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엠 인게이지] 발렌타인 초콜릿

2024.02.14 작성

베일 본인은 스스로를 세상살이에는 비교적 둔한 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주변 상황도 상황이었고 출신도 출신이었으니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으니까. 기껏해야 기사가 가끔씩 지나가는 투로 이야기를 해주는 때도 있었으나 그조차도 자주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즉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경험을 토대로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다른 세계의 자매였다. 자신보다 월등히 쌓아온 그 지식을 빌린다면 길이 보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서 솔라넬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으며, 발견했다.

"음, 그래서 신룡 님께 초콜릿을 건내드리는 걸 왜 제게?"
"엘은 그, 지식이 풍부하잖아? 그래서..."

그렇군요, 다른 세계의 베일의 자매인 엘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다만 상담을 받아봤자 엘이 답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평범한 대답 뿐이었다.

"신룡 님은 베일, 당신이 건낸 초콜릿이면 기쁘게 받아들일 것 같은데요."
"그, 그래...? 그래도 내가 고르려 하면 나도 모르게 내 취향에 맞춰서 고를지도 모르니까..."

베일의 그 말에 엘이 묵묵히 그 상황을 생각해본다. 매운 초콜릿, 확실히 들어본 적도 없고 무슨 맛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엘 본인도 자극적인 맛을 찾는 편이었으나 분명 매운 초콜릿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도 선물용으로는 맞지 않을 거라 충분히 예상됐다. 적어도 엘이 알고 있는 이 세계의 신룡, 뤼에르는 기쁘게 받아들일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뤼에르가 매운 걸 선호한다는 정보는 엘은 듣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마친 후 엘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신룡님에게 드릴 초콜릿을 만들기 위해 협력을 해달라, 그 말인가요?"
"으, 응...! 안 될까...?"

뭐가 그리 겁나는지 미소와 괴로운 표정을 함께 짓는 이 세계의 자매인 베일을 여전히 똑같은 표정을 하며 바라보면서 엘은 생각했다. 애초에 본인은 맛을 잘 느끼지 못하니 도움이 될 수 없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기에 베일의 이 부탁은 거절해야 마땅했지만 문득 시야에 들어오는 지나가던 라팔을 보며 말했다.

"협력하죠. 대신 저만으로는 불안 요소가 남아 있으니 한 명 더 데리고 와도 되겠습니까?"
"응? 응... 고마워!"


***

솔라넬, 신룡 뤼에르가 잠드는 방의 문고리를 잡은 채 베일은 굳은 얼굴을 하며 몸을 작게 떨고 있었다. 스스로를 묶는 긴장을 풀기 위해 연신 숨을 들이 마셨다가 내쉬는 것을 반복해보지만 영 잘 되질 않는다. 품 안에 있는 수제 초콜릿을 더욱 꼬옥 안고서 이 초콜릿을 만들기 위해 꾸준한 인내력으로 협력했던 베일의 다른 세계의 자매인 엘을 떠올리며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서 문고리를 잡았던 손을 떼고 똑똑, 가볍게 노크를 했다.

솔직히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가장 고귀하고 높은 위치에 있는 베일의 언니는 그 탓인지 자주 솔라넬을 비우곤 했다. 당장 며칠 전에도 잠깐 피레네 성에 다녀 오겠다며 한 손을 연신 붕붕 흔들며 인사를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래서 노크를 한 후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던 베일은 예상치 못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며 무심코 문고리를 다시 잡고서 그대로 밀어버렸다.

"역시 베일이었네요. 솔라넬에 돌아와서 처음 본 게 베일이라 더 기뻐요."

아, 다른 분들이어도 기뻐요! 라며 넣지 않아도 다들 오해하지 않을 말을 덧붙이는 그 목소리는 역시 베일의 언니, 뤼에르였다. 베일은 놀란 얼굴을 하고서 더듬더듬 물었다.

"어, 언니... 피레네 성에 다녀오겠다고 하지 않았었어...?"
"네, 그리고 오늘 돌아왔어요. 아, 혹시 베일을 기다리게 했나요?"
"아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돌아와서 놀랐을 뿐이야."

