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그아샤 Regasha

[레그아샤] 데드 웨이트

ⓒX(@archaicmalefice) 님 커미션

* 본 글은 레그아샤의 (생존if) 1991년 서사를 기반하여, 레귤러스 블랙이 살아돌아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 ⓒX(@archaicmalefice) 님 커미션 입니다. 여러분 이 개쩌는 필력과 문체를 보세요. 소설 한 편 뚝딱-

데드 웨이트

ⓒX(@archaicmalefice) 님 CM

창조주가 축복한 안식일과 생일이 겹쳤다며 좋아할 사람은 많을 것이다. 일 년에 한번뿐인 기념일을 직장 같은 성가실 뿐인 것에 구애받지 않고 온전히 축하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주의 운 좋은 당첨자에게는 함께 생일을 보내고 싶은 사람도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ㅡ직전의 주장은 완전한 거짓은 아니나 반론의 여지가 있으므로 그것을 우선 밝히고 넘어가겠다. 사실 그는 이맘때가 되면 어떠한 '마가렛'과 보내던 생일을 그리워하며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주위에는 이 마가렛 뿐 아니라(그야 그녀는 영영 사라진 것이 아니었으므로) 빠짐없이 편지와 선물을 보내는 '자넷', 그리고 얼마나 만류하더라도 마가렛과 함께 굽던 전통 있는 생일 케이크를 올해도 완벽하게 구워내겠다며 팔을 걷어붙이는 '사라'가 있었으므로, '아이샤 트와일라잇이 생일을 홀로 보냈다'고 진술하는 것은 과히 가혹한 처사일 것이다. '홀로'와 '외로이'에 다소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이 날의 영예로운 주인공이자 작고 조용한 생일 파티가(초대 명단은 없었다) 이루어지는 저택의 주인은 케이크 조각과 차를 옆에 두고 아늑한 거실에서 휴게를 즐기고 있었다. 바깥은 겨울 밤의 가혹한 통치 아래 있었으나 두꺼운 커튼이 폭군의 진격을 든든히 저지했다. 그러므로 램프 빛이 은은하게 밝히던 방을 순간 환하게 타오르게 만든 눈부신 불꽃 역시 바깥의 아무도, 운 좋은 자들은 모두 숨어 텅 빈 컴컴한 거리를 소란스레 휠쓸고 지나가는 동장군 좋병도 목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설령 발각되었더라도, 만군을 끌고 와도 그 불길을 꺼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저택의 주인은 코앞에서 별안간 화염에 휠싸인 탁자에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책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마치 마법처럼 손바닥에 나타난 나무 막대기를 접싸게 들어 올렸는데(불을 끄기 위해 꺼낸 것인지 키우기 위해 꺼낸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가 그것을 (추측하건데) 불에 던져 넣기 전에 형체를 쉼 없이 바꾸며 타오르던 불이 장엄한 선홍빛의 큰 새로 변했다. 놀랍게도 그는 이 기현상에 까무러치지 않고, 오히려 아는 새인 듯 막대기를 쥔 팔을 내렸다. 심지어 다소 긴가민가하며 그것을 이름으로 부르기까지 했다.

"퍽스?"

그러나 주조는 불린 이름에 달리 반응을 보이지 않고(그야 새에게 대답을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그게 불사조더라도) 그를 도도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하나도 그을리지 않은 생일 케이크를 한 입 쪼아 먹더니 잠시 깃털을 고르고는 나타날 때처럼 불길에 휠싸여 사라졌다. 이번에는 그 자리를 예스러운 양피지 쪽지가 차지했으므로,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그것을 집어 펼쳤다. 덤블도어의 자존심 높다는 애완조가 직접 전달한 만큼 부엉이로 보낼 수 없는 아주 긴급하거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다.

쪽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오늘은 별이 밝은 날이네. 머글 과자 중에 <밀키 웨이>라는 게 있다는 거 알고 있었나? 트와일라잇 양이 좋아할 것 같아 쪽지를 보내네. 생일을 축하하고 싶었을 뿐이니 답신은 필요 없네.'

‘The stars are bright tonight. Did you know, there is a muggle candy called <Milky Way)?

Thought you would like to know. No need to send an answer back. Just wanted to wish you 6 happy birthday.'

