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또다른 짐승

김성식 정은창 / 성식은창 / 연령반전(연반도시)

우리는 병든 관계다.

김성식은 잔을 내려두었다. 유리잔이 나무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는 깔끔했다. 하아…. 짧은 한숨 끝에 그의 시선이 테이블 위, 휴대폰으로 향했다. 불빛이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계속 기다리는 연락은 오지 않았고 진동 한 번 울리지 않은 휴대폰은 몇 시간 째 잠을 자며 미동이 없었다. 이쯤 되면 언제나 자신만 초조해지는 것을 알면서도 또 휴대폰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영감탱, 정은창.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야.”

 이 능구렁이 같은 영감 놈. 매번 이랬다. 연락을 하는 사람은 정은창. 기다리는 것은 자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연락을 먼저 한다고 해서 받아주는 것도 아니라 더 화가 나는 것이었다. 나이를 헛으로 먹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휴대폰 사용 방법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생각해봐라. 나이가 나이였다. 어? 전화 거는 것도 할 줄 모를…,

 지잉

 시발. 휴대폰의 진동이 울린다. 잔 위로 술 따르던 손이 멈추고 신경질적으로 병을 내던져놓고 휴대폰을 집었다.

 [ 오늘 밤. ]

 시발!

목적도, 이유도, 하다못해 인사 한마디도 없는 본론 밖에 없는 텍스트에 또 열이 뻗쳤다. 이번엔 잔이 아니라 술병을 들고 목 뒤로 꼴깍꼴깍 넘겼다. 알싸한 알코올 향이 머리를 잔뜩 채워낼 쯤에야 겨우 진정이 되고 흥분 했던 얼굴을 쓸어 올렸다.

 내가…, 등신이지.

 기대 하면 안 될 사내에게 또 기대하고, 기다리고, 기대하고. 몇 해를 반복하고 있던가. 한숨을 느리게 터트리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급하게 들이켰던 알코올이 뒤늦게 온 몸으로 퍼져갔다. 멍하게 흘러가는 의식 속에 문득 그와의 처음을, 그리고 지금까지의 일들이 떠올랐다.

삶의 구원이었고,

삶의 종말이었던 사람.

정은창.

 처음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김성식은 바다를 앞에 두고 서있었다. 어린 시절 김성식이 살았던 도시는 그랬다. 고래를 잡아 생활하는 사람이 대다수였고 아직 제대로 된 공장도 없던 가난한 도시. 경상남도 울산. 그 작은 촌도시에 그가 서있었다. 지나가는 놈 한 놈 잡으면 껄렁이는 양아치 새끼들이었고 좀 번화가다 싶은 그런 놈들이 자리를 치고 갖은 시비를 걸어왔던 병들었던 시기. 달다구리를 입에 좀 넣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땅콩 따위나 주워 먹던 그 때. 김성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돈이 없던 시절이었다.

가난에 찌들어 지긋지긋한 삶을 살면서 가족이라고는 고래잡이 일로 새벽 일찍부터 집을 비워 비린내를 품고 돌아오시는 아버지라는 작자가 뿐이라 모든 것이 원망스럽기만 하던 어린 시절. 위안이 될 만한 것 하나 없이 자기 하나만 믿고 이 꽉 깨문 채 주먹을 휘둘렀던 날들이었다. 태생적으로 골격이 크지 못한 몸뚱이고 좆같은 새끼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것은 언제나 외줄타기와 다름없었다. 그런 바닥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을 무렵, 김성식은 남자와 만났다. 정은창, 그와.

 “생각보다 알아두면 나쁘지 않을 걸. 나.”

피를 흘린 채 죽어가던 김성식의 앞에서 담배 연기를 뱉어내며 그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정은창이라는 이름 석 자 아래 김성식을 보호해주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단 걸, 김성식은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 시절의 정은창은…, 바다 속에 잠겨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언성을 크게 높이는 일은 거의 없었고 잔잔했다. 그가 유일하게 화를 내고 감정적이게 되는 일은 오직 정은서에 관해서만 이었다. 정은서가 없으면 그는 진즉에 메마른 선인장이 되어서 외로운 사막에 서있었을 게 분명하다. 누군가에게 맹목적이게 되는 사람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이 가난 했다고 했다. 부모는 도망을 가고 동생과 단 둘이 남게 되어서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깡패들의 잔심부름이 겨우였다. 나이를 먹은 아직도 깡패 노릇을 하고 있는 까닭은 자신보다 자신의 동생인 정은서에 대한 절대적인 보호를 형님에게 약속받았기 때문에 그에게 충성을 바쳤다고. 성일파가 당시에 굳건하게 울산을 휘어잡고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 정은창이 성일파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은창의 손에 구원 받았던 어린 김성식은 누구보다도 더 그것을 알았고 아마 당시 성일파의 큰형님이라는 놈도 알고 있었을 터였다. 

