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녀+민성] 복기
2024 대운동회 배포본
이상용(뇨타)×주민성 NCP 전제입니다만 해석은 자유롭게 부탁드립니다.
17시즌 준플레이오프 종료 시점의 두 사람이 대화합니다.
여체화(이상용, 주지성), 캐릭터 붕괴, 적폐 및 날조 해석 주의.
아! 이게 무슨 일인가요!!
여기서 나오는 주민성 통한의 실책! 이건 큽니다. 이건 커요…
“…형. 민성 형!”
“아.”
권가람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두 사람은 이미 정리도 끝나, 밤에 가까운 시간에 구장을 나섰다. 그들은 주민성이 대구에 얻은 집이 권가람의 집과 가까웠기에 함께 출퇴근을 하곤 했다. 오늘도, 어찌 됐든 함께 퇴근 중이었다. 건네는 말에 대답도 않은 채 정신을 빼놓고 있는 주민성을 권가람이 불러 세우기 전까지는.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보내며 주민성은 이미 끝난 경기를 반복하는 짓을 그만두었다.
답답했다. 수비에서 나온 결정적인 실책이나 팀메이트들에게 보인 부족한 리더십 따위도 분명히 중요한 문제였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그것들이 아니었다. 전 시즌의 패자였던 트로쟌스가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다는 사실과 그에 마땅히 따라야 할 분노, 혹은 아쉬움도 그다지. 그의 머리를 잠식한 것은 오로지 한 사람의 모습이다.
“…….”
어떤 정신으로 더그아웃에서 팀원들을 챙겼는지, 돌아가라는 인사를 건넸는지, 짐을 챙겨서 나왔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 훈련된 신체는 의식하지 않아도 능숙하게 일과를 수행해냈다. 의아해하는 권가람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한 그는 불 꺼진 출입구 옆에 기대어 섰다. 주민성은 복잡하게 꼬인 머릿속을 풀어내고자 애쓰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분명하게, 오늘의 트로쟌스는 졌다. 하지만 오늘의 램스에게 패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경기장 이상의 판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 능력이 그를 판에 설 수 있게 했다. 읽어낸 판이 말하고 있었다. 트로쟌스를 무너뜨린 건 어제의 그 사람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축인 나를 박살 낸 것은.
그리 크지 않은 체격. 정규시즌보다는 약간 탄탄해진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평균보다 작았다. 키는 저보다 클까.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마운드 위에 서 있는 그녀는 크게 느껴졌지만. 뒷목을 살짝 덮는 기장의 머리카락. 기름한 얼굴. 십자가 모양의 아이블랙. 팀 전체가 맞춘 듯했다. 검은 이너와 품이 조금 남은 듯한 재색 유니폼. 높은 키킹, 과격한 모션, 오버핸드에서 뽑혀 나오는 듯한 팔의 스윙. 디셉션은 여전히 훌륭했다. 릴리즈 포인트도 일정했다. 거칠게 깎여나간 듯한 손. 그 끝으로 잡아채던 체인지업 그립. 덜한 브레이킹. 더한 무브먼트. 예전과는 다른 피칭. 예전보다 더 불가해한 플레이.
그리고 변하지 않은 그 무표정. 모자의 그늘에 가려져, 얇은 눈매에 덮여 마주치지 않는 눈동자. 조금의 찡그림, 혹은 격려, 감사 따위의 말. 이외에는 어떠한 파고도 없는. 좁아진 시야에 들어있던 유일한 사람.
이상용.
기억을 낱낱이 떠올리자니 목이 탔다. 그 기억을 더듬는 것은 자해와도 같은 행위임을 자각했다. 원래대로라면 이대로 집에 가서 충분히 쉬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을 때쯤 경기를 돌아봐야 했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에게 흔치 않게 찾아오는 강렬한 직감이었다. 이 상흔은 아주 오래갈지도 모른다. 어쩌면 계속되는 것일지도. 이런 종류의 예감은 드물었지만 잘 틀리지 않았다.
그는 램스 구단 버스가 주차된 곳으로 발길을 향했다. 번호도 뭣도 모르는 사람을, 그것도 어제 선발이었던 사람을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발길은 멈추지 않았다. 하다못해 그 포수에게라도 연락처를 물어야 할 것 같았다.
