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녀)재원] 안내를 시작합니다
대운동회때 발행한 배포본 회지 백업입니다
w. 김세포(@lookatmyTL)
표지 디자인 및 실물 책의 편집은 개거북(@ouiowencar) 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발행일자: 2024.07.28.
* 이 글은 카카오페이지 웹툰 ‘프로야구생존기’의 2차 창작물로써, 원작의 내용과 무관합니다.
* 본 작품의 사건과 장소는 실제와 일절 관계가 없는 허구이며 저자는 이를 옹호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습니다.
* 이 글은 15세 이상 관람가입니다(소재주의: 간접적인 살인 및 시체은닉 묘사 포함).
칠흑같이 까만 하늘에 어슴푸레하고 어둑한 푸른 빛이 채워지는 애매한 시간, 잘 관리되지 않은 아스팔트 위의 노란 선과 흰색 점선을 명확히 밝혀주는 것은 미색의 하향등과 드문드문 위치한 노란 가로등밖에 없었다. 김재원은 양손을 핸들 위에 얹은 상태로 무거운 어깨를 가볍게 움직였다. 자주 하지 않는 움직임을 반복적으로 한 탓인지, 어깨부터 손가락 마디에 이르기까지 팔 전체가 뻐근했다. 특히나 핸들을 쥐고 있는 엄지와 검지 사이는 벌써 근육통의 기미가 보였다. 지금은 단순히 무거운 정도지만, 이대로 돌아가서 잠든 후 일어나면 지난한 연장 끝에 무승부로 끝난 다음 날 아침이나, 원정경기 이동 후 일어난 다음 이상의 낯설고도 지독한 근육통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불길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 동시에 의문도 뇌리를 스쳤다. 돌아간다니, 어디로? 앞으로 이 키로 앞에서 좌회전이라는 안내를 송출한 뒤 침묵을 지키고 있는 내비게이션은 이상용의 아파트가 목적지로 설정된 상태였다. 도착까지는 백 키로 하고도 수십 키로나 남은 그 장소는 어제저녁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김재원이 난생처음으로 찾아갔던 장소이자, 조수석에 앉아 있는 이상용을 태우고 도착해야 할 장소였다. 그곳은 제가 돌아갈 목적지가 아니었다. 김재원의 목적지는 그의 아파트여야 옳을 것이다. 처음 출발한 장소이자, 마무리 캠프와 스프링 캠프 사이의 휴식 기간에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 장소 말이다. 그러나 김재원은 그곳에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서,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직감이 왜 든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액셀을 밟았다가 떼어 가며 속도를 비슷하게 유지하면서 핸들을 그대로 고정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다른 조작도 하고 있지 않기에 김재원의 차 안에서는 방향지시등 소리도 주변 차의 소음도 전혀 없이, 조용한 엔진 소리와 가끔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표면을 지나며 나는 덜컹거리는 소리, 그리고 금속 재질의 캔 안에 든 액체가 흔들리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조용한 차 안에서 김재원은 입을 다문 채로 숨을 들이마셨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뜨자, 유난히 뻑뻑한 눈꺼풀 탓에 각막이 긁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최대한 크게 숨을 들이마셔도 폐 안쪽에 산소가 차고,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는 것 같다. 천천히, 끝까지 내쉬며, 폐에 조금밖에 차지 않은 공기를 뱉어내도 폐 위에 큰 돌덩어리라도 올라간 것 같은 답답함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크게 숨을 내쉬어 볼까 잠깐 생각했지만, 한숨이라도 쉬는 것처럼 보일까 싶어 결국 무르고 말았다. 그러므로 김재원이 할 수 있는 것은 옆 좌석에 앉아, 이쪽에는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은 채 윤곽선만 선명히 드러나는 어두운 산등성이를 응시하고 있는 이상용을 의식하며, 도로를 주시하는 집중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밖에 없었다.
이 정도의 시골길을 운전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아니, 시간대를 고려하면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일지도 몰랐다. 유흥을 즐긴다고 해도, 이런 시간대에는 애당초 차에 타 있지 않거나, 차에 타 있더라도 대리기사에게 운전대를 맡긴 채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뒷좌석 시트에 기대어 무거운 눈꺼풀에 한 치의 저항도 하지 않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김재원의 차와, 주변의 들판과 밭, 뜨문뜨문 자리한 가건물과 작은 야산을 제외하곤 텅 비어 있는 이차 선 외곽 국도는 차 안의 정적만큼이나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조수석에서 들리는 희미한 숨소리에 긴장하게 되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며, 김재원은 다시금, 쥐어짜듯 숨을 들이쉬고, 입을 다문 채로 끝까지 내쉬었다. 돌아갈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의 원인은 차치하더라도 지금 이렇게 숨이 답답한 이유는 알 수 있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 차의 트렁크에는 시체가 들어 있었다. 그것도 아는 사람의 시체가. 아니, 단순히 아는 사람이라 칭하는 건 어떤 유의미한 정보도 주지 못한다. 김재원의 은색 벤츠 트렁크 안에는, 지금 조수석에 앉아 있는 이상용의, 남편의 시신이 담겨 있었다.
