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우] 댄스동아리 외전
고백 이후 둘의 관계는 당연하게도 연인으로 발전했다. 솔직히 지훈은 놀랐다. 설마 순영이 자신에게 고백할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훈 자신만의 외로운 짝사랑인 줄 알았는데... 솔직히 꿈같았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순영이 고백했을 때 지훈은 너무 놀라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말이다. 순영은 목까지 빨개진 지훈을 보고 긍정의 신호라는 걸 알아차리고 두 팔 벌려 껴안았다. 순영은 지훈을 품에 안고서 말했다.
“지훈아 정말로 좋아해...”
“너도 나 좋아해...?”
지훈은 이제서야 몸이 조금씩 움직여지기 시작했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영은 그 작은 움직임을 보고 있는 힘껏 지훈을 끌어안았다. 어정쩡하게 있던 지훈의 팔도 어느 순간 순영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순영은 끌어안던 팔을 지훈의 허리에 가볍게 감쌌다. 그러고는 지훈의 눈을 응시했다.
“지훈아. 너도 말해주면 안돼?”
“...”
“나 좋아한다고 말해주라 응?”
“...좋아해”
“권순영. 좋아한다고.”
지훈은 아예 못을 박아버리려고 권순영 세 글자 이름을 다 말하며 고백했다. 순영은 얼굴을 붉히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여태 본 권순영 웃는 얼굴 중에 가장 밝고 행복해보였다. 저 뒤에 달 보다도. 그리고 그 얼굴을 지훈의 고백으로 보는 것이었다. 물론 지훈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그 얼굴은 순영이 오래토록 기억하게 될 것이다.
둘이 회식 장소로 돌아오자 부원들이 반겼다. 정확히는 아이스크림을. 다행히 날씨가 조금 서늘했던 탓에 녹지 않았다. 녹았으면 큰 야유를 받았겠지. 그리고 부원들 모르게 둘만 조용히 사라졌다. 아무래도 둘만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방학이 다가왔다. 전교권을 유지하던 지훈은 여름방학 계획을 착실하게 세웠다. 그런 지훈을 따라 순영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순영은 지훈과 최대한 붙어 다니고 싶었기에 학원도 옮기고 자습도 시작했다. 지훈은 그런 순영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기특했다. 저 정도로 지훈을 좋아하는데 왜 몰랐을까 싶었다. 학기 말의 학교는 어수선했다. 지훈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전교권 유지 중인 우등생이어도 노는 걸 좋아했다. 어떤 학생이 노는 걸 싫어할까. 방학식 날 학교가 일찍 마쳤다. 역시나 순영은 지훈이 반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훈은 그런 순영을 보고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다리 다 낫더니 빨리도 오네?”
“우리 지훈이 보고 싶어서.”
누가 들으면 어쩌려는 건지 낯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그래도 지훈은 순영의 자제력에 감사했다. 저번에 야자 끝나고 집 가려고 나오는데 교문 앞에 권순영이 있는 것이었다. 지훈은 한걸음에 순영에게 달려갔다.
“바로 집 안가고 뭐했어.”
“너 나올 거 같아서 기다렸지.”
자습을 하느라 진을 뺀 지훈은 순영을 보자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하여간 집 가ㅈ...”
지훈이 순영을 이끌고 가려는 순간 쪽 하는 소리가 지훈의 볼에서 났다. 지훈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순영을 바라보며 입만 뻐끔거렸다.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는 순영을 향해 말하려는데
“너 지금 뭐하는...”
이번엔 입술에 쪽 하는 소리가 났다. 학생들이 교문밖으로 다 나가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전교에 소문이 쫙 퍼질 뻔 했다. 지훈은 불타는 고구마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순영은 그런 지훈이 마냥 귀여운지 꼭 껴안고 이마에 쪽쪽거렸다. 그 뒤로 지훈은 학교에서 스킨십 금지 선언을 했다. 권순영의 억장이 무너진 듯 했지만 학교에서의 체면을 지키는 것도 중요했다. 순영도 그 부분은 어느 정도는 인정했고 지훈이 곤란해지는 건 싫었기에 지훈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스킨십 금지령이 없었으면 낯부끄러운 소리와 함께 뽀뽀도 당했을 것이다. 권순영이 이 정도 자제력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무튼 모처럼 방학식이기도 하고 사랑스러운 애인이 있으니 오늘 하루 정도는 놀아도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지훈이었다.
“순영아.”
“응 자기야.”
“오늘 학원 쨀래?”
