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y day
런던 바닥 한 복판에서 류노스케 생각하는 아소기. 짧습니다.
※ 대역재 2-5 이후 시점이지만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 제가 쓰는 대역재 글은 항상 논씨피를 상정하고 있으나 씨피 요소가 느껴진다면 그것은 제가 글을 못 쓰기 때문이겠죠…🙄
Rainy day
"우산을 챙겨야 하나."
아소기 카즈마는 아침부터 꾸물거리는 구름의 움직임을 창 밖으로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영국에서 지내면서 가장 종잡을 수 없는 것은 다름아닌 날씨다. 런던 사람들이 인사 대신 날씨 이야기를 달고 사는 이유를 본국에서 영어를 배울 때엔 짐작도 못 했는데, 영국 생활을 하게 된 다음부터 온 몸으로 깨달아 버렸다. 우산을 갖고 나가면 바로 그치는 비에 속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냥 외출하면 어김없이 흩뿌리는 물방울. 내리는 비의 양은 우산을 쓰지 않기엔 많고, 굳이 우산을 꺼내 쓰기엔 적다. 매사 명쾌하고 분명한 결론을 선호하는 아소기 카즈마에게 런던의 애매모호한 날씨는 올드 베일리의 집무실에서 얼굴을 구기며 '흐음...' 만 연발하는 그의 상사 만큼이나 짜증을 유발하는 존재였다.
"아직은 비가 안 오니 그냥 가야겠군. 일본 남아가 고작 가랑비 따위에 굴복할 수는 없지."
쓰리 버튼 베스트 위에 짙은 갈색 재킷을 걸치고 베레모를 눌러 쓴 아소기는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대충 가다듬은 후 하숙집의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거처에서 올드 베일리까지는 걸어서 30분이다. 운동 삼아 가볍게 오갈 만한 거리지만, 비가 오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나가는 마차 바퀴에서 사정없이 튀는 흙탕물, 스모그의 오염 물질을 끌어안아 축축하고 꿉꿉한 냄새를 풍기는 빗줄기 사이로 유령처럼 묵묵히 오가는 검은 사람들, 눈 앞에 펼쳐지는 잿빛의 세계는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10분 정도 걸어온 아소기는 마침내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을 느끼고 먹구름처럼 인상을 구겼다. 우산을 안 가져오니 기어코 비를 뿌리는 저주받을 날씨다. 언제까지 영국에서 지낼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아마 일본으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도 이 빌어먹을 날씨에는 익숙해지지 못할 것이다.
- 하하하! 런던에서 가장 끔찍한 것 세 가지는 음식, 스모그, 날씨라네.
며칠 전 류노스케의 편지를 찾으러 베이커가 221번지에 갔던 날에도 갑자기 비가 내렸다. 명탐정 씨는 물에 반쯤 빠진 생쥐 꼴로 나타난 아소기에게 일본에서 온 편지 뭉치를 건네 주며 호쾌하게 웃었다. 류노스케와 스사토의 편지를 받아 든 아소기는 입을 일자로 다물고 두툼한 편지 봉투만 바라보았다. 서예 연습을 아무리 시켜도 변함 없이 삐뚤빼뚤한 류노스케의 필체와 동글동글하고 단아한 스사토의 글씨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 일으켰다. 반가운 마음에 눈가의 긴장이 조금 풀어졌던 걸까. 좀처럼 그에게 말을 거는 일이 없는 아이리스가 타올을 건네며 고개를 갸웃했다.
- 아소기 검사님, 일본 날씨는 여기와 달라? 나루호도 군과 스사토도 늘 런던 날씨를 싫어했거든.
- 으음... 다르다, 상당히. 비가 줄창 내리는 시기도 있지만 화창한 날도 많다. 그리고 안개가 훨씬 적게 끼지.
- 화창한 날? 안개 없는 날?? 우와, 보고 싶다.
- 그게 런던에서 제일 귀한 거라네.
금세 런던 날씨로 화제를 돌린 두 사람을 보며 아소기는 생각했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6월 말에 접어들었다. 지금쯤 에도에는 장맛비가 한창 내리고 있을 것이다. 류노스케와 스사토는 별 일 없이 잘 지내고 있을까.
- 촤아악
지나가던 마차가 튀기는 흙탕물을 능숙하게 피하며 현실로 돌아온 아소기는 제법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를 째려보다 재킷을 벗어 머리 위에 뒤집어썼다. 그리고 늘 우산을 까먹던 소중한 친구를 떠올렸다. 장마철에는 우산을 가지고 다니라고 잔소리를 해도 늘 '그러게, 네 말이 맞아. 그런데 또 잊어버렸어-' 라며 실없이 웃던 류노스케는 장대비를 맞아도 옷이 젖었다며 약간 난처해 할 뿐 좀처럼 짜증을 내는 일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용맹대학교 가쿠란을 벗어 '비 그만 맞고 안으로 들어 와.' 라고 말했던 쪽은 아소기였고, '미안, 또 신세를 지네.'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던 류노스케는 슬금슬금 아소기 옆으로 붙으며 오늘 소고기 전골은 자기가 사겠다며 빙그레 미소지었었는데.
- 그런데 아소기, 너도 우산 안 갖고 다니잖아?
- 시, 시끄럽다! 배고프니까 빨리 뛰어가자!
아침에 스사토가 챙겨주던 우산을 귀찮다고 물린 건 끝까지 비밀로 하기로 결심하고, 괜히 재촉하니까 푸슬푸슬 웃으며 아소기의 발과 보폭을 맞춰 부지런히 달린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도 햇살처럼 환히 빛났던 류노스케가 눈부셔, 아소기는 녀석을 따라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식당에 도착할 무렵에는 둘 다 흠뻑 비를 맞아 애써 몸을 가린 보람 따위는 없게 되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함께 있는 시간이 소중하고 행복해서 영영 끝나지 않길 바랬는데.
무채색의 세상 속에 가랑비가 흩날린다.
분주한 이국의 도시는 이방인의 존재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회색빛깔의 시간만을 흘려 보낸다. 불특정 다수가 일으키는 소음 속에 홀로 남은 아소기는 쓰게 웃었다.
'비는 오는데 우산도, 너도 내 곁에 없구나.'
문득 치미는 그리움을 곱게 쓴 편지처럼 접어 넣고, 아소기는 물결처럼 움직이는 군중을 따라 목적지를 향해 바쁜 발걸음을 옮겼다.
날씨가 꾸물꾸물해서 일찍 일어난 김에 끄적 끄적.
아소기 얘기는 제 경험담이 섞였는데… 영국 날씨보다 이상하고 예측 안되는 걸 겪어 본 기억이 없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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