다시 생각하니 순간 토기가 올라왔다. 고개를 들고 입안에 분비된 침을 삼키면서 위액을 게워 내기 위해 괴롭게 경련하는 식도 근육을 진정시키려 애쓰면서, 김재원은 식탁 위에 켜 둔 밋밋한 미색의 형광등을 제외하고는 어떤 광원도 없어 어둑했던, 이상용의 아파트 거실을 떠올렸다. 두어 번 얼굴을 봤을 뿐인 그의 남편이 일자로 누워 있는 그 어두운 거실에서 이상용은 유령같이 서 있었다. 잠든 듯이 누워 있는, 아니 쓰러져 있는 이의 옷을 적신 다음 구깃구깃한 모양으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굳어 갔을 갈색의 핏자국을 제외하고는 집 안의 모든 공간이 깔끔했다. 마치 그날 대청소를 한 것처럼 어떤 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광경을 마주하자마자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다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에 뛰어가 그날 먹은 것을 전부 게워 냈던 것이 떠올랐다. 화장실에서 강하게 났던 락스 냄새나, ‘왜’라는 물음에도 그저 입을 다물고선 공포도, 분노도, 절망도, 일말의 당혹스러움도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던 이상용의 얼굴과 캠핑이 취미라는 남편의 야전삽으로 죽어라 땅을 파고 있을 때 났던 축축한 흙냄새와 점점 저리는 손의 감각과 같은 단편적인 기억이 물밀듯이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토기를 가라앉힌 후, 김재원은 고개를 내려 정면을 향했다. 신물이 올라오건 말건 간에, 지금은 운전 중이었다. 저 멀리 주황색 신호를 점멸하는 신호등이 있었다. 집중해야 했다. 김재원은 모범 운전자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 차가 망가지거나 무슨 사고라도 난다면 모든 것이 어그러질 거라는 것 정도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명확한 사실이었다. 어쨌든, 멈춰서는 안 됐다. 여전히 눈은 피로하고, 손은 아프고, 컨디션도 최악이었지만 방금처럼 도저히 집중되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누가 목을 누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숨은 쉬어지지 않았지만, 눈앞에 있는 도로에는 다소 집중이 되었다.
"전방 100미터 앞, 보행자 사고 다발 구간입니다."
나직한 내비게이션의 음성에 액셀에서 발을 떼어내고,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정지선 앞에 차를 멈추고, 교차로를 한 번 훑어본 후 -당연하게도-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다시 액셀로 발을 옮겼다. 신발 아래로 느껴지는 액셀과 브레이크의 감촉이 묘하게 거칠었다. 그러고 보니, 밑창에 묻은 흙을 채 닦아내지 못했다. 해야 하는 것들이, 그리고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세차라던가, 어제부터 지금까지의 알리바이 마련이라던가, 블랙박스 데이터 삭제라던가… 그런 잡다한 것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
스읍, 하고 다시 억지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조수석의 이상용은 그저 고요했다. 깨어 있는 게 맞는지, 애초에 살아 있긴 한 건지 잘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그는 마치 그 자리에 고정된 것처럼 조수석 시트에 등을 완전히 붙이고, 오른쪽 차창을 향해 고개를 완전히 돌린 채 빽빽하게 늘어선 키 큰 나무의 윤곽과 이제는 제법 푸른 빛을 띠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김재원은 이상용이 정말로 그 일을 저지른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아파트 거실에서 목격한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몇 년을 함께 살았던 배우자를 살해하고, 홀로 그 현장을 깨끗이 닦고, 정리하고, 환기를 해서 흔적을 지워낸 당사자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허벅지 위에 손바닥을 천장으로 향한 채 늘어뜨리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 동그란 뒤통수는 김재원에게 익숙한 모습이었다. 주말 저녁에 남의 가정집에 들어오기를 껄끄러워하는 그의 앞에서 잘 왔다고 짧게 인사를 건넨 뒤 거실로 먼저 향하던 그 뒷모습 역시 경기가 끝난 뒤 가방을 메고 돌아가는 모습처럼 익숙한 것이었다. 평소와 달랐던 것은 그가 걸어간 곳이 구장 관계자용 출입구가 아니라 그의 배우자의 죽은 몸을 뉘어 둔 거실 마루였다는 것 정도뿐이었다. 시신 앞의 이상용은, 그저 남의 일처럼 그것을, 그리고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확신을 지울 수 없었다. 잘못된 게 이상용인지, 김재원 자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잠시후, 좌회전입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 음성과 동시에, 김재원은 핸들 뒤 레버를 조작해 좌측 방향지시등을 켰다. 신호등은 노란색 등을 점멸하고 있었고, 등과 등 사이에 ‘비보호 좌회전’ 표지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반 바퀴 정도 핸들을 돌려 좌회전했다. 가로등 아래를 지나감과 동시에, 김재원은 내비게이션의 디지털 패널에 표시된 숫자를 읽었다. 오전 5시 56분, 여름이면 이미 해가 뜰 시간이지만, 지금은 해가 뜰 때까지는 시간이 다소 남아 있었다. 확인과 동시에 아스팔트의 움푹 팬 곳을 바퀴가 지나가자, 컵 홀더에 끼워진 싸구려 캔 커피 안에 남아 있는 액체가 출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김재원은 문득, 어제저녁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것도 입에 넣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십 분 전에 졸음 쉼터 자판기에서 뽑은 캔 커피조차 입에 담지 않았을뿐더러, 저녁 전까지 먹은 모든 것을 토해냈으니, 위장은 텅 빈 지 오래된 상태였다. 그리고 제가 본 바로는, 이상용 역시 커피를 반절쯤 마신 것을 제외하곤 마찬가지였다.
