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글

누아남 이야기

-나는, 권현석 경감님의...친구란다.

여자아이는 눈물을 그득 담은 얼굴로 남자를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하얀 빗살 섞인 눈물은 희게 흐드러져 볼을 타고 방울져 떨어졌다. 남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무어라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못 했다. 여자아이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런 위로를 겉치레로도 건넬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짧게 인사한 남자가 다시금 거리를 두었을 즈음, 다른 남자가 여자아이 앞으로 다가왔다. 그 남자는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처럼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더니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물은 참았지만 분을 참지 못 한다는 것을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팀장님이 보호했다던...그 정은창이란 남자 있잖아..어떤 사람이었어?"

듣고 있는 남자는 죽은 이름이 되어버린 옛 이름에, 여자아이는 아버지를 죽였을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지목된 '오빠' 의 이름에 움찔했다.

여자아이, 권혜연은 잠시 먼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전 정말..모르겠어요.

권혜연은 그 말과 함께 고개를 푹 묻었다. 물음을 던진 남자, 서재호는 그 이상 묻지 않고 자신이 혹여 실례를 범했다면 용서하라며 말을 맺었다. 누구도 아닌 남자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권현석 경감의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은 당연하지만 대부분 경찰이었다. 그가 제일 염두에 두고 있는 두 사람의 대외적인 신분이 경찰이기 때문이었고, 대외적인 시선과 최소한의 양심 -후자의 경우 따지기 힘들지만- 이 있다면 이르든, 늦든 방문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한 발 물러나 경계를 늦추지 않고 살피는 것이었다.

물에 젖어 늘어진 머리카락.

그늘진 눈매와 침중한 표정. 허나 빛을 잃지 않은 암록색 눈동자. 주정재는 본 적 없는 새까만 양복을 입고 권혜연의 앞으로 나섰다. 안면이 적은 박근태 국장이라면 모를까, 주정재라면 지금 이 장소에서의 접촉도 위험할 수 있다. 누구도 아닌 남자는 제 가슴속에서 증오며 분노, 착잡함과 혀의 뿌리 끝까지 쓰라린 감정들이 마구 깔려대는 것에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애써 참았다. 지금 느끼는 감정들을 잊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감정인 것처럼 객관적으로 여겨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은 초입에 불과하다. 그렇게 되뇌며 주정재와 권혜연을 주시했다.

"..얘기 많이 들었다. 네가..현석이 딸이구나."

권혜연의 어깨는 이제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저씨는, 주정재 경사라고 한다."

..계급은 다르지만, 현석이와는 나름대로..오랜 친구 사이지.

누구도 아닌 남자는 저와 비슷한 대답을 한 주정재의 속내를 짚어내보려 애를 썼고, 그와 동시에 한 장소, 한 때에 권현석을 잃은 주정재의 모습을 떠올리며 애를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다. 서로의 길은 이제 다르게 갈라졌으나, 수단이나 사고방식은 엇비슷하다. 그러니 대동소이 할 법도 하다. 납득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아닌 남자는 납득했기에 눈물 맺힌 얼굴로 쓴웃음 짓는 주정재에게 살의를 느꼈다.

***

"야."

"...왜."

"나랑 어디 좀 가자."

"어딜?"

"어딘지는 묻지 말고."

주정재의 물음에 누구도 아닌 남자는 또 일이냐며 투덜거렸다. 재차 목적지를 묻는 말을 깡그리 무시한 주정재는 차를 끌고 가는 길에 꽃집에 들러 하얗고 노란 꽃이 그득한 꽃다발을 하나 샀다. 여자에게 줄 선물이라고 하기엔 분위기가 침중했고, 뭣보다 여자 찾아가는데 저를 데려가지는 않을 터였다. 차를 끌고 도착한 곳은 현충원이었다.

누구도 아닌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주정재가 시간 내어 찾아갈 만한 사람. 10년 동안 옆을 맴돌며 주시했지만 그럴 만한 사람은 과거에도 지금도 한 사람 뿐이었다.

"야, 청승 떠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권현석.

누구도 아닌 남자는 못 이기는 척 조금 거리를 두고 주정재의 뒤를 따랐다. 얼굴은 다르지만 혹여 마크될 지 몰라 주정재를 포함한 백석의 끄나풀들이 잠잠할 때를 골라 한두번쯤 들른 게 전부였다. 눈치보고 갈 수 있다면 바라마지 않았다.

멀찍히 앞서간 주정재는 어느새 멈추어 서서 꽃다발을 내려놓고 있었다.

권현석의 장례식장에서 자신을 친구라 소개하던 것, 혼자가 되어버린 권혜연에게 다가가 가족이 되어준 것, 권현석을 추모하고 그릴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는 것. 쫓기지 않는 정은창이라면 모를까, 누구도 아닌 남자로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누구 때문이었나.

"야, 이런 데 데려왔다고 너무 노려보지 마라. 등이 뜨끈하잖냐."

"뒤통수에 눈 달린 것도 아니고..내가 뭘 했다고 그래?"

"뭐야, 안 째려봤어? 그럼 그놈이 어디선가 서슬 시퍼렇게 날 노려보고 있는 건가..."

주정재는 그렇게 등을 돌려 누구도 아닌 남자를 보았다. 누구도 아닌 남자는 뻔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누굴 추모하러 온 거냐?"

"......"

"대답하기 싫으냐?"

"...내가 인생을 조져버린 망할 친구 놈이지."

말투와는 달리 주정재의 얼굴에 빈정거림은 묻어있지 않았다.

누구도 아닌 남자 역시 그 대가로 네 인생 역시 어그러져 버렸다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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