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INED, BUT UNDEFINED
THE GOLDEN EYE, TAKE X
사각사각, 종이와 흑연이 마찰하는 소리 사이와 팔랑거리며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사이로 고요한 소음이 펼쳐지다, 무언가에 몰입하여 뒤를 돌아볼 새 없이 달리던 사람의 귀에 시작도 끝도 정해져 있지 않은 존재들의 우려가 마침내 가닿는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죽은 소리 사이로 이 자리의 단 한 사람에게만 들리는 움직임의 소리가 연필의 끄트머리에 내려앉는다. 절지동물을 닮기도, 헝겊 인형을 닮기도 한 형상의 존재는 자신의 방식으로 발화한다. 전해져야 할 말이 마침내 가닿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으므로.
“왕, 어지간해서는 말 안 하려고 했지만,”
“어인 일이오?”
“그렇게 안 자다가는 산 채로 도깨비왕이 되어버리는 수가 있어.”
“…?”
확신의 끝에는 의아함이 있었다. 이 방의 유일한 사람— 그마저도 이 상태로는 꽤나 아슬아슬했지만— 은 고개를 기울여 의아함을 표했다. 자신들에게서 배워, 옮아, 영향을 받았기에 고전소설이나 오래된 흑백 영상에서나 나올 법한 말투가 당연하게 나오는 이에게로 사람 아닌 이들이 그들이 지녔던 걱정의 수만큼 빼곡히 몰려든다. 모양도 형상도 크기도 각양각색이나 그들은 한 가지의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대관식이 아직 이르다는 목적. 당장 내일 스러진다 해도 오늘 반드시 해야 할 일. 오늘 반드시 전해야 할 일.
도깨비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고, 도깨비왕의 내정자 역시 사람이므로 그들의 사랑을 받아 마땅한 대상이기에 그들은 이른 대관식을 원치 않는다. 당장 내일, 당장 한시간 후, 당장 1분 후, 당장 1초 후 대관식이 거행된다 해도 받아들이고 왕을 존중하여 따르겠지만 그것과 욕망은 다른 문제라는 걸 수명 각양각색인 존재들은 대부분의 생명종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건 그들이 경계선에 서 있어 그럴지도 모르고, 봐온 게 많아 그럴지도 모르고, 탄생부터 본능적으로 알게 된 무언가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사람은 그러한 것에 대해 모른다.
그렇다면 도깨비가 가르쳐줘야 한다. 그들은 경계를 지키기 위해 움튼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의 경계에도 민감한 만큼 취약했다.
“왕은 지금 내정자지만 이대로 쭉 죽음에 가까워지게 되면 그대로 도깨비가 되어버린다는 얘기란다.”
“허나, 최근에는 큰 부상도 없고 이렇다할 건강적 이상도…”
“김 왕, 어제 수면시간 몇 시간?”
“아?”
“그거야, 그거. 잘 자고 잘 쉬고 잘 먹어야지 ‘살아있는’ 사람이라니까?”
“그럼 지금 나는…”
“한 반 쯤 ‘우리’겠지.”
“아직 학부생 입학도 안 했소만.”
“하지만 계속 안 잤지?”
“그거 위험해, 왕. 우리도 왕이랑 오래 있고 싶어. 잠을 자!”
“어째 기시감이 드네만…”
“그야 우리가 계속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멍청이 왕 같으니라고.”
“내가 아니 들었소?”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는 쪽이 맞지 않겠니.”
“아.”
그리하여 마침내 색이 다른 두 눈이 자신에게 깃든 피로감을 인지하고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을 때, 도깨비들은 자신들이 이겼음을 확신했다. 대관식은 당분간 거행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내정자는,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다행히 사람 사이에서도 혼자가 아니었고, 설령 모든 종류의 사람이 그를 내버린다 해도 도깨비는 두 팔 벌려 그를 환영할테니까. 다만 그런 사람 같지 않은 생각을 아직 사람인 이가 알 필요는 없었으므로, 라연 샌더스 최보다 덩치가 큰 도깨비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라연 샌더스를 그의 과제, 숙제, 과업, 여튼 어떠한 귀찮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일로부터 그를 떼어내 기꺼이 두 팔을 벌린 침대 도깨비의 품으로 떨궜다.