"저.… 선배."
"응?”
이상용이 창밖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리고 즉답하자, 핸들을 쥔 손에 무심코 힘이 들어갔다. 방금까지도 생각하고 있던, 평소와 같은 표정이었다.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감정의 동요를 비추지 않는 건조한 표정과 낯빛. 눈을 정면으로 마주치는 걸 주저하면서, 김재원은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노력하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니, 그.… 혹시 배 안 고프신가 해서요."
정면을 주시하며 그렇게 말한 김재원을 향해 잠시 시선을 두고 있다가, 정면으로 시선을 옮긴 이상용은 잠시 생각하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 정적이 방금 전과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 더욱더 숨쉬기가 어려웠다. 다행히도 정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먹을 때가 되긴 했지."
"…그럼 뭐라도 찾아볼까요?"
“그래.”
대답하며 조수석을 향해 시선만 옮기자, 이상용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 일상적이면서도 비일상적인 응답이었다. 오른손을 뻗어 내비게이션을 조작하면서도, 김재원은 어색함을 느꼈다. 사석에서 이상용과 식사를 하는 것은 뜻밖에도 처음이었다. 게이터스 시절부터 지금까지 경기를 하며 합을 맞춰 왔음에도.
*
콘크리트 부스러기와 모래알을 바퀴가 누르면서 나는 갉작거리는 소리와 함께, 김재원의 차는 식당 옆 공터로 올라갔다. 적당한 자리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끄자, 내비게이션을 비추는 디지털 패널을 포함한 차 안의 모든 빛이 꺼지고 엔진의 진동까지 모두 멈췄다. 김재원은 차 문의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운전석의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도착했습니다.”
“그래.”
손잡이를 잡아당겨 문을 연 김재원은 차 밖으로 발을 디디며 시트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상용 역시 문을 닫은 것을 확인한 뒤 키를 눌러 문을 잠근 김재원은 식당 건물로 시선을 향했다. 아침 식사를 하기에 이른 시각에 간간이 차만 다니는 국도 근처에서 영업하고 있을 만한 곳은 운전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애용하는 기사식당 정도밖에 없다. 굳이 찾아올 이유도 없기에, 이렇게 기사식당을 내비게이션에 찍어 찾아오는 것도 김재원에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굳이 더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앞서 걸어가는 이상용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김재원은 다시금 숨 쉬는 것이 갑갑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질문에 이상용이 대답하지 않은 그 순간 이후로 지금까지 나눈 대화의 숫자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것보다는 많았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줄곧 맨정신으로 깨어 있던 것에 비해 적은 수였다. 평소에도 이상용은 그에게 굳이 경기와 관련되지 않은 화제로 대화를 나누는 일이 많지 않았지만, 램스에 온 뒤부터는 나름대로 대화가 트였다고 생각했던 김재원에게는 이렇게 오랜 시간을 같이 앉아 있으면서 이렇게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고 있는 것은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그 숫자에 반비례하는 정적 속에서 김재원은 낡고 빛바랜 간판 아래로 향하는 고작 스무 걸음만큼의 거리를 걸으며 어떤 말을 할지 생각했다가 그만두는 것을 반복하고 있는 지금처럼 이상용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식당의 유리문을 당기자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과 문 위에 붙어 있는 종이 흔들리는 청명한 소리에, 어색한 정적은 다행히도 멈췄다.
“어서 오세요~.”
뒤를 돈 상태로 식탁을 정리하던 중년 여성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불이 환하게 켜진 식당 안에는 여섯 개의 식탁, 그와 짝을 맞춘 의자가 네 개씩 놓여 있고, 그 식탁 중 한 개 앞에는 아마도 주인인 듯한 퍼머머리를 한 여성이 서서 식탁을 행주로 닦고 있었으며, 그 옆의 탁자에는 두 명의 중년 남성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첫 손님이 아니라는 것에 감사하며, 김재원은 이상용이 당기고 있던 문손잡이를 대신 잡고 말했다.
“어디 앉으실래요?”
“딱히 어디 앉든 상관없어.”
김재원은 손님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안쪽 구석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저기 자리에 앉으시죠.”
“그래.”
