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만약

주정재, 권현석/정재현석 - 과거날조

“우리, 이제 그만할까.”

끝을 선고하는 그 말은 평소와 다름이 없어서 멍하게 너를 바라봤다. 이쪽으로 시선 하나 주지 않는 너에 억지로 시선을 맞췄다. 깨달았다. 진심이라는 것을.

“…그래.”

옅은 죄악감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치기어린 나이의 우리들이었다.



아, 더워. 시부럴─ 존나게 덥네! 길바닥에서 에어컨을 바랄 수 없으니, 그 대신이라기엔 부족하지만  손부채질이라도 열심히 해댔다. 그런다고 이 더위가 가실 리는 없지만! 그래도 안하는 것 보다 낫지 않, …기는 무슨. 옘병. 더 덥기만 하다. 괜히 승질이나 욕만 내뱉었다.

“아니, 대한민국의 경찰을 이렇게 막 대해도 된답니까? 어?”

볼멘소리가 참지 못하고 터져 나왔다. 거! 시원한 거라도 주고 기다리라고 하던가! 경찰 뱃지 해를 넘기지도 않았으면서 말하는 뽐새는 한 십년은 몸 담근 사람이다. 너는 임마, 경찰이라는 놈이 언제까지 그렇게 말하고 다닐래! 아니나 다를까, 불호령이 옆에서 떨어진다. 예, 예~, 제 주둥이가 문젭죠. 젠장, 괜히 아무것도 없는 아스팔트에 신경질을 부린다.

 “그, 뭐냐. 그래서 오늘 만나기로 한 그 대단하신 경감님 이름이나 좀 압시다. 아니, 이름도 모르는데 다짜고짜 소개시켜주니 어쩌니, 이렇게 데려와도 되는 거요?”

“말! 말! 말하는 말뽄새 봐라 진짜. 나는 아직도 네가 경찰이 된 게 신기해 임마! 그렇게 꼴통 짓 하던 동네 깡패 정재가, 어? 이야, 이제는 경찰이라니 동네사람들 아무도 안 믿어!”

“아 진짜! 그런 이야기 말고 대답이나 좀 해주시죠~? 어제 꽃집 누님에게 고백했다가 차인, 경사님.”

“야!! 주정재!!”

“어우 씨, 귀 떨어져나가겠네. 소리 안 질러도 잘~ 들립니다!”

옆에서 속 뒤집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 질문은 까먹은 건지 대답할 생각은 않고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냐며 독촉하는 목소리를 흘려듣고는 주머니를 뒤지다가 말았다. 이 더운 날씨에 담배는 무슨, 그보다 대체 이 양반은 언제 오는 거야?

“늦어서 죄송합니다! 도중에 갑자기 급한 연락이 와서.”

“아, 권 경감님!”

땅 파고 있으려니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참 빨리도 온다, 정말. 숨기지 못하는 불만을 표정으로 드러낸 채 시선을 움직였다. 익숙한 갈색 빛의 곱은 머리카락, 동그란 안경테, 마주친 눈동자의 색 마저 과거에 두고 온 그 빛을 담고 있었다.

“어?”

“정재…?”

자신이 생각해도 꽤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을 거라고 예상한다. 권현석. 과거에 버려두고 온 미련이다. 지워낸 그림자가 불쑥 제 눈앞에 나타났다. 주춤거리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 가득 채워진다. 뒷목을 어색하게 쓸며 시선을 돌렸다. 뭐야, 이미 둘이 아는 사이? 하는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간다. 어떤 눈치 없는 놈이라도 알아챌 만큼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침묵 사이 매미 울음소리만 경쾌하다.

“오랜만, 이네. 정재야.”

“뭐어, …그러네.”

애써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정쩡한 대답이 이어졌다. 서로 아무 말 않고만 있으니 옆에서 애써 분위기를 잡는다. 둘이 아는 사이 같은데, 정재! 이야기 해놓을 테니까 경감님과 이야기 좀 하고 들어와! 억지로 등이 떠밀려진다. 곤란한 표정을 짓던 그 역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더위에 숨이 막혀온다.

“경찰, …됐네. 의외라서 좀 놀랬어.”

근처 다방에 자리 잡아, 한참을 망설이더니 내놓은 말이 겨우 그거였다. 의외라니, 누가 할 소리를. 짧게 헛웃음 지으며 냉수를 들이켰다. 시원하다. 겨우 숨이 트였다.