…정은서를 보호가 아니라 거의 인질로 잡고 있던 건 아닐까. 

뒤늦게 그런 생각도 하게 된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다.

왜냐면 결국 성일파는 울산에서 무너졌고, 정은창은 사라졌으니까. 말 그대로 갑자기.

김성식은 아직 그때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은창은 죽어가던 자신을 살렸고, 곪던 배를 채워주었으며 무자비하게 저를 향했던 폭력들로부터 보호해줬다.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형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 모든 선행들에 대해서는 밥값이라는 말 대신으로 가끔 자기 집에 와서 동생, 정은서와 말동무 좀 되어달라는 말 뿐이었다. 대체 자신의 어디를 믿고 그랬는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별 다른 것을 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다정히 굴어주는 그의 태도에 어린 김성식은 집구석에서 받아보지 못한 온정을 쫓아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고 거의 매일 그의 집 대문을 오갔다. 

어떤 날은 그 없이 정은서만이 자신을 반겼고, 어떤 날은 남매 둘이서 저를 반겼다. 정은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저를 따랐다. 실제로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주제에 저보고 꼭 오빠라고 불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정은창과 더 친해지기 전, 길에서 우연히 그가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고 해맑게 오빠라고 불러왔을 땐 지금 생각해도 황당했다. 이 여자는 뭐야, 싶었지. 뒤늦게 다급한 얼굴로 뛰어와 그를 품에 안은 정은창의 얼굴을 봐서야 뒤늦게 이해했다. 정은창이 그토록 아낀다던 그 동생이란 걸. 처음 봤음에도 불구하고 제게 삐약삐약거리는 정은서를 보고 정은창이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했던가. 그게 그의 집에 가게 된 첫 날이었지. 말동무가 되어달라는 말은 그날 저녁에 바로 들었었다. 남매 둘 다 좀 더 경각심을 기를 필요가 있었다. 그런 태평한 생각을 했을 때가 좋았지.

 “…그랬었지.”

 김성식이라는 남자의 삶에서 햇볕이 되어주었고 가족이자 집이 되어줬던 정은창. 그가 갑자기 모습을 감추기 전까지는 그 일상이 지속될 거라고 생각했다. 왜, 어째서, 언제. 아무도 몰랐다. 불행의 전조는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배 사고로 결국 그 바다 위에서 생을 끝낸 아버지는 시체도 온전하지 않았다. 없는 살림 속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조문객은 많지 않았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일을 도와주시던 직원 분들의 표정에서도 무안함이 스쳐갔었다. 가난하기 때문이었다. 삼일이라는 시간 동안 김성식은 혼자였다. 정은창이 얼굴 한번 비추지 않은 것은 의아하게 여겨졌다. 그가 보고 싶었고 우습게도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홀로 지켜보고 있을 때는 특히나 더 그랬다. 그렇지만 정은창의 신발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바쁘겠거니. 생각했다. 그가 굳이 이곳에 참석해야하는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이해해보려고 했다. 백골이 된 아버지의 유골을 바닷가에 뿌려두고 정은창의 집을 찾아갔을 땐, …….

 “뭐야….”

아무도 없었다. 난장판이 된 집안만 보였다.

 “아이고, 총각. 무슨 일이래. 여기 자주 왔다 갔다 했던 총각 맞지? 응? 표정이 왜 그래. 몰랐어? 며칠 전에 웬 덩치 산만한 것들이 우르르 와서 깽판을 얼마나 쳐놓고 갔는지 몰라. 다행히 여기 살던 그, 두 남매는 집에 없었던 것 같은데. 하루 종일 집을 다 부수고 얼마나 욕을 하면서 동네를 나가던지. 다들 식겁했다니까.”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밖에 없는 문장이 귀에 닿았다. 골목을 좀 더 내려가면 시장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일파가 무너졌다는 이야기였다. 경찰과 부딪힌 게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난 분쟁이 결국 큰형님을 무너트리고, 조직 주요 원들이 와해가 되고… 정은창은 사라지고.