자리에 앉고 점퍼를 의자에 걸어 두는 김재원의 귀에 주방 안쪽에서 보글보글 국이 끓는 소리와 도마에 칼로 재료를 다지는 듯한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 앉은 김재원은 식탁 가장자리에 위치한 티슈 통에서 티슈를 두 장 뽑아 건너편에 앉은 이상용 앞과 제 앞에 하나씩 내려놓은 뒤 수저통에서 수저를 두 세트 꺼내어 똑같이 세팅했다. 세팅을 완료함과 동시에 잠시 정적이 찾아왔으나, 식당 주인이 행주를 접으며 자리로 걸어와 앞치마 주머니에서 약간 끈적함이 남아 있는 코팅된 메뉴판을 꺼내 식탁 중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 주문하시겠어요?”
약간 힘이 없는 목소리로 물은 식당 주인의 얼굴은 피곤함에 찌들어 있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같은 찌개류와 기본 백반, 제육 백반 등 백반 종류로만 단출하게 구성된 메뉴판을 훑어보며 김재원은 입을 열었다.
“된장찌개 하나 주시고… 선배는 뭐 드실래요?”
“전 기본 백반으로 부탁드릴게요.”
이상용은 찬찬히 문자열들을 응시하다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인은 예에, 하고 말끝을 흐리며 대답한 후 메뉴판을 다시 들고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된장 하나, 기본 하나요.”
“예~.”
조금은 생기 있는 목소리로 주방 안에 있는 직원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린 이후 주방에서는 조리하는 과정에 나는 생활 소음이 더 분주하게 이어졌고, 꺼져 있는 TV 대신 시간을 죽이기 위한 손님 두 명의 잔잔한 대화 소리와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가게 안에 남았다. 김재원은 의자를 뒤로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이 나오기까지는 조금 걸릴 테니, 물이라도 떠올 공산이었다.
“선배는 물 필요하세요?”
“난 괜찮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이상용이 고개를 들고 대답하자, 김재원은 넵, 하고 대답한 뒤 정수기 앞으로 걸어갔다. 시퍼런 자외선 등이 켜진 컵 소독기의 문을 열어 컵을 하나 꺼낸 후 문을 닫고, 누런빛으로 약간 이염된 플라스틱 재질의 작은 정수기의 냉수 레버를 눌러 물을 담았다.
시원치 않은 물줄기 탓에 작은 컵이 채워지는 데에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 찰랑거리는 표면을 내려다보면서 김재원은 지금까지 이동해 온 길에 CCTV가 얼마나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나름대로 고속도로 같이 큰길은 피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그렇게 효과가 있는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오히려 기름만 낭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각 지역에 위치한 CCTV의 위치나 수사 과정을 꿰고 있지도 않은 일반인의 입장에선 그나마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여러 가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가게 내부를 포함해서 근처에는 CCTV가 눈에 띄지 않았다는 점이나 카드 대신 사용할 비상금이 지갑에 남아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그렇지만 합당하면서도 막연한 두려움은 김재원에게 확실한 것으로 다가왔다. 결국, 언젠가 경찰이 자신과 이상용이 이동한 루트를 추적하면서 이 식당의 목격자를 조사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걱정에 이르자, 김재원은 그때, 지금 이 식당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과 이상용을 어떻게 진술할지를 생각했다. 직장 동료라기엔 옷은 서로 통일감도 없었고, 토요일 새벽이라는 이 시간대는 이질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가까워 보이지도 않는 호칭과 적은 말수를 생각해 보면 연인…관계라던가 내연관계로 보이지도 않을 테고…
생각에 빠져 있다 보니, 손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어느새 스테인리스 재질의 컵은 가득 차서 손을 타고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김재원은 황급히 정수기 레버로부터 컵을 떼어내고, 왼손으로 컵을 옮기고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어 손에 묻은 물기를 가볍게 털어냈다.
끈적끈적한 바닥에 떨어진 대여섯 개의 물방울을 내려다보며 김재원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오늘따라 쓸데없는 방향으로 생각이 흐른다는 자각은 있었다. 누구에게 향해야 할지 모를 수치심에 휩싸이는 것을 어떻게든 누르면서, 떨어진 물방울을 방치한 채 등을 돌렸다. 평소에도 잡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계속해서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난무하는 것은 아마도 지금 이 상황이 정상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몇 걸음 앞에 위치한 자리에 앉아 있는 이상용의 검고 동그란 뒤통수를 다시 응시하며 김재원은 새삼스럽게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어제저녁부터 그 뒷모습에서는 어떤 감정을 엿볼 수 없었고, 그것이 김재원에게 도망가고 싶다는 갑작스러운 충동을 들게 했다. 그러나 발걸음은 멈추지도, 가게 문을 향하지도 않고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끌려가듯이 향할 뿐이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의자를 당기고, 자리에 앉으면서 가득 찬 물컵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상용은 지루하지도 않은지 식탁에 손을 올려 두지도 않고 앞에 놓여있는 수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도, 이상용과 김재원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는 작은 소음도 발생하지 않았다.