“누가 할 소리를? 이쪽은 놀라다 못해 아주 그냥,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무거운, 그러나 애써 가벼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정말,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천하의 권현석이 경찰이라니. 그것도 심지어 서울 쪽까지 올라와있다니. 그를 피하기 위해 서울로 기어 올라왔는데 다 헛수고가 되어버린 격이다. 속으로 혀를 찼다. 만나기 꺼림칙한, 과거다.

“그, 잘 지냈어? 갑자기 연락이 안돼서 걱정했는데.”

허, 이번에는 소리 내어 헛웃음을 내뱉었다. 걱정이라, …. 제 앞에 놓인 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두터운 소리가 들린다. 세심하지 못한 손길이었다. 괜히 목을 축였다.

“그쪽은, 이미 결혼 했지? 잘 지내?”

껄끄러운 화제를 굳이 입에 올리고 만다. 과거의 우리 관계가 끝나게 되었던 원인, 그가 만났던 여자의 임신. 아주 제대로 신호위반 했지. 모두가 어리던 때였다. 그도, 나도, 그 여자도. 미안해, 하지만 책임지지 않을 수가 없어. 라고 이야기하던 그의 말이 여즉 선명했다. 우리 그만 하자. 그래 애초에 우리 사이에 사랑은 없었고, 그와 그녀 사이에 있던 것이 사랑이었…,

“아, …헤어졌어.”

“뭐? 헤어졌다고? 그럼 여자는, 애는?”

…던 것도 아니었네. 이번에는 그가 어색하게 뒷목을 쓴다. 이제 보면 앳된 티는 많이 벗었으면서 옛날 보다 더 둥글어진 그가 제 앞에 있었다. 우습다. 어느 쪽에서도 사랑은 없었나보다.

 “걔는, 다른 사람이랑 결혼 했고. 혜연이는 지금 혼자 키우고 있지.”

 물을 들이키다가 사레가 걸려, 몇 번이고 기침을 내뱉었다. 당황한 그의 목소리도 들렸다. 고개 숙이고 기침을 내뱉으며 여러 생각이 올라왔다. 하? 다른 사람이랑 결혼? 애는 자기가? 무슨 헛소리가 혼자 자진모리를 치다 못해 굿거리장단 치면서 얼쑤하는 소리냐. 한마디로 개소리처럼 들려왔다. 물론 모든 가정마다 다 사정이 있는 거라지만, 제가 아는 권현석도 그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이제는 어렴풋이 기억나는 여자를 떠올렸다. 취소. 어떻게 생겼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진정하고, 이번에는 조심히 물을 넘겼다. 휴지 몇 장으로 물이 튄 테이블을 닦았다.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좀 미련이 떨어질 거 같다고 생각하고 물어본 거였는데, 돌아온 답이 너무 청천벽력이라 대꾸할 답도 찾지 못하고 물이나 연거푸 들이켰다. 그의 얼굴에 숨기지 못하는 씁쓸함이 언뜻 보였다. 잊지 못했나.

“…정재, 너는 만나는 사람은 없고?”

“나? 허, 없수다! 만나는 사람은 무슨, 위아래로 달달 볶이느라 정신없어 죽겠구만.”

 침묵이 맴돌던 테이블 위에서 겨우 물어본다는 게 그거냐. 능청스레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이지만 입 안이 쓰다. 도망치듯, 아니 벗어나듯 멀어져 여러 사람을 만났다. 몇 번 만나는 것에서 끝나는 관계들뿐이었다. 나는 늘 어린 애새끼였던 과거에 발목이 매여 있었고, 그걸 좋아할 상대는 없었으니까. 또 테이블은 침묵이 맴돌았다. 몇 번째의 침묵인지 모르겠다.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건 권현석, 그였다.

“이번 작전, 참여 한다며.”

“작전?”

“선진.”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수사본부 팀장이니까. 리스트가 들어왔거든.”

