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훌라바바
열린 창을 통해 고스란히 떠밀려 오는 바깥의 소란에 침대 위 이불 더미가 꿈틀, 움직임을 보인다. 세상의 종말이 가져오는 각종 불행한 것들에 대해 토로하는 목소리에는 광기가 어려있다 느껴질 만큼 맹목적이고 절박한 데가 있었다. 할렘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미친놈처럼 종말을 떠들어대는 치들이 이 골목으로 넘어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
아무래도 펍에 새로운 단골이 하나 더 늘어난 것 같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단골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조만간 이반의 머릿속 단골 리스트에 올라갈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뜻이다. 단골 리스트에 올라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밤새 펍에서 자리를 지키다 나가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맥주를 음료수처럼 마셔대는 사람이라면 전자의 단골들과는
차가운 공기에 벌써 싸늘히 식은 열쇠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이반이 겉옷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모스크바에 비하면 따뜻하다 싶은 겨울의 냉기에도 입김은 희게 공기 중으로 스며든다. 습기를 머금은 이끼색 녹안이 흐릿한 하늘을 눈에 담는다. 일기예보대로라면 오후에 진눈깨비가 조금 내릴 터였다. 스노우 스톰이 불어 뉴욕의 이곳저곳을 하얗게 만들던 게 작년 이맘쯤의
죽음에게 물으면 생이 답한다. 생이 움직이면 죽음이 따른다.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죽음을 피해 살아남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는 본능이다. 비단 인간 뿐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살고자 하는 본능을 가졌다. 살고자 몸부림을 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살기 위한 야만스러움을 드러내는 가운데 얌전을 떨어서는 목숨줄을 이어붙이고 있을
캄캄한 어둠이 내렸어야 하는 밤이었다. 물론 뉴욕이라는 대도시의 밤은 모국의 변두리에 내리는 어둠과 사뭇 달랐지만 어쨌든 밤은 밤이었다. 내리는 눈에 주홍빛으로 물든 밤하늘이 희끄무레하다. 눈은 쉽게도 더러워지는 주제에 쉽게도 빛을 반사했다. 검던 밤하늘의 존재를 지웠다. 허드슨강과 맞닿은 리버사이드 공원의 돌담에 걸터앉은 이의 하얀 얼굴이 찬바람에 붉게
술은 때때로, 혹은 상습적으로 사람을 바꿔놓고는 한다. 그렇게 될 즈음이면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그것은 보드카 국이라는 오명 아닌 오명―이반은 오명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술을 잘 마시는 것이 흉은 아니지 않은가.―을 가진 국가 출신인 이반이 지겹게 보아 온 광경이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실시간으로 보고 있기
인구 과밀의 도시가 달아오른 정점, 세 시. 길거리를 누비는 자동차며 사람이 뿜어낸 열기가 한낮의 온도와 뒤섞여 빽빽한 건물 사이사이를 쉽게도 달군다. 유월의 뉴욕은 확실히 지난달보다 조금 더 뜨거웠다. 이맘때쯤의 모스크바는 뉴욕보다는 조금 시원했으므로, 이반은 식사를 위해 들른 가게의 창가에 앉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이른 더위를 느끼는 중이었다.
멸망이 한걸음 더 성큼 다가왔다. 칠월이었다. 이반은 여즉 멸망을 또렷이 실감하지 못했다. 뉴욕은 지난달 몇 가지의 큰 사건들로 말미암은 슬픔에서 겨우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멸망이 도래했음을 외치거나 울부짖는 목소리는 한층 더 힘을 얻고 하늘 높은 줄을 몰랐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볍고 짧아졌다. 더운 날의 연속이었다. 이반은 마치 여행객이나 대
짙푸른 드네프르 강을 앞에 둔 작은 오두막은 대체로 빈 집이었다. 생활감이 없는 냉막함이 작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마른 나무의 냄새와 오래도록 켜켜이 쌓인 먼지의 냄새가 퀴퀴하게 묻어났다. 사냥꾼들이 잠시 바람을 피하고 몸을 쉬기 위해 사냥철에나 종종 쓰곤 한다는 장소였다. 오가는 사람이 없어 야생동물이 오두막 근처를 기웃거리는 일도 잦았다. 어
부슬비가 약한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나부끼듯 내리는 밤이었다. 사흘 째 오락가락하는 비에 도로며 건물이며 모든 것들이 축축이 젖어있었다. 바닥에 고인 얕은 물 웅덩이 위로 차의 헤드라이트며 건물 외부의 간판이 발하는 빛이 흔들거리며 떠다닌다. 잠시 그것에 시선을 두었다, 거의 내리지도 않는 비를 피하는 것처럼 건물 외벽의 튀어나온 장식 아래에서 오가는 사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6월이 다가올 쯤이면 하얀 밤이 찾아온다. 새벽 두 시에 해가 떠 밤 열한 시가 될 때까지 해가 지지 않는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하지가 되면 지지 않는 밤을 축제로 보낸다. 또한 하지는 이반 쿠팔라Иван Купала가 열리는 때이기도 했다. 쿠팔라는 수확과 열매를 가져다주는 여름 신의 이름임과 동시에 전통 있는 하지 축제였다.
