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제

Fold or Double

with. 바네사


알렉세이의 사무실 책상에 걸터앉은 이반의 탁한 녹안이 소리 없이 굴러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 보았다. 이반의 앞에는 알렉세이가, 그 맞은편에는 바네사가 앉아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펍에서 마주하는 바네사 라이트우드의 얼굴은 대체로 술기운이 올라 붉거나 술에 취해 베싯거리는 웃음을 머금고 풀어져 있었는데, 카드 덱을 앞에 놓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제야 그녀의 직업이 카지노 딜러라는 것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펍의 왁자한 소리가 사무실 문틈을 비집고 작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알렉세이의 사무실 안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째깍이는 시곗바늘의 소리만이 공간을 제 앞마당처럼 휘젓고 다녔다. 어딘가 비장하기까지 한 알렉세이의 깊은 숨이 티테이블 위로 흩어져 내렸다. 두 사람의 손에 들린 다섯 장의 카드와 앤티Ante에 걸린 몇 장의 달러, 그리고 바네사가 뒤집어 까는 카드가 한 장. 그러니까, 알렉세이와 바네사는 지금 포커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캐리비안 스터드 포커는 딜러와 플레이어가 일대일로 게임을 하는 방식으로 변형된 카지노 포커로, 러시아에서 라스칼로프가 심심찮게 카지노를 찾아 즐기던 게임방식이었던 덕분에 이반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이반은 대체로 카지노로 향하는 라스칼로프의 뒤를 따라야 했고, 그가 게임을 충분히 즐기고 일어설 때까지 비슷한 처지의 조직원들과 뒤를 지키고 서 있어야 했으므로 자연스레 눈으로 익히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반은 일견 사무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바네사의 얼굴을 훑었다. 그녀는 카지노에 대해 깊은 지식이 없는 저가 봐도 노련한 딜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상대로 게임에서 이겨보겠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리라. 이반이 마치 한심한 바보를 쳐다보는 눈빛으로 제 앞에 앉은 알렉세이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았다. 실제로 알렉세이는 내리 네 판을 바네사에게 지고, 이제 겨우 한 판을 이긴 참이었다. 그 한 판도 알렉세이를 딱하게 여긴 바네사가 한번 져 준것일 뿐. 알렉세이가 제 뒤에 악마 하나가 앉아있음을 깨닫지 않는 이상 운으로 이기는 일은 영영 오지 않을 터였다. 이반은 알렉세이가 내리 네 판을 지게끔 만든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카드를 펼치는 족족 바네사에게 손가락으로, 혹은 입모양으로 알려주곤 했으니 말이다. 저를 사이에 두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른 채 고작 한 판을 이기고서 자신만만해서는 다음 판을 외치는 것을 보면 알렉세이는 절대 카지노에 출입하지 말아야 할 인물 군에 속하는게 틀림 없었다. 떠먹여 준 한 판을 이겼다고 앤티에 오십 달러를 턱하니 올려두는 무모함이란.

 

"Fold? Double?"

 

알렉세이가 제 몫의 카드를 확인하길 기다린 바네사가 묻는다. 게임을 포기할 것인지, 진행할 것인지. 알렉세이는 볼 것도 없다는 듯 더블을 외치며 호탕하게 백 달러를 베팅했다. 캐리비안 스터드 포커는 더블 혹은 콜을 외칠 경우 앤티 베팅의 두 배가 되는 금액을 추가로 베팅해야 했다. 이반은 고개를 살짝 내밀어 알렉세이의 어깨 너머로 그의 패를 내려다보았다. 잭 트리플이 그의 손에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마냥 좋다고 볼 수는 없어도 썩 나쁘지 않은 패였다. 물론 딜러인 바네사가 에이스와 킹을 갖고 있지 않거나 낮은 패를 가졌을 때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반은 바네사를 향해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였다. 알렉세이의 호탕한 베팅에 희미하게 보일 듯 말듯 웃어 보인 바네사가 이반과 시선을 교환한 후 자신의 카드를 오픈해보였다. 에이스에 킹을 포함한 스페이드 플러쉬. 대볼 것도 없이 바네사의 승리였다. 거짓말! 알렉세이의 배신감 가득한 목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 이반은 알렉세이의 반응에 재미있다는 듯 웃음 지었으나 매번 알렉세이보다 높은 패를 오픈해 보이는 바네사의 딜러로서의 능력이 궁금해지기 시작하는 참이었다. 무슨 수를 쓰면 매번 만들어내는 것처럼 높은 패를 내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거짓말은 무슨? 결과에 승복해."

