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짐승

김성식, 정은창 / 성식은창 / 연령반전, 스왑

정은창 깡패 대가리와 잡입경찰 깡패 김성식 (원작과 다르게 깡패가 좀 더 우세한 상황.)


비틀거리는 걸음이 평소와 다르다. 제정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휘청이는 몸이 보고 있자니 속이 다 뒤집어진다. 속으로 숫자 8까지 세아렸을까 결국 넘어질 듯 상체가 훅 꺼지는 모습에 손이 먼저 나갔다. 단단한 허리가 손바닥 안에 가득 잡히고, 휘청이는 몸뚱아리를 제게 기대 세웠다. 젠장, 술 냄새.

"어? 어어…?"

 반쯤 풀린 눈동자가 허공을 헤매다가 내게 닿는다. 5초는 지났을까, 그제야 사람을 알아본 듯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진다. 아, 정말 생각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저 뒤를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이 놈의 다리는 주인의 의사를 전혀 신경 안 쓰고 멋대로 보폭을 넓혀 그의 옆에 걷게 하질 않나, 손은 또 성급하게 움직이고. 이 정도면 하나의 머리통 안에 세 개의 뇌가 있음이 분명하다. 김성식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 가진 않는다. 많은 생각들이 바로 눈앞에 있는 놈보다 중요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식아!"

술기운에 해맑게 외치는 정은창의 목소리가 오늘처럼 싫었던 날이 없다. 김성식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런 자신의 반응은 당연하게도 눈에 들어도 오지 않는 놈은 생각 없이 헤벌쭉 웃고야 있으니 멀쩡한 사람 속만 뒤집어지는 꼴이었다. 오늘로 벌써 다섯 번은 넘게 한숨을 삼켜든다.

"신기하네. 방금 전까지 네 생각 하고 있었는데. 진짜 성식인가? 가짜인가?"

정은창의 손이 술이라는 대단한 것의 힘을 빌려 제 볼을 감싸든다. 주정뱅이답게 따듯한 체온이 평소보다 뜨거웠다. 조물딱거리는 손길에 한 소리 하려다가도 이 사람이 이렇게 웃는 것은 술이 들어갈 때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쉬이 쓴소리도 내뱉지 못하고 한숨을 결국 내뱉는다.

"날이 찹니다. 형님."

"진짜 성식이네, 형님이 아니라 형이라고 해도 된다니까. 형님은 어? 너무 그래 보이잖아. 엄연히 번듯한 기업 이름 달고 있는데 아직도 형님 소리 하고 해대면…."

웃기지도 않는 호칭을 내뱉는다. 정은창의 주정이 이어진다. 네가 그래서 미간 사이의 주름이 어쩌고, 인상이 어쩌고.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며, 길어지는 말이 확실히 평소와 다르게 취했다는 느낌이 강했다. 여즉 그의 허리를 잡고 있는 제 팔에 벗어날 생각 없이 제게 기대있는 것 만으로도 말 다했다.

깡패 노릇 흉내를 낸 지도 수년이 지나가며, 이제는 뭐가 진짜 자신의 위치인지도 회까닥하면 잊어버릴지도 모를 시간이다. 경찰 정복을 마지막으로 입었던 것이 언제인가. 화려하고 시끄러운 이 뒷골목 길 위에는 깡패 김성식과 그 깡패의 대가리인 정은창만이 서 있었다. 전봇대의 전등이 불안하게 깜빡이며 시야를 어둡게, 또다시 밝게, 또 어둡게 반복했다. 길어졌다가 짧아지길 반복하는 그림자는 기분 탓인지 누군가의 마음인지.

"듣고 있어?"

상념은 언제나 그의 목소리에 깨진다. 성공, 출세, 그것만을 뒤쫓아 진흙탕에 직접 뛰어들었던 젊은 날의 자신만만하고 오만했던 김성식은 퇴색되어 사라져갔다. 어중간한 남자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주제에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 만큼은 지독하게 또렷하고 선명하고, 또 나락 같은 이 남자가 그 저울질의 대상이다.

"예, 듣고 있습니다."

"거짓말."

김성식, 출세가 그렇게 좋냐.

그래. 더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겠지.

그런데 그 모든 전제 조건은 살아있다는 거 아니겠어?

살고 싶어야지.

아무런 서론 없이 그가 던진 말을 기억했다. 경고이자 조언이고 결국 경고였을지도 모를 말. 거래 정보를 빼돌린 날, 그는 꽤 오랜만에 김성식, 세 음절로 저를 호명했고 다른 쥐새끼는 그 날 이후 지하실에 끌려가 나오는 것 조차 볼 수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손을 닦으며 멀끔한 얼굴로 그는 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고 그 눈동자의 시선은 여전히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건 그 날 이후, 김성식은 정보를 빼돌리던 뭐던 쥐새끼 노릇을 할 수 없었다.

늘 자신의 시야에 김성식이 있길 바랬던 정은창의 탓도 있었고,

…….

"에취."

답지 않은 재채기 소리와 함께 정은창이 짧게 떨었다.

"춥다. 성식아."

 정은창이 제 허리에 팔을 감았다. 정은창의 체온은 언제나 자신보다 더 높았고 술기운에 지금은 평소보다 더 뜨거우면서 온기를 찾듯 품에 매달리는 꼴이 우스웠다. 이미 겨울은 지났다. 날이 차다고 말한 것은 자신이지만 온기를 찾을 추위는 아니었다.

 "그러게 답지 않게 왜 그렇게 술을 드셔서."

 "매년, 늘, 이 시기에. 새삼스럽게."

 새삼스럽게. 매년, 늘, 이 시기에. 지독하게 약해지는 정은창. 유일한 혈육의 기일이 있는 시기. 그리고 그 약해지는 모습은 오로지 자신에게 보여준다는 것 또한 자신은 알고 있었다. 기이한 기분이 든다.

 가끔 그의 앞에 서면 드는 표현 하지 못하는 기분. 고개를 조금 내리면 정은창의 붉어진 목이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온다. 가슴팍에 꽂아둔 나이프를 꽂아 쑤셔 넣는대도 전혀 방어하지 못할 그의 그 부위를 가만 내려다본다. 상상을 했다. 살갗을 찢고 쑤셔 들어간 날붙이에 붉은 과즙이 흘러넘쳐 바닥에 고이고 잔을 채우겠지. 푸르게 허옇게 변하고, 그렇게. 아. 숨이 멎는다.

목이 마르다.

"김성식."

 뺨을 두드리는 손길에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가 몇 번 깜빡이며 다시 시선을 마주친다. 주정뱅이의 시선이 아니었다. 김성식은 숨을 삼켰다. 정은창의 그 또라이 같은 눈빛이었다. 마치 제 머릿속을 다 읽힌 기분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지도 못한 채 그러고 있었을까, 그는 금방 아무것도 아닌 것 마냥 웃어 보인다. 볼이 발갛다. 착각. 착각이. 착각.

 손가락을 굽혔다가 피고는 그의 팔을 제 어깨에 둘렀다.

 "들어갑시다. 형님."

 오늘은 살아야 한다.

 내일도 살아야한다.

 김성식은, 살아야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것도 아닌 척, 아닌 척이 아니라 아무렇지 않고 아무것도 아니다.

언젠가 그 목을 꺾어내 제 것으로

만들기 전 까지 모든 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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