“…대로 …가서….”
램스 버스 옆에 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찾던 사람과 장건호 감독이었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잠시 주민성의 발걸음이 멈춘 사이 장건호가 그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그와 함께 곁에 서 있던 이상용도 고개를 돌렸다.
“어, 민성 선수.”
“…장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나야 뭐. 근데 무슨 일이에요?”
의아해 보이는 표정. 그 질문에 주민성은 이상용 쪽으로 눈길이 향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은 무감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술렁이는 속을 제대로 감추어 냈는지, 저 사람이 이쪽을 바라보지 않고 있는 건 맞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상대가 불편했다. 장건호는 그녀를 향한 눈빛을 눈치챈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상용이한테 볼 일이 있습니까?”
“아, 예.”
“그래요?”
흠칫, 그는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에 놀란 듯 몸을 움찔하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자신답지 않게 충동적이었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무심코 와버렸다. 주민성은 그런 생각에 입술을 짓씹었다. 이상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주민성을 바라보다가, 장건호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저 창원에서 언제 등판합니까?”
“어? …2차전 등판 예정이야. 당겨지는 일은 없을 거고.”
“그러면 내일 창원으로 이동해도 될까요?”
주민성 쪽을 흘끔 바라보며 장건호는 눈을 굴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장건호도 이상용은 어려웠다. 지금만 해도 평소 이상용의 자기 관리를 알고 있는 그로서는 구태여 루틴을 깨고 타 팀의 선수, 더군다나 자신이 완전히 박살 낸 타자를 만난다는 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선수 개인의 안전의 문제로도 그렇고. 하지만 이상용에게는 나름의 생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장건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괜찮으면.”
“예, 그러면 내일 저녁까지는 숙소로 가겠습니다.”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민성 선수도 들어가요.”
“네. 들어가십시오.”
그렇게 장건호는 램스 구단의 버스를 타고 떠나갔다. 버스가 출발하는 것을 보던 이상용은 뭔가가 생각난 듯 능숙한 손놀림으로 자판을 두드렸다. 슬쩍 비친 화면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포수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듯했다. 그 연락이 간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벨이 울렸다. 이상용은 살짝 귀찮아 보이는 표정을 짓고는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전화기 밖으로도 쨍쨍 울렸다.
“어. …카톡 보냈잖아. 그래, 내일 저녁까지는 갈 거야. …짐 좀 대신 옮겨주라. 응. 고맙다.”
주민성은 어색하게 서서 그녀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찬 바람이 얇은 외투 안으로 파고들자 이상용이 어깨를 살짝 움츠리는 모습이 보였다. 주민성은 무심코 자기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주려다 전화를 끊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주게요?”
“…추워 보이셔서.”
“고마워요.”
손에 들려있는 재킷을 자연스럽게 받아 든 이상용이 팔을 꿰었다. 주민성은 그 익숙함이 어쩐지 무척 이상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배려를 받는 것이 퍽 어색치 않아 보이는 것에. 이상용을 걱정하는 지인이 존재한다든가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주민성은 입가를 한 번 쓸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용은 그와 보폭을 맞추며 툭 말을 던졌다.
“여동생을 잘 챙겨주나 봐요.”
“예? 주지성이요?”
“자연스럽게 벗어주길래.”
그의 그런 습관은 주지성 때문에 생긴 게 맞긴 했다. 그러나 주민성은 이상용에게 행동을 읽혔다는 지점에서 거북함을 느낀다. 경기장에서도 이런 식으로, 타자들을 관찰하는 것일까. 얇은 눈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대체 무엇이 어디까지 비치고 있을지. 그는 간신히 무례하지 않다고 우길 수 있을 만큼의 침묵을 깨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상용은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가만히 주민성을 응시했다. 그는 그녀의 고요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
이상용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까딱였다. 승낙이나 거부 한쪽의 의미라기보단 마음을 굳혔을 때의 제스처였다. 그래, 그럴까. 작게 들려온 말 또한 주민성보단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았다. 그는 약간 의아해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주민성의 의아함을 눈치챈 이상용은 오늘의 자신이 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비일상적인 행위에 적극성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그 일상 자체가 한정되었기 때문이리라는 생각도 함께. 그러고 보면 아직 자신에게조차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다. 뭐든 아는 척하고, 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그 정도의 인간일 뿐이다.