 

덤덤하게 알렉세이에게 패배 선고를 내린 바네사가 앤티에 걸린 백오십 달러를 제게로 가져간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손길을 보는 알렉세이의 뒷모습에서 허망함이 묻어났다. 뒤에서 피식 웃음을 터트린 이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게 한 번 이긴 걸로 뭘 믿고 백오십이나 내놔?"

"도와줄 거 아니면 넌 조용히 해, 이반. 일하러 안 가냐? 바네사, 한 판 더 해."

"또 하자고? 나야 상관없는데 괜찮겠어? 본전도 못 건지고 있잖아."

 

바네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한 판 더를 외치는 알렉세이의 기세가 비장하다. 정말 쓸데없는 곳에서 끈질기다는 생각을 하며 이반은 조용히 두 사람의 새로운 게임을 관전하기로 했다. 사실 관전을 하나마나 바네사의 승리일 것을 알고 있지만 매번 지면서도 또 하고 싶다는 알렉세이의 뜻이 그러하다는데 뭐, 굳이 말릴 생각은 없었다. 손과 카드가 하나라도 된 듯 능숙하게 셔플하는 손길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우아했다. 이반은 카드를 섞는 바네사의 손길을 가만히 주시하다 순간적으로 보인 손의 특이한 움직임에 눈을 깜빡였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녀는 지금 카드 두 장을 뒤섞던 덱에서 빼내 손바닥 아래로 감췄다. 사실 확인을 원하는 탁한 녹안과 빤히 마주하던 바네사의 녹안이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알렉세이에게 떨어져 내렸다.

 

"베팅해."

 

방금 전 패배의 영향으로 앤티에 베팅된 것은 오십 달러에서 한 풀 꺾인 이십 달러였다. 아까처럼 무모하게 걸어보지 왜. 뒤에서 참견하는 이반의 목소리에 러시아어로 궁시렁 욕설을 내뱉은 알렉세이가 제게로 드로잉 되는 카드를 받아들었다. 이반은 다시 바네사를 쳐다보았고, 제 몫의 카드 다섯장을 가져가던 바네사가 고개를 들었다. 알렉세이가 제 패를 보느라 한눈을 판 사이 바네사의 곧은 검지 하나가 도톰하니 웃음기를 담고 휘어진 붉은 입술 위를 가로질렀다. Shh―. 소리를 내지 않아도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짧은 제스처를 통해 바네사는 이반이 본 것이 맞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반은 소리 없이 입매를 휘어보이며 바네사에게 응하듯 한손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떼어 보였다. 그녀가 손에 감춘 카드는 분명 에이스와 킹일 것이다. 캐리비안 스터드 포커에서 딜러에게 가장 중요한 두 장의 카드였으므로. 다섯 장의 카드를 받았다가, 두 장을 바꿔치기 해 에이스와 킹이 있는 유효 패를 만들어내는 것일 터였다. 이반은 작은 헛기침으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가렸다. 알렉세이가 이길 수 없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네사에게 패를 알려주는 자신이 없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 뻔했다. 그리고 앞으로 몇 판의 게임을 해본들 알렉세이가 진실 된 승리를 거두는 일은 없으리라.

 

"Fold? Double?"