“…”
“……”
무어라 말이라도 해 볼까, 고민해 봤지만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곳이 구장 구내식당이었다면 다음 선발 경기에 대한 이야기나, 아니면 다른 투수들이 요즘 이런 부분을 어려워한다는 등의 화제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선배 남편의 시신을 묻고 온 뒤에 그런 이야기를 태평하게 꺼내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애초에 아직도 팔 근육의 뻐근함을 느끼고 있는 김재원으로서는,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뿐더러 야구와 관련된 생각을 하기도 힘들었다. 이상용이 그에게 필요하지 않은 대화를 시작하는 일도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어쩌면 어제부터 이어진 이 숨쉬기 힘든 고요함은 당연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느새 이상용은 고개를 들어 벽면에 붙어 있는 메뉴를 읽고 있었다. 음식 사진으로 꾸미지도 않은 데다가, 김밥천국처럼 메뉴가 많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별로 읽을만한 내용은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메뉴를 훑어보는 이상용을 계속 쳐다보고 있다가는 눈이 마주칠 것 같아, 김재원도 그 옆에 붙어 있는 커다란 달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붉고 굵은 글씨로 ‘12’가 적혀 있는 달력의 아래쪽에는 ○○은행이라는 글자와 은행 로고가 자리 잡고 있었고, 살짝 습기를 먹어 가장자리가 우그러져 있었다. 생각해 보면 식당에 와서 저런 달력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된장찌개랑 백반 나왔습니다~.”
감상이라 할 것도 없는 생각을 하며 무의미하게 검은색과 파란색, 붉은색의 숫자가 늘어서 있는 사각형들을 응시하고 있던 찰나에 음식이 도착했다. 옆 식탁에 큰 쟁반을 내려놓고 흰 김을 내뿜으며 끓고 있는 된장찌개가 든 뚝배기와 노릇하게 구운 꽁치가 담긴 길쭉한 그릇을 순서대로 김재원과 이상용 앞에 각각 내려둔 식당 주인은 그 이후에도 밥그릇과 반찬, 콩나물국 그릇과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자리에 놓았다.
“맛있게 드세요~.”
모든 세팅을 마치자, 사장은 예의 피곤함이 묻은 목소리로 인사한 뒤 다시 주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용은 그제야 손을 올려 금속으로 된 공깃밥의 뚜껑을 열었고, 김재원 역시 뚜껑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잡아 뚜껑을 밥그릇 옆에 뒤집어 놓았다. 밥에서도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숟가락을 손에 들어 아직도 보글보글 끓고 있는 찌개를 두부와 함께 떠내 한 김 식힌 후 입안에 넣어 보니, 딱히 맛집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꽤 먹을 만했다. 두어 숟가락 더 퍼내어 김이 올라오는 흰쌀밥에 얹은 후 숟가락을 찔러 조금 섞은 후, 반찬으로 놓여 있는 김치 한 조각을 집어 얹은 후 한 숟가락 가득 퍼서 입안에 넣으면서 김재원은 이상용의 앞에 놓여 있는 꽁치와 콩나물국 그릇으로 시선을 향했다.
이상용 역시 오른손에 숟가락을 쥔 채 맑은 콩나물국을 떠서 마시고 있었다. 이상용이 입은 회색 니트티에는 밥그릇과 그 앞에 놓인 꽁치구이에서 조금씩 올라오는 김이 그 위를 덮듯이 하얗게 비쳤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입을 다문 채 국물에 적셔진 밥알과 김치를 씹어 삼킨 뒤, 김재원은 방금 떠 온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 집의 김치는 그렇게 맛있는 편이 아닌 것 같았다.
이상용은 흰 밥을 떠서 입안에 넣은 후 가까이에 있는 멸치볶음을 조금 젓가락으로 집어 함께 먹었다. 덤덤하게 턱을 움직이는 이상용을 앞에 두고, 김재원은 다시 된장찌개를 먹기 시작했다.
특별한 것 없는 반찬과 자신의 찌개를 번갈아 가며 먹고 있던 김재원은, 손을 뻗어 멸치볶음에 젓가락을 옮기다 문득 이상용이 들고 있는 젓가락의 끝으로 시선을 향했다. 이상용은 젓가락으로 꽁치구이의 살을 바르고 있었다.
젓가락으로 아가미 언저리를 분리한 이상용은, 아가미 바로 밑의 몸통에 젓가락을 예리하게 집어넣어 꼬리까지 천천히 가르면서 척추뼈와 살을 분리했다. 듬성듬성 칼집이 들어가 노릇노릇한 꽁치의 윗면을 분리해 그 위에 놓은 후, 촘촘한 가시가 들어찬 척추뼈를 떼어 내 꽁치의 몸통 아래에 놓았다. 마지막으로 반질반질한 젓가락의 끝이 섬세하게 움직이며 분주하게 잔가시를 분리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김재원은 알 수 없는 울렁거림을 느꼈다. 흰 살과 갈색의 살이 층을 이룬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꽁치의, 단백질이 변형되어 시허옇게 튀어나온 눈깔을 보자, 그 울렁거림은 더욱 심해졌다.
“…..”
