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5

유상일+박근태 생축글

"아빠!"

"아연아!"

어느 고등학교 정문. 모처럼 딸을 마중나온 아빠와 반갑게 아빠에게 다가가는 딸. 흔한 광경은 아니었지만 아예 보기 드문 광경도 아니었다. 교복을 입은 딸의 가슴에는 유아연이라는 노란 명찰이 여름 오후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정문에 있어서 깜짝 놀랐어. 어쩐 일이야, 아빠?"

"간만에 오프 나서 마중나왔지."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현아랑 호진이도 안녕. 시간 괜찮으면 다같이 뭐라도 먹으러 갈래?"

"아니에요. 저흰 괜찮아요. 그치 호진아?"

"어? 응! 저흰 내일도 학교에서 보는 걸요!"

두 친구, 문현아와 신호진은 조금 멋쩍어하다가 유아연과 그의 아버지 유상일에게 인사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정문을 나서 거리로 접어들기까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려고 했던 걸 아빠가 방해한 거야?"

"조금?"

"아니라고는 안 해주는구나..."

"괜찮아. 내일 가도 돼. 스티커 사진 찍으려고 했거든."

"스티커 사진이라..아빠랑은 어때?"

"아빠는 그런 깜찍한 거 안 어울려."

"하~ 아빠도 아연이만했을 땐 온 동네 깜찍이였는데 말이야."

유아연이 으! 하고 장난스럽게 반응하자 유상일은 국어책을 읽는 듯 훌쩍거렸다.

격 없이 사이 좋아 보이는 부녀. 세상 사람들은 유상일이 지금의 일상을 얼마나 그리고 또 갈망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10년. 적잖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유상일은 딸의 손을 맞잡을 때마다 10년 전으로 달리는 기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서대문 인질극 사건. 납치된 유아연을 구해내는데 성공했지만, 강제진압 과정에서 인질범들이 사망했다. 당시 열 살도 채 안 된 여아를 납치해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 했던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생명이란 소중해서, 그 책임은 유상일을 필두로 해 현장에 멋대로 난입한 팀원들에게 떨어졌다. 하지만 유상일은 유아연을 구해낸 이상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오랫동안 존경했고, 따라왔고, 한 몸 바쳐 사선을 넘나들었던 시간들조차 모조리 무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사 과정에서 유상일은 선처를 요구했다.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제 책임이고 제 잘못입니다. 딸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물불 가릴 생각같은 건 없었습니다. 두 형사는 경위인 저의 강압적인 지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처분이든 달게 받겠습니다..하지만 두 형사에 대한 처분만은 아량을 베풀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상일은 면직 처분을 달게 받아들였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스스로 옷을 벗었을 것이라 결과에는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다만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병상의 두 후배와, 권현석과 오미정에게는 그저 미안하기만 했다. 제 모든 것이었던 딸아이를 구했는데 경찰을 그만 둔다는 게 무슨 대수일까. 대외적으로는 그래도 경찰 영웅이라, 내부에서 물의를 빚은 것과는 상관없이 딸아이를 한순간에 잃을 뻔했던 경험과 충격, 잠입요원 일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라는 점에서 경찰 영웅의 자리를 내려놓고 한 아이의 아빠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했다는 내용으로 적당히 포장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경찰 영웅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별칭이 유일하게 도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아빠."

"응? 응, 왜?"

"손 너무 꽉 잡아서 땀 나."

"땀이 나면..안 잡아야지. 그나저나 오늘은 외식하는 거 어때? 먹고 싶은 거 없니, 아연아?"

"흠..흠...그럼 스테이크."

"스테이크 접수했습니다. 마침 아빠가 봐둔 양식집이 있는데..."

"가 봤어? 현석 삼촌이랑?"

"아니. 하지만 혜연이가 추천해준 곳이라 믿고 간단 말이지."

"혜연이 언니 추천이면 안심이야."

"아빠 추천은 안심 못 하고?"

"아빠도 괜찮기는 한데...가끔 세대 차이 나."

세대차이라니. 나름 젊은 아빠라고 생각했는데!

유상일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한편으론 다른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추천받았던 양식집의 주소를 확인했다.

***

스테이크는 맛있었다. 적당히 두툼하고 부드러운 고기는 질기지 않았고 촉촉한 육즙이 배어들어 한 입 한 입 먹을 때마다 깊은 맛을 냈다. 같이 곁들여 먹은 샐러드와 파스타도 스테이크 소스의 강렬함을 훅 잡아주려는 듯 상큼하고 담백해서 궁합이 잘 맞았다. 유아연은 양식집을 나서며 제 배를 통통 두드리곤 말했다.

"와~ 잘 먹었다. 사진도 예쁘게 찍혔구."

"흠, 음식 사진은 왜 찍는 거야?"

"자랑 겸 부러워 하라고. 그럴듯하게 찍어서 친구들에게 보내면 나중에 자기가 맛있는 걸 먹을 때 에잇, 복수다~ 하고 보내는 거지."

"요즘 애들은 그렇게도 하는구나."

"피, 아까는 세대차이 난다고 충격받았으면서 또 요즘 애들은~ 하기는."

"아빠 어릴 때도 그런 거로 자랑하는 건 똑같았다 뭐."