그날 저녁에는 정말로 예상대로 흘러가는 일이 없었다! 어설픈 줄 바꿈에 뚱딴지같은 내용만 들어있는 곤란한 축하 편지는 대체 뭔가. '오늘은 별이 밝은 날이네'라니, 켄타로우스가 썼다고 해도 믿을 만 했다. 갑자기 머글 세계의 초콜릿 바는 왜 등장하는지. 그분(그야 불사조를 전서구로 부릴 수 있는 발신인은 정해져 있었으므로)이 세간에 미치광이(혹은 괴짜, 어느 쪽이든 애정과 존경이 담긴)라 불리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장난 편지를 보낼 인사는 아니었다. 그는 은사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쪽지를 다시 곰곰이 읽어 보았다. 별이 밝은 날, 불사조가 전달한 쪽지를 처음 눈에 담았을 때 느껴진 위화감. 세 번째 줄을 제외한 각 줄의 첫 단어의 소문자로 적힌 내용을 연결하면 '그가 돌아왔어'가 된다. 성의 없이 숨겨진 참뜻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가볍지 않은 푹신한 의자가 뒤로 쿠당탕 넘어갔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손끝에서 팔랑거리며 떨어진 양피지 조각은 탁자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재가 되나 그는 그것을 지켜보지 않고 실내에서 입는 얇은 카디건 위에 겨울용 외투를 빠르게 결친다.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것처럼 중얼거리고 사라 나 금방 올게- 무언가에 홀린 듯 황급히 문을 나선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Destination 목적지, Determination 의지, Deliberation 신중함. 그는 이제 이것들을 떠올리지 않고도 순간이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순간이동의 3요소에 새로운 D- Desire 갈망을 더해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그러지 않으면 신체분리 사고를 면하지 못할 것 같았다. 튜브에 곽 끼어 압축되는 기묘한 느낌이 몇 초 지나가고, 그는 바람이 쌩쌩 부는 호그스미드의 인적 없는 골목에서 눈을 떴다. 불과 몇 블록 옆에서는 즐겁게 떠드는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당장은 아는 얼굴을 그다지 마주치고 싶지 않았으며 모교 방문의 이유를 뭐라 변명해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그는 스스로에게 인식 저해 마법을 걸고 부츠 신은 발을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옮기다가, 금세 빨개진 손을 코트 주머니에집어넣고 덜덜 떨리는 턱을 당겨 고개를 움츠려야 했다. 그러나 얇은 카디건과 코트가 추위를 충분히 막아주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추론한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의 방문은 최대한 비밀스럽게 진행되어야 했다. '그는 어째서 자신을', '왜 지금' 같이 불안하게 뻗어나가는 산만한 생각을 애써 다스리려 했다.

그는 교문의 날개 달린 멧돼지 동상들을 지나고, 고성의 한적한 복도를 지나 인적 없는 계단을 오르면서 끊임없이 그날 저녁 일어난 일과 자신을 여기까지 이끈 편지, 그리고 스스로의 판단을 의심했다. '이건 꿈이거나, 장난이야. 내가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거나.' 그는 급기야 이렇게 생각했다. '답장을 보낼 필요는 없다고 하셨잖아. 그건 정말로 생일 축하 편지였고, 내가 그분의 의도를 착각하고 찾아가서 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어느새 교장실 탑을 지키는 이무기상 앞에 도달한 그는 제자리에서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한 채 초조하게 고민했다. 그 내적 대치 상태를 끊은 것은 그를 기다리다 못한 문지기였다.

'봐, 이봐!"

아이샤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굵은 목소리의 근원은 근엄한 표정의 험상굿게 생긴(아주 크고 못생긴) 이무기상이었다.