 

아까와 마찬가지로 게임을 포기할 것인지, 진행할 것인지를 묻는 말에 알렉세이가 말없이 사십 달러를 더했다. 어깨 너머로 알렉세이의 패를 살핀 이반이 바네사를 향해 입술을 느릿하게 달싹여보였다. Flush. 그것을 본 바네사의 얼굴 위로 찰나 간에 짧은 미소가 스쳤다. 알렉세이가 가진 것은 똑같은 다이아의 카드 다섯 장이었다. 제법 높게 나온 카드에 알렉세이의 어깨가 짧게 들썩였다. 저렇게 다 들여다보여서야, 무슨 포커를 치겠다는 건지. 카드를 한데 모아쥔 바네사가 카드를 한 장씩 뒤집어 테이블에 오픈하기 시작했다. 다이아 에이스, 클로버 에이스, 하트 에이스. 나머지 두 장이 각각 다른 순위의 카드라면 이대로 알렉세이의 승리였다. 알렉세이가 제 승리를 예감하듯 섣부르게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아닐 텐데. 이반은 나머지 두 장을 뒤집는 바네사의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스페이드 킹, 클로버 킹. 알렉세이가 가진 플러쉬보다 높은 풀 하우스였다. 웃음을 잃은 알렉세이에게 베팅 금액을 수거하겠다 말하는 바네사의 음성은 저승사자의 사망 선고보다 더 단칼과 같았다.

 

"이건 사기야. 어? 말도 안 된다고! 왜 항상 나보다 높은 패만 나오는데?"

"지금 같이 게임하고 있는 게 누구라고 생각해? 일대일 게임에서 한 번도 진 적 없거든, 나."

"그럼 아까 진 건 뭔데?"

"그거야 져 준거지."

 

게임의 승패를 손바닥 위에서 갖고 노는 바네사에게서 여유로움이 넘쳐흘렀다. 자신의 승리가 오롯한 운이나 실력따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네사의 너그러움 혹은 동정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알렉세이는 한층 침울해진 채 자신의 (조금) 얇아진 지갑을 내려다보았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둘 다 나가."

 

착잡한 알렉세이의 음성에 바네사는 조금쯤 웃음을 참는 얼굴이 되어 카드 덱과 딴 돈을 챙겼고, 이반은 최소한의 양심도 없이 킥킥 알렉세이를 비웃었다. 물론 그 다음 뱀같이 혀를 놀려 알렉세이를 위로하는 말을 건넸으나 이미 비웃을 대로 비웃은 뒤라 딱히 먹혀들지는 않았다. 다만 알렉세이를 더욱 침울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재차 나갈 것을 종용하는 알렉세이 덕분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쫓겨난 이반과 바네사가 문 앞에서 시선을 교환하며 피시식 웃음 지었다. 알렉세이의 지갑을 벗어난 돈이 바네사의 손에서 반으로 나눠지고, 이반에게로 건네지고 이반은 당연하다는 듯 내밀어진 것을 건네받는다. 돈을 주고받는 일련의 과정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러웠다. 하여튼 그놈의 승부욕이 문제라니까. 동의를 구하는 듯한 녹안이 짓궂게 휘는 탁한 녹안과 마주친다. 다음에는 무슨 게임으로 뜯어먹을래요? 이반이 짐짓 비밀이야기를 하듯 소근거리며 제 몫의 돈을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우리가 안 정해놔도 조만간 알렉세이가 또 뭐든 하자고 할 걸. 바네사가 마찬가지로 소근거렸다. 바네사와 이반은 사실, 알렉세이를 상대로 사기극 아닌 사기극을 벌이고 나온 참이었다. 알렉세이의 패를 알려주는 것도, 교묘하게 알렉세이의 승부욕을 자극해 소소하게 돈을 따내는 것도, 알렉세이에게 쫓겨나면 벌어들인 돈을 반으로 나누는 것까지 모두 이미 약속된 일들이었다.

 

"알렉세이는 언제쯤이면 자기가 절대 못 이긴다는 사실을 깨달을까 몰라."

"딱 한 번만 이겨보겠다는 그 승부욕만 없어도 이렇게 바보같이 털리진 않을 걸요."

"다 들린다, 이 자식들아!"

 

들으라는 듯 문 앞에서 대화를 주고받자 아니나 다를까, 알렉세이의 고함이 문을 타넘고 두 사람에게 닿았다. 아주 문을 열어놓고 대놓고 비웃지 그러냐는 말에 귀도 밝다며 기어이 한마디를 덧댄 바네사와 이반이 짧게 웃으며 문에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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