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n] 글

Guard you, Guide me 2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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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로 호텔로 돌아가 본부에 올릴 보고서를 작성하고, 바로 쓰러져서 잠이 든 나누는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본부에서 온 연락을 받고는 잠시 머릿속이 멍해졌다. 추가 인력을 투입하겠다고 하긴 했는데, 아니 그게 왜 이렇게 되는 거지? 나누는 방금 통화를 끝낸 휴대기기를 노려보며 머릿속으로 정리를 했다. 그러니까, 추가 인력이 공급되긴 하는데, 칼로스와 가라르 각 도시의 체육관 관장들을 경호할 요원을 그들에게 한 명씩 붙인다고 한다. 이동할 때에는 물론 같은 공간에 있을 때마저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나누는 왜 자기가 순무의 경호인으로 발탁된 건지 의문을 표하며 동료들과 아침식사를 했다. 가까운 카페에서 식사를 주문하고는 누구도 듣지 못하도록 칼로스어로 조용히 대화한다. 동료 둘은 자기들도 본부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그런 말은 없었다고 한다. 즉, 셋 중에서 경호인이 된 것은 나누뿐이라는 소리다.

"나이도 비슷하고, 비슷한 문화권 출신이라 그런 거 아냐?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겠지. 네 고향이랑 호연지방은 가깝지 않아?"

"그런가……."

아침부터 힘이 빠진 나누는 앞니로 포크를 살짝살짝 깨물다가 빈 접시에 내려놓았다. 식사와 함께 주문했던 커피를 마시며 복잡한 머릿속이 정리되기를 바란다. 카페인 성분은 그의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주며 아침의 활력을 되찾아주기 시작한다.

"네가 빠지면 앞으로 수사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건 걱정 마. 내가 빠지는대신 001과 002가 오기로 했어."

유추가능하듯, 그 둘은 코드네임이 000인 나누의 다음가는 실력자들이다. 본래 코드네임은 일반적으로 요원이 들어오는 순서대로 부여되는 것이지만 상위권에 속하는 '특수'요원들은 본부에서 주어지는 코드네임을 사용해야했다. 이것은 상부에서 구분하기 쉬우라고 정해놓은 규칙같은 것으로, 나누에게는 언제나 숫자들이 끊을 수 없는 목줄같은 느낌이 강했다. 상위권의 요원이 은퇴하거나 사망, 부서 이동을 하는 등 공석이 생기면 즉시 테스트를 개시해 새로운 요원을 발탁한 후 그 자리에 앉히기 때문이다.

목줄에 묶인 채 가장 앞장선 나누가 할 일은 최대한 순무의 안전을 도모하며 그의 주변에 수상한 움직임이 없는지 수시로 살피는 것이었다. 다른 동료들은 돌아다니며 수사를 해야했기에 늘 순무를 지켜볼 수 없는 입장이므로, 한 명을 뽑아 옆에 붙이는 것이 그리 나쁜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뒤늦게 깨닫는 것은 아직 경력도 짧고 이런 사건이 처음이기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카페를 나서고, 동료들은 수사를 위해 가라르팀과 합치기로 했고 나누는 곧장 엔진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 등의 매체에서 체육관의 무기한 폐관을 알려서인지 거리에는 어제보다 사람이 적어보였다. 놀이기구처럼 작동하는 승강기를 탄 후 위층으로 올라가 스타디움에 가까이 가자 스태프가 입구를 지키며 서있는 것이 보였다. 경찰수첩을 보여주면 그는 나누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스태프의 옆을 따라 걸어가며 순무가 지금 와있는지를 물었다.

"관장님께선 늘 체육관에 와계세요. 특히 엔진시티는 챌린지 개회식을 하는 곳인데다 관장님이 워낙 수련하시는 걸 좋아하셔서 과장 좀 덧붙이자면, 일년내내 출근하신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는 공휴일이나 휴가, 명절같은 날은 빼구요, 하고 덧붙였다. 그러나 나누의 생각은 달랐다. 순무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치고 올라오는 트레이너들에게 꿀리지 않기 위해 죽도록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젊은 나이에 챌린지 첫관문이라는 칭호가 붙었다는 것은 순무가 얼마나 강한 상대인지를 말하고 있었다. 첫승리의 맛에 취한 챌린저들은 다음에도 승리의 맛을 본다. 그러나 다음, 입 안 가득 날라지는 것은 패배의 맛. 챌린저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다. 그를 이기기겠다는 독기에 중독된 그들은 마침내 혀를 내밀고 승리의 맛을 가득 머금는다. 그는, 그만큼 강한 것이다.

