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night
M03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6월이 다가올 쯤이면 하얀 밤이 찾아온다. 새벽 두 시에 해가 떠 밤 열한 시가 될 때까지 해가 지지 않는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하지가 되면 지지 않는 밤을 축제로 보낸다. 또한 하지는 이반 쿠팔라Иван Купала가 열리는 때이기도 했다. 쿠팔라는 수확과 열매를 가져다주는 여름 신의 이름임과 동시에 전통 있는 하지 축제였다. 쿠팔라 축제가 이반 쿠팔라가 된 것은 정교회를 받아들인 이후였다. 하지는 세례 요한의 축일이었고, 그의 이름을 러시아식으론 이반이라 불렀다. 전통 축제와 신흥 종교의 축일이 한데 합쳐진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 아래에서 열아홉의 이반은 평생에 딱 한 번, 이반의 낮과 쿠팔라의 밤을 보냈더랬다. 생일을 넉 달이나 앞두고 생일선물을 챙겨주고 싶다며 데리고 나서는 일리야를 따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날아가야 했다. 여름이면 일부 지역에서 하얀 밤이 내리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으나, 처음으로 마주한 하얀 밤은 기이한 이질감을 안겨주었다. 질 듯하면서도 지지 않는 해 아래에서 이반은 문득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고 싶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온 사위가 밝음 아래에 있었다. 근원도 이유도 알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이반은 그것을 억지로 삼켰다. 낯선 것을 마주함에서 기인한 두려움이리라 생각하고 덮어두었다.
이반을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달고 온 일리야가 안내를 자처한 곳은 사람들이 가득한 들판이었다. 이반 쿠팔라야. 이른 생일선물로 네 날을 챙겨준 거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따뜻한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는 그렇게 말했다. 이반 쿠팔라는 7월 6일에서 7일로 넘어가는 하루를 꼬박 보내는 축제였다. 이반은 사람들이 가득한 들판에서 노파가 나뭇잎 달린 나뭇가지로 흩뿌리는 물을 맞았고, 누군가 웃으며 씌워주는 화관을 머리에 얹어야 했다. 이름이 뭐예요? 화관을 씌워주던 전통 복장의 여자가 그렇게 물었다. Иван. 그럼 오늘은 당신의 날이네요. 축하해요, 이반. 소박한 미소를 내건 얼굴로 축하를 건넨 여자가 멀어졌다. 이반은 그녀가 무엇을 축하한다고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름 모를 꽃향기와 풀의 풋내가 짙게 주변을 메웠다. 여자가 멀어지고 슬그머니 화관을 벗은 이반은 사람들에 이리저리 떠밀려 그들의 음악과 춤 사이에 있었다. 어느덧 이반의 낮이 지나고 쿠팔라의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환했다.
사람들은 모닥불을 피웠고 냇가에서 적신 몸을 던져 불 위를 뛰어넘는다. 축제에서 모닥불은 태양을 상징했다. 과거엔 모닥불을 뛰어넘음으로써 병과 불행, 악한 기운을 쫓아내고 새로운 생명체로 거듭나기를 기대했다. 손을 잡은 남녀와, 어린 아이를 안은 부부, 노년에 가까운 이들, 젊은 생명력 가득한 십대까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새로이 거듭나기를 바라며 모닥불을 뛰어넘었다. 들판 위로 웃음이 가득했고, 활기와 생명력이 가득했다. 제게도 불 위를 뛰어넘기를 권하는 이들을 피해 뒷걸음했다. 낯설기 짝이 없는 광경에 이반은 눈앞이 어찔할 정도였다. 별세계에 혼자 불시착한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일리야를 찾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다. 밤 열한 시를 넘기고 그제야 조금 어둑해지는 하늘 아래에서 사람들 틈에 뒤섞인 이반은 그들의 집단적이고 격렬한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결국에는 조금 웃었다. 아무 의심도 경계도 없이 웃었던 몇 안 되는 이반의 순간이었다.