순영은 지훈 답지 않은 말에 놀라 지훈을 쳐다보았다. 지훈은 잘못들은 말이 아니라는 제스쳐를 하곤 다시 말했다.
“우리 데이트 한 번은 해봐야지. 여태 못해봤잖아.”
아무래도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인지라 학교, 학원, 자습이 일상이었다. 같이 붙어 다니는 건 징그러울 정도로 많이 붙어 다녔지만 둘이 제대로 놀러간 적은 없었다. 순영의 대답은 당연히 Yes였다. 지훈의 입에서 학원 째고 데이트 하자는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했기에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둘은 곧장 뭐하고 놀지 검색했다. 역시 대학로에 가는 게 나으려나 싶어서 무작정 지하철을 타고 대학로로 향했다. 학교가 아니니 자유롭게 손도 잡고 누가 봐도 깨가 쏟아지는 커플이었다. 대학로에 도착해서 길거리에 펼쳐진 플리마켓을 구경하고, 쇼핑도 하고, 농구 내기를 했던 오락실도 가보고, 인형도 뽑아보고, 조금 출출해져서 길거리 군것질도 하고, 카페도 갔다. 카페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조금 오래 걸어다닌 탓에 둘은 약간 피로했다. 느긋하게 앉아서 수다를 떨 때가 온 것이었다. 순영은 지훈을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지훈아 나 궁금한 거 있는데.”
“응.”
“언제부터 나 좋아한 거야?”
지훈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마시던 음료를 뿜을 뻔했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묻고 그래;;”
“아니 그냥 궁금해서... 솔직히 네가 날 좋아할 거라곤 생각을 못했거든..”
그건 지훈도 마찬가지였다. 지훈만의 외로운 짝사랑인 줄 알았다. 그래서 고백 할 생각도 없었고 혼자만 간직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권순영이 대뜸 농구 내기 소원권을 걸고 고백을 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더라 권순영을 좋아하기 시작한 게...
“지훈아?”
지훈이 너무 골똘히 생각하고 있자 순영이 지훈을 불렀다.
“생각 안 나면 대답 안해도 돼. 너 곤란하라고 물어본 거 아니야.”
“아냐 생각났어.”
“응?”
“이거 생각해보니까 너 때문이잖아.”
“어..?”
“네가 먼저 나한테 예쁘다 예쁘다 거리니까...!”
“아 그랬지 참.”
“아 그랬지 참???”
“그치만 지훈이 정말 예뻤는걸... 지금은 더 예쁘고.”
“그래 내가 너의 그 아무 의도 없는 플러팅에 당한거지.”
지훈은 모두에게 다정하던 순영을 떠올렸다.
“너 도대체 그런 식으로 몇이나 꼬셨냐?”
“꼬시다니 그런 적 없는데ㅜㅜ”
“에휴 됐다.”
“그래도 지훈이 꼬신 건 살면서 가장 잘한 일 같아.”
“얼씨구 말은 잘해요.”
지훈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되물었다.
“그럼 너는?”
“나?”
“넌 별 생각 없이 나한테 예쁘다고 한 거야?”
“음...”
“네가 그럼 그렇지.”
“그치만 네가 예쁜 건 사실인 걸.”
“예쁘다니...”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하지 않은 얘기다.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너 첫인상부터가 호감이었어. 처음 봤을 때부터 예뻤거든.”
“뭐야. 첫 눈에 반한거야?”
“아마... 그런가봐.”
순영은 얘기하다가 깨달은 듯 했다. 지훈을 처음 봤을 때 기억을 되짚어보니 지훈이 너무 예쁘고 귀엽게 기억되어있었다. 물론 지훈은 예쁘다. 아니 그렇지만 첫 만남 때 기억의 지훈은 너무 예뻤다.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는 건가보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길. 순영은 기어코 지훈을 데려다주겠다며 지훈을 따라 나섰다. 해가 슬슬 져가면서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이었다. 순영은 지훈과 나란히 걷다가 은근슬쩍 지훈의 손을 잡았다.
“? 누가 보면 어떡해.”
“어차피 저녁이고 어둡잖아.”
“그래도 동네인데...”
“힝... 알겠어.”
순영이 아쉬워하면서 손을 스르륵 놓자 지훈이 덥썩 잡았다.
“...그냥 잡아.”
“!”
순영은 순식간에 싱글벙글해져서 지훈의 손을 꼭 잡았다. 지훈은 그래도 모처럼 데이트였는데 데이트 하는 동안 손 한 번 못 잡은 게 순간 신경 쓰였던 것이다. 지훈 성격 상 남 눈치를 조금 보는 편이라 가벼운 스킨십조차 잘 하지 못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기분이 좋은 순영이었다. 순영은 그저 지훈이 옆에 있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듯 했다. 지훈이 집 근처로 다다르자 순영은 아쉬운지 맞잡은 손을 쉽게 놔주지 않았다.
