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아가미

김성식, 누구도 아닌남자 / 히든엔딩 이후

정은창은 그의 그림자를 시선으로 쫓았다. 바람 불 때마다 나무의 그림자는 계속 흔들리는데 그의 그림자는 꼿꼿했다. 그림자를 따라 그 뒷모습을 좇는다. 허리부터 어깨까지 비뚤어짐 없이 곧게 세운 등이 그림자보다 더 꼿꼿했다. 깡패 대가리 치곤 얄팍한 체구지만 그런 그의 곧은 자세가 사람을 더 커 보이게 했다. 그래서 정은창은 시선을 돌려 다시 그의 그림자를 바라봤다.

"이쪽으로 와."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부름에 정은창은 그림자를 밟지 않고 그 옆으로 섰다. 엇비슷한 눈높이에 시선이 맞닿았다. 피비린내가 난다. 겨우 한걸음 가까워졌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진흙탕 속에 발이 잠긴 기분이 들었다. 끈적거리고 미끌대는 것이 발목을 타고 올라온다.

"피하지 말고 잘 봐야지. 정은창이."

이름이 불렸다. 정은창은 숨을 흡 들이켰다. 더럽고 다정한 손이 등을 쓸었다. 숨을 어떻게 쉬는 거더라. 겨우 숨을 입 밖으로 내뱉으며 애써 이성을 부여잡았다. 콰직,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피하지도 못하고 정은창은 억지로 허리를 세운 채 정면을 바라봤다. 사람의 형체를 가졌던 것은 일방적인 폭력에 이렇게 쉽게 형태를 잃는다. 고깃덩어리처럼 뭉개져 가는 것을 보며 정은창은 계속 숨 쉬는 법을 떠올려야 했다. 곁에서 바라보고 있는 이 시선 때문이라도.

아, 피가 튀었다. 정은창은 다시 숨을 참았다.

애정, 김성식은 정은창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 내 애정을 모르겠어? 남자는 이제야 그 단어를 곱씹어본다. 애정이란 무엇인가.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고 해가 넘어갔음에도 여전히 남자는 그 단어를 이해 할 수 없었다. 이해란 무엇인가. 남자는 먼지가 가득한 책장들 사이를 지나가 두껍고 사람 손도 타지 않은 굵은 국어사전을 꺼냈다. 가장 밑바닥에서 먼지로 뒤덮인 책을 털어내고 페이지를 넘긴다. 

이해.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하다. 깨달아 앎다. 

페이지를 좀 더 넘긴다. 허공에 떠다니던 먼지가 검은 옷에 다닥다닥 달라붙는다. 

애정. 사랑하는 마음.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사랑?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페이지를 앞으로 넘긴다. 무수히 많은 시옷으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지나 단어를 찾는다.

사랑,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손가락 끝이 한참 그 단어 위를 머무른다. 의미 없이 사랑이라는 단어 위를 두드린다. 사전을 덮었다. 먼지가 나풀 날리는 것을 손으로 휘저으며 다시 원래 위치로 돌려놓곤 더러워진 옷을 털어냈다. 책장을 다시 지나서 건물을 나오면서도 남자의 머리 속엔 방금 찾아본 단어들이 떠나질 않는다.

애정, 사랑. 그따위 단어가 김성식에게, 그리고 정은창에게 가져다 붙일 수 있는 것이었나.

한참을 걸어 나와 전봇대 아래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익숙하게 연기를 폐 깊숙이 밀어 넣고 내뱉으며 맡는 향은 김성식의 향이었다. 단종되어 다시 나오지 않는 것과 최대한 비슷한 향을 찾으며 고르고 고른 것이 이젠 남자의 향이 되었다. 

짧게 타들어 간 담배꽁초를 바닥으로 떨어트려 구두 밑창으로 비벼끈다. 남자는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는 가게의 유리창에 남자가 비친다. 답지 않은 정장을 몸에 걸치기 시작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던가. 배우가 배역을 버리고 무대 아래의 사람이 되기 위해 새로운 것을 처음부터 쌓아야 했을 때 무의식중에 쌓던 것은 모두 누군가의 흔적이었다. 당시에는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 눈에 들어온다.

김성식이 비뚤어진 남자의 어깨를 툭 툭 친다. 