“이해했으면 포트폴리온지 포트럭파티인지 뒤로 하고 가서 자!”
“내일 조식도 잊지 말고 먹도록 하게나.”
윈덤에 더 골든 아이가 돌아왔다. 도깨비 아닌 이들 중 귀환을 알아채는 이도, 그의 아치에너미를 제외한다면 부재를 알아채는 이도 없었지만 윈덤의 시민들은 이유 모를 안정감을 느꼈다. “최근 골든이 좀 장난스러워진 것 같지 않아?” 정도의 안정감이지만 확연히 그랬다. 라연 샌더스는 그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있는 집에 돌아와서, 살 내리지 않고 건강한 볼을 하고, 지친 기색을 애써 감추는 대신 완연한 행복감과 안정감으로 반짝이는 눈을 하고, 깊어진 생각이 테가 나는 행동거지를 지닌 채 자신의 귀환을 알렸다. 영선은 다음 여행을 위해 준비하던 슈트케이스를 내버리고 자신의 손주를 와락 끌어안았고, 영건 요제프는 라연 샌더스가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그의 등을 받쳤으며, 현관의 소란에 영현 프림과 영례 로지스가 부엌에서 식기를 얌전히 두고 세 사람으로 이루어진 포옹의 공을 다섯 사람의 것으로 만들었다. 막 욕실에서 나오던 춘웨이는 옹기종기 모인 다섯의 머리를 보며 웃고는 공의 중심에 있는 라연 샌더스가 짐을 정리하도록 놔달라고 첨언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라연을 반기는 이들 중에는 라연 샌더스의 가족에게 애착을 느껴 그들의 집에 남은 도깨비들과, 그들의 집 자체인 도깨비 역시 있었다. 라연 샌더스가 사람인 가족의 포옹에서 벗어나며 허공을 보며 인사를 건내는 광경 역시 이 집의 일상이었기 때문에, 최씨 집안의 사람들은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옷가지와 서적이 든 짐을 응접실의 다탁 옆에 놓은 라연 샌더스의 근처에서 걱정했다느니, 골든 목격담은 늘어가고 네 방에 가구나 책은 채워져 가는데 돌아온단 기별은 없어서 놀랐다느니, 하는 일상적인 대화를 했다. 라연 샌더스는 걱정 섞인 투정과 타박에 웃음으로 답했고, 할로우에서 만난 이들과 작별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찰리가 굉장히 아쉬워했소.” “그럴 만도 하지. 다음에 한 번 데리고 올래?”— 전하고, 골든과 동시에 귀환한 시민으로 등장해 걱정거리를 늘리고 싶지 않다고 첨언했다. 윈덤에 새로 나타난 거물, 크립티드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그의 사람 가족은 그 첨언이 더해지고서야 납득하고는 질문 폭격을 멈추고 응접실의 다탁에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할로우시티에서 영영 살 줄 알았어!”
“아니면 그 옆의 피스톤으로 가거나. 그치?”
“무슨 근거를 가지고 나를 그리 음해하시오?”
“네가, 음…”
영건 요제프가 어떻게 포장해야 자신의 조카가 상처받지 않을지 고민하는 동안, 자신의 어버이보다 사촌을 더 잘 아는 다연 프림과 재연 로지스는 가감없이 걱정을 꽉꽉 눌러담은 말을 꺼냈다. 전달하여 가벼워질 수 있는 문장들이었다. 담고 있는 동안 무거워서 차마 꺼내지 못하다, 상대가 안온하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꺼낼 수 있는 종류의 의사였다.
“지대한 번아웃 증세를 보여서 다시는 안 돌아올 줄 알았지.”
“돌아와도 우리한테로는 아닐 줄 알았지.”
“그렇게나 빤했소? 책거리와 모란버선도 걱정했소.”
“엄청 빤했어.”
“골든 타워만큼.”
“그건 아직도 서 있소? 귀환할 때는 철거되어 있거나 이름이 바뀌기를 기대했네만.”
