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전환

오미정, 누구도 아닌 남자

우상이 쓰러지고 선망하던 사람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 날 이후 오미정의 세계도 같이 무너져내렸다.

그런 날이 있다. 특별한 날도 아닌데 예약도, 손님도 없는 날. 오미정은 매장 바닥을 한 번 쓸어낸 후 시계를 바라봤다. 이제 막 정오를 지났는데도 한 번도 입구의 종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거울을 한 번씩 닦고 창고까지 정리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하루가 한참 남아있다는 사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자꾸 잡생각들이 올라왔다.

불안은 손끝에서 드러나곤 한다. 테이블을 규칙적으로 계속 두드렸다. 톡, 톡, 톡, 톡. 미용실 안에서는 시계 초침 소리와 손톱에서 시작된 소리가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그 소리마저 귀에 거슬린다고 생각이 들자 의미 없이 테이블을 내려쳤다. 묵직한 소음 뒤론 시계 초심소리만이 계속 이어졌다.

"하…."

오미정은 한숨을 쉬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이 일을 시작하는 게 아니었는데. 침묵을 이겨내지 못한 생각이 툭 튀어 올랐다. 계속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는 자신에게 향하는 불우한 감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입술 안쪽을 잘근 씹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기라도 시키지 않으면, 그런 생각에 문을 열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맡은 것은 담배 냄새였다.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용실 입구 바로 옆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사내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입에는 담배를 물고 있었다. 무심코 오미정의 시선이 남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언뜻 보기만 해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남자를 향해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형사의 감이 움찔거렸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오미정이 유리문은 가볍게 두드렸다.

"이봐요."

남자가 돌아봤다. 오미정의 손가락이 벽 옆에 붙여진 금연 표지판을 가리켰다.

"여기 금연 구역이에요."

그는 오미정과 표지판을 번갈아보다가 담배 끝을 손가락으로 탁탁 털어냈다. 불씨가 꺼진 담배꽁초가 그대로 하수구 아래로 떨어졌다.

"미안."

순순히 돌아오는 그의 사과는 의외였다. 그를 바라보던 오미정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문을 좀 더 밀었다.

"들어와요."

"뭐?"

"미용실에 머리하러 아니면 왜 오겠어요. 들어와요. 한가하니까."

남자가 아니라고 말할 틈도 없이, 그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울 앞에 앉아있었다. 오미정은 능숙하게 가운을 꺼내 그의 위로 덮었다. 수갑 대신 빗을, 권총 대신 가위를 잡기 시작한 게 벌써 몇 년인가. 오른손엔 이제 가위 쥐는 대로 굳은 살이 잡혀있었다. 형사의 손은 사라졌다. 도피하듯 결혼으로 도망치고, 그곳에서 또 다시 벗어난 뒤 향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무작정 손에 잡히는 대로 시작했었지.

"목 불편하면 이야기 해요."

머리가 많이 상했네. 그녀의 손이 머리카락을 조심히 살폈다. 싸구려 약을 오랫동안 쓴 것처럼 상해있는 머리카락은 가까이서 봤을 때 더 상해있었다. 물을 뿌리고 머리카락을 빗어 넘겼다.

"이왕이면 짧게 치지 그래요. 인물로 훤한데, 가리고 다니면 아깝지 않나?"

"됐어. …지저분한 것만 정리해줘."

얼떨결에 의자에 앉긴 했지만 이럴 예정이 없었던 남자는 그렇게 협조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흐음, 간단하게 정리할 게 아닌 것 같은데. 오미정이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젖은 머리카락을 문질러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마음대로 할게요."

"뭐?"

오미정이 웃었다. 움직이려는 남자의 목에 서늘한 쇠붙이가 닿았다. 위험하니까 가만히 있어요. 그녀의 말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남자는 결국 얌전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가윗날이 들쭉날쭉 엉망으로 자란 머리카락을 잘라내면서 사각사각 가위질 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생각해보면 오미정은 이 소리가 좋았다.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소리. 바닥에 잘린 머리카락이 쌓여간다.

남자는 거울을 살폈다. 마음대로 한다고 했던 말과 다르게 그녀의 손길은 생각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샴푸까지 끝내 무겁게 젖은 머리카락을 오미정이 수건으로 가볍게 털었다.

"왜요, 걱정했어요? 내가 정말 밀기라도 했을까 봐."