"들어갈 거야, 말 거야?" 그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이무기상은 성질 급한 듯(그것은 이무기상의성격에 대한 지표보다는 그가 맡은 일에 충실하다는 뜻이었지만), "들어갈 거라면 암호를 대고, 용건이 없다면 썩 꺼져."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제 그는 기로에 놓여있었다. 그는 그날 저녁에 일어난 일련의 기묘한 일들을 모른 체 하고 애초에 이곳에 오지않은 척 돌아가 잠에 들 수도, 혹은 낭떠러지일지도 모르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문 너머에 공간의 부재와 같은.―그것이 불확정성을 지니기에 근원적인―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대상의 가능성을 느낀 것은 본능적 직감에 가까웠다. 혹은 그 공간이야말로 그러한 공포에서 비롯하여 생긴 것일지도 몰랐다). 불확정성의 세계에서 약속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약속한다, 이것은 본제와 필연적 관련을 가진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제아무리 멀리 떨어진 추운 사지라도 신의 굽어 살피는 시선 아래 있다. 지금의 고통은 외면의 증거가 아니니, 당장 배부르지 못한 자들은 탐하지 않는 대가로 약속된 땅에서 보상받으리라. 그러니 게이트 옆쪽으로 차례대로 줄을 서시길. 그러나 신에게는 이행 의무 따위도 그에게 감히 그것을 부여할 수 있는 자도 없다.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는 이 세계에서 확실한 것은 그것의 불확정성뿐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지와 미지의 수직선에서 진리, 규칙성과 가능성을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이며, 어설픈 십일 세 마법사의 지팡이 한 획에 무너지는 과학의 역사가 규명한 자연의 법칙들이다. 세계가 볼확실성을 띠기에 인류는 본능적으로 확실성을 찾고자 하며 그러한 세계에서 우리가 약속이라는 개념에 매료되는 것은 자연하다. 그러나 약속의 본질은 계약이다. 이행을 보증할 수 없는, 즉 위반의 대가가 없는 계약은 효력이 없는 것과 다름없다. 약속의 무게를 측량한다면 그것은 위약금의 무게와 동일할 것이나, 그것을 지불하고자 하는 자들이 존재하기에 위약금이라는 장치도 궁극적으로 약속을 보증으로 만들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모두 보증 없이 선택을 내리는 결정 주체이다. 이것은 손익을 측량하기 어려운 계약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렇다면 아이샤 트와일라잇은 어째서 ‘그’의 약속을 받아들였는가? 그것은 결코 관대함이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심장에 달라붙은 부끄러움을 씻어내고자 소녀를 등지고 사지로 간 소년은 귀환의 보증이 없음에도 그것을 확언한다. 매 숨이 마지막일 수 있음을 알기에 마음을 남기고 떠난, 앎에도 돌아오리라 약속한 소년의 결정은 언뜻 모순으로 보인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소녀에게 곱절의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수많은 거울을 비춰 생긴 만상 중 소년이 약속을 밸지 않은 세계가 설령 존재하더라도(이 가정이 얼마나 황당무계하며 비현실적인지 바로 후술할 것이다) 소녀가 처음 사랑을 믿어보려 한 그 시간에서 나아갈 수 있었을까? 소녀의 회복탄력성이 부족하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저, 약속이 없었다면 '아이샤와 그' 혹은 '그와 아이샤'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귀환은 뒤늦게 추가된 새로운 조항도, 무책임하거나 무게 없는 약속도 아니다. 이렇기에 위약금 없는 계약이 족쇄가 되어 두 사람을 잇는다.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데드웨이트. 그 무게는 다른 쪽을 달고서는 서로를 반대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없게 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대가가 그 사람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영원히 걸음을 떼지 못해도 좋아. 그렇기에 채무자는 발생하지 않는다. 또 남겨지고 싶지 않아, 헛된 희망을 품고 싶지 않아, 올렸다가 떨어트려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한쪽이 다시 나아가려 한다면―소년이 약속을 이행하려 한다면 소녀는 상실감과 두려움을 넘어서라도 그의 역할을 다해야 했다. 그것이 그들의 약속, 족쇄의 무게였다. 그는 증명할 기회를 달라고 하였다. 이제 소녀가 그것을 제공할 차례였다.

 "……<밀키 웨이>."

조용한 목소리로 암호를 됐다. (그야 당연히, 암호가 될 만한 것은 그것뿐이었으니.)

열린 문 너며에는 멋진 나뭇결의 난간이 달린 자동으로 움직이는 소라모양 계단이 있었는데 그것은 올라서기 전에도 토할 것 같은 울렁거리는 멀미를 불러일으켰으므로 그는 홀륭한 만듦새에 감탄할 수조차 없었다. 아주 잠시 머뭇거리다 올라탄 계단은 순식간에 그를 사무실 문 앞으로 데려간다. 그는 나무문에 노크 세 번, 죽음을 부르고 불운을 쫓는 노크 세 번으로 존재를 알렸다. 잠시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했다. 외출 종이신가 봐. 약간의 안도와 씁쌀함에 돌아서려던 차, 작은 마찰음과 함께 문은 저절로 서서히 열리며 틈 사이로 따뜻한 불빛을 드리웠다. 빛나는 녹인 금, 마치 펠릭스 펠릭시스 같은 커진 눈은 무언가를 찾는다. 덤블도어, 그리고……