서른에 가까워진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앳되어보이는 얼굴은 최근 의학지에 실린, 총상을 입은 피해자의 생존 확률을 50% 올리는 의학 기술의 주요 공헌자 답지 않은 가벼움을 담고 있었다. 못마땅해보이는 표정을 대놓고 해서 그럴지도 모르고, 가까운 이들의 앞이라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어딘가로 가버릴 것 같은 침잠이 느껴지지 않음에 다탁에 둘러앉은 이들이 모두 안심했다. 라연 샌더스를 제외하고서. 당연하지 않나? 원래 스스로가 가장 자각이 늦은 법이니까. 다만 그도 주변의 사람 가족과, 도깨비 가족들이 기뻐한다는 사실만은 기민하게 알아챘다. 응급실에서 조금 길러진 사람을 대하는 눈치 덕분일지도.
“어림도 없지, 윈덤의 간판 히어로씨.”
“춘웨이…”
“나도 동의한단다.”
“영서까지.”
영광도 무용하며, 무명도 무용하고, 유명세도 필요없다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하고는 방문을 닫은 게 엊그제 같은데. 춘웨이는 영건의 어깨에 볼을 기대고는 보호자가 으레 피보호자의 성장에 기꺼워할 때 짓는 웃음을 지었다. 영선은 대놓고 위태로워 더 시선이 갔던 손주를 놀렸고, 영현과 영례는 일부러 간식 바구니에서 노랗고 주황색이며 황금색인 간식만 골라서 라연의 앞에 쌓아올렸다. 그리고 이 모든 관심의 중심에 놓인 라연은 그걸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할로우 시티로 학부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떠나기 전에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나 돌아보고, 올바른 반응을 돌려주었나 몇 분이고 고심했을텐데 지금은 자연스러워보였다. 류 춘웨이는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유가 생겨났고, 그걸 즐길 줄 알았다. 더 이상 볼살이 내릴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도 윈덤의 데리스 병원이 지닌 스케줄에 대해 불평할지언정 당장 떠날 것 같지는 않으니.
“그래서, 네 자칭 아치에너미인… 누구더라.”
“앵커.”
“맞다. 걔는? 여전히 윈덤에 뜰때마다 시끄럽긴 한데, 보다보면 개그 연예 프로그램 같아서 재밌긴 해.”
“여전히 사실을 호도하는 방송을 자주 내보내기 때문에 저지하고 있소.”
“동업은 안 한다니?”
라연 샌더스의 일이 모두 공유되고 나서는— 데리스 병원은 오래 일할 만 한지, 안내는 잘 받았는지, 긴장되지는 않는지, 의사와 골든의 병행은 괜찮은지 등등— 골든의 일이 화두가 되었다. 더 골든 아이라는 이상하게 긴 명칭을 쓰는 이는 적어도 이 집에는 없었다. 그들에게 골든은 곧 라연 샌더스였으며, 라연 샌더스의 일부는 골든이었다. 가끔은 애칭 삼아 골디라고 부르기도 한 만큼 공식적인 명칭을 고수할 라연 샌더스의 가족은 없었다. 그들이 사랑하는 건 라연 샌더스의 금안이지 윈덤의 구원자가 아니니까.
그러니 당연하게도 카론 노라크에 대한 게 의제에 올랐다. 더 골든 아이가 공식적으로 윈덤의 히어로로 알려졌을 때, 간 크게도 그를 새내기 히어로 취급하며 아치에너미 삼은 기묘한 빌런에 대해서. 라연의 가족은 오랜 기간 동안 라연과 도깨비들만이 정보 수집과 정리를 하는 걸 과로라고 여겼고, 마침 아치에너미 되는 쪽은 그리 폭력적이지도 않고, 음모론자인 것을 제외하면 활동 방식 자체는 골든과 비슷한 면이 있었으므로 둘이 동업을 시작하면 업무량이 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시작된 의제였으나 해가 지날수록 약간의 놀림도 포함되게 되었다. 대부분의 히어로나 빌런, 혹은 은닉한 자들(Masked)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표현하는 라연 샌더스였지만— 심지어는 “그” 게이트키퍼에 대해서도 주장 중 쓸 만한 게 없진 않다고 평했으니 말 다했다— 앵커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약간의 불평과, 한심함과, 귀찮음과, 개인적인 감정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가족 된 도리로 뭔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느냐는 영례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이후로 골든과 관련된 의제에서 앵커가 빠지는 일은 없어졌다.