김성식은 혼자가 됐다.

혼자로 남겨졌다.

김성식은 멍청하게 있지 않았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품은 지금 멍청하게 손발 내려놓고 있는 놈들이 바보였다. 그는 바로 연장을 챙겼고, 쓸 만한 놈들을 찾아갔다. 황도진을 치러 갔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위가 필요했다. 자신이……, 강자가 돼야 했다. 결국 황도진에게 죽도록 처맞았지만 그의 옆에 2인자로 설 수 있었다. 선진화파라는 이름의 조직이 성일파의 조각을 먹고, 부수고, 울산을 차지해갔다. 성일파라는 이름이 과거로 묻힐 무렵엔 선진화파의 1인자 황도진과 2인자 김성식의 이름이 곧 섰다. 정은창이라는 이름은 과거로 들어갔다. 울산만이 아니라 영남권을 삼켜난 선진화파는 곧 서울까지 집어삼키고자 상경했다.

 우스운 일은 이곳에서 벌어졌지.

“…영감.”

“영감? 누구보고 영감이래. 요 꼬맹이가.”

 둘 다 그렇게 불릴 사람은 아니었지만, 절로 김성식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몇 년 만의 재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정은창은 여전히 어려 보였다. 옛날에도 그 나이로 안보였던 얼굴은 지금도 그랬다. 누가 마흔도 더 넘은 사람으로 볼 까. 기억 속의 정은창과 다른 점이라고는 조금 지치고, 더 가라앉은 사람처럼 보였다. 얼굴에 자리 잡은 흉터도 낯설었다. 죽은 줄 알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죽은 줄 알았다. 살아있으면 편지라도, 연락이라도 한 번 쯤은 했어야지. 주먹이 떨렸다. 애써 감췄다. 어째서 그가 백석과 만나고자 했던 테이블에 앉아있는 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곧 큰 너구리가 올 예정이었고 선진화파가 서울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눈치를 봐야했다.

…정은창이 사라졌던 이유가 서울로 왔기 때문이라니.

조직을 와해시켰던 것도 그의 짓이라니.

 정희준의 웃음서린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그쪽 조직도 부디 큰 그림을 보길 바란다고. 우스운 소리다. 김성식은 미간 사이를 짚어냈다. 자신이 몰랐던 사실이 너무 한꺼번에 밀려왔다. 당시 완전히 무너졌다고 생각했던 성일파가 사실은 정은창의 중심으로 일부가 한꺼번에 서울로 올라왔고, 이미 주요하게 자리를 잡았다며 백석과는 자신들선진화파와 다르게 동맹과도 같은 관계라고 떠들던 목소리. 정은창이 선진화파에 도움을 주고자 이야기를 건넸기 때문에 그쪽에게도 기회를 주는 거라고 하는 너구리 새끼나 그 말 내내 자신을 보지 않고 담배 필터만 씹어대던 정은창이나. …화가 났다.

 서울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성일파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백석에서 왜 선진화파를 서울에 자리 잡게 도와줬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깡패노릇보다는 더 위험한 쪽을 주로 손대는 곳이 성일파였다. 밀매, 밀수, 마약, 유통, 관련된 것은 모두 선진화파를 거쳐야겠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서울을 잡던 놈들과 마찰이 자꾸 생기니까 적당히 서로 이해관계에서 끝낼 조직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황도진이야 그쪽 사업으로는 생각도 없는 것이 깡패답지 않게 깔끔했으니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거겠지. 김성식은 불만이었다.

 “영감.”

그 뒤로 다시 정은창과 만난 것은 서울에 온지 1년이 지나서였다. 우연이었다. 길바닥에서 쪼그려서 담배피고 있는 남자가 정은창일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자신을 부르는 줄은 용케 알고 정은창은 고개를 들었다.

“이젠 형님이라고 안 부르네.”

양심이 있어야지, 형님은….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에 피곤이 서려있었다.

“정은서는 어떻게 됐어.”

그의 옆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사실 짐작했다. 그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죽었어.”

“언제.”

“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어쩌다.” 왜 이야기 안했어.