왕이 마음을 잃고 광기를 띄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종종 궁금해하곤 했다. 날 때부터 미친 사람이 어디있겠어. 뭔가 계기가 있었겠지. 왕의 광기가 처음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 일부 사람들은 왕을 동정했다. 일국의 정점에 서는 자리가 마냥 가벼운 자리만은 아니니 광기에 휩싸이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게 그들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마약상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을 무작정 죽일 수 있는 인내심이다(물론 반은 우스갯소리다). 특성상 일일이 방문을 할 수도, 광고를 할 수도 없으니 한 장소를 암묵적으로 정해두고 고객들이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일이었다. 이반은 특별한 일 없이 시간을 죽이는 것에 이골이 날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고, 며칠 전의 기다림 역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흘러가고
악마는 교만을 먹고 자랐다. 혼돈한 존재인 인간의 교만함이 악마의 배를 채웠고, 힘을 키웠다. 사실, ‘자랐다’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었다. 어린 시절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자랐다는 표현 또한 맞지 않았다. 악마는 '자랐다'는 말이 가진 어감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자란다는 것과 강해진다는 것은 그 두 가지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의미의 조각이
오후 다섯 시가 지나야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일반적이던 알렉세이가 평소와 달리 직원들이 출근하기도 전에 펍 Holyoke의 문을 열었다. 가게의 문을 열었음을 알리는 팻말은 여전히 Close에 머물러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낡은 가죽 수트케이스를 든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바 안쪽에서 차갑게 얼어 농도가
알렉세이의 사무실 책상에 걸터앉은 이반의 탁한 녹안이 소리 없이 굴러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 보았다. 이반의 앞에는 알렉세이가, 그 맞은편에는 바네사가 앉아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펍에서 마주하는 바네사 라이트우드의 얼굴은 대체로 술기운이 올라 붉거나 술에 취해 베싯거리는 웃음을 머금고 풀어져 있었는데, 카드 덱을 앞에 놓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반 블라디미로비치 아이스토프는 멸망을 욕망했다. 멸망을 원한다는 것을 처음 인식한 때는 악마 푸르카스를 마주쳤을 때였다. 세상에 켜켜이 쌓인 신의 안배를 증오할 수 있을 것 같다 느꼈다. 그와 더불어 이반은 멸망을 향한 제 원함이 그보다는 오래되었음 또한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의 정확한 시작은 알 수 없었다. 부모의 죽음을 목격하고 길거리로 도망쳤을
사람의 사회적 지위라는 것은 사회에서 그가 가진 영향력과 돈, 누릴 수 있는 권리 등을 말하는 지표다. 사회적 지위가 어느 높이에 위치 하냐에 따라 삶의 질이 크게 달라졌다. 사회적 지위는 타 구성원들과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내세울 수 있는 무기이자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패였으나, 그것이 세상의 모든 곳에 통용되는
한 장소에서 꾸준히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점차로 그 장소에 스며들게 됨을 뜻한다. 그와 더불어 그 장소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의 일부가 되거나 관찰자 또는 방관자, 증인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반은 줄곧 어중간한 위치에 머물러 있었는데, 알렉세이의 소개로 직원들과 얼굴을 익힌 뒤 펍 Holyoke에 반쯤 스며든 채 직원인 듯 아닌듯한
"바냐? 오늘은 어쩐 일로 나보다 더 자네." 낯선 듯 익숙한 목소리에 이반이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깜빡, 깜빡 느릿하게 깜빡이는 시야에 낯선 천장이 선명히 자리한다. 흠칫 몸을 굳인 이반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바냐, 왜 그래.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어깨 위로 사뿐히 와 닿는 온기, 다정한 걱정이 담긴 말. 고개를 옆으로 돌리
*warning: 자살사고, 자해* 눈을 뜬다. 눈을 감는다. 다시, 눈을 뜬다. 숨을 가늘고 길게 내쉰다. 뱉어지는 호흡과 함께 내려앉는 갈빗대가 심장과 폐를 짓누르며 새카만 무저갱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이대로 호흡을 멈추고, 깊게 잠들어 흔적 없이 녹아내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멸망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멀어진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