연이는, …괜찮을 거야. 어른스러운 아이니까."

이해해줄 거야. 권현석의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갔다. 박근태도 그를 말렸다. 유상일도 끝까지 말렸다.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이, 자신 때문에 그가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것 같아서. 그러나 권현석은 꿋꿋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해해줄 거야, 라니. 얼마나 이기적인 말인지 스스로 알고 있었다. 혜연이도 아직 어린 나이였다. 자신밖에 남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짐을 지우는 것 같아서 미안함도 피어 올라왔다. 그래도 그때는 작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그 역시도 믿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었지.

직접 끼어든 바닥 판은 생각보다 더 난장판이었다. 그의 순해 보이는 외형에 칼을 들이대는 사람이 많았다. 비난과 욕보이는 말들이 등 뒤로 빗발쳤다. 순해보이는 인상으로 얕잡아보거나 우습게보거나, 시비 거는 이들도 많았다. 권현석은 이를 꽉 물고 발버둥 쳤다. 맞지 않는 깡패 짓이라는 거에 익숙해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동시에 익숙해지는 것에 대한 죄악감을 벗고자 발버둥 치기도 했다. 지쳐갔다.

그런데도 이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다른 잠입들을 위해, 또 수사팀을 위해, ─자신을 기다릴 혜연이를 위해 입술을 물었다. 목덜미가 뻐근했다. 시계를 바라봤다. 아, 그래. 오늘은 그와 만나는 날이었다. 예상치 못한 이의 등장으로 잊어버릴 뻔했다. 시간은? 조금 여유가 있다. 조금, 아니 빠듯한가. 벌써 투덜거리는 그가 떠오른다. 웃음이 나왔다. 이 지친 일상 속에서도 그를 떠올리면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내렸다. 피투성이가 된 옷자락을 손으로 눌렀다. 갈아입고 가면 조금 늦겠지. 너무 기다리지 않게 해야 할 텐데. 간지러운 마음을 잡았다.

주정재는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삼키는 숨과 함께 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입에 침을 발라도 도저히 좋다고 할 수 없는 갑갑한 향이 주변으로 퍼졌다. 시계를 본다. 이제 막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자정을 넘긴 새벽의 바람은 더 칼같이 매섭다. 코드를 더 여의고 벽에 머리를 기댄다.

 "…대체 언제 오는 거야?"

투덜거림이 내뱉어진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행위는 지겹기 짝이 없었다. 주정재는 괜히 머리카락을 헝클이며 바닥의 무늬를 눈으로 세어본다. 하나, 둘, …저건 좀 징그럽게 생겼네. 시답지 않은 생각들이 이었다. 담뱃불이 꺼지고도 십분, 이십 분. 오는 사람은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뒹굴던 돌멩이를 걷어찬다. 돌이 굴러간다. 데굴데굴 이곳저곳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힘없이 날아가던 돌멩이가 어디에 툭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정재는 아무 생각 없이 시야를 돌리다 무언가와 마주한다.

 "아, 아오 시팔! 깜짝이야!"

그것은 사람이었다. 안경에 빛이 스쳐 빛난다.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사람. 주정재는 뛰는 심장을 애써 부여잡고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신경은 가늘게 떨렸다. 자신의 심장을 철렁거리게 했던 이가 태연하게 웃으며 그늘에 천천히 걸어 나왔다. 희미한 전등 빛으로 그의 갈빛 머리카락이 천천히 색을 드러낸다. 동그란 안경이 올라갔다가 내려간다.

"놀라게 해버렸나?"

"놀라게 하다마다! 아주 저승 갔다 오는 줄 알았다! 정말!"

제 머리카락 색과 비슷한 갈빛의 코트를 다듬으며 그가 작게 웃었다. 권현석…. 이번에는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낯이었다. 저도 모르게 험한 말부터 내뱉었지만 그래도 반가운 얼굴이었다. 좀 더 앞으로 나온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봤다. 예전에 만났을 때 비해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있고, 자잘한 흉터도 눈에 띈다. 그의 고생이 겉으로 다 드러나고 있었다.

"정재, 그렇게 빤히 바라보면 아무리 나라도 좀, …."

"오랜만에 보는 건데 멀쩡한지는 살펴봐야 할 거 아니야?"