관장실 앞에 서자 스태프가 대신 노크를 해준다. 안에서는 순무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누는 문을 열었다. 나누를 본 순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왔다. 나누는 뒷짐으로 문을 닫았다. 내부에는 업무용 책상, 가죽의자, 응접용 탁자와 소파, 옷장, 캐비넷, 전신거울이 놓여져 있었고 벽에는 가라르 공인 체육관 관장 인증서와 인물사진 몇장이 액자에 끼워진 채 걸려있다. 아주 소소하고 필요한 것만 배치되어 있는 것도 순무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었다.

"수사관님께서 오실 줄 알았으면 준비라도 하는 건데."

순무는 어찌할 줄 몰라하며 가라르어로 말했다. 나누는 그들 지방의 언어로 말을 꺼냈다.

"저희끼리 있을 땐 굳이 공용어는 안 쓰셔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하네요."

나누는 중앙에 놓인 응접용 탁자를 매끄러운 발길로 빙 둘러 소파에 앉았다. 순무도 나누의 맞은편에 앉았고, 나누는 그가 면도를 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앳된 얼굴의 입과 턱 주변에는 까만 수염이 듬성듬성 나있다. 속으로 피식 웃으며 갑자기 찾아온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이야기를 마치면 순무는 당황한다. 포켓몬도 늘 데리고 다니고 집과 체육관, 광산, 와일드 에리어 등 정해진 곳만 다니기 때문에 위험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게 위험한 거죠. 몇시쯤에 어딜 가는지 알게 되는 거니까."

나누가 그렇게 말하면 순무는 김새는 소리를 한 번 내고는 얼굴을 감싸고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서 양손을 떼고 말한다.

"전 수사관님께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아요. 가뜩이나 사건 해결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이게 앞으로 제가 할 일입니다."

딱 잘라 말하면 순무는 눈썹을 찡그리고는 잠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도 나누를 꺾지 못할 것에 주춤하는 것 같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 나누는 그를 무시하고 정장 안주머니에서 펜과 손바닥만한 수첩을 꺼냈다. 하는 김에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고 명함도 하나 꺼내어 순무에게 내밀었다.

"소개가 늦었네요. 국제경찰기구 칼로스 본부 국제형사과 소속인 나누라고 합니다."

순무가 나누의 명함을 받고 찬찬히 살펴보는동안 나누는 수첩을 펼쳤다.

"관장님의 출퇴근길에 동행하고 업무를 보실 때에는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어딜 가시든, 실내에서 실내로 이동하실 때에도 제게 보고하셔야 합니다."

재빠르게 요점만 적은 후 그것을 찢어 순무에게 건넸다. 순무는 여전히 아무말도 하지 않고서 나누가 찢어준 종이를 보았다.

"관장님께서도 트레이너 협회에서 받은 지시같은 게… 있으시지 않나요?"

"네, 당분간은 외출을 자제하고 다른 마을 관장들과도 만나지 말라고…."

나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협력에 감사드리며 어서 빨리 이 사태가 나아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누는 오른손을 들어서 악수를 청했다. 순무는 나누의 손을 잡고 거기에 응했다. 순무의 손은 나누의 손보다 약간 더 따뜻하고 피부결은 거친 느낌이 강했다. 나누는 순무가 손을 빼지 못하도록 약간 힘주어 잡았고 순무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리고 부담스러워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온 지방의 만인을 보호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게 저희의 임무니까요."

아시겠죠? 라는 느낌으로 잡은 손을 살짝 흔들면 순무는 알겠다고 대답했고, 마침내 대답을 듣게 된 나누는 실례했다고 사과하며 순무의 손을 놔주었다.

그 후, 나누의 '일'은 당장 시작되었다. 나누는 순무의 충실한 포켓몬처럼 관장실 앞을 지키며 내내 서있었다. 혼자서만 서있으려니 조금 지루한 면이 없진 않지만, 순무의 안전을 위해 이따금씩 관장실 문 쪽에 귀를 가까이 하고 내부의 인기척을 살폈다.