문득 감았던 눈을 뜬 이반은 사위를 환히 밝히고 있는 빛에 자연스럽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를 떠올렸다. 처음 마주한 하얀 밤 아래에서 느꼈던 두려움을 떠올렸다. 다만 러시아의 하얀 밤과 다른 것이 있다면 더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고, 세상 모든 것이 우뚝 멈춰버렸다는 점이었다. 여전히 콜럼비아 대학병원 앞이었다. 비명을 지르고 웅성거리던 그대로 굳어버린 사람들의 모습과 이반 쿠팔라의 흐린 기억이 겹쳐지고 대비된다. 주변을 휘 둘러보고 고개를 든 이반의 탁한 녹안에 하늘을 덮은 희고 불투명한 막이 비친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제 곁을 맴돌던 영체와 비슷한 존재들이 하늘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마저 또렷이 보였다. 이반은 일순 제가 드디어 미친 건가 하는 생각을 했으나, 때마침 여덟 쌍의 날개를 편 채 제 앞에 내려서는 영체 푸르카스를 마주하며 그 생각을 지웠다.
"푸르카스."
[결국 메시아가 탄생하고 말았군요. 하지만 아직 어떻게 될지 몰라요. 하늘의 저것은 인간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미카엘의 권능입니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힘이죠.]
"그래서 이제 뭘 어떻게 할 건데요?"
[루시퍼의 곁으로 가 그가 미카엘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도록 방해하는 것들을 없앨 겁니다. 겸사겸사 인간들을 죽여 버리는 것도 미카엘을 방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죠.]
"루시퍼는?"
[하늘로 올라가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몸을 잠시 내주면 좋겠군요.]
"내준다는 어감이 기분 나쁘네요. 빌려주는 정도는 허락해줄 수 있어요."
[뭐, 그 정도여도 날개를 편히 쓰는 데 어려움은 없을 테니 상관없겠죠.]
날개? 의아함에 이반의 눈썹이 설핏 튀는 사이 푸르카스가 이반에게로 걸어 들어오듯 스며들었다. 제 영체와 동조라는 것을 해본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동조는 괜히 찝찝하고 어색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실제로 무언가 불편함을 느끼느냐면 딱히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이반이 묘한 감각을 느끼는 사이 등 뒤로 네 쌍의 날개가 돋아 활짝 펼쳐졌다. 푸르카스가 말하던 날개를 쓴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나. 검은 피막의 날개를 어깨 너머로 흘긋 돌아보는 이반의 머릿속에 제 것이 아닌 목소리가 닿았다.
[루시퍼와 그 동조자가 완벽히 동조해 그가 지나는 길은 에테르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눈이 있다면 볼 수 있을 겁니다.]
이반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애매하게 반씩 몸의 주도권을 나눠가진 기분이었다. 이반은 이제껏 푸르카스에게 몸의 모든 주도권을 건넨 적은 없었다. 그가 인외의 존재라 해서 바닥을 기는 신뢰라는 것이 절로 자라날 리가 없었으므로. 그러나 푸르카스는 주도권에 대해 군말을 덧댄 적이 없었고, 특별히 제멋대로 굴지도 않았다. 날개가 펄럭이며 바람 소리를 만들어낸다. 푸르카스와의 동조 덕분인지 날개를 이용해 '날고 있다'는 것이 그다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의 허리 높이 정도로 떠오른 이반이 주변의 멈춘 것들을 살폈다.
[여길 떠나기 전에 주변을 좀 정리하고 갈 생각은 없습니까? 병원도 폭파되지 못했는데.]
"정리라면― 이런 거 말인가요."
두어 걸음 떨어진 자리에 서 있던 부부에게로 가까이 간 이반이 손을 뻗어 남자의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는 우드득, 뼈 어긋나는 소리가 선명하도록 남자의 머리통을 꺾었다. 손끝에 묻어나는 것은 망설임도, 죄책감도 아니었다. 해골은 살인을 한 적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반은 제 팔뚝에 자리한 해골을 떠올렸다. 이미 저지른 살인일진대 두 번째, 세 번째가 어려울 리 없었다. 사람은 모순적인 존재다. 쉽게 죽지 않았으나, 아주 쉽게 죽기도 했다. 접싯물에 코를 처박는 것만으로도, 고작 목뼈를 어긋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죽을 수 있었다. 남자의 머리에서 손을 거둔 이반이 그 옆의 여자에게로 손을 뻗었다. 배가 조금 솟은 여자 역시 남자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 두 사람에게 안배되어 있던 삶은 여기까지였을까, 더 이어질 수 있을 삶을 제가 끊어낸 것일까.