젓가락에 집힌 약간의 멸치볶음을 흰 쌀밥 위에 올려두면서, 김재원은 다시금 올라온 토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눈이 감겨 있으니, 눈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듬성듬성 나 있는 칼집이 꽁치에게 남긴 것보다 더 깊숙이, 몸 안쪽까지 뚫려 있었을 상흔이 계속 눈에 들어왔던 게 떠오르게 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방금 떠올랐던 막연하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확실한 두려움이나 불안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 모든 것이 뒤섞여서 방금까지 먹은 것이 올라올 것 같았다.
눈을 감은 채 신물이 올라오는 감각을 진정시키고 밀어내려 노력하자, 조금씩 긴장되었던 식도 근육이 이완되는 것이 느껴졌다. 김재원은 눈을 뜨고, 숨을 크게 들이쉰 후, 내쉬었다. 다시금 폐를 온 방향에서 짓누르는 것 같은 갑갑함이 몰려왔다. 눈앞에는 실처럼 가느다란 멸치들이 땅콩 조각과 함께 물엿과 기름에 반질반질하게 코팅되어 밥 위에 한데 뭉쳐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김재원은 느직느직 숟가락을 집어 들고 멸치볶음과 밥을 약간 떠서 입안에 넣었다. 썩 먹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아 괜스레 천천히 턱을 움직이며 이상용 쪽을 힐끔 쳐다보자, 이상용은 말끔하게 발라낸 꽁치의 흰 살을 젓가락에 한 덩어리 집어 입안에 집어넣고 있었다. 꾹 닫힌 입은 우물우물 움직이며 꽁치의 살을 잘게 자르고, 그것을 삼켜 내는 과정을 당연하고 묵묵히도 수행하고 있었다. 꽁치를 한 덩어리 입에 집어넣고 숟가락으로 밥을 퍼서 또 그것을 잘게 씹어 먹는 과정은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낯설게 보이는 장면이었다. 김재원은 별로 씹지 못한 밥과 멸치를 목 안으로 삼키고 그 옆에 있는 물을 마셨다. 찬기가 남아있는 물이 식도를 거쳐 지나간 뒤, 다시 제 밥그릇을 향해 고개를 떨궜다. 건너편의 이상용은 여전히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식사를 이어갔다. 밥은 반 공기 정도 남아있었지만, 김재원은 울렁거림 탓인지 더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
“잘 먹었습니다.”
이상용이 그렇게 말한 것은 대략 십여 분 정도 지난 뒤였다. 더 이상 식욕이 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 수저를 내려두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도 껄끄러웠기 때문에, 김재원은 간간이 된장찌개의 국물을 마시며 이상용이 다 먹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용이 그렇게 말하자, 김재원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저도 다 먹었습니다. …그럼 일어날까요?”
“아, 잠깐. 나 물 좀 마시고 와도 될까.”
“아, 넵. 다녀오세요.”
의자에서 일어난 이상용이 뒤돌아 정수기를 향해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김재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발걸음을 향했다. 잠깐 계산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장은 일어나 계산대 앞에 섰다.
“이만 원 나왔습니다.”
김재원은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서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찾아 주인에게 건넸다.
“예,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먹었습니다.”
주인의 인사에 대답하면서, 김재원은 정수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수기 앞에 있는, 자신과 이상용이 방금까지 앉아 있던 자리에는 이상용의 검은색 코트가 걸려 있었고, 푸른 빛을 내뿜는 컵 소독기 옆에는 어깨에 힘을 빼고 늘어뜨린 채, 오른손에 들린 컵에 물을 받고 있는 이상용이 서 있었다. 물이 어느 정도 찬 것인지, 이상용은 밸브를 누르던 손을 떼어내고, 아주 잠깐 멈춰 있었다.
물을 마시지 않고, 고개를 떨구고 차가운 물컵을 손에 쥔 채로 조용히 그곳에 멈춰 있던 이상용의 어깨는 숨을 들이마시는 것인지 위로 조금 올라갔다가 내려갔고, 그 후 컵을 든 오른손을 굽혀 입가로 가져갔다. 김재원은 막힌 공기를 트이게 하려는 듯한 그 움직임이 문득 2013년의 재규어스전 9회 말에 등판한 이상용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물론 팀의 승리가 자기 어깨에 걸려 있다는 부담감 속에서 느껴지는 그때의 긴장감과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것이겠지만 불현듯, 그때처럼 이상용이 자신과 같은 것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니까, 방금까지 계속 느꼈던 답답함 같은 것 말이다. 그 원인이 긴장인지, 불안인지, 아니면 두려움인지… 아니, 두려움은 아닐 것 같고, 어쨌든 그런 원인은 솔직히 모르겠지만, 김재원은 심호흡하듯 숨을 내쉬는 이상용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런, 동질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이상용은 고개를 살짝 들어 물을 마신 후, 컵 소독기 아래에 있는 반환구에 금속 재질의 컵을 밀어 넣었다. 그때까지 이상용을 응시하고 있던 김재원은 고개를 돌리고 앞에 있는 문을 열었다. 그 반동으로 문 위의 종이 다시금 딸랑거리고, 들어올 때와 반대로 차가운 바람이 안으로 훅 들어와 순간 피부를 식게 했다. 한 발짝 반 정도 걸어서 문을 잠시 잡고 있자, 코트를 다시 걸친 이상용이 걸어 나왔다.