"자세를 바르게 해야지. 입는 옷에 맞춰 가지런히."

환청이다. 앞으로 굽었던 어깨를 폈다.  

남자는 넥타이도 맬 줄 몰랐다. 정장은 입을 일도 없었다. 구두도 잘 신지 않았고 끈을 가지런히 묶는 법도 몰랐다. 엉성하게 엮고 풀리지만 않게 꽉 묶던 습관을 억지로 뜯어고친 사람이 있었다. 깔끔하고 모난 티 없이 움직이던 손끝을 남자는 왜 기억하고 있었을까. 

그 사람이 묶던 것처럼 넥타이를 매고, 신발 끈을 묶었다. 그가 입던 옷을 찾았고…. 

유리창 속의 자신과 남자는 눈을 마주쳤다. 바꿀 수 없었던 배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눈동자에 자신의 그림자가 비쳤다. 김성식의 손이 남자의 턱을 들었다. 

"고개 숙이지 말고 빳빳하게 들어. 네가 고개 숙이는 건 내 앞에서만 해."

알겠어? 하고 되묻는 목소리에 무심코 대답한다.

"예."

그것은 남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남자는 아무것도 없는 유리창을 가만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머리에 피가 쏠리는 기분은 유쾌하지 않다. 이성을 마비시키고 무의식적인 사고가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 남자는 쥐고 있던 파이프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듣기 싫은 소음이 굴러갔다. 더러운 이물질이 구두를 더럽히고 손을 더럽혔다. 

쯧.

남자는 혀를 차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꺼내면서 옷도 더러워졌지만 적어도 손을 닦아낼 순 있었다. 사람이었던 것을 바라보다 바닥에서 굴러다니던 파이프를 발로 툭 툭 쳤다.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무릎을 굽히며 더는 껌벅이지 않는 눈과 시선을 맞췄다. 생기를 잃는 눈동자는 의미 없이 허공을 향한다. 무뎌진다. 살아있는 것의 숨을 꺼트리는 일에 대해 무뎌지고 또 무뎌진다. 그는 이제 숨을 참지 않는다. 

*

지하실은 낯선 공간이 아니다. 김성식의 애정을 받는 정은창은 다른 사람들보다 예외가 많았다. 쥐새끼란 쥐새끼는 싹 몰아 잡아 청소를 해도 꾸준히 밟혔고 김성식이 지하를 열면 그 뒤로 정은창이 따라붙었다. 

"거기 딱 서 있기만 해."

정은창은 입구 쪽에 섰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김성식이 지하실에 있는 동안 정은창 역시 벗어날 수 없었다. 김성식은 이따금 정은창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를 찌르면 죽진 않아. 딱 죽지 않을 정도인 거야."

설명을 하듯 조곤조곤 뱉어지는 목소리는 풍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바닥을 더럽히는 피와 비린내. 살을 지져 나는 불쾌한 냄새와 살아있는지 의심이 되는 것을 두고 김성식은 그에게 자신의 행동을 가르쳤다.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김성식이 하는 것을 오로지 지켜봐야 하는 정은창은 울렁거리는 속을 애써 눌렀다. 저 의자에 묶인 것이 자신이 되는 상상을 했다. 

"은창이."

김성식의 부름엔 바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구두 밑창에 달라붙는 핏덩이가 끔찍했다. 내색하지 않고 그의 곁으로 다가가면 이미 더러워진 나이프가 손에 쥐여줬다. 김성식이 고갯짓을 하면 정은창은 그가 가르쳐 준 대로 손을 움직여야 했다. 혀가 잘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이의 발버둥은 의미 없었다. 죽이지 않기 위해 찌른 칼의 칼날은 피부 가죽을 뚫고 근육을 끊어낸다. 손바닥에서부터 뇌까지 전달되는 그 감촉은 끔찍하다. 

"잘했어. 뭐, 처음치곤 나쁘지 않아. 칼은 참 잘 다룬단 말이야."

일이 끝나면 돌아오는 칭찬에 정은창은 이게 정말 잘한 일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척추를 따라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허리가 곧게 펴졌다. 자세는 바르게 하고, 어깨를 펴. 김성식은 그렇게 정은창을 교정했다. 피를 본 날엔 김성식과의 술자리가 이어졌다. 개를 칭찬하듯 식탁 위로 값비싼 음식과 술이 채워졌다. 고기를 나이프로 찌르는 순간 손에 남아있던 감각이 뇌를 문질렀다. 사람의 살과 짐승의 살은 차이 나지 않는다. 그날 숙소로 돌아간 정은창은 새벽 내내 변기를 붙잡았다. 