이번에도 같은 경우로, 라연 샌더스가 일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월병을 집어들며 애써 표정을 편 것을 집에 있는 모든 이들이 보고 각자의 방식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월병 포장지를 뜯던 라연의 잇새에서 한숨이 새어나온 건 당연한 수순이었고, 그럼에도 가벼운 놀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이 집의 구성원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들의 목록에는 라연 샌더스의 업무량 감소도 들어 있었고, 앵커는 가끔 뒷걸음질로 골든보다 뭔가를 빠르게 알아내기도 했으니 더 그랬다. 라연의 가족이 보기에, 앵커는 그를 위한 완벽한 동업자였다. 적어도 업무적인 측면에서는.
“제안이 온다 해도 이쪽에서 사양이오.”
“어머, 언제는 손이 필요하다더니?”
“그건 맞소만,”
“그리고 정보 추출 솜씨는 봐줄 만 하다며.”
“그것도 맞소,”
벗겨낸 월병 포장지를 치워내고 간식을 한입에 넣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색이 다른 양안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을 고르던 라연은 간식이 목 뒤로 넘어가자마자 찻잔을 찾아 손에 쥐며 제 답을 내놓았다.
“…너무 어리오.”
그야말로 그의 가족들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답이었다. 앵커는 나이도, 소속도 미상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윈덤에서 활동하는 빌런이라 할 만 했고, 그가 나타날때마다 쇼를 펼치는 건 윈덤의 빌런답지 않다고 할 만 했다. 이곳에서 자신을 숨기려 하는 자들은 초창기의 골든처럼 도시괴담으로 남을 뿐이었으며 윈덤은 자신에 대한 것이 알려지지 않을수록 유리한 도시였다. 디어와 콜드-블러디드, 블랙 바니와 카피캣, 그리고 골든과 앵커를 제외한다면 알려진 이들이 몇 없는 것도 이 이유에서 기인했다. 돈과 권력이 있다면 만사가 간편해지는 건 미국이라는 국가의 특성이었고, 그건 어느 주를 가든 통용되는 상식이었으나 윈덤시에서는 조금 더 심했으므로.
하여튼, 앵커를 아는 누구도 그가 어리다고 여기지 않았다. 어리석다기에 그는 너무 많은 정보를 찾아내 손에 쥐었고, 연령적으로 어리다기에 그는 외견만으로는 영원한 삼십대로 보였다. 적어도 청년, 많이 잡으면 장년 정도가 아닐까, 그게 히어로-빌런 커뮤니티의 주도적인 추측이었다. 물론 거기는 골든을 쉰이 넘어가는 중년으로 보고 있긴 했지만.
“행동이나 언행을 말하는거요. 나는 그의 정체를 캐낼 생각도, 뒤를 밟을 동기도 없소. 허나 디 앵커 카론 노라크는 환각이며 허상이라는 사실을 등한시할 생각은 없소.”
“그거, 실물인 사람이랑의 동업은 생각해봤단 뜻으로 들린다?”
“추측이지만, 만난 적 있기에.”
“뭐야?? 우리한테는 말한 적 없잖아!”
“연애사 정도는 업데이트하라고!”
“연애사가 아니니 업데이트 안 한거요. 대체 무슨 게시글을 보고 지내는거요?”
아치에너미는 원래 그렇게 엮여… 라는 말을 영현은 현명하게도 꺼내지 않았다. 골든과 앵커에게 헌정된 텀블러 페이지가 몇 페이지고, AO3이 몇 페이지인지, 골든이 알아봤자 좋을 건 없었다. 의외로 그런 게 있군 그래, 하고 넘어갈지도 모르지만. 여튼 가끔가다 보며 웃는 인생의 재미를— 골든의 정체에 관한 헛발질은 몇 번을 봐도 웃겼다— 정보 수집에 한해서는 따라올 자 없는 사촌에게 들켜 빼앗기고 싶진 않았으니까.
해서 그는 조부모가 말을 돌리는 때에 맞춰 입을 다물고 노란색 망고 젤리를 입에 넣었다. 말을 많이 했으니 배고픈걸로 보이겠지, 하는 계산이었고 영례 역시 자신의 옆에서 젤리 포장지를 뜯는 걸 보니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라연이 영건과 춘웨이, 조부모 사이에서 곤란해하는 사이 쌍둥이는 시선으로 합의했다. 다시는 이 주제를 꺼내지 않는 걸로.