“……. 나 때문이야.”

“그쪽이 모시던 형님 짓이었어?”

그래서 조직을 엉망으로 만들고 서울로 왔어? 왜 하필 해도 당신이 마약 유통을 해. 그냥 깡패도 아니고 왜. 질문이 목 위로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걸 억지로 막았다. 정은창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이제는, 과거야.”

전혀 그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시답지 않은 이야기조차 오가지 않은 채 둘은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추웠다. 먼저 일어난 것은 정은창이었다. 품에서 작은 노트를 꺼내더니 볼펜으로 무언가를 적었다. 그 페이지를 찢어 김성식에게 전해줬다.

“형 보고 싶으면 연락해. 꼬맹아.”

메일 주소와 번호가 적혀있었다. 말도 안 나왔다. 헛웃음을 내뱉었다. 손에 쥔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습게도 다음날, 김성식은 그 번호로 연락을 걸었다. 전화는 받지 않았다. 화가 나서 수화기를 던졌고 메모는 서랍에 고이 넣어뒀다. 그날 밤,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잠긴 목소리의 그가 받았다. 김성식은 아무 말 않고 전화를 끊었다. 생각해보니 한 번도 그와 통화 해본 적이 없었다.

 …….

 “강재인이라고, 우리 쪽엔 걔가 거의 일을 다 처리해. 내가 1인자 소리 듣긴 하지만 걔가 1인자지 뭐. 여자가 하면 무시당할 게 뻔 하니까 내 이름 앞에 두고 일을 처리하는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뭐 물어봐도 몰라.”

 “은거? 뭐,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취향이 아니니까.”

 “꼬맹이, 말 많아졌네.”

 “내일은 연락 안 된다.”

 “……은서가 보고 싶다.”

 연락은 띄엄띄엄 이어졌다. 5통 걸어야 한번 연결 될까 말까였다. 정은창이 기분 내키면 통화가 연결되는 식이었다. 애가 타는 건 김성식이었지. 한 달에 한번 연락이 될까 말까 할 때도 있었다.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선진화파는 완전히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백석의 도움이 있었고 은근한 성일파의 백업도 있었다. 완전히 서울을 잡아먹은 셈이었다. 해도 몇 번이고 바뀌었다. 한 해, 두 해, …김성식은 답답함을 느꼈다.

백석의 힘으로 자리 잡긴 했으나 언제까지고 그 너구리 아래에서 길 필요가 없음에도 황도진은 꽉 막힌 채 스스로 일어날 생각을 안했다. 이제 그의 쓸모도 다한 것은 아닌지. 몇 번이고 언쟁이 오고 갔고 황도진은 은거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울산 경남에서 새 놈들이 온다고 해야 겨우 얼굴 비출 정도가 됐으니 할 말 다했다. 늙어서 겁만 많아지기는……. 김성식은 생각했다.

 내가, 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처음으로 정은창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웬일로 먼ㅈ…,”

-황도진, 치려고?

김성식은 입을 다물었다. 늙은이. 귀는 좆나게 밝아서 어디서 처 듣고 전화를 하는지. 욱 했던 걸 애써 눌렀다. 목을 죄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었다.

“왜. 그쪽도 말리게?”

-도와줄까. 내가.

“……그 쪽이 왜.”

정, 이라고 해두지 뭐. 정은창의 목소리에서 웃음이 서려있었다. 술이라고 마신 거 아니야? 미간 사이가 좁혀졌다. 이내 소리 내서 웃기까지 했다. 김성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 정은창이 말했다.

-확실하게 도와줄 수 있어. 네가 1인자 자리에 앉는 거.

잘 생각해보고 연락해. 꼬맹아.

그렇게 전화는 끊겼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김성식은 결국 정은창이 내민 손을 잡았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처지였다. 내부에서 움직이는 짭새새끼들이 눈에 띄게 늘었기 때문이었다.

황도진은 정은창의 도움으로 김성식이 죽였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고 둘 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 뒤로 정은창의 연락은 더 일방적이 됐다. 김성식만 늘 애가 탔다. 

황도진을 무너트리고, 김성식은 처음으로 정은창의 집에 발을 딛을 수 있었다. 조용하고 삭막하기 그지없는 집이었다. 울산에서의 집은 낡았었고 퀘퀘하긴 했지만 사람 사는 집다웠는데. 정은서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정은서를 잃은 정은창은 말 그대로 회색으로 보였다. 아직도 살아있다는 게 우스울 정도로…… 동생에게 맹목적이었던 남자가.