생각에 빠진 이상용을 보던 주민성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목에 한참 매달려 있던 말을 어렵게 꺼내 놓는다.
“선배님.”
주민성은 이 직종에 종사하는 다른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패배는 익숙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꼴사납게 굴었던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이 아니면 그 균열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무례한 질문이겠지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응, 뭔데?”
“어제 제 경기에서 어째서 그런 수비를 하셨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망설임 없이 행동하실 수 있으셨는지, 뭔가 습관 같은 것을 발견하신 건지…. 물론 곤란하다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무사히 말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대답이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질문을 한 시점에서 이미 그의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 손을 떠난 일에 대해 느껴지는 익숙한 허탈감. 주민성은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이상용은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그는 그녀에게서 옅은 곤란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야 곤란할 만도 하다. 주민성은, 따지자면 아주 성공적으로 무너졌으며 그것은 눈앞의 이 사람이 의도한 결과다. 그런 상대가 자신의 의도를 해설해 달라며 요구하는 것 아닌가. 그는 당연히 거절당하리라고 생각했다. 찬 바람이 한 차례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재킷을 여민 이상용은 왼손으로 뒷목을 한 차례 쓸어내리고 긴 침묵을 깼다.
“내가 원래대로였으면 안 알려줬을 텐데.”
담담한 말. 내뱉는 목소리에 자조가 섞여있다. 원래대로라는 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상용은 알려줄 결심을 한 모양이다. 안도감을 느끼며 주민성은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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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이런저런 신변잡기를 이어갔다. 주민성도 이상용도 그리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라지만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인지라 이야기는 적당히 이어졌다. 주민성이 음식을 주문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이상용은 그가 메뉴판을 닫는 것에 맞춰 입을 열었다.
“후레쉬도 두 병 부탁드립니다.”
“…괜찮으십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크게 영향을 받는 타입도 아니고.”
진짜 문제는 이게 아니기도 하고… 하고 중얼거린 이상용은 걸치고 있던 외투를 주민성에게 도로 건넸다. 그는 받은 옷가지를 걸어 정리하며 아까의 시답잖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음식이 나오고, 술도 깔리고, 어느 정도 배가 찬 뒤에 그녀는 물을 한 잔 마시고 입을 열었다.
“그래, 뭘 알려달라고?”
“…제 행동을 어떻게 읽어내신 건지가 궁금합니다.”
“흠.”
이상용은 볼을 긁적이며 말을 시작했다. 설명하는 모습이 꽤나 익숙해 보였다. 주민성은 그녀를 덕아웃에서 볼 때마다 옆에 후배들을 달고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보기보다 좋은 선배인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뒤로 밀어두며 그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주민성 너는 굉장히 좋은 타자다. 경기 전체를 볼 줄 알고, 자신이 해야 할 것을 알고, 팀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리더형. 그러나 본인이 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지. 장타를 뻥뻥 때려대면서 타점을 먹어 치우는 역할은 할 수 없고, 그걸 너도 알고 있다. 결국 팀 배팅. 주자가 나가 있다면 더더욱.”
“…….”
“1점 싸움. 타격이라는 건 반사행동이지. 번트도 다르지 않아. 주자에 대한 의식이 있다면, 팀배팅에 익숙하다면, 낮은 공이 온다면, 커브에 필시 손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전, 그러니까 게이터스에서 마무리로 있을 즈음에도 한 번 확인한 적이 있다. 너에게는 기습번트를 적절한 상황에 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
하지만 그렇게 ‘예상’하는 것과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말이 좋아 100% 번트 대응이지 만약에 강공이었다면, 타구가 투수나 1루 쪽으로 빠져나갔다면, 못해도 무사 1, 2루인 상황 아닌가. 예전에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이상할 정도로 강한 정신력이다.
“기습번트가 읽혔다면 바로 다시 번트를 대기는 어려워. 물론 평소의 너라면 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너는 어제 경기에서 의식적으로 의도를 가지고 타석에 서는 걸 피했다. 두 번의 번트는 명백히 의도를 가진 플레이. 그렇기에 체인지업에는 번트 수비 없이.”