“땡큐.”
“아뇨, 그럼 이제 가실까요?”
“그래. 계산은?”
“얼마 나오지도 않아서 제가 계산하고 왔습니다.”
“아, 그래? 잘 먹었다. 고마워.”
“아뇨 뭐 이 정도는…”
문에서 손을 놓자, 유리문은 앞뒤로 흔들리지 않고 꼭 맞게 닫히고, 김재원은 가게 오른편에 위치한 공터를 향해 걸음을 향했다. 이상용은 한 걸음 앞에서 주차된 차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고, 어느새 해가 떠올라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 그 배경으로 눈에 들어왔다.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자 하얀 김이 눈앞에 스치듯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차가운 공기가 폐 안을 맴돌듯이 속속들이 스치고 나가는 감각을 느끼며, 김재원은 기묘한 편안함을 느꼈다. 편안함이라는 말 자체가 방금까지 느껴왔던 온갖 감정들과 모순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덜미를 으슬으슬하게 만드는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를 짓누르던 갑갑함을 해소해 주는 것 같았다. 숨을 길게 뱉어낸 뒤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하자 오히려 자연적인 빛이 생겼기 때문인지 더 어둡게 보이는 이상용의 뒷모습이 앞에 있었다. 결국 이상용은 여기까지 오는 여정 동안 어떤 의문에도 제대로 답을 하지 않았다.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부터 시작해서, 왜 김재원에게 연락을 한 것인지, 또 이다음엔 도대체 어쩔 생각인지에 이르기까지 넘치도록 많은 의문점이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다. 결국 그렇기에 지금 느껴지는 일말의 편안함은 명백히 이상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이상한 건 나일지도… 라고, 막연하게 김재원은 생각했다. 지금 이 상황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그걸 지적하거나 의문을 해결할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폭을 조금 넓게 하여 몇 걸음 뒤따라가자, 김재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주차된 차 앞에 이상용과 함께 도착해 있었다.
“앞으로 두 시간 정도는 가야 할 것 같은데, 선배는 안 피곤하세요?”
차 앞으로 돌아가는 이상용에게 차 문을 잡은 상태로 김재원이 그렇게 묻자, 이상용은 고개를 돌리고 잠깐 허공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어제부터 안 잤다 보니, 좀 피곤하긴 하네.”
“그럼 가는 길엔 편히 눈 좀 붙이세요.”
문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그렇게 말하자, 차 문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이상용이 답하자 김재원은 운전석 문을 열었다. 운전석의 좌석 앞 바닥 매트에 지금 김재원이 신고 있는 운동화의 바닥 굴곡대로 말라붙어있는 흙 부스러기가 눈에 들어왔다. 차에 오르기 전 그것을 운동화 앞코로 가볍게 비벼 흩뜨린 뒤, 가죽으로 된 시트 위에 앉았다. 뒤이어 차 문을 열고 이상용이 앉아 벨트를 착용하는 소리를 들으며 브레이크에 발을 올린 채 시동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신발 밑창을 통해 여전히 느껴지는 까끌까끌한 감촉과 시트에 닿은 부분부터 전해지는 냉기를 뒤로 하고, 김재원은 내비게이션에서 최근 검색어 중 이상용의 아파트를 찾았다. 장소를 누르자, 지도는 부감하듯 전체 경로를 보여주며 1시간 56분의 예상 시간을 표시했다. 경로 안내 버튼을 누르기 전, 김재원은 컵 홀더에 꽂혀 있는, 아직 따지도 않은 캔 커피를 꺼내 들었다. 차가운 온도 탓에 흠칫 놀랄 정도로 차가운 캔의 뚜껑을 열자, 엔진음을 제외하고는 고요한 차 안에서 치익,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김재원은 뚜껑을 딴 캔을 기울여, 그 안에 든 텁텁할 정도로 달짝지근한 액체를 한 모금씩 삼켰다. 당분과 카페인의 효과가 도는 것을 기다리며, 김재원은 지도에 표시된 루트와, 그 뒤에 본인의 아파트에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했다. 네 모금 정도를 마신 후, 다시 컵 홀더에 캔을 내려놓자 남은 커피가 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캔을 제 자리에 되돌려 놓은 뒤, 아직도 남아있는 먼 길을 보여주고 있는 내비게이션의 패널에 표시된 버튼을 누르자, 스피커에서는 언제나처럼 차분한 안내 음성이 들려왔다.
“경로 안내를 시작합니다.”