그의 집으로 초대 받은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1인자에 오른 걸 새삼 축하라고 하고 싶은가보지? 그런 생각으로 그의 집에 들어왔고 소파에 앉아 그가 따라준 술 잔을 기울였다. 대화는 한참 없었고 정은창은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그 날, 은서가 죽었어.”

특별한 설명은 없었지만 김성식은 알 수가 있었다. 황도진을 죽였던 그 날, 은서가 죽었다고. 김성식은 뒤늦게 날짜를 헤아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달이 이 달이었다. 은서를 위한 제물이라도 됐나. 황도진이. 우스운 생각이었다.

“은서는 좋겠네. 길동무가 생겨서.”

나쁜 사람은 아니니, 은서를 잘 챙겨주겠지. 길동무라고 해도. 김성식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은창은 술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그 뒤로 특별히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그저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그렇게 방에 서로 앉아 술잔만 기울이며 밤을 보내고 아침에 헤어지는 관계가 되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오늘도 그랬다. 지금도 그런 날이라고 생각했다. 정은창은 말이 없었고, 김성식도 말이 없었다.

오늘밤이라고, 멋대로 텍스트만 보내면 단 줄 아나. 망할 영감탱. 김성식은 신경질적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정은창은 자신이 그렇게 노려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꼬맹아, 요새 도를 넘는다는 이야기가 내게 들려와.”

…마약 이야기였다.

하여간 짭새 새끼들. 입은 싸고 말도 빠르기는. 김성식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정은창은 술잔을 탁 소리 나게 테이블에 내려뒀다.

“예뻐할 때 얌전히 있어. 내 애정을 몰라?”

“…….”

“네가 그럴수록 강재인이 나를 귀찮게 군다고. 시끄럽게 굴지 마. 원래 하던 것처럼… 조용히 굴어.”

“김성식, 정신 차려. 그 자리에 널 올린 건 나야.” 

정은창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떨어졌다. 술맛이 뚝 떨어졌다.

“……영감탱이, 노망이 났나.”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해도 속은 화했다. 짜증이 났다. 언제쯤, 이라는 생각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환멸감이 들었다. 소파에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이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에 올라온 건, 내 힘이야.”

화거 났다. 얼마나 저를 멍청하게 볼 생각인지. 내가 쌓아놓은 것을 무시하는 발언은 속이 뒤집어지는 기분이었다. 잔에 남아있던 것을 한꺼번에 들이켰다. 십년도 더 전에 품어왔던 감정이 이제 썩다 못해 문드러졌다. 상대는 아무것도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는 조금 기대를 했던 자신이 멍청하기 짝이 없다.

“……술맛 떨어지게.”

정은창, 당신이 무너졌으면 좋겠다. 저를 우습게만 보는, 과거의 김성식으로만 보는 당신을 무너트려서 자신을 올려다보도록 하고 싶다. 당신을 뒤쫓기만 했던 애새끼가 자신을 잡아먹을 거라는 것을 머릿속에 새겨놓는다면 저를 좀 다르게 볼까. 무릎을 꺾고, 몸을 무너트리고, 무방비가 된 그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지금도 손만 뻗으면 얼마든지 목을 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몇 번이고 그가 저를 밀어내고, 선을 긋고 남으로 봐도 가져버린 감정은 꺼질 생각을 안 한다. 불씨를 꺼트렸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피어오르는 것은 검게 물들었다. 주황 빛 조명 아래서 그림자가 일렁이는 기분이 든다. 바닥은 점점 깊어져만 가고 빈 술잔에 채워지는 술은 속을 까맣게 태워갔다. 정은창은 더 이상 말이 없었고 김성식 또한 말이 없었다. 소리 대신 머릿속에서 서로 어떤 문장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을지 짐작 할 수도 없을 터였다. 김성식은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헤아리다가 정은창을 바라봤다. 나이를 먹어도 앳된 얼굴을 보다 얼굴을 찌푸렸다.

 

김성식, 정신 차려.

저 남자는 이제 ……네가 무너트려야하는 상대야.

그를 내칠 때가 왔다.

사랑이라는 정을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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