그런 식으로 당연하게 말할 일이 아니지 않나. 하지만 자신에게 당연하지 않은 일이 저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런 식의 야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커브에는 수비가 나왔는데, 체인지업에 나오지 않으면 당황하겠지. 자신이 읽혔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 무엇보다 네게 치명적이었을 건 너 자신이 스스로의 통제 밖에서, 내게 조종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 그런 생각을 하며 타석에 선 너는 강공 자세를 취하다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그 당황을 원했고, 노렸을 뿐이야.”
모든 사고를 읽혔다. 주민성은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패배감을 느꼈다. 저런 직관은 자료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상대하는 것만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끊임없는 분석과 정규 시즌 중의 테스트, 다른 선수들과의 교류와 집요한 관찰 끝에 얻어지는 것이다. 무의식의 영역까지 읽어내는 직관.
“어제 타석에 들어왔을 때는 일부러 생각을 안 하려는 게 보였어. 그건 분명히 내게 껄끄러운 접근법이다. 그렇지만 네 성향과 그리 잘 맞는다고는 할 수 없어. 휘 선배는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너는 그런 식으로 타석에 서기엔 뭐랄까.”
이상용은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편하게 말씀하시라, 주민성이 말하자 이상용은 침음을 내며 따라진 소주로 입술을 축였다. 어깨 밑으로 길어진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것을 한 번 쓸어 넘기고서야 이상용은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통제광이니까….”
“콜록.”
당황한 기침이 쏟아졌다. 거세게 사레가 들린 주민성은 잔에서 넘친 술로 소매를 적셨다. 그는 이상용이 미안한 표정으로 건넨 휴지로 소매를 닦으며 연신 목을 가다듬었다. 살다 보니 면전에서 저런 소리도 들어보는구나. 주민성은 헛웃음을 비식비식 흘렸다. 이상용의 한껏 당황한 표정도 솔직히 말하자면 좀 웃겼다. 그 모습을 보니 여태 긴장해 온 것도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주민성은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긍정했다.
“예, 제가 좀 그런 편이죠.”
인정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자신은 많은 걸 통제하고 싶어 하고, 여러 경기에서 그런 방식으로 이득을 봐 왔다. 하지만 그 심리마저 읽어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도리어 잡아먹히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띤 주민성을 물끄러미 보던 이상용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너는 생각하는 게 명확하고 결심이 빠르고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그 방식대로 일궈낸 결과가 있고. 그런 행동양식은 스위치처럼 한순간에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야. 바꾼다고 해도 보통은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없어.
다른 선수… 예를 들어 주지성이 거기 있었다면 그러지 않았겠지. 타율이 높고, 컨택이 좋고 나쁘고 그런 문제와 상관없이. 주지성은 투수를 예측하지 않아. 자신이 어떤 타구를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을 만들어 두고 타석에 서는 타입도 아니고. 오는 공을 감각적으로 받아 칠 뿐이지. 루에 나가면 휙 도루하고. 그런 타자들은 너처럼 흔들 수 없다.”
“…….”
이상용은 거기까지 말하고 목이 마른 듯 잔을 비웠다. 주민성은 빈 잔에 다시금 술을 따랐다. 그녀는 별다른 안주도 없이 술을 물처럼 마시고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주민성을 보았다. 내게서 뭘 보고 있을까. 해부당해 속을 훤히 드러낸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 느끼던 긴장과 두려움은 이미 사라졌다. 이상용은 주민성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행동을 확신할 수 있었던 건 너라서야. 행동양식은 하루아침에 없앨 수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끌어낼 수 있는 영역에 있을 테니까.”
주민성은 그 담담한 말을 내뱉는 이상용을 사람 아닌 것 보듯 바라보았다. 자신이 완전히 읽혀버렸다는 것은, 어렵지만 이해할 만한 이야기였다. 남을 읽는 플레이를 해왔으니 자신 또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은 그 사고방식에의 유도를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없다. 애초에 유도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지 모르겠다. 저것은 차라리 지배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지도. 그 부담스럽고 긴장되는 상황에서 타자 하나를 위해 저런 식으로 공작을 한다는 것,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상식의 범주를 넘어섰다.