그런 남자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오미정이 웃으며 이야기 했다.

"그다지."라고 대답하는 목소리에서도 은근한 무안함을 숨기질 못해 남자는 시선을 피했다. 남자가 무슨 겁이 이렇게 많담. 가볍게 물기를 말리고 끝을 좀 더 다듬은 후에야 오미정은 스펀지로 머리카락 주변을 털어냈다.

"훨씬 보기 좋네요. 아까운 인물 가리고 지내지 말아요."

남자가 목덜미를 쓸었다. 오랜만에 짧아진 머리카락이 낯설었다. 덥수룩했던 머리카락이 드라이까지 거치고 나니 음울해 보이던 인상이 아까보다 멀끔해져 오미정은 만족스러웠다.

"마음 같아선 더 정리해주고 싶은데, 내키지 않은 것 같아서 이 정도만 했어요."

거울 너머 어색해 보이는 남자가 비쳤다.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을 내려놓고 남자는 지갑을 꺼냈다.

"얼마야."

"이번엔 됐어요. 내가 멋대로 한 거니까 돈은 안 받을게요."

"그런 게 어디 있어. 받아. …아니 무슨 미용실에 가격표도 없어?"

남자가 뒤늦게 벽면이나 주변을 훑었지만 따로 금액을 적어둔 것은 없었다. 오미정이 남자의 등을 밀었다.

"정 돈 주고 싶으면 다음에 또 와요. 혼자 멋대로 가위질하고 싸구려 약 써서 머리 상하게 하지 말고. 그럼 되겠네, 다음번엔 그냥 해달라고 해도 절대 안 해줄 거니까."

버티지 않고 밀린 남자가 들어왔을 때처럼 쉽게 밖으로 밀렸다. 문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오미정을 돌아본 남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쩐지 '경감'을 닮은 '미용사'는 고집도 닮아있었다. 이러려고 이 근처로 온 게 아니었는데.

"잘 가요. 또 오고."

손을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은 어쩐지 이길 수 없었다. 남자는 이런 사람들에게 언제나 쉽게 휘말리곤 했었던 것 같다. 무심코 정돈된 머리카락을 만진 남자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미정은 가게 앞에서 한참 멀어져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지워내지 못한 피 냄새가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다. 오랜만이었다. '위험하다'고 머릿속에서 계속 울리게 만든 사람은. 한층 무뎌지고 무뎌졌던 감각이 계속 그녀에게 경고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뺨과 손에 숨기지 못한 흉터들만 봐도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녀는 굳이 남자를 경계할 필요를 느낄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어쩐지 남자의 모습에서 '누군가'를 비춰본 것은 아닐까. 음울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낯익은 사람을 보았던가. 멋대로 굴어도 결국 가만히 앉아있는 남자의 행동에 위험하지 않다고 느낀 걸지도 몰랐다. 그를 위험하다고 느낀 것도 그저 기우였을지도 모르지. 그녀가 형사를 버린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

또 오려나.

불과 한두시간 전만 해도 그녀를 집어삼킬 듯 올라왔던 불안한 감정들이 한결 가라앉아있었다.

오미정은 왠지 조만간 또 그를 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혹은 그보다 좀 더 그리운 사람을 만나게 될지도.

형사가 남자를 바라보곤 입을 떡 하니 벌렸다.

-뭐야, 웬일이냐. 네가 머리를 하고?

-시끄러워.

남자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형사가 많은 의미가 담긴 시선으로 남자를 훑었다.

-눈깔 치워라. 찌르기 전에.

-어우, 그냥 쳐다봤는데도 난리야. 오늘 그날?

-죽는다 진짜.

형사가 허, 참,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차에서 서류를 꺼냈다.

-뭐야.

-며칠만 다녀오라신다. 출장.

-나만?

-그럼 나도 같이 가리? 잽싸게 갔다 오셔.

남자는 형사가 건넨 서류를 훑었다. 왜 하필 이 시기에 출장을 보낸 걸까. …'그 녀석'의 출소일이 머지않은 지금 이 시점에. 남자는 의심스러운 시선을 애써 감췄다. 그래, 라고 대답하면서도 찝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갔다 오면 형님이 거하게 고기 쏜다니까.

껄렁껄렁 어깨동무를 해오는 주정재를 남자를 밀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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