그는 주머니 속 지팡이를 짐 손에 힘을 준다. 알버스 덤블도어가 모방자가 아니라고 판단한 인물을―아니, 어쩌면 바로 그것을 판별하기 위해 자신을 부른 것일 수도 있었다. 존경받는 스승이 그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하지 않으리라 믿었지만―만약 모방자가 아니라면 그께 자신은 어쩔 것이지? 그러나 세계의 모든 것들이 그렇듯 사고를 기다리지 않고 흔들리는 눈동자 너머로 문은 열린다. 넓어진 시야각에 은빛 로브를 두른 인영과 느리게 뒤를 도는 검은 뒤통수가 뇌에 입력된다. 가늘게 들이킨 숨이 끝나지 않으며 시간이 저속으로 지나간다. 축축하고 차가운, 균류로 드글거리는 밀도 높은 공기가 끈적거리는 양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다. 약간의 악취에 어지러운 머리를 작게 흔들고 막이 끼인 듯 흐려진 눈을 깜박인다. 감겼다 뜨이는 눈꺼풀 안쪽에서 검은 인영이 한 걸음 다가온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어렴풋한 물비린내의 원인임을 알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한 걸음 주춤, 뒤로 물러서면 누렇게 해진 소매 끝에 달린 창백한 손이 그를 향해 뻗어지다가 거두어진 것 같다. 귀가 먹먹했다.

―양.

"트와일라잇 양. 어서 오게. 괜참다면 문을 닫아주지 않겠나? 나이가 드니 작은 외풍에도 무릎이 시리구나." 온화한 목소리가 귀에 닿는다.

그제야 점멸하는 시야에 따뜻한 난색 인테리어, 똑딱거리는 소리를 내고 이따금 증기를 내뽐는 장치들이 인지된다. 침을 꿀꺽 삼킨다. 먹먹했던 귀가 뚫리고 차갑고 습한 공기 대신 타닥거리는 벽난로의 따끈한 온기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문을 닫았다. 중후하고 무거워 보이는 문은 소리 없이 닫혔다. 재빠르게 눈을 움직여 사무실 안을 둘러보지만 방에는 덤블도어와 그 둘뿐이었다.

"덤블도어 교수님-" 그는 고풍스러운 사무 책상 뒤에 앉은 은사를 향해 말을 떴으나 노인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잠시 멈줬다.

"트와일라잇 양, 오랜만이네. 묻고 싶은 게 많을 테지. 하지만 먼저 차를 한 잔 들지 않겠나."

그는 손바닥으로 사무실 한 편의 푹신한 안락의자 한 쌍과 작은 티 테이블(응접세트)을 가리켰다. 낮은 탁자 위에는 따뜻한 김을 내는 노란색 들꽃무늬 티 세트와 다과가 놓여있었다.

"생일 축하를 즐기고 있었을 텐데 갑자기 불러내어 미안하네. 나름의 비밀유지를 필요로 하는 사안이라 그러네."

아이샤는 그의 찾잔에 향긋한 카밀레 향이 나는 차를 따르고 눈을 친절하게 반짝이는 덤블도어의 배려에 용기를 내어 따뜻한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그것은 뱃속으로 내려가며 그녀의 속을 따뜻하게 데웠고 아이샤는 조금 침착해진 마음으로 노인의 말을 기다릴 수 있었다.

덤블도어는 반달 모양 안경 뒤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푸른 눈동자에 잠시 고통의 파편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실종되었던 블랙 군이 발건되었네. 그가 가장 먼저 자네와 대면할 것을 요청하더군."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은빛 로브자락이 바닥에 쓸렸다. 심장에 납덩이가 차 바닥으로 떨어진 기분을 느꼈다.

"경위는 나보다 블랙 군에게 듣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네." 노인은 금색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옛 제자의 무언의 요청을 등지고 벽난로에 반짝이는 가루를 한 줌 뿌렸다.

"블랙 군, 뒤의 설명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덤블도어는 그 말을 남기고 벽난로 안으로 사라졌다. 방 안에 남겨진 것은 횟대에 앉아 털을 고르기 시작한 퍽스와 아이샤 둘 뿐이었다. 역대 교장들의 초상화마저 그날따라 모두 비어있었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느낀 이질적인 공기가 다시 폐를 채웠다. 존재할 리 없는 찬 열 손가락이 목을 감싸 쥔다. 혹은 얼어붙은 부속지가 기도를 타고 꿈질거리며 빠져나오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품신한 안락의자에 몸이 달라붙은 듯 앉은 자세로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이샤.」

「아샤.」

「―내 햇살.」

"부디 나를 봐줘요."