그리고 그 대상이 자신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약간 수치스러워졌다. 그만큼 자신이 트로쟌스 선수진에 있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을 터인데. 투수에게 휘둘려 자멸하고 팀에도 악영향을 준 것 아닌가. 그런 생각으로 아쉬워하는 주민성을 아랑곳 않고 이상용은 마저 말했다.
“그리고 어떻게 확신하냐고 한다면 그건, 그냥 내가 그런 선수라서 그래. 네가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성욱 선배가 투수의 노림수를 읽고, 이현이 짐승처럼 때려내는 것처럼. 나는 타자를 읽어내고 흔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걸 위해 많은 시간을 관찰과 모니터링에 할애하고, 예상을 벗어나면 당황하고.”
“…그렇습니까.”
이상용은 허공을 잠시 눈으로 더듬더니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과거를 돌이키는 사람들은 종종 저런 눈을 한다.
“사람마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건 다르니까.”
“…….”
“나라고 휙휙 떨어지는 변화구를 던지고, 원바운드 헛스윙 삼진을 유도하고, 150km/h짜리 강속구를 던지고 싶지 않을까. 그냥 그럴 수 없으니까. 내게 맞고 내가 잘 해낼 수 있는 걸 하는 거지. 그러다 보면 그게 내 합리성이 되는 거고.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선수는 거의 없어. 160km/h짜리 강속구와 4가지 이상의 변화구를 완벽하게 던지고 9분할 제구를 칼같이 할 수 있는 투수 같은 건 소설 속 얘기야. 마찬가지로, 60홈런을 치면서 유격수 수비를 보고 모든 투수의 공에 대응하고 심리전에도 걸리지 않고 1년 내내 부상 없는 타자도 현실에는 거의 없지.”
아예 없다는 얘기는 못 하겠지만…. 이상용은 어색한 듯 볼을 긁적였지만 주민성은 기억하고 있다. 이상용은, 14시즌의 정인권에게도 삼진을 잡아냈다. 그런 식으로 타자를 분석하고 대비하고 자신의 노림수로 이끌어가는 투수다. 그런 방법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주민성은 이제야 이상용을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다못해 정인권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제각기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지. 좋은 선수일수록 강점을 극대화하고 약점을 보완하려 들지만, 약점이라는 건 쉽게 고쳐지지 않으니까 약점인 거다. 결국 그 강점을 어떻게 억제할 수 있는가, 그 약점을 얼마나 잘 노릴 수 있는가는 분석과 상성의 영역이야. 유난히 상대 전적이 약한 투수가 있을 수도 있고, 유난히 강한 투수도 있을 수 있어.”
어쩔 수 없지. 이상용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주민성은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했다. 하지만 아무리 상성이 좋지 않은 상대에게라도 지는 건 싫었다. 이상용의 말을 곱씹으며, 주민성은 반찬으로 나온 콩자반만 괜히 깨작거리는 그녀를 흘끔 보았다. 뭔가를 망설이는 듯한 모습. 그는 말을 꺼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이상용은 얕은 한숨을 탁 쉬더니 여상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거야. 당장 내년부터는 나도 없을 텐데.”
“…예?”
“나 은퇴해. 이번 시즌이 끝이야.”
주민성은, 그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표정과 목소리에 자신이 내용을 잘못 이해했는지 잠시 의심했다. 포기해야 하는 그 마운드 위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있을 터인데도 이상용은 평온했다. 주민성은 그녀의 어깨로 시선을 향했다. 사실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적지 않은 나이, 2시즌을 통으로 날려버린 재활, 투구 수 제한. 시즌 막판 한 달을 부상으로 빠져있었던 것도 아주 명백한 증거였다. 그러나 8이닝 무실점, 2피안타. 주민성의 성적이 유난히 안 좋았다지만 다른 선수들도 공략하지 못한 것은 비슷했다. 그런 피칭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심각한 부상을 끌어안고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의 시선에 답하듯 이상용은 말했다.