어찌 되었든 한 날 한 시에 눈을 감은 것과 마찬가지이니 억울하진 않을 것이란 오만한 생각이 들었다. 푸르카스와의 동조에 영향을 받는 탓인지 기괴하게 목이 꺾인 두 사람을 보고서도 이반의 눈은 평소보다 더욱 냉랭하고 무감한 빛을 띨 뿐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두 몸뚱이를 내려다보며 이반은 쿠팔라의 밤을 떠올렸다. 불에 삼켜지지 않고 불을 뛰어넘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모든 불행과 악한 기운을 태운다던 모닥불을 넘었더라면 지금 저와 동조하고 있는 것은 천사였을까. 이내 이반은 조소했다. 무의미한 생각이었다. 이반은 가까운 거리에 있던 여덟 사람의 목을 똑같이 만들어 놓은 다음에야 조금 더 높이 몸을 띄웠다. 이쯤하고 루시퍼에게로 가 방해하는 천사들을 치워낼 생각이었다.
"야! 기다려! 나도 데려가!!"
역시 저 혼자만이 자유로울 리가 없었다. 저 사람도 동조자였다. 그렇다는 것은 적어도 악마든 천사든 영체와 동조한 동조자들은 움직이고 있을 거란 의미와 일맥상통했다. 이 뉴욕에 저와 같은 처지의 이들이 과연 몇 명일까. 이반은 아까 전보다 몰골이 말이 아닌 그를 내려다보았다. 허드슨 강으로 향하는 재규어 안에서 어쩔 수 없이 하는 느낌으로 통성명을 했던 게 분명한데 그의 이름이 기억나질 않았다. 미국식 이름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던 것 같은데. 알? 아브라함? 알렉산드르같은 이름도 아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반은 굳이 그의 이름을 자신이 기억하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대충 부르기로 했다. 여하튼 남자는 그 사이에 사람이라도 하나쯤 죽이고 온 것처럼 얼굴이며 옷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갑작스런 빛이 터지기 전 사람들이 지른 비명과 관련이 있을까. 이반은 냉소적으로 입매를 비틀었다.
"내가 어딜 갈 줄 알고 데려가 달래요? 당신이 뭔지도 모르는데."
"할렘 가려는 거잖아. 데려가. 나도 너랑 같은 편이니까."
이반은 어림도 없다는 얼굴을 하고 같은 편임을 주장하는 아르망을 빤히 주시했다.
"증명해 봐요. 당신이 악마의 동조자인걸."
"내가 천사면 멀쩡한 인간을 폭탄 담긴 차에 수장시키진 않겠지 새끼야."
"그거론 부족하고. 아쉬운 입장에서 입이 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반. 데려가다 대충 버리면 됩니다. 주워가도록 하죠.]
"……. 생각이 바뀌었어요. 데려가 주죠."
푸르카스의 말에 이반은 작게 혀를 차고 생각을 달리했으나, 한 가지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등의 날개를 고려했을 때 아르망을 데리고 갈 수 있는 방법은 그를 양 팔로 안아 올리는 것뿐이라는 게 그 문제였다. 이반은 썩은 달걀을 본 듯한 아르망의 표정을 보며 빈정거렸다.
"진심으로 데려가요? 고를 수 있는 게 하나뿐이라는 거 잘 알 텐데요."
"씨발, 어쩔 수 없잖아. 빨리 안아."
"좀 더 빌어보지 그래요."
[이반.]
Говно. 재촉하는 음성에 조용히 욕설을 뇌까린 이반이 짜증이 묻은 얼굴로 아르망의 몸을 대충 안아 올렸다. 붕대를 감은 왼손에 약한 우릿함이 감돌았다. 맹세컨대 이반은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안아 올렸던 적이 없었다. 목에 팔이 감기자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이반은 무슨 짓을 했는지 여기저기 피가 튀어 지저분한 이 남자를 빨리 떨어뜨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빠르게 공중으로 치솟았다. 병원 건물의 옥상이 내려다보일 정도로 올라가자 브로드웨이를 포함한 워싱턴하이츠 일대가 눈에 들었다. 푸르카스가 말한 루시퍼가 지나간 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보다 더 높이 날아오르고서야 저만치 먼 곳에서 새카만 흔적이 조그맣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는 무너져버린 브루클린 교 방향이었다. 할렘을 지나쳐 루시퍼가 이동하는 곁으로 간 다음 루시퍼가 이동하는 것을 따라 다시 할렘으로 돌아오는 것이 맞으리라. 생각을 정리한 이반이 곧장 방향을 잡고 날았다.
"승차감 존나 구리네."