건물을 지을 때 애초에 이런 용도로 사용할 것을 알고 지하실을 만들었을까. 시답지 않은 생각이 흘러갔다. 김성식이 자켓 안쪽에서 마카로프를 꺼냈다. 익숙해지지 않는 총신이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반짝거렸다. 정은창은 그 총구가 자신을 향하는 상상을 하며 긴장했다.

"쫄지마, 겨우 이런 걸로 쫄면 어떡해. 이리 와 봐."

김성식은 곁에 선 정은창의 손에 권총을 쥐여줬다. 가볍게 생겨서 생각보다 묵직하게 잡히는 것은 아무래도 처음 쥐는 터라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잡아도 불편한 것이 보이는지 김성식은 혀를 차며 쥐는 법을 교정했다. 좀 더 힘을 빼고, 그래 손 위치를 바꾸고. 좋아, 잘하네. 불편했다. 

"좋아, 쏴봐."

"예?"

그의 손이 가리키는 것은 쥐였다. 너덜너덜해진 쥐는 이미 숨이 끊어진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좋은 과녁이잖아. 안 그래? 힘든 친구 쉽게 보내주자고."

김성식이 총을 쥔 정은창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가 몇걸음 물러났다. 다른 말 없이 지켜보는 시선은 시험이었고 이 또한 가르침이었다. 정은창은 마른침을 삼켰다. 떨리는 손이 자꾸 아래로 내려갔다. 무겁다. 시선은 재촉했고 입술을 꽉 깨문 정은창의 손은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탕-  

발포된 총알은 흔들리는 팔 때문에 빗나가 쥐의 몸통으로 박혔다. 크게 움찔거리는 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팔이 저렸다. 반동에 의해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고 김성식을 바라봤다. 그에게 다가온 김성식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자세를 다시 교정했다.

"다시." 

뒷목이 서늘해졌다. 방아쇠는 당겨지고 총알은 아까와 다른 방향으로 빗나갔다. 김성식은 이야기했다. "다시." 탄창이 비워지기 전에, 쥐의 숨통을 끊어야 했다. 처음보다, 두 번째보다 방아쇠를 당기는 속도가 느려졌다. 떨리는 손을 억지로 진정시키고 숨을 참고, 집중해야 했다. 

탕.

이득고 발포된 총알이 드디어 쥐의 숨통을 끊었다. 숨소리가 하나 사라지고, 정은창의 손에 남은 것은 잔상 뿐이었다. 이상했다. 숨이 꺼졌는데 손에 남는 것은 고작 떨림 뿐이었다. 김성식이 박수를 쳤다. 

"잘했어. 봐, 잘 하잖아."

잘했다. 

정은창은 총이라는 쇳덩어리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죄책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쇳덩어리가 자신을 어딘가 망가트리는 기분이 든다. 지하실의 공간에 들리는 숨소리는 두 사람의 것 뿐이었다. 하하, 하하, 하. 정은창은 어정쩡하게 웃는다. 바닥으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기분이 든다. 와중에 칭찬하는 손길이 기분 더럽지 않다는 것에 세상 어딘가가 빠그라진다. 

*

김성식이 정은창에게 주었던 것을 애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남자는 회고한다. 남자는 이제 보이지 않는 김성식의 그림자를 눈으로 좇았다. 그는 이제 혼자 숨을 쉴 수 있었다. 숨을 참지 않아도 된다. 칼을 쥐어도, 총을 쥐어도, 피를 보고, 쥐를 봐도 그는 더 이상 숨을 참지 않는다. 

누구도 아닌 남자를 쌓아 만든 것은 김성식의 손길이었다. 

"혼자 숨을 쉬는 방법을 익혀놔야 해."

김성식이 옆에서 웃는다. 남자는 거울을 바라본다. 비치는 것은 오로지 남자 뿐임에도 뒤를 돌면 김성식이 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것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그래서 남자는 김성식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숨을 쉰다. 호흡을 한다. 천천히,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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