“통증을 제외하고 부상 때문에 컨트롤이 나빠지거나 하지는 않았어. 등판 전에는 진통제를 먹고 올라갔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은퇴를 확정지을 정도라면 부상의 정도가 심각할 게 뻔했다. 그런 어깨를 가지고 8이닝씩 등판을 할 셈인가, 이 사람은. 심지어 그녀는 가을야구에 들어서며 말도 안 되는 성장을 했다. 그것들이 무엇을 대가로 요구하는지 주민성은 모르지 않았다.
“증량하셨죠.”
“응.”
“떨어지는 체인지업도 새로 던지시잖습니까.”
“그래.”
구속이 거의 5km/h는 늘었을 텐데. 그건 말 그대로 팔을 쥐어짜 낸 구속일 것이다. 거기에 강한 회전의 떨어지는 변화구. 어깨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마운드 위에서 쓰러져 그대로 실려 나간대도 지금 여기서 뛰고 싶다는 각오 하나로 던지는 공.
“…트레이너가 안 말립니까?”
“은퇴 전 소원이라는데 어쩌겠어.”
“…….”
아연한 기색의 주민성에 반해 이상용은 태연했다. 자신의 몸상태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그저 당연한 일을 말하는 것처럼. 여전히 그 무표정이다. 하지만 그 행동의 기저에 있는 것은 야구에 대한 애정이다. 조금이라도 오래, 한 번의 등판이라도 더 마운드 위에 서고 싶다는 열망이다. 이곳은 자신이 팀에 필요한 선수라는 것을 입증해내야 공을 던질 수 있는 곳이니까. 위력이 있는 공을 던지지 못한다면 거기서 끝이다. 더 이상 선수로 존재할 수도 없고, 그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 그렇기에 마지막 가진 것까지 불사르는 것이다.
“난 뭔가 이뤄낸 것도, 특별한 것도 없으니까. 그래서 그냥. 마지막까지 태워보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 이왕이면 코시에서 어깨 잡고 쓰러지는 정도는 해 줘야 무용담이 되겠지.”
“…알 것 같습니다.”
“…….”
그 마음을, 완전히 안다고 하면 분명 거짓이 될 테지만. 주민성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바쳐온 이 야구라는 스포츠의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 빛나는 재능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도, 기록에 남지 못한다고 해도, 팬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선수는 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홈런 타자는 아니래도 자신이 이 그라운드에 필요한 선수라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 그 기회가 왔을 때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 주민성은 이해할 수 있었다. 갈 땐 가더라도 무용담 하나는 마운드 위에 남겨 두고 싶다는 마음을.
“사실 그런 게 아니라도… 어차피 이번 시즌이 지나면 공을 더 이상 던질 수 없는 것만큼은 확실하니까. 조금이라도 오래 뛰고 싶었다.”
이상용은 생각했다. 같은 팀조차도 아닌 두 살 아래의 후배, 자신의 부상을 알지 못했고, 이제 선수 생활이 끝나는 날까지 다시 맞붙을 일 없는 타인. 그 적당히 먼 거리에 안정감이라도 느끼고 있나. 굳이 숨기고 있던 것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너무 많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단순히 그렇게 하고 싶다는 이유로. 그녀는 자신의 이상을 자각했다. 왜일까. 주량의 반도 안 되는 술로는 자신의 이 동요를 설명할 수 없었다. 끝을 앞두고 쓸데없는 감상이라도 드는 것일까.
“…아쉽네요.”
그런 이상용의 상념을 끊어내듯 주민성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의아한 눈빛으로 주민성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은퇴하는데 아쉬울 것이 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가 말을 이었다.
“한 번쯤은 이겨보고 싶었는데.”
그 말에 이상용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트로쟌스와 램스의 팀원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타자와 투수의 호승심이다. 점수도, 다음 타자도, 팀과도 상관없는. 자신이 모르는 주민성이다. 이게 어떤 계기가 되었을까. 성장하는 후배들을 보는 건, 역시 즐거웠다. 예전부터 그랬다. 자기 자리를 위협할지 모르는 불펜 투수에게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선발 투수에게도, 자신의 천적이 될 길 잃은 천재 타자에게도 결국은 충고를 하고 마는 것이 그녀의 좋지 못한 버릇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라난 후배들이 기껍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어쩌면 천성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편 주민성도 자신이 답지 않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역시 이상용의 은퇴에 느낀 첫 번째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더 이상 이길 수도 질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이해당할 수도 없다는 것. 끊임없이 결과가 나오는 이 스포츠에서 더 이상 결과를 받아볼 수 없다는 것. 이겨보고 싶었다. 투수 이상용을, 타자 주민성으로서.