순무는 본래 퇴근하는 시간보다 한시간정도 빨리 관장실 문을 열었다. 이미 옷을 다 갖춰입고 어깨에 가방까지 맨 터라 그가 퇴근하려는 것을 알았다. 관장실의 불을 끄고 나누와 복도를 나란히 걸어가며, 딱히 일도 없고 나누가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신경쓰였다는 말을 꺼낸다. 나누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순무가 어떤 상황에 놓인 건지 다시 상기시켜주고 싶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저녁 먹기엔 아직 이른가…."

순무는 휴대기기로 시간을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나누에게 같이 저녁식사 하는 것이 어떻냐고 물어보자 나누는 좋으실대로, 한 마디만 하고 말았다. 순무는 잠시 생각하더니 죄송하지만 피곤하실 테니 그냥 집에 가겠다고 했고 나누는 그가 거주하는 곳까지 따라 걸었다. 낡고 낮은 아파트 단지는 스타디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순무는 운동삼아 매일 걸어다니고 있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나누는 정말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시네요, 하고 대답했다. 순무는 싱긋 웃으며 가만히 있는 체질이 아니라고 말했다. 다시 침묵 속에서 걷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면 어느새 순무가 거주 중인 곳의 문앞이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나누는 순무가 현관문을 열고 완전히 닫을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참으로 지루한 임무라고는 생각한다. 동료들과 탐색하며 수사하는 것이 더 적성에 맞다고 생각한 나누는 동료들에게 전화를 걸어 진전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아직은, 이라는 대답에 얕은 한숨이 나온다. 범인들을 잡기 전까지는 이래야 하는 걸까.

나누는 혼자서 일찍 호텔로 돌아왔고 조금 쉬다가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후 저녁거리를 사들고 왔다. 간편식을 먹으면서 보고서 작성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해본다. 몇시 몇분에 피보호인을 방문-엔진 스타디움 내 관장실. 대기하다가 몇시 몇분에 피보호인의 귀가에 도보로 동행-가라르 트레이너 협회에서 제공하는 공용 아파트. 몇시 몇분에 경호임무를 종료. 다 쓰고나니 이렇게 작성하는 게 맞나 싶었지만 일단은 본부 쪽으로 전송했다.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눕자 붉은 색으로 칠해진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엔진시티의 빛깔을 닮은 눈동자를 끔뻑거리던 나누는 잠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가만히 있었더니 몸이 적응하지 못하는 건가. 일어서서 스트레칭을 하고 통유리 너머 바깥을 보며 어둑어둑해지는 것을 구경한다. 때마침 동료들이 옆방으로 돌아왔는지 발소리와 함께 반가운 칼로스어 몇마디가 들려왔다. 나누는 객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동료들은 옆 객실의 문을 열다가 나누를 보고 인사를 하고, 오늘 어땠는지 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루해."

어깨를 으쓱거리자 동료들은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가 고생하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관장님을 지켜드려야지."

"그래, 맞아."

"……."

나누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약간 탐탁지 않을 때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동료들은 방으로 들어갔고 나누도 문을 닫았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두었던 휴대기기를 왼손에 든 채 통유리 쪽으로 스르륵 다가가서는 입력해두었던 순무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순무는 전화를 빨리 받긴 했으나 조금 머뭇거리며 수사관님? 하고 나누를 불렀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별일 없으신가 해서요."

여전히 도시 전경을 감상하면서, 오른손으로는 짧게 깎은 앞머리를 오른쪽으로 쓸었다. 순무는 계속 집에 머무르는 중이었기에 별다른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곧바로 순무의 포켓몬들이 보채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죄송해요…. 막 씻긴 후라서 다들 물기 빨리 말려달라고 난리네요."

가슴 속을 간질이는듯한 느낌에 나누는 한쪽 입꼬리만 올리고서 피식 웃었다. 이렇게 포근한 기분이 얼마만이지? 마치 따뜻하게 데운 튼튼밀크를 마신 후 내일은 좋은 일이 있으니 일찍 자야겠다며 아늑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나누는 내일 찾아갈게요, 라고 말한 후 전화를 종료했다.

왜 갑자기 순무에게 전화를 했을까.

그냥 그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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