“ …허, 팀장? 이야, 엄청 출세하셨네. 거기다 경감이라며?”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대답했다. 한몫 단단히 잡아 볼 거라고 지원한 프로젝트에, 그가 얽혀있는 건 또 뭐람. 얽히고 싶지 않던 것들이 막 얽혀든다. 목이 탄다. 계속 물을 들이키려니 답답해 얼음 하나 깨물었다. 무거운 이야기가 오가다, 금방 또 일상의 이야기가 흘러간다. 네가 내뱉는 무수한 단어들이 내 위에 쌓여 거대한 무덤을 만든다.

낮에는 다방이고, 밤은 술집이었다. 특별한 곳도 아니고 그냥 흔한 포장마차. 떠들썩한 주변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았다. 불판에 놓인 고기는 천천히 익어가고 있었고 투명한 술잔이 비워질 때마다 알싸한 술이 채워졌다. 그를 바라봤다. 이렇게 마주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서로 자연스럽게 술을 넘기는 것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마지막 기억은 어린 애새끼였으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세월이 많이 지나긴 했나보다. 정재 너와 이렇게 술 마시고 있는 거 보니까.”

“누가 할 소릴, 그보다 형은 어쩌다 서울까지 올라와 있는 거야?”

“은혜 입은 게 있어, 네가 사라지고 얼마 안돼서. ‥뭐, 치기어린 마음으로 은혜 갚겠다 어쩌다 이러면서 서울까지 올라왔지.”

“이야~, 이렇게 의리 있는 사람인 줄 몰랐네. 거기다 아주 엘리트야. 벌써 경감이라니, 크 …. 나는 열심히 굴려지고 있는데 어느 세월에 그 자리 가냐?”

 술이 들어갈수록 이야기는 편해졌다. 왁자지껄한 주변 분위기에 물든 걸지도 몰랐다. 수저가 부딪히는 소리, 잔을 내려놓는 소리, 고기가 구워지는 소리, 여러 소음들이 가득하다. 술을 들이키며 슬쩍 그를 바라봤다. 술기운이 도는지 약간 붉어진 채 불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궁금증이 일었다.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그 꼴통 주정재나, 알게 모르게 꼴통이었던 권현석이나. 이렇게 어엿하게 경찰이 되어있을거라고 말이야. 오늘 낮에 봤던 아저씨 기억나지? 하경사. 그분도 같은 고향 출신이야. 뭐어,  …우리 동네에 잠깐 살다가 상경해서 형 얼굴은 모르는 것 같은데, 내 얼굴은 어찌나 잘 기억하던지 서울 와서 도움도 많이 받았지. 아? 하이고 말도마. 그 양반, 얼마나 말 많고, 참견 많은지 잔소리 쟁이야, 잔소리 쟁이.”

 괜히 더 크게 이야기를 떠들었다. 크크 웃으며 고기를 집어 먹었다. 눈에 띄게 어색한 모습을 지우지 못하는 그 때문에 부러 더 과장되도록 리액션하고, 말을 했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냐. 스스로 생각해도 바보 같지만, 그래. 이건 다 술기운 때문이라고 하자. 무엇보다 제 이야기에 조금씩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끔 정도는 이래도 된다고 생각 할 수 있었다. 주로 자신이 입을 열어 우스갯소리를 하면, 그가 대꾸를 하며 이야기를 이었다. 그러다 내가 말을 멈추면, 테이블은 다시 침묵을 베어 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침묵이 마냥 껄끄럽지도 않았다.

“정재야.”

새로 놓아둔 고기가 불판에 익어가는 소리가 감칠 났다. 그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서 테이블에 소주병을 보니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언제 저렇게 마셨지? 이미 빈병이 바닥에 한두 병 있었고 테이블에 있던 건 얼마 마시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그의 안색을 살펴보니 어느새 더 붉게 달아올라있었다.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하게 자작을 얼마나 열심히 한건지, 혀를 차고 왜, 라며 짧은 대답을 내뱉었다. 훅 올라온 술기운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겠는지 그의 손짓이 자꾸 허공을 맴돌았다. 그렇게 몇 번 허공을 젓더니 결국 물 컵을 쥔 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내가, 그때 그만하자고 안했으면,”

“우리가 그만두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었을까.”

 단단히 취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누가 봐도 술에 꽐라가 된 모습이었다. 목 뒤로 술이 유독 쓰게 넘어갔다. 무엇보다 관계의 끝을 선고한 본인 입에서는 절대 듣고 싶지 않은 가정이었다. 생각 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기도 했다. 그러기에는 과거의 내가 너무 비참해지니까.