“의외네. 내가 없어지면 트로쟌스에는 좋은 거 아닌가? 우리 팀 자동문이잖아.”
의미 없는 농담. 주민성은 이상용의 웃는 얼굴을 눈에 담았다. 진지해지는 게 싫은 건가. 내리깐 눈매는 여전히 읽어낼 수 없다. 그 태연한 얼굴에 조금 욱하는 감정이 든다.
“트로쟌스에는 분명히 그럴 겁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다, 는 대답. 형태는 농담조였지만 이상용은 그게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주민성은 이제 그녀에게 뭔가를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을 직시하고, 들여다볼 테면 들여다보라고 도발한다. 읽어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들으라고. 하지만 이상용은 한 발짝 물러선다.
“그렇겠지. 내년에도 잘 해봐.”
“…예. 노력하겠습니다.”
여기까지라는 일선. 주민성은 그 정도 신호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둔하지 않았고, 무시할 만큼 무례하거나 절박하지 않았다. 이상용은 왜 하필 주민성이 이 이야기의 상대가 되어야 했는지 이제 안다. 자신과 친밀한 사람이 아니기에 그여야 했다. 천재적인 홈런 타자도, 야구 센스의 괴물도 아닌 선수라서 그여야 했고. 그녀에게 필요한 건 이해하나 간섭하지 못할 청자였는지도. 그런 생각을 끝으로 마지막 잔에 남은 방울을 목에 털어 넣었다.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응, 고마워.”
두 사람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외투를 챙기고, 자리를 정리하고, 식당을 나섰다. 하지만 식당에 들어갈 때의 그들과는 아주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걸 둘 다 알았다.
날짜가 넘어간 시점, 대구의 가을밤은 적잖이 추웠다. 주민성은 이상용에게 외투를 주고 도로변에서 택시를 잡았다. 뒷자리에 탄 이상용이 겉옷을 돌려주려 했으나 그는 집이 가깝다는 이유를 대며 입고 가시라, 돌려줄 필요도 없다며 거절했다. 이상용은 되묻지 않고 벗으려던 재킷을 도로 여몄다. 주민성은 차 문에 손을 올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들어가십시오.”
“응.”
“…몸조심하십시오.”
그 말에는 이상용도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몸조심이라. 이러니저러니 해도 주민성은 사람에게 신경을 써주는 게 눈에 보인다. 지금도 저 추워 보이는 옷차림으로 잘도 저런 소리를 하는구나 싶었다. 이상용은 웃음기를 띤 목소리로 답했다.
“너도. 오늘 고마웠다.”
“…저야말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주민성은 차의 문을 닫았다. 차는 곧이어 출발해, 호텔로 향했다. 택시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주민성은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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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용은 침대에 푹 엎어지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나이를 먹으니 하루하루 회복력이 줄어드는 게 느껴진다. 날씨가 추우니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마침 방에 돌아온 김재원이 엎드린 이상용의 뒤통수에 대고 인사를 건넸다.
“아, 형님 오셨어요.”
“응….”
“지금 오신 거예요?”
“응.”
김재원은 막 씻고 온 듯 젖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며 맞은편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매가리 없이 축 늘어진 이상용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어제는 무슨 일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어?”
“대구에서 주민성 만났다매요.”
“아….”
이상용은 옆으로 돌아누우며 볼을 긁적이다가, 입을 열었다.
“궁상… 떨다 왔다고 해야 하나.”
궁상요? 되물으며 어이없어하는 김재원의 목소리는 한 귀로 흘리며 이상용은 짐을 뒤적거렸다. 그녀는 휘적거리던 손에 잡힌 재킷을 물끄러미 보다가 툭툭 접어 캐리어에 집어넣었다. 사이즈가 큰 재킷은 캐리어 한 쪽 구석에 콱 박혀서, 짐 밑에 깔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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