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환
정은창, 권현석. 루프
“…고마워. 넌… 좋은 사람… 될….”
아, 아아, 아…. 젠장, 젠장, 젠장… !!!!
또, 또 실패하고 말았다. 몇 번이고, 몇십번이고 과거에 돌아와도 또 이렇게 그를 잃고 말았다! 멍청한, 멍청한 새끼. 두 손에 묻은 피가 뜨거웠다. 동시에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권총을 잡았다. 총알이 장전되어있는 금속 덩어리는 무거웠다. 빗물 때문에 미끄러지는 손을 애써 고쳐 잡으며 총구를 제 머리로 향했다. …. 짧게 숨을 내쥐었다.
타-앙! 세상이 느리게 암전된다.
깨질듯한 두통에 눈이 번쩍 뜨였다. 급하게 숨을 들이쉬느라 가슴이 높게 올라왔다가 가쁘게 내려갔다. 헐떡이는 숨소리 밖에 들리질 않았다. 남자는 진정되지 않는 숨을 고르다가 머리를 감싸쥐었다. 환상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떨리는 다리를 애써 움직이며 억지로 바닥을 딛고 일어났다. 울렁거리는 속을 누르고 창문 앞에 멈춰섰다. 조금 열린 창문으로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도시는 이미 어둠에 잠겨있는데도 화려한 불빛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떨리는 눈동자가 벽에 걸린 낡은 달력을 향해 굴러갔다. 남자는 날짜를 읽었다.
“…돌아왔어.”
거기까지 확인한 정은창은 지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창문 틀을 부여잡고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토할 것 같다. 손도, 발도 계속 떨렸다. 머리는 송곳으로 누군가가 계속 찌르는 듯한 아픔이 이어졌다. 하지만 정은창은 이 고동이 기뻤다. 다시 돌아온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고통이었다. 그는 이것을 죽음의 흔적이라고 생각했다.
죽음.
정은창이 과거로 돌아온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몇 번째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무수히 과거로 돌아왔다. 그 말은 즉, 그만큼 무수히 많은 죽음을 겪었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원하던, 원치 않던 그는 죽음이라는 신호로 과거에서 눈을 떴다. 죽음을 맞이했던 그 순간과 고통은 선명한데 아무런 이상 없는 몸으로 계속 되돌아왔다. 처음, 처음은 기억했다. 그의 첫 죽음은 울산을 등지고 서울에 막 상경했을 때였다. 소완국…, 아니. 이준영 그 놈을 따라 그 외진 창고로 향했던 그 날. 김성식의 말에 잘못된 대꾸로 제게 총구가 향했던 것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허무한 죽음이었다고 생각했다.
시야가 어두워지고 한참, 정신을 차리고보니 그는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이었다.
이상한 꿈을 꿨다고 여겼다. 괜히 기분이 찜찜한 상태로 서울역에서 핸들을 기다렸다. 노인에게 또다시 지폐와 담배를 쥐여주고 꿈에서 겪었던 일이 반복될 땐 뒷목이 서늘해졌다. 다시 만난 소완국은 결국 변함 없이 이준영이었고, 그는 두 번째 살인을 저질렀다. 김성식의 면접에서 '기억하는 답'과 다른 답을 내놓으면서 겨우 목숨을 연장했다. 기이한 기분에 휩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죽음은, 언제였지. 황도진의 경호원? 아니, 그 다음에. 하극상이 있던 날이었다. 황도진을 제 손으로 끝내버리겠다고 총을 쥐었는데, 빈 탄창이 들어가 있던 총이었다. 오히려 반대로 황도진의 손에 죽었던 걸로 기억한다. 눈을 떴을 땐 유상일과의 처음 만나는 날의 하루 전이었다. 이해 할 수 없어 멍청하게 달력만 한참을 봤었다.
더는 이상한 꿈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었다.
정은창은 결국 권총의 탄창을 재차 확인했고, 황도진을 제 손으로 죽였다.
덕분에 김성식의 신뢰를 얻었다.