"멱살 잡혀서 날아가 보고 싶어요?"
[입이 건방진 인간이군요.]
남자도 악마 놈도 시끄러웠다. 이반의 얼굴에 짜증스러움이 좀 더 짙어졌다. 푸르카스의 말에 의하면 루시퍼는 할렘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미카엘과 그 동조자가 할렘의 어느 아파트에서 힘을 쓰고 있다 했다. 그러니 미카엘과 그 동조자, 탄생한 메시아까지 한데 모여 멸망을 막겠다고 힘을 쓰는 중이라는 뜻일 터였다. 멸망을 부추기는 것이 옳은 일인가, 막는 것이 옳은 일인가. 이반은 아직 그것에 대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자신의 답을 찾는 것이 중요한가 싶기도 했고, 어찌 보면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기실 그 답이라는 것은 옳고 그름의 기준점이 어디냐에 따라 언제든 달라질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원하는 쪽을 고르라면 멸망에 보다 가까이 닿아있다는 점이었다. 푸르카스가 처음 멸망에 대해 언급했을 때, 이반은 제 안에서 묘한 환희가 들끓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반에게는 세상의 멸망을 막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푸르카스는 멸망이야말로 물질계에 안배된 일이라 했다. 만약 멸망이 정말 예정되어 있던 것이라면, 안배된 일을 막는 것은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 해서 모든 일이 순리를 따라야하고, 안배된 것이 그대로 흘러가야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런 건설적인 주장은 애초에 이반과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공중에서 내려다 본 땅은 마치 미니어처로 흉내 낸 도시의 일상적인 일면을 보는 것 같았으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엉망진창임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멈춰버린 사람들 사이로 움직이는 인영들, 움직임을 멈춘 인간을 죽이려는 이들과 그것을 막으려는 이들의 대치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혼돈, 멸망을 목전에 둔 것 같았다. 지키는 것보다 망가뜨리는 것이 쉽다. 천사의 동조자들은 무엇을 위해서 저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삶을 지키려 애를 쓰는 걸까. 얄팍한 정의감? 자신은 깨끗하다는 자기만족? 다른 이를 도움으로써 제 안의 무언가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걸까. 답이 없는 수수께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이기적이다. 서로를 물어뜯는 것에 더욱 열중하는 존재들이었다. 이반이 보아온 사람들은 모두 그러했다. 저와 같은 뒷세계에 몸담지 않은 이들이라 해서 그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높게 떠올라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쳐가는 사이 이반은 점점 할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억지로 떠맡은 이 남자가 할렘에 간다고 했던가. 그를 어디쯤 떨궈버릴까를 가늠하며 날고있던 높이를 낮추었을 떄였다.
"너, 군인 아니면 마피아 같은데 어느 쪽이야?"
이반은 아르망을 내려다보았다. 예리한 것인지, 무언가를 알아보는 것이 그의 능력인건지 알 수 없었다. 물속에서 탈출할 때 무언가 능력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По крайней мере это был не правительство. Ты говоришь как солдат."
(적어도 정부의 개는 아니었겠죠. 군인 같은 소리 하네.)
이반은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마치 남 이야기를 하듯 무던한 어투였다. 그가 알아들어도, 알아듣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지난 과거의 일이기 때문에.
"그럼 어디 시정잡배한테 목줄 잡힌 갱스터였나?"
"…미국식으로 보자면 갱스터랑 비슷할 지도요."
러시아어로 대답한 것을 알아듣고 대꾸한다. 미국인 가운데서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이를 만난 일은 썩 많지 않았다. 질문에 답을 되돌리며 의외라는 이반의 시선이 짧게 아르망의 얼굴 위로 닿았다 멀어졌다.
"그럼 뒷돈 받아서 총 팔고 마약 팔고 여자 팔고 장기 팔고 사람 찌르는 사람이라고?"
"아… 던질까."
[건방지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텐데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이반이 혀를 찼다. 역시 이 남자도 악마 놈도 짜증난다. 의외란 눈빛을 준 것이 무색하게 이반은 금세 못마땅한 얼굴을 해 보였고, 목을 끌어안은 아르망의 팔에 좀 더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던져버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이반은 그를 곱게 내려 줄 생각은 없었으니 긴장하고 있는 것이 아르망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할렘을 빗겨가듯 날아 이반은 웨스트 128번가 쪽과 가까운 성 니콜라스 공원의 끄트머리에서 조금 더 땅으로 가깝게 내려갔다. 땅과의 높이는 이제 4m에 조금 못 미치는 높이였다. 이반은 아르망을 내려다보았다. 아르망 역시 이반과 시선을 마주했고, 녹빛과 푸른빛이 뒤섞인 오묘한 눈 위로 설마, 하는 기색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며 이반은 받치고 있던 손을 거둬 목에 감긴 팔까지 매정하게 떼어냈다.