권현석이 그의 시선을 느낀 듯 눈동자를 굴리며 볼을 긁적인다. 주정재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속으로는 꽤 당황한 상태였다. 자신이 그렇게 빤히 보고 있었나? 그냥 상태를 좀 본다는 생각이었는데. 곤란한 낯을 한 권현석에 괜히 움찔했다. 작게 큼큼, 목을 다듬었다. 손가락 끝이 벽을 두드렸다. 서로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익숙한 번호와 코드가 오간다. 의미 없어 보이는 나열이지만, 모든 숫자의 끝은 정보였다.

"오늘은 좀, 일이 길어져서 늦어졌어. …그가 예민해. 한동안은 쉽게 연락하기 어려울 거야."

"이해해, 말도 안 되는 양반이잖아. 그쪽 영감은."

누군가를 정확하게 지칭하는 단어는 언급되지 않았다. 주정재는 뒷목을 쓸었다. 제 앞에 있는 자는 다름 아닌 경위였다. …였지. 주정재는 입 안이 쓰게 느껴졌다. 제 앞에 서 있는 이는 그냥 '권현석'이였다. 굳이 호칭을 붙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경위가 아니라, 깡패. 깡패 권현석이었다. 다시 곱씹는 생각이 머리를 차분하게 만든다.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달고 있는 그의 어깨가 유독 고되어 보인다.

"특별한 일은 없고?"

"특별할 게 있나, …여기 생활이 다 똑같지."

안경 뒤로 보이는 눈동자가 흐리다고 느껴졌다. 그러게 현석아, 왜 거기로 간 거야. 왜 자원한 거냐고. 대체, 왜 하나뿐인 딸을 뒤로하고…. 주정재는 그를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선진화파의 잠입수사건은 모든 게 비밀로 이뤄졌다. 잠입 요원으로 사람을 뽑는 건 물론이요, 작전이 시작되면 수사팀을 이끌어갈 이들을 뽑는 것 또한 비밀이었다. 모든 게 비밀이었고 모든 걸 아는 것은 세 손가락으로도 꼽을 수 있었다. 그만큼 신중에, 신중히 처리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주정재는 권현석의 사정도 몰랐다. 심지어 딸이 있다는 이야기도 권현석의 말실수에서 알게 된 이야기였다. 그 뒤로 권현석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이 딸을 돌봐주겠다고 어르고 달래 이제는 삼촌 소리 듣는 처지가 됐지만.

"…잠깐, 쉬었다 갈래?"

창백한 권현석의 낯이 신경 쓰였다. 평소와 달랐다. 그래서 주정재는 그에게 입을 열었다. 손끝이 가리키는 것은 싸구려 모텔이었다. 권현석의 시선이 따라왔다. 모텔 간판과 자신을 번갈아 보는 시선에 손을 내려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그,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고!"

"어떤 오해?"

권현석의 목소리에 웃음이 서린다.

"아니~, 그… 거울은 좀 보고 다녀? 진짜 상태 안 좋아 보여서 그래. 급한 거 아니면 쉬고 가. “

절대, 아무 짓 안 한다니까! 주정재의 목소리가 높게 올라갔다가 뒤늦게 내려간다.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묻는다. 아, 그러니까, …현석이 네가 좀, 쉬었으면 좋겠어. 툭 떨어지는 목소리에 권현석은 시선을 굴렸다. 쉬어도 괜찮은가?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될까? 그의 의심이 제게 닿지 않을까? 표정에서 드러나지 않는 날카로운 생각이 뒤섞인다. 이제 차근차근 쌓아가는 자리에, 괜찮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주정재를 내려 보고 있자니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싶어진다. 짧은 숨을 내뱉었다. 거절의 생각이 느리게 들어간다. 그의 빈손을 잡았다. 주정재가 움찔한다.

"알았으니까, 진정하고. 응?"

다정한 음성이 울린다. 이제 남에겐 별로 할 일도 없는 톤이다. 조직 내에서는 늘 날카롭게 있어야 했다. 다정함은 무기였다. 다정한 웃음 뒤에 칼을 꽂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 다 뒤로하고 온전한 다정함만 몸에 두른다. 주정재가 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작게 숨을 푹 내쉰다. 다행이야. 그 한마디도 답지 않게 다정해서 권현석은 웃었다. 싸구려 방에, 한 침대에 몸을 누여 오랜만에 온기를 얻었다.