유쾌한 기분과, 찝찝한 기분이 뒤섞여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시간은 흘러갔다. 죽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대로 죽으면, 또 과거로 돌아왔다. 그것도 돌아오는 과거의 시점은 늘 제각각이었다. 제 주변에 도사린 죽음을 애써 피하며 지낼 즘 남자는 그를 다시 만났다. 권현석 경감. 다정한 사람이었다.
“경감님 말을 듣고서 알았네요. 은서의 명복을 빈다는 말, 내가 힘들었을 거라는 말. …태어나서 처음 들었어.”
처음 들었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허황된 이야기였지만, 그와 만나면 만날수록, … 그래. 구원 받는 기분이었다. 이건, 구원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었다. 그 다정함에 자신이 점점 물들어 감을 느꼈다. 그래, 최소한 벌어질 일이라면 이 사람을 위해서 하고 싶다.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조금 더 무리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다. 정은창은 많은 생각을 했다.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 만나는 만남이 따스했다. 다정했다. 그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 받는 기분이었다. 그때쯤의 정은창은 제가 죽으면 과거로 돌아온다는 것도 잊은 채 지내던 때였다. 그가 이야기했던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이, 현실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그의 곁에 서 있고 싶었다. 이 사람이 가는 길을 돕고 싶었다. 정작 제 손은 이미 피로 물들었다는 애써 무시한채.
슬쩍 손을 잡아도, 그는 싫은 내색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따듯하게 웃어주고는 했다. 아이 취급이 낯설지만 싫지 않았다 …현석이 형. 그의 고집으로 불러본 그 호칭은, 무척이나 낯설고 어딘가 간지러운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 은창아. 제 이름이 이렇게 다정한 이름인 줄 몰랐다. 괜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피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그의 다정함에, 진득하게 빠져, 벗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런 감정,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상관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은창은 안주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 가지 않는 법이었다.
“…헉, …윽, !”
눈을 번쩍 떴다. 지하…, 느리게 눈동자가 주변을 살폈다. 바뀌는 게 없었다. 이걸로, 이걸로 다섯 번이나 넘게 과거로 돌아왔다. 아직도 얼굴이 얼얼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생각을 억지로 정리했다. 사실 정리할 것도 없었다. 제가 끄나풀이라는 걸 들켰고, 변명할 시간도 없이 이곳에 끌려와 죽을 듯이 처맞았다. 다섯 번이나 넘게 과거로 돌아왔다는 건, 이곳에서만 벌써 다섯 번 넘게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대답을 잘못해서, 세 번. 그의 폭력에도 아마 두 번, 이번 까지 합치면 세 번째인가? 초반에는 죽었다 깨어났다는 것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신 차린지 얼마 안 되어서 문 열고 들어오는 김성식의 말이 이미 기억 속에 있는 말이라 불현듯 내겐 죽음조차 쉽지 않다는 것을 떠올렸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삶은 잠깐 축복처럼 느껴졌지만 그저 한낱 저주에 불가했다. 정은창은 김성식의 불음에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렇게 또 다시 죽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보이는 풍경이 여전했다. 정말 빌어먹게도 이곳에선 몇 번을 죽어도 더 이전의 과거에서 눈을 뜨지 않았다. 시간대만 약간씩 다른채 정은창은 지하실에 갇혀 죽음을 계속 맞이했다.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죽는 감각만 선명해져서 숨이 자주 막히곤 했다. 호흡이 고르지 않아도 죽는구나 싶으면 김성식은 노구치를 불렀고, 정신을 잃을 것 같으면 차가운 물이 뇌를 깨웠다. 죽었다 다시 과거로 돌아온 건지, 상처가 치료되는 건지 정은창은 구분 할 수 없었다.
“…젠,장.”