"이 개새끼야!!"
"콘크리트 바닥이 아닌 걸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잔디밭에 일어난 균열 사이로 떨어져내린 아르망이 분노를 가득 담아 고함쳤다. 그제야 그의 능력이 무언가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임을 깨달으며, 이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던져버리지 않고 곱게 내려다 준 게 어딘가. 그런 의미에서 저 지저분한 남자는 고마운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반은 귀찮은 듯 손을 한 차례 휘저었다. 원하는 대로 할렘과 가깝게 데려다 줬으니 이제 난 갈 길 가요. 짜증과 화가 가득한 아르망의 입에서 또다시 욕설이 쏟아지기 전에 이반은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높이까지 날았다. 그 사이 한 몸이 된 루시퍼와 그의 동조자는 할렘에 한결 성큼 다가와 있었다. 검은 피막의 날개가 크게 펄럭이며 그를 향해 날갯짓했다. 그와 가까워질수록 루시퍼의 힘에 스러진 천사들의 비명이 성가처럼 새카맣게 남은 흔적 위를 울리고 있었다. 파괴적이기 그지없는 광경에 묘한 감정이 들끓는다.
[이반, 저기 천사의 동조자가.]
"알아요. 나도 보이니까."
그리고 그 천사의 동조자라는 게 누구인지도, 아주 또렷이 보였다. 에단이었다. 천사를 옆에 대동한 채 에단 역시 두 쌍의 날개를 달고 날아오다 이반을 발견하고 멈춰선 상태였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시선이 마주친다. 등 뒤의 날개를 훑는 눈의 움직임이 다 보였다. 거리 탓에 검게만 보이는 눈에 담긴 감정을 짐작할 수 없었다. 어쩌면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마주칠 때마다 그와는 묘하게 맞지 않는다 생각했던 것을 떠올린다. 애매하게 비슷한 동류여서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천사의 동조자와 악마의 동조자. 어쩌면 이래서 그와는 맞지 않는다고 느꼈던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가 천사의 동조자라니.
이반은 실소했다.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상대의 얼굴을 마주하며 이반은 뒤춤에 꽂아두었던 권총을 꺼내 에단을 겨눴다. 평범한 인간이 아닌 천사의 동조자야말로 바로 자신이 죽여야 할 제1순위가 아닐까. 저를 향해 겨눈 권총에도 에단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동요가 보이질 않았다. 슬몃 가늘어진 눈이 가늠자와 가늠쇠의 열을 맞춘다. 격발을 위해서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무엇인가 몸을 붙잡아 고정한듯, 손가락 하나를 까딱이는 것조차 되지 않았다. 이반은 이것이 에단의 능력일 거라 짐작했다. 능력도 모르는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 실수였다. 펄럭이던 날개조차 움직임을 멈췄고, 이반은 총을 쏘려던 자세 그대로 통나무마냥 아래를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빠른 속도로 땅을 향해 떨어져내리는 이반을 에단이 쇄도하듯 뒤따랐다. 사람을 굳혀 추락시켜놓고 따라오는 것은 뭐란 말인가. 천사의 동조자답게 사람을 죽게 둘 수는 없다는 건가? 이반은 삐딱한 눈으로 에단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떨어지는 이반을 기어이 따라잡은 에단이 손을 뻗어 팔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손자국이 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넌지시 머리를 스쳐 지난다. 그의 체격을 생각하면 의외의 상당한 힘이었다. 두 사람분의 체중을 견디려는 날개의 펄럭임이 거세다. 이반은 제 키 높이 정도의 간격을 두고 지면과 부딪혀 박살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대체 왜 붙잡아 살리지? 꼴같잖은 박애주의이기라도 한 걸까.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에단을 올려다보던 이반의 손가락이 움칫 잔떨림을 자아냈다. 몸을 옭죄던 무형의 힘이 사라진 것이다. 이반은 재빠르게 에단의 얼굴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달칵이는 빈 소리만이 날 뿐, 총구 밖으로 내뱉어지는 것이 없다. 탄창은 분명 가득 차 있었다. 원인을 파악할 여유는 없다. 짜증스럽게 총을 던진 이반이 주먹을 말아 쥐어 에단의 얼굴을 가격했다. 광대뼈와 주먹이 맞닿는 둔탁한 소음이 선명히 공기를 흔든다. 에단이 팔을 놓친 틈을 타 이반은 날개를 펄럭이며 거리를 멀찍이 벌렸고, 동시에 능력을 써 모습을 감추었다.