날은 금방 밝았다. 옆에 잠이 든 주정재를 내려다보던 권현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를 만나면 늘 여러 감정이 올라왔다가 가라앉았다. 나약해진 자신을 다독이기도 했고, 불편한 감정들이 사르르 녹기도 했다. 그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와 같은 팀으로 움직이고 있을 이가 부러웠다. 부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그는 현재 생활에 지쳐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감정은 그와 헤어지는 순간 바로 갈무리해야 하는 감정이었다. 수사팀 역시 일이 잘 풀리지 않는지 밝은 전등 아래에서 본 주정재의 얼굴에도 피곤이 서려 있었다. 잠든 이의 머리를 몇 번 쓸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따듯한 물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바라봤다.

타인의 피로 얼룩진 자신이 비친다.

쿠당탕, 소리를 냈다가 흠칫하며 문 너머에 귀를 기울였다. 밖은 조용했다. 아직 깨진 않았나보다. 대충 씻고 나와 바닥에 흐트러진 옷을 주워 입었다. 구김진 옷을 손으로 대충 털어냈다. 주정재는 아직 꿈나라였다. …여러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묻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다.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끝은 보여? 혜연이는 잘 지내? 상일이는, 근태 형은? 다른 잠입자들에게 선 이야기 있어? 

- 나는, 괜찮아?

결국 입안에서만 맴돌 이야기였다. 혹여나 부정적인 대답이 돌아올까 봐, 부정을 담은 침묵이 돌아올까 봐 차마 묻지 못했다. 비슷한 대답을 들으면 지금처럼 버틸 자신이 없었다. 괜찮아. 잘 되어가고 있을 거야. 그러기 위해 이 길을 선택하고, 집중한 거잖아. 안 그래? 자신을 다독였다. 권현석은 안경을 고쳐 쓰고 정재 위로 이불을 바로 덮어줬다. 빈 메모지에 먼저 들어간다는 글자를 반듯하게 쓰고는 문을 열었다. 하룻밤의 온기는 따스했다. 다시 바닥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시간은 무심하다. 흘러간 시간이 이야기하는 것은 절망이기도 했다. 결국 벗어나지 못한 길이 숨이 막혔다. 여전히 자신은 깡패였고, 작전의 끝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권현석은, 서서히 흔들렸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안에서부터 난 금으로 물이 새나가기 시작했다.

 "뭐야, 권형. 어디 갔다 왔어?"

 저를 반기는 목소리가 가벼웠다. 정은창이었다. 최근에 서울로 올라온 아이였고, ‥깡패로 있기엔 아까울 만큼 다정한 아이였다. 서울 올라오자마자 황도진의 경호원을 죽였다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여 모두의 관심이 쏠려있는 아이기도 했다. 자신이 자리 비웠을 때의 일이라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화를 내다가 웃던 황도진의 목소리가 기억이 났다. 이녀석도 재미있는 놈이라고 웃던 목소리가 옛날을 떠올리게 했다.

"잠깐 밖에, 라면이 다 떨어졌더라고."

"형 짬밥에 라면 심부름을 가? 애들이 뭐라 하겠다."

비닐봉투를 흔드니 돌아오는 답은 투덜거림이었다. 어깨를 으쓱였다. 짬밥…. 우스운 단어다. 그랬다. 권현석이 차곡차곡 쌓아놓은 높이는 적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결국 이렇게 되었다. 결국 아직 선진을 무너트리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앞으로 더 얼마나 이런 일을 해야 할까. 직접 불법적인 일을 돕고, 그것을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은 가슴을 괴롭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익숙해지려고 한다. 익숙한 공포다.

"그리고 보니, …권형. 큰형님 직속이라며?"

조심스러운 물음이 제게 향한다. 직속? 직속이라고 할 수 있나? 의아한 기분이 든다. 권현석은 빈손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직속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하다. 황도진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저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더 어떻지?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하고 권현석은 시선을 피했다.

"직속, 까지는 아니야. 큰형님이 좀 아껴주실 뿐이야."

어색한 대답이 이어졌다. 술렁거리는 조직이 은연중에 황도진파와 김성식의 파로 나누어져 있음을 느낀 걸까? 정은창, 촉이 좋은 아이라는 생각을 했다. 굳이 황도진 쪽에 서 있을 생각은 없었지만 일은 원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었다. 김성식은 언제나 자신을 꺼리는 기색을 보였고, 황도진은 반대로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듯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김성식의 낌새가 이상해지고 나서부터 은둔생활을 하는 황도진은 어째서인지 자신에게만큼은 어디에 있는지 이야기했다. …이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김성식도, 경찰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신뢰인가?