후기
안녕하세요, 세포입니다. 딱 작년 디페를 계기로 GM시리즈의 존재를 알고 GM1부를 찍먹하기 시작했는데, 1년 뒤에 배포본을 내다니 진짜 구라같네요… 이번에 처음으로 부스를 준비했는데, 부스 경험이 있으신 트친분들의 조언도 많이 받고 여유입고도 해내서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이게 정말 다 신도시 트친분들 덕분이에요(이 자리를 빌어 오프때 조언을 주셨던 깡님 거북님 에고님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글은 작년 말에 탐라에서 풀었던 상용녀 썰에서 시작되었는데요…그 당시에 썰에 감사한 피드백 주시고 트윗 남겨주신 쌤들께 허락을 받아서 쓰게 되었습니다(랄린님, 에고님, 깡님, 소굼님, g님 그리고 연결해주신 닝긴님께 다시 한 번 감사). 특히 당시 막연하게 은닉 도와주는 건 김재원이겠지…생각했는데, 그 때 랄린님께서 김재원한테 범행을 털어놓는 김재원 트윗을 해주시고 같이 멘션을 나누면서 상용녀재원(?)으로 설정했고…불륜관계 운운하는 김재원도 랄린님의 트윗 보고 꼭 넣고 싶어서 넣었어요(항상 뇌트워크 공유를 하며 썰풀어주시는 랄린님께 정말 감사한 마음뿐이에요(계속 감사러쉬중. 그러나 정말…감사한 분들이 끝이 없어요. 다들 사랑합니다…)). 그리고!! 표지는 거북님께서 흔쾌히 만들어 주시겠다고 해주셔서 정말…감사하게도…지금의최강GOAT완벽하고너무예쁜 표지가 나왔어요ㅠㅠ진짜 처음 받자마자 너무너무 신났어요….북주방님은 정말 신이 아니실까? 정말 무한 감사드립니다…사랑해요…(추가: 본문 편집까지 같이 진행해주셨어요 북님은 역시 신이신 것 같아요(진짜너무나 압도적 감사…))
본문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상용과 김재원 관계성을 고찰하면서…뭐 귀여운 후배나 두근거림을 주는 상대도 아니고 유일무이한 추억이 있는 것도 딱히 아니지만…어쨌든 지금 배터리. 마누라.를 하고 있다 보니 자기가 일방적으로 이상용에게 유대감을 형성한 원인인 둘이서만 공유하는 어떤 공통된 경험이 있다는 게 나름…다른 관계와의 차별점 같은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여기서는 공범되기라는 방식이었는데 정말 둘이서밖에 공유할 수 없는 뭔가를 주고 싶었어요… 이상용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는 안 썼지만,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미리씨나 아영씨) 자수하라고 설득할 것 같은 애들(김기정이나 진승남)을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제외하면서 김재원한테 연락한 거 아니었을까 생각했어요 자기가 한 짓을 알아도 도망칠 것 같지 않고 어쨌든 결국 같이 은폐하는 선택을 할 것 같아서? 그리고 거기에 김재원의 회피성향이 더해져서 자수하라고 설득하기 vs. (물리적으로) 묻어버리기 중 후자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런 걸 전달하려고 했는데 잘 썼는지는 모르?겠어요
여담으로 쓰는 과정에 영향받은 것들.에 대해서 간단히 얘기해보자면 개인적으로 한강 작가를 좋아해서(담담하고 조용하고 외로워보이는 사람 묘사가 좋아요)… 상용녀 느낌을 꾸준히 채식주의자의 영혜 같은 사람으로 생각했고, 남편 죽이는 여자라는 소재를 쓴 건 그 전에 봤던 헤어질 결심이나 마스크걸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당. 갈피를 잡아보려고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 2권도 살짝 펼쳐봤었는데, 그 뒤에 이상용은 어땠을까?에 대해 고찰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다음번에 쭉 읽어봐야지) 또 예전에 음식과 살인을 주요 소재로 다룬 금단의 팬더라는 미스터리 소설을 읽었는데, 음식 먹는 묘사에서 섬뜩함 같은 걸 느끼는 요런 장면이 넣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그 소설이 떠올랐답니다.
후기를 너무 길게 써서 현타가 오는데요. 죄송합니다…구구절절 하고 싶은 얘기를 하려고 배포본으로 했어요. 만약 이 문장까지 읽고 계신다면?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Special Thanks…최고의 표지와 본문 편집까지 맡아주신(으아앙ㅠㅠㅠ정말 감사해요…) 거북님과 상용녀재원남.을 결정해주시고, 이후 함께 원고 짓시∙원고 완성 후 검토를 해주신 랄린님! 항상 감사합니다… +저희 부스 쌤들을 포함한 신도시 주민분들 전부!! 감사합니다><
폭염주의보가 내린 7월 어느 날…수원 독거토끼 종합지원센터장 김세포 올림
설마 5달도 넘게 지나서 백업을 하게 될 줄은...저의 미루기 습관이 슬슬 무섭네요... 다시 보니까 대운동회 날이 생각나네요... 잘 끝낼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는데 신도시 부스도 저희 부스도 성황리에 마쳐서 정말 다행이었고 감사함 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다시 한 번 저희 부스 선생님들, 그리고 특히나!!! 이렇게 멋진 표지를 만들어 주신 거북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중복되지만? 정말 '압도적 감사'라서 여러 번 말씀드리게 되...(맞춤법틀림)
맞춤법이나 오탈자가 발견된다면...디엠으로 알려주시면, 바로 고치겠습니다. 그날 받아가 주신 분들, 그리고 여기까지 읽어주신 읽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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