그런가요?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묻는 뤼에르는 베일에게 옆에 앉으라는 듯 침대 위를 가볍게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베일은 알겠다는 듯 앞으로 걸어와 그대로 뤼에르가 쳤던 자리에 앉았다.

"베일, 그건?"
"언니, 그건?"

그와 동시에 자매가 똑같은 것을 물었다. 베일은 뤼에르의 한 팔에 안긴 물건을, 뤼에르는 베일이 그 팔에 안은 물건을 보고 있었다. 먼저 대답한 것은 뤼에르였다.

"아, 오늘이 그 초콜릿을 건내는 날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몇몇 분에게 받았어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았다면 저도 드리는 거였는데 받기만 해서 미안하네요..."
"그렇구나..."

면목없다는 듯 웃는 뤼에르를 보며 베일은 숨을 삼켰다. 한 가지 의외였던 것은 뤼에르가 그 품에 안은 초콜릿의 수가 매우 적었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던 베일은 문득 그럴듯한 것을 떠올렸다. 신앙의 대상이기도 한 신룡은 그 위치 때문에 되려 무언가를 전할 때 가벼운 마음으로 줄 수 없어지기에 받는 선물이 적어지는 게 아닐까 하고. 아마 이것이 정답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베일을 제정신으로 되돌리듯 뤼에르가 물었다.

"베일이 안은 그건...?"
"아..."

뤼에르의 질문에 정신을 되돌린 베일은 순간 머뭇거리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다른 팔로 초콜릿을 잡고서 그대로 뤼에르에게 건냈다.

"초, 초콜릿이야. 오늘이 발렌타인데이니까 언니에게 주고 싶었어."

직접 만들었어, 베일은 어쩐지 자꾸 시선이 바깥으로 향하는 것을 억지로 뤼에르 쪽으로 돌리면서 더듬더듬 답했다. 뒤에 엘과 엘이 억지로 데리고 온 라팔이 초콜릿을 만드는 것을 도와줬다는 말을 붙이는 데 성공한 건 나중에 베일이 이 일을 회상하면서도 말해서 다행이라 생각한 부분이었다.

"베일이 모두와 함께 협력해서 만든 초콜릿... 기뻐요, 정말 기뻐요!"

그렇게 말하는 뤼에르는 정말로 기쁜 듯 한 손에 안고 있던 초콜릿들을 옆에 두고서 베일이 건낸 초콜릿을 든 후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손으로 베일의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베일은 처음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결국에는 함께 웃었다.

"지금 먹어봐도 되나요?"
"으, 응!

뤼에르가 마치 처음 선물을 받아 두근거리는 마음을 못 참고서 선물을 뜯는 아이처럼 베일에게서 받은 초콜릿의 포장지를 뜯고 상자를 열어 그대로 초콜릿 한 조각을 입 안에 넣었다. 미소를 가지고서 초콜릿을 먹었던 뤼에르의 표정은 처음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이었으나 점점 다시 미소를 되찾고, 이윽고 입 안에서 초콜릿이 전부 녹아 목구멍 너머로 흘러 들어갔을 때는 베일의 손을 더욱 강하게 잡으면서 말을 꺼냈다.

"정말 달고 맛있어요!"

고마워요 베일. 뤼에르는 정말로 기쁜 듯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 미소와 말에 겨우 안심한 베일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눈앞에 들어온 초콜릿을 보며 놀라 말했다.

"이건 왜?"
"베일도 같이 먹어요. 맛있는 건 함께 먹으면 더 맛있어진다고 들었거든요."
"음..., 응. 언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매운맛을 선호하는 한 명과 어지간히 자극적인 맛이 아니면 느끼지 못하는 한 명을 데리고서 마지막 한 명이 고생 아닌 고생을 한 것은 베일의 마음속에 굳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두 명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언니의 이 미소를 보지 못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 베일은 마음속으로 두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남기며 뤼에르가 건낸 베일 본인과 형제 두 명이 합쳐서 만든 초콜릿을 입에 물었다.

전혀 맵지 않고 달콤한 것이 안심되면서도 조금은 베일의 혀에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이렇기에 뤼에르는 맛있게 받아들여준 거겠지. 베일은 그렇게 생각하며 뤼에르에게 잡힌 자신의 손에 힘을 더욱 넣어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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