노구치, ‥ 나 좀, 도와줘. 가쁜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쪽도 살고 싶을 거 아니야.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입을 뻐끔, 뻐끔, 겨우 열며 단어를 이어냈다. 형이 보고 싶어졌다. …경감님, 형. 젠장. 빌어먹게도 그 얼굴이 떠나가지 않았다. 이런 제 모습을 보면 걱정을 해줄까? 내가 들켰다는 이야기는 이미 흘러갔겠지? …날, 날 버리는 말로 쓰지 않을까. 혼자 지친 몸으로 있다 보면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떠오르다가 가라앉고는 했다.
… 죽고 싶다. 그러나 죽을 수가 없었다.
무의미한 과거를 되풀이 할 뿐이었다. 억지로라도 정신을 차렸다. 무너질 수 없었다.
겨우 사람 꼴을 하고 거래 장소에 끌려갔을 때, 아 여기서 죽으면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여기서 죽으면… 그래도 지하실에선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정은창은 충동을 애써 눌렀다. 자신을 두고 도망간 노구치도 떠올렸다. 빌어먹을…. 젠장. 몸이 무거웠다.
경찰의 진압은 난전이었다. 정은창을 억지로 끌고가는 김성식의 손속은 자비가 없었다. 아물었던 상처도 다시 터진채 패닉룸 아래 떨어진 정은창은 가쁜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경찰이 사냥감을 몰아넣었다. 아마 권현석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그가 이곳에 있다면 제 복수는…, 이곳에서 끝내야했다. 정은창은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아니, 내가 지금 제정신일 것 같아? 너 때문에 내가 이 지경이 됐어…. 제정신일 것 같냐고!”
“정신이 나갔다고? 그래! 난 미쳤어, ”
“복수를 위해 뭐든지 했어! 소완국의 얼굴을 한 이준영을 죽였어! 황도진의 경호원도 찔렀다고! 겨우 황도진을 처리했는데, 진짜는 김성식, 너였어! 성일동을 밀어버렸다고 낄낄거리는 널 보고도 참아야 했어…! 이러니 내가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겠어?”
“이제 출구는 없어, 김성식!”
급하게 위로 도망치는 김성식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우당탕탕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법으로 심판하겠다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걸로, 이걸로 괜찮은 거지, 괜찮은 거지 은서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바닥에 주저 앉은 채 사람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제 몸을 잡아 이끄는 사람이 있었다. 뿌려 칠 힘도 없어 그대로 끌려갔다.
“…정은창! 은창아! 어이, 그 녀석은 놔줘! 우리 쪽 사람이야. 병원, 병원 쪽으로─”
아, 경감님의 목소리다. 눈을 겨우 뜨며 그를 바라봤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변한 게 없는 모습이다. 안심이 되었다. 안심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과거에서 눈을 뜬 게 아니니까 정신을 잃었던 거겠지.
깨어나고, 노구치를 다시 만나고, 길을 헤매기도 하고, 은서의 원망 어린 목소리로 밤을 지새웠다. 그의 집에 발걸음 하기도 했으나, 매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였다. 누구보다 바쁠 사람이었다. 방해할 수 없었다. 몇 번의 죽음이 다시 나를 덮치는 꿈을 꾸고, 은서의 죽음을 꾸었다.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하던 경감님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그렇게 어영부영 멍청하게 굴다가, … 결국 김성식이 타인의 손에 목숨을 잃는 것을 코앞에서 지켜보게 되고.
애초에 내가 원했던 것은, 김성식을 죽이고 나 역시 죽는 거였는데.
언제부터 죽음에 대해 무르게 생각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다. 반복되는 죽음의 경험이 죽음에 대한 경각심을 무너트린다. 또 마주한 온기가 자꾸 안주하게 만든다. 이게, 다, 그 때문이었다. 경감님, 현석이 형. 당신이, 나를 자꾸 무르게 해. 원망어린 은서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해진다.
“난 그냥 망가져버렸어요…. 뭘 해야 할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고요….”
“형, 아니 경감님. 난 좋은 사람 같은 거 못 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긴 아세요? 난 살인자라고요.”
“몇 번이고, 내 죽음을 봤어요. 나는. 나는, 기대해선 안 됐어. 바라지 말아야 할 걸… 바라서는 안 됐다고요!”