두 사람은 가는 길에 생과일 주스 집에 들러 주스를 두 잔 사서 들고 가면서도 이야기를 계속했다. 다음엔 어디를 가 보자, 여기도 가고 싶다, 오늘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데 등등 가끔씩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끗 볼 정도로 대화는 계속 되었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녹색 불로 빛나자 두 사람은 좌우를 살핀 뒤 건넜다. 간간이 웃음 지으며 가는 모습들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퍽 정겹기 그지없었다.

신호등 앞에서 다음 신호를 대기하던 검은 세단의 뒷좌석 창문이 빠끔히 열렸다가 곧 닫혔고, 붉은 불이 들어오자 빠른 속도로 그 자리를 떠났다.

***

검은 세단의 뒷좌석에 앉은 자는 흔히 국회의원이라고 불리는 자였다. 국회의원 박근태. 한때 범죄와의 전쟁을 종결시킨 경찰 영웅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전 횡단보도를 건넌 부녀-정확히는 아버지 쪽을 알고 있었다. 고향에서 알게 된 인연이었고, 그 인연을 바탕으로 한때나마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며 일했던 옛 심복이었다. 별 감흥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나이를 먹은 남자의 얼굴을 보니,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가 멋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0여 년 전 일이었다.

'근태 형은, 그간 동고동락하던 모두를 버린 거야. 제일 먼저 날 버렸지.'

아버지, 유상일이라고 불렸던 남자는 인질극이 마무리 되고 며칠 뒤 박근태의 개인적인 부름을 받았을 때 조용히 침묵하다가 그렇게 말했다. 인질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유상일이 날뛰게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유상일을 구하고자 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당시의 박근태는 그런 사실들을 말한다고 해서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회복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놈들이 요구했던 것에 대해선 입을 다물도록 해.'

'아, 물건 말이지. 그래서 거기 있던 놈들을 모두 죽인 건가?'

'..강제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인명 피해지. 폭탄까지 갖고 있는 놈들을 제압하느라 위험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어. 더군다나, 멋대로 난입한 형사들이 있었으니 더더욱.'

'입을 다물지. 단, 조건이 있어. 서 형사와 배 형사에겐 손대지 마. 물론 나와 아연이에게도. 처분이 어떻든 더는 경찰에 몸담을 생각 없으니까. 죽었으면 모르되 살아있으면 이 정도는 요구해야 맞지. 안 그래?'

'.....'

유상일도, 유아연도 죽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감사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곧 뒷처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질극을 빌미로 장인 장희준은 그의 입조차 막고자 했다. 살아남은 이상 더는 손댈 수 없다. 물론 박근태는 감히 더 손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유상일이 물건에 대해서 영원히 입을 다물고 자발적으로 경찰을 그만 둔다면 지금으로선 그만한 묘책이 없었다.

'더 할 말씀 없으시면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유상일은 약속을 지킬 것이다. 존경하고 은애했던 형님과의 마지막 의리가 아니라, 자신과 아이, 다른 두 사람에 대한 안전을 담보로 한 거래이므로. 박근태는 눈물을 쏟으며 자신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때의 얼굴보다도, 무서울 정도로 침착하고 차분한 그의 얼굴이 두렵고 끔찍했다. 그의 말대로 그를 먼저 버린 것이 저였는데도, 감히 져버림 당할 거라 생각지 않은 것처럼 숨막히는 상실감이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유상일의 면직과 함께 수사팀 내 몇 명의 팀원들과 권현석 경감 역시 경찰을 그만두었다. 껍데기만 남은 수사팀은 곧 해체 수순을 밟았다.

물건, 장부가 물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는 결과는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다.

그 대가로 박근태는 자신을 따르던 이를 모조리 잃고 말았다. 이는 결코 바란 적 없던 결과였다.

그 적잖은 상실을 모두 뛰어넘은 박근태는 이제 경찰이었던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큰 그림은 자신을 볼 줄 아는 자, 다소의 희생이 발생하더라도 추구하기를 멈추지 않고 다가서는 자에게 길을 보여준다. 자신은 제게 예비된 길을 걸었을 뿐이고, 낙오된 자들은 거기까지가 한계였을 뿐이다. 불현듯 떠올랐던 옛 기억에 대한 감흥은 그걸로 끝이었다.

"의원님. 저택에 도착했습니다."

"아아."

기사는 운전석에서 내린 뒤 뒷좌석으로 다가가 바깥에서 차문을 열었다. 박근태는 차에서 내린 뒤 저택으로 발을 옮겼다. 여전히 무덤같이 고요한 곳이었다. 빠끔히 열린 무덤 안쪽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기나긴 복도에 작은 아이 한 명이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아버지."

딸. 박수정. 장지연이 남긴 유일한 핏줄이었다.

수 차례 교육한 결과, 더는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박근태는 문득 끝없이 웃고 떠들며 제 앞을 지나갔던 부녀를 떠올렸다. 유일하다는 것은 다시 없다는 것과 같다. 모처럼 말썽부리지 않고 얌전히 귀가한 아버지를 맞이하는 어린 딸을 귀여워해주는 모습을 비추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오늘 하루쯤은. 박근태는 드물게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그래, 오늘은 무얼 하고 지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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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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