다만 그 관념적 말이 눈에 입력되는지, 귀에 입력되는지, 머릿속으로 떠올린 것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고도의 희열은 추락의 고통을 동반하기에 있다. 그러나 그는 올렸다가 떨어트려지는 것이 싫었다. 높이 올라갈수록 커지는 추락의 고통과 중력, 지면에 부뒷힐 몸의 무게를 두려워했다. 스코틀랜드 시골 고성의 천문탑에서는 밤하늘의 별이 특히 잘 보였다. 소녀는 별을 구경하자며 자신의 손을 이끌고 가장 높은 탑의 지붕으로 이어지는 좁은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손길의 다정함에 몸을 맡겼었다. 조금 더 가까이서 별을 보기 위해, 별빛에 더 가까워지기 위해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탑을 오른 그는 지면이 가까워질 때면 눈을 질끈 감고 온몸으로 느껴질 욱신거리는 아픔과 턱, 막히는 숨을 기다렸다.

만약 이름을 떠올리는 것조차 힘든 그가 약속하지 않았더라면 그를 포기할 수 있었을까. 그를 원망할 수 있었을까? 지금 기대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미풍에도 바르르 떠는 여린 꽃잎이 느긋하게 찌는 부드러운 오후 햇살은 폭렬하는 불덩이 거인의 어루만지는 손길인가? 혹은 연약한 풀잎을 차마 만질 수 없어 멀리서 뻗어보기만 하는 손의 그림자인가. 낮의 태양빛은 인간의 과오를 훤히 드러내나 정작 스스로는 광풍을 내뿜어 인간들이 그것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게 한다. 그 빛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생명을 존재하게 하는 자비로운 휘광을 내세운 뒤로 욕망(낯)을 숨기는 기만을 고발한다. 행성을 끌어 모아 태양계를 지탱하는 거대한 중력을 지니면서 욕망하지 않는다는 항성에게 욕망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조심스러운 거인을 비난할 수 없다. 꽃잎이 느긋하게 햇살을 필 수 있는 것은 거인이 자신을 단속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태양 근처에만 가도 섬유질의 꽃잎 같은 것은 타버릴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에게 욕심을 낼 것을 촉구한다. 가진 것을 양보할 마음으로 누리고, 상치받아 움츠러들고 숨는 것은 죄스러움이 아닌 지키고자 하는 송고한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소극적인 태도로는 지킬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아샤, 내가 왔어요. 내가 당신을 봐도 될까요?"

이번에는 등 뒤에서 울음기가 섞인 것 같은 젖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목소리에서 형체를 느낄 수 없었다. 그것에게는 공기를 울리는 통 역할을 하는 것(사람에게는 가슴과 배가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세부적인 사실이 그녀에게 공포를 불러일으겼으나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그것이 자신과 현실을 붙들어두는 유일한 닻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이 원형의 사무실마저 환각일 수도 있었다. 등 뒤에 서있는 것이 무엇일지 두려워―혹은 목소리에 정말로 형체가 결여되어있는지 확인받는 것이 두려워 감히 뒤돌아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감상을 속절없이 느끼는 동안 병적이기까지 한 어두운 호기심이 뇌 한 구석을 간질였다. 뒤를 보고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아샤'는 차마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뜨거운 울음이 목구멍에 차올라 있어 대답하더라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대신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을 뒤로 보냈다. 그리고 그곳에는, 잠시 아무것도 없다가 조심스레, 작고 여린 꽃잎을 쓰다듬는 듯 천천히 그것을 마주잡는 감촉이 있었다. 그녀는 차가운 온도에 홈칫했지만 손을 거두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존재'와 아주 오랫동안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고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 앉아있었다. '아샤'가 목소리의 물음에 답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답해버리면 목소리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봐. 그리고 끝내,

―"응."

아이샤는 긴 속눈썹을 깜박여 맺힌 눈물을 품으로 떨어트렸다. 그러나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순간과 눈을 맞추었을 때, 그녀는 은백색으로 밝게 빛나는 항성에 눈이 부셔 그것을 차마 직시할 수 없었다.

"어서 와."

"다녀왔어요."

그의 시간은 마치 마지막으로 소녀를 봤을 때에서 멈춘 것 같았다.

그러나 소녀의 시간도 이제 막 다시 흐르기 시작했을 뿐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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