치밀어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뱉으며 그에게서 도망쳤다. 길을 잃고, 헤매다 아는 사람을 만나고 또 길을 헤맸다. 유상일이 무너졌다. 저와 똑같이 복수를 부르는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얼마나 멍청한지. 괜히 그에게 원망을 내뱉고 도망쳐버렸다. 밤길을 걷고, 낮에는 길을 헤맸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더 이상 그를 만나지 않아야겠다 생각하면서도, 또 사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집 앞을 서성였다. 열린 문을 열고, 죄인처럼 초조하게 그를 기다렸다. 그러다 걸려온 전화를 받고, 그의 집을 뛰쳐나갔다. 이번에는 꼭 지켜야할 약속을 하고, 달렸다.
세상은 내게 절망을 내려주기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닐까.
“은창,아….”
제 앞에 쓰러진,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간 느리게 잠식해오던 절망이, 온몸을 다 감싸 안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를 붙잡았다. 내가, 내가 잘못했어요. 경감님, 내가, 내가 잘못했어요. 나,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안 돼, 안돼요, 경감, 아니 형, 형, … 현석이 형! 그러지, 그러지 마요, 내가, 내가 잘못했어, … 눈물이 비와 함께 떨어졌다. 내가, 나는, 누구에요, 대답, 좀 해주세요‥.
“스스로 선택해. 할 수… 있잖아…?”
제 절망어린 말에 내뱉어지는 그의 목소리가 제 숨을 가쁘게 만들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누가, 누가 좀 도와, 도와, … 제발, 가쁜 호흡을 억지로 쥐는 시야에, 그의 권총이 들어왔다. 아, 아. … 그래, 이, 방법이 있었,어. 선택, 스스로, 선택, 그리고 집중.
“나는… 죽어서… 다시.”
눈을 감았다. 장전된 총이 제 머리를 향했다.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형, 형, 기다려요. 다음엔, 내가, 내가 꼭 살려놓을테니까… 그러니까, 내 이야기 들어줘요. 그런 생각을 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그리고
암전.
과거에 돌아왔던 정은창은, 그 뒤로 갖은 짓을 다했다. 처음부터 김성식을 죽이고, 황도진을 살리고, 거래를 뒤엎거나, …그만큼 무수히 죽었다. 정은창은 죽음의 두려움 자체를 잃어버렸다. 그저 머릿속에서는 권현석을 살려야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은창이 무엇을 하던 꼭 마지막은….
“…고마워. 넌… 좋은 사람… 될….”
그의 죽음이었다.
유상일의 딸도 살려보고, 애초에 그와 만나지 않으려고도 했다. 그런데, 그런데도! 정해지지 않은 시간대로 수십 번을 되돌아가면서, 많은 선택지를 바꿔도 결국! …그는 제 앞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눈 앞이 어두워졌다. 결말은 늘 바뀌지 않았다. 정은창은 바닥에 쓰러진 그를 앞에 두고 사무치는 고통에, 숨이 막혔다. 마지막은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을 향해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그를 살릴 수 있도록, 그것만을 애절하게 바라면서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사실 한 번쯤은, 정말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다면 이 악몽이 끝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죽어도 죽는 게 아니었다.
“그런 표정 하지 마, 나야말로 죽을 맛이야!”
“…고마워. 넌… 좋은 사람… 될….”
“복수 할 수 있게, 도와줘…! 제발 부탁이야 정은창 … ! !”
“큭, 정은창…, 너 이새끼…!!”
“도망가, 정은창…!”
구하지 못한, 구하기도 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매일 밤 귓가를 어지럽혔다. 꿈에서도 그는 제 눈앞에서 죽어갔다.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다 포기하고 싶었다.