“나도 손주의 반려 정도는 보고 싶단다.”
“조부모까지… 아니라고 했잖소. 추측이 맞다면 허상을 가장하는 자와는 손잡을 의향이 있네만, 성격상 나를 만나러 오진 않을거요.”
“단정적인 어조는 의외네요, 라연.”
영건에게 찻잎을 건내며 춘웨이가 의아함을 표했다. 앵커가 제 조카의 사적인 면을 끌어내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사적일줄은 몰랐다는 생각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 라연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는 불안정하오.”
“또 단정이네요.”
“지정된 사실이니 별 수 없소. 그는 불안정하고, 환각으로 무언가를 전하려 하오. 그리고 히어로를 싫어하오.”
“그리고 더 골든 아이는 윈덤의 간판 히어로지.”
간판 히어로라는 호칭에 디어나 콜드-블러디드도 있잖소, 하고 말하고 싶은지 미간을 구긴 라연 샌더스는 그 불평을 건내진 우롱차와 함께 삼켜냈다. 의미없는 소모전이었고, 윈덤에 제 이름과 상징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마천루가 있는 한 반박이 어려운 세간의 사실이었다. 유일한 위안은 그 빌딩이 NGO 시민단체에 의해 관리되며 시민용 문화복지시설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골든의 이름으로 익명 아닌 익명 기부도 하고 있긴 하지만…
“내키지는 않지만 그게 세간의 인식이지 않소? 허니 그는 골든에게는 다가서지 않을게요. 왕도 아니며 이상론자도 아니니.”
디 앵커, 카론 노라크는 그런 점에서 독특했다. 더 골든 아이에게 다가오려고 하는 이는 많았고, 그에게 적의를 가진 이들은 더욱 많았다. 그럼에도 자신의 길에 방해가 되는 게 아니라 귀찮고 성가셔서 꺼져 줬으면 한다고, 그렇지만 죽기를 바라지는 않는다고 모든 종류의 행동으로 말하는 건 카론 노라크가 유일했다. 게이트키퍼야 비인간에 속하는 이들을 싫어하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었고— 아마 예측이 어려워서겠지— 코트 제스터는 종잡을 수 없었으나 당장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다. 라비린스나 개더링 이모션, 제니아나 케토스는 자신들의 일만으로도 바빴다. 트릭시는, 찰리였고. 스펙터? 그는 취미가 히어로 헌팅이었다. 골든을 쏘고 싶어해도 완전히 납득이 가는 성격이었단 뜻이다.
“너는 그럼, 아니지.”
춘웨이도 그 사실에 금방 도달했는지 이어지는 말을 고르며 찻잔을 손에서 두어바퀴 돌리고는, 라연의 색 다른 두 눈을 특이할 것 없는 갈색 눈을 들어 마주보았다. 영건이 춘웨이의 표현을 알았다면 적어도 이레 밤낮을 고민해서 그의 눈을 찬양하는 시를 써 올 판단이었지만, 누군가 모르는 건 잊혀지기 쉽지 않은가? 춘웨이와 가까운 다기 도깨비만이 라연에게만 보이는 표정으로 킥킥 웃었다.
“더 골든 아이는 윈덤의 히어로로 남을건가요?”
“아니. 내 목표가 바뀔 일은 없소.”
“경계에 서 있겠다고 했던가, 너무 철학적이라 아직도 이해는 못하겠는데.”
“그건 자네가 도깨비가 아니라 그렇소.”
“너도 아니잖아.”
“이해도는 자네들보다 높소.”
“그건 그렇지만.”
집에 돌아왔으니 재정비를 해야 할 때였다. 라연도 이 사실을 알았고, 다른 모든 가족들도 이 사실을 알았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골든이 화두에 올랐고, 자연스럽게 앵커가 언급되었다. 더 골든 아이는 히어로가 아니었다. 세간이 어떻게 부르거나, 그는 히어로일 수 없었다. 어떠한 절대 선을 지향하지도 않았고, 뚜렷한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지금의 현실이 그르다는 걸 알아서 행동하기로 한, 인간 아닐 것이 내정된 누군가였을 뿐이다.