“가끔, 가끔 생각했어.”

“내가, 잘못된 것을 선택하고, 집중한 게 아닐까.”

“몹쓸 짓을 한 게 아닐까.”

 술잔을 부러 탁, 소리 내며 내려놓았다. 아까부터 남모르게 술을 연거푸 들이붓더니 이런 꼴이나 되고, 한숨이 푹 나왔다. 솔직히 말하면 짜증나기도 했다. 이런 말이나 듣자고 만난 게 아닌데. 이 양반은 오랜만에 만나서 자기 주량도 모르고 이렇게 달리면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그냥 짜증이다.

“아, 거 말하는 거봐라. 그렇게 말하면, 댁 딸은 어쩌려고? 혜연이? 혜연이랬나?”

“왜, 딸도 잘못 선택하고, 잘못 집중 한 거라고 하지 그래? 아주 큰일 날 소리 하고 있네.”

“과거 일이야, 우리는 어렸다고! 몇 년이 지난 일을, 구질구질하게 굴지 마.”

 말을 하면 할수록 속에서 무언가 들끓었다. 젠장, 빈 소주잔에 콸콸 채웠다. 넘칠 듯 채워지는 잔을 꺾어 목 뒤로 넘겼다. 크으, 숟가락으로 된장찌개를 휘휘 저어 한 숟가락 뜨고는 씁, 목을 달랬다. 폼도 안 난다. 구질구질하다. 내가.

“나한테 미안해? 몹쓸 짓 한 거 같아? 됐어! 어차피 가볍게 만나던 거잖아. 둘 다 어리고, 호기심이었다고. 그런 걸로 해두면 돼.”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주변 소음이 재잘재잘, 시끄럽다. 소음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타들어가는 고기를 옆으로 옮겼다. 아까부터 젓가락 한번 움직이지 않는 누구 탓에 고기가 영 줄지 않았다. 아깝게 시리, 쯧. 혀를 차며 두 점 집어 먹는다. 아뜨, 아뜨…….

“정재야.”

“아 또, 왜! 비싼 이름이야! 왜 자꾸 불러?”

다시 만날까. 

허? 쥐던 젓가락을 그대로 떨어트렸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주변에서 시선이 모였다가 흐트러진다. 어, 어, 어우씨, 사장님! 여기 젓가락 좀! 버벅거리며 떨어진 젓가락을 줍고, 외쳤다. 그리고 다시 허? 이해되지 않는 머리가 고장 난 것 마냥 버벅였다. 테이블에 새 젓가락이 놓여졌다.

“그때 우리, 괜찮았잖아. 그치?”

“이 사람이 취하다 못해 훅 갔나….”

그가 젓가락을 쥐고 고기를 집었다. 아이고, 이제 겨우 한 점 먹네. 이 와중에 그런 생각은 잘도 든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그의 말에 술을 다시 찾았다. 이런 시벌. 나 혼자 한 병 다 해치우겠네.

“후회할 소리 그만해. 권현석. 너 딸 있잖아. 가볍게라도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형이라는 호칭이, 입에서 떨어졌다.

“애초에, 이제 와서 우리가 다시 만나는 것도 우습지 않냐, 어? 잘못된 걸 선택하려 들지 마.”

가라앉는다. 또 가라앉는다. 주변의 소음이 멀어져갔다. 시끌거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들리는 건 내 목소리와 그의 작은 목소리였다. 쓸데없는 희망고문 따위 사양이었다. 애초에 이런 소리 할 거면 술에 취한 게 아니라 멀쩡한 상태에서 떠들어야 믿는 척이라도 하지. 저런 상태로 떠들어봤자 다 술김에 저지르는 말인데. 아 물론 술 안 취한 상태에서 말해줘도 이쪽이 곤란하다. 절대.

“선택, 집중…. 너를 다시 선택하는 건, 잘못된 집중일까?”

“분명 후회할걸.”

분명, 후회할거다. 그리고 과거의 우리들처럼 또 헤어지겠지. 그럴 바에는 시작하지 않는 게 맞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갑갑하다. 제 술잔을 또 다시 비우고, 그의 술잔을 뺏었다

“그만, 그만. 이제 그만 마셔! 진짜 골로 가겠네, 어디 가서 나보다 형이라고 하지 마라. 어우씨.”