깨질듯한 두통에 눈이 번쩍 뜨였다. 급하게 숨을 들이쉬느라 가슴이 높게 올라왔다가 가쁘게 내려갔다. 헐떡이는 숨소리 밖에 들리질 않았다. 남자는 진정되지 않는 숨을 고르다가 머리를 감싸쥐었다. 환상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떨리는 다리를 애써 움직이며 억지로 바닥을 딛고 일어났다. 울렁거리는 속을 누르고 창문 앞에 멈춰섰다. 조금 열린 창문으로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도시는 이미 어둠에 잠겨있는데도 화려한 불빛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떨리는 눈동자가 벽에 걸린 낡은 달력을 향해 굴러갔다. 남자는 날짜를 읽었다.
“…또, 돌아왔어.”
남자는, 정은창은 얼굴을 감쌌다. 짧은 호흡이 반복되었다. 이쯤 되니까 깨달고 싶지 않더라도 알게 되는 것이었다. 권현석, 그의 죽음은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죽음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주정재를 죽여도, 황도준을 죽여도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서있고, 권현석은 쓰러져간다. 애초에 바꿀 수 없는 미래였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김성식은 제 눈앞에서 다른 사람의 손에 죽고, 유상일은 또 딸을 잃고, 빗속에서 주정재와 다시 서 있게 되었다. 제 옆에 있는 그가 신경 쓰인다. 곧 있으면 총성이 발포되고, 황도진이 나타나고, … 그가 쓰러지겠지. 또 차갑게 식어가겠지. 가라앉는 기분을 숨길 수가 없었다.
“현석아, 그냥, 저 새끼만 죽이고 우리 도망갈까.”
“너, 딸도 있다며! 지켜야지! 지켜야한다며! 그들이, 네 딸도 그냥 둘거 같아!?”
… 낯선 대사가, 귓가에 맴돈다. 고개를 들었다. 문득 단어가 귓가에 맴돌았다. 딸, 딸. 혜연이. 가쁜 숨을 내쉬다 주정재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하고 짧은 단말마와 함께 총성 음이 들렸다. 낯설다고 생각했던 건, 기우였나 보다.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제는 지겹도록 내뱉은 이야기가 또다시 내뱉어지고, 이제는 외워버린 그의 대답이 제게 돌아온다.
“혜연이를 … 부탁해.”
그러네. 당신은 늘 마지막에 딸을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했었지. 그를 살리려고 발버둥 치기 바빠서 그의 부탁을 늘 잊으려했다. 왜 이번에는 유독 그 부탁이, 제 마음에 걸리는지, …알고 있다. 사실 그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고,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슴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심장 소리가 느려져갔다. 그의 가쁜 호흡에, 가슴이 짧게 오르락내리락 했다. 끝이 다와 갔다. 그의 손을 잡았다. 잘게 떨리는 손이, 차가워져간다. 이제 흘릴 눈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시야가 흐려져,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손을, 좀 더 꽉 잡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비린 피 맛이 전해졌다. 숨이 꺼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욕심이었다. 고개를 때어내고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이 아는, 그 다정한 눈이다.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전하지 못한 감정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제가, 좋아했어,요.”
“… … … 그,래.”
짧은 조소를 지었다. 따듯한 웃음을 지어보인 그는, 곧 더 이상의 대꾸도 돌아오지 않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권총에는, 더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잘못된 패를 던지면 판을 뒤집었다. 그 판마저 일그러지고 말았다면… 말을 바꾸겠다.
“나는… 죽지 않겠어. 이제는… 다시 살겠어.”
노구치의 발소리가 들린다. 처음으로 이곳에서 만나는, 노구치였다. 아니었나? 몇 번의 죽음 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 생각이 뒤엉켰다. 잠든 듯 쓰러진 그를 한번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노구치, 나를 도와줘. 이제 망설임은, 없었다. 없어야했다.
나를, 죽이고, … 약속을 지키겠다. 그의 부탁대로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 살아야했다.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절뚝거리는 걸음을 옮기다 문득 멈춰 섰다.
“그쪽이 끼어들 자리는 이제 없어.”
“나를 이정도, 죽였으면 됐잖아. 이후의 간섭은, 그만둬.”
무엇보다 네 선택지도, 끝났잖아.
얼마나 더 우리를, 죽여야 만족할래?
그의, 정은창의 시선이, 당신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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