“집에 안 가려고?”
“그치만 아쉬운 걸...”
순영은 울상을 지으며 말하다가 주변에 놀이터가 있는 걸 발견하고는
“...지훈아 우리 잠깐 저기서 놀면 안 돼?”
라고 말했다. 지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순영의 손을 이끌어 놀이터로 향했다.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아무도 없는 휑한 놀이터였다. 둘은 자연스럽게 그네에 앉았다.
“그네 타는 거 오랜만이네.”
“그러게.”
“지훈아 내가 밀어줄까?”
“그럴 필요는 없는데... 어 야?!”
순영은 지훈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네에서 내려와 지훈의 그네를 밀기 시작했다. 지훈은 느슨하게 잡고 있던 양 쪽 줄을 꽉 잡았다. 둘은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 마냥 웃으며 놀기 시작했다. 그네 하나만으로도 동심을 찾은 기분을 느끼는 둘이었다. 둘의 모습은 마치 청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힘차게 움직이던 그네의 줄이 점차 멈췄다. 순영은 지훈의 앞에 가서 섰다.
“어때 지훈아 재밌었지.”
“응...”
순영은 지훈의 얼굴을 살며시 두 손으로 잡았다.
“역시 너무 예쁘다 지훈아.”
“...”
지훈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을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는 저 두 눈과 얼굴에 닿아있는 손이 감당하기 힘들만큼이나 좋았다.
“그... 권순ㅇ...”
지훈의 입술에 부드럽고 말캉한 게 닿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지훈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지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순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지훈을 바라봤다.
“?!”
지훈의 입 안에 따뜻한 무언가가 들어왔다. 지훈은 너무 놀라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눈 앞에 자신을 가늘게 바라보는 순영의 눈이 보였다. 지훈은 다시 눈을 감았다.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듯해서 순영에게 맡겨졌다. 순영의 혀는 지훈의 입천장부터 치열까지 천천히 훑었다. 지훈은 처음 느껴보는 감촉과 귓가에 들려오는 끈적한 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더불어 점점 숨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순영은 지훈의 상태를 눈치 챘는지 지훈에게서 서서히 떨어져 나왔다.
“흐하... 하....”
지훈은 목까지 벌개져서 거친 숨을 쉬었다. 얇은 실이 생긴 채로. 순영은 지훈의 얼굴을 다시 감쌌다. 그러고는 지훈의 입술을 살며시 핥았다. 지훈은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지훈의 입술이 삼켜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순영은 지훈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고 씩 웃으며 숨을 고르는 지훈을 바라봤다.
“하아... 권순영 너...”
“우리 지훈이 좋았어?”
“...”
빌어먹을 솔직히 안 좋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좋아하는 애랑 그런 짓을 한 건데 싫을 리가 있나. 그저 권순영 저 놈이 생각보다 위험한 녀석이라는 것만 알았다. 지훈이 무어라 따지기라도 해야 할 거 같아서 그네에서 일어나는데 대뜸 권순영 품에 안겨버렸다. 그러고는 지훈에게 하는 말이
“지훈아 좋아해...”
“...”
“많이 좋아해.”
“...응”
“나 미워하지 말아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네. 누가 누굴 미워해. 이래도 좋아서 미치겠는데.
“지훈아 너도 나 좋아해?”
“...응 좋아해.”
“사랑해 지훈아.”
순영은 마치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처럼 지훈을 바라봤다. 지훈은 순영의 말에 화답하려는 듯 그대로 순에게 돌진 했다.
“쪽...”
지훈은 순영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순영은 놀란 눈으로 지훈을 쳐다보다가 지훈의 부드러운 볼에 입을 맞췄다.(지훈이 먼저 스킨십을 하는 일이 거의 없는데다 심지어 입맞춤이었다.) 맘 같아선 다시 한 번 입술을 덮쳐버리고 싶었지만 통통하게 부어오른 지훈의 입술을 보니 괜히 미안해져서 볼 뽀뽀로 만족하기로 했다.
“지훈아 다음엔 집에서 데이트 할래...?”
“...무슨 짓을 더 하려고”
“글쎄~”
순영은 능글거리면서 대답했다. 아무리 봐도 속이 시꺼멓다. 지훈은 무슨 일이 있어도 홈 데이트는 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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