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2
양시백 생축글
겨울에 눈 소식은 놀라울 것 없는 일이었지만, 수도권에서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와 봤자 얼마나 쌓이겠냐고 대수롭잖게 생각했고, 서울에 말뚝 박고 산 지 오래된 양시백의 생각도 비슷했다. 몇 년 만에 전국적으로 엄청난 폭설이 예상된다고 말은 했지만 기껏해야 3cm에서 5cm 정도 쌓이겠거니 생각했고,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니..관장님, 그 치워도 치워도 눈이 계속 오는데요! 어푸붑!"
"그러게나 말이다. 이 근방을 싹 다 치웠는데 이렇게 계속 오면..."
엄청난 폭설로 이 눈이 수습되기 전까지는 임시 휴무로 학부모들에게 안내를 하고 눈이 그치면 얼른 눈을 한 곳에 모으고 쌓아 통행로를 뚫어 놓았으나 그쳤다가 몇 시간 뒤 다시 오고 다시 쌓이는 것으로 도루묵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나마 인도나 차도는 치워지거나 녹기라도 해서 괜찮았지만 치우지 않는 곳에는 눈이 폭신할 정도로 두껍게 쌓여있었다.
"...일단 다닐 정도는 됐으니 우리도 들어가서 몸이나 녹이자."
"네...에츄!"
"나 참, 서울에도 이렇게나 눈이 많이 오다니, 흔한 일이 아닌데 신기하고만. 이번에 눈 그치면 그거나 해볼까 양시?"
"그거라뇨?"
"눈오리 집게!"
눈오리. 눈으로 만든 오리.
작년쯤엔가 제작년쯤엔가 눈오리 만들기가 한창 유행해서 많은 사람들이 눈이 조금이라도 쌓이면 집게에다가 눈을 채우고 닫은 다음 폭 꺼내서 완성! 간단한데다 은근히 귀엽기까지 해서 담벼락 등이나 조금 높은 장식물에 올려두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언제 사셨대요?"
"기억 안 나냐? 올해 초에 샀잖아. 올 겨울에 눈이 오면 꼭 만들어 보자고."
"나 참, 관장님, 애도 아니고...."
"나이로 보면 애는 너지. 양시."
"저도 앞자리 2거든요."
"저 눈보라 같은 눈이 정~말 그치면 쌓아둔 눈으로 한 번 해 보자. 기껏 샀으니 한 번이라도 써봐야 맞지!"
아니. 누가 봐도 관장님이 애에요.
양시백은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길 방법이 없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근데 저거 재밌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됐고 관장님, 밥이나 먹자고요. 힘 썼더니 배고파 죽겠어요."
***
"햐...드디어 눈이 그쳤고만."
최재석은 눈을 반짝이며 집게를 짤깍거리며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은 손이 시리지 않도록 장갑을 낀 다음 길에 쌓였던 눈을 모아둔 곳으로 갔다. 한 주먹 큼직하게 쥔 눈을 집게 안 틀에 꾹꾹 넣었다. 처음에는 어찌나 눈을 꾹꾹 많이 넣었는데 집게를 하나로 하면서 눈이 조금 비어져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 발길이 닿지 않아 온통 곱고 새하얀 눈으로 된 둥그스름한 작은 눈오리는 귀여웠다.
"귀엽지 않냐?"
"귀, 엽네요. 정말.."
양시백도 어디 그럼! 하고 제 몫의 집게를 들었다.
최재석이 한 것처럼 한 덩이의 눈을 섬세하게 꾹꾹 눌러 넣은 다음 집게를 툭 열었다.
그러자 반듯하고 탄탄하게 탄생한 눈오리 한 마리가 뚝딱 나타났다.
"양시, 우리 여깄는 눈으로 몇 개까지 만드나 시험해볼까?"
"다 좋은데 어디다 두려고요..."
"출입문 옆부터 도장 외관이 닿는 곳 모서리로 쭉 둘러 놓으면 되지 뭘. 이 눈을 다 써서 이 자리에 쌓아놓을 수도 있겠고."
"차라리 인터넷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예 이글루를 만들지 그래요?"