알 수 없는 정은창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눈을 마주했다.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움찔하며 아무것도 아니라도 물러서는 정은창의 뒤를 눈으로 좇았다. 정은창은, 김성식 라인이었다. 김성식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옆에 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권현석은 낮게 한숨을 쉬고 탕비실로 걸음을 옮겼다. 배가 고팠다.

*

주정재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책상에 놓인 새로운 정보들은 하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쿠데타. 유상일의 낯도 썩 좋은 꼴은 아니었다. 서재호나, 오미정도 투닥거리던 것을 멈추고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언급된 것은 아니지만 시기상조라는 느낌이 올라온다. 아니 시기상조보다는 그냥 오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코앞에 닥친 것이었다.

거친 손길로 서류를 넘겼다. 익숙한 단어의 나열을 보고 있자니 저 멀리 묻어놨던 꿈이 떠올랐다. 이제 너무 오래되고 옛날의 기억이라 제대로 떠오르지도 않은 꿈이지만, 본 적 있던 장면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랬다. 이번 프로젝트 제의를 받고 꿨던 그 악몽. 주정재는 차가워지는 손을 애써 진정했다. 기이한 느낌의 까닭을 알았다.

권현석은, 권현석은 황도진 라인이었다. 황도진의 측근이었으며 그의 정보를 전담하던 이기도 하였다. 장산 정신병원, 날카로운 칼이 자신의 등을 찔렀다. 황도진은 무너진다. 그의 손발들도 잘리게 된다. 그렇다면, 권현석은…. 오한이 들었다. 느닷없이 떠올리는 아주 오래전에 꾼 꿈의 파편이 현실감을 일으켰다. 

얼굴이 없던 싸늘한 시체에 권현석의 얼굴이 입혀졌다. 동시에 깨닫는다. 그것은 권현석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이대로 둘 순 없었다. 다음 접선 일은, 접선일은…, 젠장. 아직 한 달이나 남았다. 쿠데타 예정 날은, 접선일 다음 주였다. 달력을 다급하게 넘기는 손이 덜덜 떨렸다. 정재, 왜 그래? 유 경위의 목소리도 귀에 닿지 않았다.

그를, 잃을 수는, 없다.

"현석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만하자. 그만해야 해! 너는, 이대로 가면 죽어!"

다짜고짜 내뱉는 말은 근거랄 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권현석의 얼굴에 곤란하다는 빛이 돌았다. 갑자기 접선 일을 당기자는 이야기를 듣고 온 제게 내뱉는 그의 말은 말 그대로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느낌이었다. 서둘러온 제 어깨를 쥐고 다급하게 내뱉는 말은, 가쁜 목소리였다.

"진, 진정해.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만, 하자니."

"김성식, 김성식 그 녀석이 큰일을 칠 준비를 하고 있어. 황도진을 몰아낼 작정이라고. 그렇게 되면, 너는, 너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툭, 툭 공기를 베어 나간다. 그쯤 들으니 권현석도 모를 수가 없었다. 작은형님이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구나. 작은 형님? 스스로 자연스럽게 떠오른 호칭이 혐오스럽다. 드러내지 못한 또 혐오감이 올라왔다. 손끝을 짓누른다.

"…쿠데타, 인 거지?"

"그래, 그거! 새끼, 칼을 갈고 있어. 이번엔 진짜 끝장난다고! 경찰 쪽에서도 물론 작업 들어갈 거고 현장에도 투입돼. 나도 가! 하지만, 하지만 만에 하나가 있잖아. 정말 김성식이 황도진을 끝내면, …제발 현석아!"

애절한 불음이 권현석의 귀를 두드리지만, 현실감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들을 권현석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받아 드리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이렇게 갑자기, 그만두자고? 그렇다면 이제까지 자신이 저질렀던 일은? 애초에 경찰 측에서 자신을 다시 받아줄까? 돌아갈 자리는, 있나?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헤집었다. 자신이 맞는 길이라 선택을 하고 집중을 했다. 그 선택이 처음부터 잘못 된 거라면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권현석은 주먹을 쥐었다.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거. 누구보다 잘 알잖아. 정재야."

그래.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잠입 수사가 있다면 꼭 이탈을 희망하는 이들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복귀는 쉽지 않았다. 모든 프로젝트가 끝이 나야 공개적으로 신분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미 팔린 얼굴과 이름을 느닷없이 경찰로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저 사람, 저번 주에 봤는데 깡패였는데 뭐야. 경찰 옷 왜 입고 있어? 깡패를 경찰로 쓰는 거야? 그런 비난을 위에서는 받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청렴한 경찰. 그런 호칭을 버리고 싶지 않은 이들이 수두룩한데 혼자만 복귀라니 절대 무리인 일이었다. 정재도 알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석이, 네가 죽는 걸 내가 놔둘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주저 없이 외쳐지는 말에 웃음이 났다. 질척거리는 손은 기분 탓임에도 제 손이 더럽다고 느껴진다. 잡을 수도 없이 엉망이 된 손을, 애써 뒤로 감춘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설사 내가 죽는다고, 해도 ….