“요지는 그거요. 높은 확률로, 텅 비어버린 앵커를 자처하는 뱃사공(The Hollowed ANCHOR, Charon)은 골든이 누구인지 알고 있겠지만, 뭐,”
“뭔데? 이 타이밍에 간식 먹지 말라고!”
“먹겠다는데 뭘 그래.”
“감질나잖아.”
지금 이 자리에서 간식을 우물거리는 라연 샌더스 최는 그 날 밤, 할로우 대학 옥상에서 떨어져 죽을 뻔한 렉시 경현 서를 끌어올린 의학부생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제 전공의 자격을 가진데다 확실하게 취직했으며, 고향에 돌아왔지만, 제 눈 앞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구할 것이었고 눈 앞에서 쓰러지는 사람이 있다면 응급처치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해연 트래볼이 자신을 그렇게 가르쳤으므로, 그리고 그 기준을 지지대 삼아 자신이 살아왔으며, 그 지지대가 윈덤에게 더 골든 아이를 소개했으므로. 라연 샌더스는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도깨비들의 장담으로 미루어보건데, 도깨비왕이 되어서도 그런 도깨비왕일테다. 사람이었던 저를 잊기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고 도깨비는 그런 변화와 굴곡으로 이루어진다고 처용탈이 말했으니 아마 틀림없을테다. 비형랑이나 전기수가 확언해주기도 했고… 그러고보니 그 둘도 날을 잡아 가족들에게 소개시켜줘야 했다. 본가로 돌아간다고 말은 해놨지만 할로우 시티가 재미있어서 거기 남을지, 자신을 따라올지도 애매했으니까. 도깨비-이동이 가능한 이들에게 거리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하여튼, 그게 그의 판단에 영향을 줄 정도로 큰 정보는 아닐 거요. 사람은 누구나 지나가다 죽을 뻔 한 사람을 구하기 마련 아니겠소?”
자신의 룸메이트 겸 반려 겸 전임자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한 켠에서 생각하고 있던 탓일까, 라연은 자신의 가족들이 공통으로 지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전혀 보지 못했다. 영현과 영례는 다시 시선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이거, 그거지? 그치? 그 팬덤 연성 중에 있었잖아. 어, 그거. 정도로 요약되는 무언의 의사표현이었으나 이 역시 라연의 관심 밖이었다. 영선만이 해연의 성격을 뚜렷하게 기억하는 유이한 사람으로서, 영건과 함께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고 작게 미소지었을 뿐이었다.
“너는 여전히 사람을 잘 모르는구나.”
“그게 무슨 뜻이오?”
“여전히 바보라고.”
“근거 없는 호도를 연발하지 마시게. 이해하기 어렵소.”
라연 샌더스는, 골든은 자신의 삶을 어찌 살아갈지 고심하느라 바빠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24시간을 48시간처럼 쓰는 취미가 없는 그의 가족 대부분은 어느 순간부터 디 앵커가 골든을 대하는 방식이 기묘해졌음을 알고 있었다. 그건 어떤 기준에 부합하지만, 동시에 부합하지 않는 이를 대하는 모순된 행동이었다. 골든은 “이제 슬슬 래퍼토리가 바뀔 때가 된거요?” 하고 넘긴 모양이지만, 도깨비들은 이 상황이 너무나도 재미있어서 도깨비왕에게 알리지 않은 모양이지만, 보통 누군가의 그런 모순적인 행동은 무언가를 원할 때 발생한다. 그게 손에 쥐어졌다가, 생각한 대로의 모양이 아니었음을 아는 이의 행동이었다. 그리고 라연의 성격상, 최근들어 앵커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족적을 가리는 데 허술한 걸 보니 아마 피스톤 출신이겠지만— 한숨과 함께 행동할테고, 그럼 그에게 동업자가 넝쿨째 굴러들어올테다. 업무량이 줄어든다면 24시간을 24시간으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르지.
“황금은 무르다지만 네 시선은 더욱 종잡기 어렵구나.”
그런 계산 아래, 영선은 일부러 라연 샌더스에게 그들의 추측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 정제되지 않은 투박한 진심이 상대를 뒤흔들기 마련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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