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나아가다.

전력도시 / 회색도시 / 키워드 : 감정 / 서재호

사람의 감정은 언제라고 100으로 유지될 순 없다. 사소한 계기로 10이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100을 훌쩍 뛰어넘어 흘러넘칠 수도 있었다. 

이 세상, 마음대로 되는 일 하나 없지만! 

감정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서재호는 괜히 굴러다니는 깡통을 발로 찼다. 깡! 하는 소리가 골목길에 울렸다. 깡, 깡, 깡... 몇 번을 굴러가던 것은 곧 구석에 멈췄고 잔뜩 찌그러진 깡통은 꼴불견이다. 

"젠장."

꼭 자신 같지 않은가. 

분명 금연을 다짐한 지 24시간이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주머니를 뒤져, 버리지 못한 담뱃갑을 꺼내 든다. 밤은 어둡고, 길은 깜깜했으니 꾸역꾸역 발을 옮겨 가로등 앞에 멈추어 선다. 쓰레기들이 난장판인 그 아래에 서서 다른 주머니를 탈탈 털어 나온 라이터를 켜 담배 끝에 불을 붙인다. 

"죽겠네 진짜…."

이래서 과음은 하지 말라고 했던가. 너무 무리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최재석의 죽음이 채 아물기도 전에 꿰매기도 어려운 진실로 상처가 헤집어지고, 배준혁, 유상일, 박근태의 죽음을 나란히 겪어버린 어린 녀석을 가만히 내버려 둘 만큼 서재호는 무심한 어른이 아니었으니까. 

괜한 정이, 또 정이라고 찾아간 태권도장 문이 아직 굳게 닫혀있었고, 더 정리할 곳도 없는데 의미 없이 청소하고 있는 청년을 끄집고 나와 고기 불판에 앉힌 것은 오늘 초저녁의 일이었다. 가뜩이나 험상궂은 얼굴로 잔뜩 침울해진 것을 애써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어떻게 두고 볼 수 있나! 테이블은 금방 주문한 고기로 가득 차고, 술병도 나란히 굴러다녔다. 양시백이 말술인 건 전혀 예상외였다는 게 문제다. 

"후욱…."

숨을 내뱉을 때마다 술 냄새가 올라와 속이 매스꺼웠다. 아무 생각 없이 녀석의 페이스를 맞췄더니 오히려 자신이 과음을 해버리지 않았나. 데려다준다는 애를 억지로 돌려보내고 걸어가는 길은 어찌나도 어지러운지. 애꿎은 담배 연기만 뻑뻑 삼켰다. 

담배 불씨가 다 꺼지고, 재가 바닥으로 떨어질 무렵엔 더 걸음을 옮길 생각도 못 했다. 한 겨울만 아니라면 길바닥에 누워 잠들고 싶을 정도로 생각이 둔해졌다. 괜찮지 않을까. 지금 이렇게 더운데. 그런 생각을 하며 가로등 불빛에 진 그림자를 가만 내려다봤다. 

"……."

사실 술이 고팠던 건 자신이었을까. 양시백을 핑계로 평소보다 자제하지 못한 채 술을 들이켰을지도 모른다. 생각들이 가라앉으며 서재호는 외면했던 자신의 감정과 마주했다. 

뉴스는 요 며칠 내내 시끄러웠지만 서재호가 유독 눈을 떼지 못한 건 오늘 아침 보도였다. 무수히 몰린 기자들과 그들을 막아서는 경찰들은 엑스트라였고 유상일의 유력한 조력자이자 불법 폭발물, 아동 납치… 여러 죄목이 붙은 채 이송되던 오미정이 주인공이었다.

-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기자는 억지로 마이크를 내밀었다.

- 후회? 오미정은 방송국 카메라를 또렷이 바라봤다. 가던 길 움직이라고 밀어내는 손을 버틴 채 그녀는 마이크를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 후회 따위 하지 않아. 한다면…. 오미정이 입을 다시 다물고 형사들의 손길에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한다면, 그 뒤로 무슨 말을 하려고 하셨죠! 기자는 애틋할 정도로 간절히 마이크를 내밀었지만 더 들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서재호는 끊긴 그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유상일의 복수를 완벽하게 돕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겠지.','혹은 그의 죽음을 따라가지 못한 거나.'

십여년 전, 박근태의 앞에서 같이 목소리를 높이고 경찰 신분증을 내려놓던 당당하고 정의롭던 오미정은 누가 삼켜버렸나. 먹고 살기도 빠듯하고 버거워서 그저 잘 지내겠거니 생각하던 그녀의 삶이 언제 이렇게 망가졌나. 

"적어도… 내게 이야기라도 해주던가. 매정하긴." 

이번 일이 아니어도, 몇 번이고 자신에게 연락을 할 기회는 많았을 텐데. 자존심이겠지. 자신이었어도 엉망인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터였다. 그렇게 떵떵 큰소리를 치고 경찰서를 나와서 기껏 보여준다는 게 고꾸라진 모습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은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어쩌면'이라는 가정이 계속 떠올랐다. 이미 일어난 일이고, 지나간 일들인데 이 결과보다 조금 더 나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후회들. 살아남았고, 또 남겨진 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후회. 

"끅,"

딸꾹질이 올라온다. 입을 막고 가로등에 머리를 기댔다. 쭉 들이켰던 술들이 금방이라도 올라올 것 같다. 땅도 흔들리고, 시야도 흔들리는데 자꾸 화면 너머의 오미정이 떠오른다. 

십여년 전.

묻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아직도 남아 있던가. 아니면 잊힌 감정이 추억을 되새기는 것처럼 다이 올라오는 건가. 와중에 양시백의 모습이 떠오른다. 

"전 괜찮아요. 정말 괜찮다고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괜찮아야죠. 이 곳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참 강한 아이다. 서재호는 자신의 과거부터 현재를 떠올린다. 나라면 버틸 수 있었을까. 지키겠다고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을까. 유상일 경위의 갑작스러운 추락, 그리고 권현석 경감의 의문스러운 죽음. 누가 봐도 수상하기만 하던 그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경찰서를 뛰쳐나와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자신을 떠올린다. 

"하하…."

이제와서 후회하면 뭐 어쩌려고. 마른세수를 연거푸 하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지나가고 고칠 수 없는 일. 끊임없이 후회할 순 없고 앞으로 후회할 일을 더 만들지 않도록 두 다리로 버텨야 했다. 늙은 몸은 이제 젊은 시절처럼 잘 따라와 주지 않았지만 세월은 그냥 지나가기만 하지 않았다. 

술기운을 꾸역꾸역 삼킨다.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고자 견뎌내는 청년이 있다. 녀석이라면 과거의 자신이 못했던 것을 해줄 수도 있지. 태권도장 이름을 떠올린다. '양지'.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얼마 남아있지도 않은 담뱃갑을 구겨 쓰레기 봉지에 쑤셔 넣는다. 

서재호는 비틀비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깜빡거리는 가로등 아래 그의 걸음은 흔들리더라도 그림자가 꿋꿋하다. 버티고, 또 버텨. 감정에 매몰되지 않게. 도시로, 그렇게 도시로.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캐릭터
#서재호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