“딱, 한 잔만 더. 괜-찮아!”

“괜찮기는, 누구보고 뒷감당 하라고 그래? 술도 약한 것 같은데.”

 술은 자신이 비우고, 그의 잔에는 물을 부어 내밀었다. 술인지 물인지도 구분 못하고 마시는 꼴을 보고 있자니, 그래도 웃음이 나왔다. 귀엽네. ‥시발. 나도 중증이구만. 얼굴을 쓸었다.

“아, 됐고. 이제 일어나자. 집 주소는 알아?”

“집? 혜연이, 혜연이가 기다리는데.”

“그러니까 혜연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려면, 주소를 알아야할거 아니야.”

“주소, ‥”

휘청거리는 그의 몸을 잡았다. 어이고, 화려한 스텝이네. 대충 계산을 하며 그를 챙겼다. 비틀거리는 그를 챙기며 택시를 잡았다. 뒷자리에 구겨 넣고 옆에 탔다. 어서오세요. 하는 기사의 목소리에 그를 툭툭 쳤다. 야, 주소. 야? 야? 너, 형보고, 너 이씨, 아이고, 그래, 형님! 주소가 어떻게 되시렵니까!

 그제야 떠듬떠듬, 집주소를 이야기하고 또 금방 조용해졌다. 술기운에 벌게진 얼굴로 시트에 몸 기댄 체 색색, 숨 내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내가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보통 같았으면 그냥 택시에 버리고 제 갈길 갈 텐데. 빠르게 바뀌는 택시 밖 풍경에 턱을 괴고 창 너머를 바라봤다. 야간할증으로 택시미터기는 얼마나 빠른 속도로 오르는지. 택시 안은 라디오 음악 소리만이 들려왔다. 술집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정재야.”

“또 왜.”

“나는 그래도, 너를 선택하는 게, … 잘못된 선택은 아닌 것 같다. 그걸, … 후회할 선택이라고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았다. 그런 말, 술이나 깨고 말해. 내뱉지 못한 말이 잔잔했다. 그 뒤로 그는 잠든 것 마냥 고른 숨소리만 들리고 미동이 없었다. 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봤자 뭐한다고. …비참해지기만 하는데.

멈춰선 택시에 돈을 지불하고, 차에서 내렸다. 늦은 시간인데 애 괜히 깨우는 거 아닌가 몰라. 머리를 벅벅 긁으며 초인종을 눌렀다. 늦게 작은 여자아이가 나왔다. 초등학생? 생각보다 많이 컸다. 그만큼 시간이 흐른 거겠지. 눈을 비비며 아빠…,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어리다. 여자를 좀 많이 닮았네. 집에 대충 눕혀놓고 나가는 뒤로 감사합니다. 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인사성도 바르고, 뒤로 손을 대충 저어주며 나왔다.

새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밖은 후덥지근했다. 이 습한 더위는 그래도 낮에 비하면 살만하다는 느낌이었다. 느리게 큰 도로까지 걸어갔다.

나는 그래도, 너를 선택하는 게, … 잘못된 선택은 아닌 것 같다.

“… 젠장.”

그런 이야기, 조금만 더 빨리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만, 조금만 더 일찍 해줬으면, 그때의 나에게 해줬으면. … 좋았을 텐데. 그때 무덤덤히 우리, 이제 그만 할까. 하고 이야기 하던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후회가 담겨 있다고 여겨, 부러 접은 제 마음이 불쌍해졌다. 차라리, 그때 매달릴걸 그랬나. 아니, 그렇다고 해서 그 성격상 자기 애를 가진 여자를 버리지는 못했겠지. 그럼 그 옆에서 계속 있었어야했나? 기회가 올 때까지? 그 무슨 미련곰탱이 같은 짓이야. 짧은 자조의 웃음을 흘렀다. 됐다. 술 취한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서 뭐하겠냐.

깨버린 술기운에, 머리를 긁다가 다가오는 택시를 잡고 몸을 실었다. 반대로 바뀌는 풍경들을 시야에 담았다가, 숨을 내뱉었다. 이미 정리 된 과거다. 추억으로 남겨놔야 그나마 봐줄만한 과거다. 흔들리지 말자, 주정재. 정신 차려.

… 정신, 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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