"…정재,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권현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에 시작된 일이었다. 이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해도 권현석은 도저히 원래의 자리로 갈 수 없었다. 살인을 저지른 손이다. 아무리 큰 그림을 위해서라지만 살인과 폭행을 저질렀다. 많은 미래를 꺾었다. 깡패라는 이름을 벗어도 벗지 못할 이름이 그 위를 뒤덮었다. 경찰로 돌아갈 수 없다. 법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

"그거야, 그거야! 전부 작전을 위해서,"

"주정재!"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고개를 드는 권현석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져있었다. 어떤 감정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놓고 있는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었다. 아직도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찾아오는 꿈을 꾸며 새벽에 깨어난다. 피로 얼룩진 손을 본다. 아무것도 없는데 비명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 무엇보다 제일 무서운 것은 그런 현상들에 대해 익숙해진다는 사실이었다. 익숙해진다. 그것은 곧 죄를 저지르는 것에 대해 무뎌지는 것이다. 경찰이, 아닌 사람이 가져서는 안 됐다.

 "난, 사람을 죽였어."

 무거운 말이 내려앉는다. 주정재의 얼굴에 경악의 감정이 서린다. 한 번도 이야기하지 못한 사실을 고한다. 경찰에는 결코 이야기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말하는 순간 경찰 쪽에서 꼬리 자르듯 자신을 잘라낼 게 뻔했다. 경찰 권현석의 자리는 이미 지워버렸으니 버리는 것도 눈 깜빡할 사이 이뤄질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쌓아놓은 진흙이 높다. 질척한 늪에 발이 빠지지 않았다.

 "뭐…?"

 주정재가 조심히 되묻는다. 권현석은 답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맴돈다. 침 넘기는 소리가 유독 컸다. 주정재는 머리가 아파졌다. 그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살인, 문득 몇 번이고 그의 낯이 좋지 않던 날들이 생각난다. 유독 상태가 안 좋던 때가 있었다. 억지로 모텔에 끌고 가 재웠던 날이 떠올랐다. 무시하려고 했던 피비린내가 갑자기 왜 생각나는 걸까. 주정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건 자신에 대한 혐오다.

거칠게 얼굴을 쓸어 넘겼다. 젠장, 젠장, 젠장! 성난 외침이 허공을 꿰뚫었다. 누구에게도 내뱉을 수 없는 분노가 허공을 돌았다. 그러다 금방 손을 내리고 권현석을 향해 긴 다리를 성큼성큼 옮겼다. 뒷걸음치지도 않는 권현석을 내려다보았다. 이 사람이 홀로 속으로 삭여왔을 시간에 화가 났다. 진작, 자신에게 털어놔도 됐는데, 그랬다면! 그랬다면 그는…. 혼자 덜 힘들지 않았을까. 퀭한 얼굴이 떠오른다. 그냥 힘들어서, 그래서 그런 줄 알았다. 나는 그에 대해서 몰랐다.

"내가,"

손을 뻗었다. 주정재는 손을 뻗어 권현석을 품에 안았다.

마른 몸이 안쓰럽다. 이를 꽉 깨어 물었다.

"그래, 그래. 전부 없던 일로. “

그가 싫어할 말임을 알면서 말로 내뱉었다. 경악으로 물든 권현석의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품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는 것을 힘으로 눌렀다. 정재, 주정재! 부르는 물음을 무시하고 입을 맞췄다. 키스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것이었다. 입술을 맞대기만 할 뿐인, 그런 거.

"…내가, 없던 일로 만들게."

떨리는 목소리가, 울음을 베어 물었다. 손이 권현석의 얼굴을 쓸었다. 죄책감으로 물든 이 얼굴이 사랑스럽다.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타인의 죽음 따위 알 바가 아니다.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 그가 희대의 살인마라고 하여도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반드시, 없던 일로,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러니까 죽지마. 제발.

그림자가 깊어진다. 바람이 불며 그림자가 일렁거린다. 그들의 미래처럼 마치 계속 흔들린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