"그럴까? 저기 효제초등학교에도 눈이 정말 많이 쌓였을 텐데."
"농담이었어요, 농담!"
"알아, 나도 농담이었어. 자 그럼 시작해보자고!"
서로 만든 눈오리가 열 마리가 되기 전에는 커다란 장정 둘이서 눈더미 앞에 쪼그려앉아 무얼 그리 하나 궁금해하는 시선이 등에 꽂혔지만 열마리를 넘겨 스무 마리쯤 되었을 즈음엔 귀엽다던가, 저거 봐봐! 하는 웃음소리 섞인 말소리가 등을 간지럽혔다. 양시백은 문득 눈을 눌러담덤 것을 멈추고 최재석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10년 전에는 감히 꿈꾸지 못했던 일상이었다. 최재석이 있어주었기에 한가로이 길을 치우고 남은 눈을 주물럭거리면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관장님, 감사해요."
"엥? 눈오리 집게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거냐, 양시?"
"아뇨. 그냥...이러고 있으니까 무지 즐거워서요."
"싱겁기는. 그보다...양시."
"네."
"생일 축하한다."
"...잉?"
"잉? 이라니. 너 오늘 네 생일인 줄도 몰랐던 거냐?"
"달력을 안 봐서..."
"눈도 그쳤으니까 이거 다 만들고 뜨뜻하게 지지다가 저녁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아저씨랑 같이."
"그래요. 모처럼 비싼 고기 먹고 싶네."
우뚝, 하는 소리가 뒤에서 멈췄다.
익숙한 기척이었지만 양시백과 최재석은 고개를 빙글 돌려 기척을 낸 사람을 돌아보았다.
양시백과 쏙 빼닮은 중년 남자. 그의 아버지 양태수였다.
"둘이서 뭐해? 날도 추운데."
"어, 양시랑 이거 써먹어 보고 있었지. 눈오리 만들기 재밌어. 아저씨도 같이 해볼래?"
"아, 나는..."
"눈도 많은데 아빠도 같이 해 봐요."
난 됐으니 둘이서 재미있게 놀라고 말하려던 양태수는 얼른 제 생각을 접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모처럼 권한 일이었다. 섶 지고 불속으로 가래도 행동에 옮길 판에 함께 눈덩이를 갖고 노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최재석은 잠시 도장 안에 들어간다며 제 몫의 집게를 양태수에게 건넸고 가볍게 팔을 걷은 양태수는 양시백의 옆에서 눈오리를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도장 안으로 들어온 최재석은 실내의 훈기를 잠시 느끼며 눈을 감았다가 종이컵 3개에 코코아 가루를 타고는 정수기에 붙은 온수 버튼을 눌렀다. 반쯤 물을 채운 뒤 티스푼으로 골고루 섞었다.
-귀엽구나..재석이가 사왔다고 했던가?
-응. 관장님이 시장에서.
부자가 도란도란 주고받는 말이 가늘게 들렸다. 양태수가 진짜 귀엽다고 한 건 아들내미일까, 눈오리일까. 전자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또 모른다. 아들도 귀엽지만 저와 아들의 손에서 퐁퐁 태어난 눈오리를 귀여워할지도. 최재석은 제 몫의 코코아를 호록 마시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장 앞으로 나갔다. 눈오리들이 길게 종종종 늘어서 최재석을 바라보는 듯했다.
"자, 코코아 한 잔씩들 하셔!"
"고맙다."
"감사합니다! 어우, 손 시려운 것도 몰랐네."
"그래서 이 관장님이 끝내주는 타이밍을 맞춘 거지."
"자화자찬하기는."
도장 주변은 물론, 부피와 높이가 크게 줄어든 눈더미 위에도 눈오리가 한가득이었다. 각자 코코아를 다 마신 다음 안온한 도장 안으로 들어갔다. 무거운 옷과 장갑을 벗어던지고 몸을 씻으며 다 함께 맞이할 생일날 저녁을 기다리는 세 사람의 모습을, 통창 창틀에 옹기종기 앉은 눈오리들이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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