얼굴을 문지르고 고개를 든 에단이 이반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땅에 완전히 내려선 이반이 발목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 역으로 쥐었다. 새카만 양날의 군용 전투단검으로, 무언가를 베고 찌르는 데에 특화된 물건이면서 러시아에서 가져온 몇 안 되는 물건 중 하나였다. 익숙하게 손에 감기는 손잡이를 꾸욱 움켜쥔 채 에단을 주시하던 이반이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는 그대로 에단의 오른쪽 팔뚝을 길게 베고 지나쳤다. 지나쳐 온 방향으로 에단이 몸을 트는 것을 보며 이반은 재차 달려들어 에단의 옆구리를 베었다. 빈틈을 주지 않고 이리저리 물러났다 달려들어 손등이며 어깨, 등과 팔뚝까지 날이 닿는 곳이면 무조건 베어냈다.
휘두르는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일면식이 있는 사이라 하여 달라질 것 또한 없다. 에단이 천사의 동조자라는 것을 안 이후 이반에게 에단은 숨을 끊어놓아야 할 존재일 뿐이었다. 평소보다 과격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이반은 움직였다. 두 다리로 달려들던 것이 어느새 날개를 써 치고 빠졌다. 사방에서 펄럭이는 바람으로 에단의 머리칼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점차로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에단을 노리는 탁한 녹안이 먹이를 노리를 짐승의 것과 진배없었다. 이반은 온 몸을 돌며 흥분을 옮기는 피가 손끝을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것을 느꼈다. 나쁘지 않은 감각이었다. 치명상은 피한 채 점점 더 상처만 늘려가는 꼴이 마치 짐승이 먹이를 유희거리로 소비하는 것과 닮아있었다.
"잡았다."
이번에는 가슴팍에 길게 상처를 그어줄 요량으로 달려들었던 이반은 제 손목을 덜컥 잡아채는 억센 손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에단이 보이지도 않는 제 위치를 짐작해 잡아낸 것이다. 방향을 이리저리 바꿔댔으니 날갯짓으로 바람이 불어도 쉬이 잡아채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다. 에단의 능력을 생각하며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한 발 늦은 대가로 이반은 다시 전신을 얽매였다. 종전의 경험으로 그의 능력에 붙잡히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이반이 스르륵, 감추었던 모습을 알아서 드러냈다. 이미 잡혀있는데 모습을 계속 감추어봐야 능력 사용 후 돌아오는 반작용의 시간을 증가시킬 뿐이었다. 진한 고동색 눈을 쏘아보는 탁한 녹안이 평소와 달리 매섭다. 이반은 에단이 느긋하게 제 손에서 단검을 빼앗아가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까 이것도 반칙이네…"
에단이 뺏어간 단검을 멀찍이 던졌다. 평소와 별 차이 없는 목소리와 달리 몸은 지친 듯 던져진 단검은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 바닥을 구르는 단검에 시선을 두고 있던 이반의 눈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손목을 잡아챘던 단단한 손이 뺨을 쓸고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한 탓이다.
"칼을 사람한테 사용하면 나쁜 아이지… 안 그래?"
짐짓 어린 아이를 어르는 듯 한 상냥한 어조였다. 에단과 이반은 어떻게 굴어야 서로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 수 있는지, 잘 알았다. 덕분에 이반의 기분은 수직으로 바닥을 향해 내리꽂혔고, 얼핏 창백한 에단의 얼굴을 향해 개소리를 한다며 짓씹어 내뱉듯 으르렁거렸다. 이반의 기분을 바닥에 처박은 것이 제법 만족스러워 뵈는 에단이 이반을 포박한 채 그 자리에 두고 한 걸음 물러서나 싶더니, 발에 채이는 것을 내려다본다. 누군가 떨어뜨린 것인지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는 이어폰이었다. 그것을 주워든 에단의 시선이 이반에게로 향했다. Ебать. 이반은 에단의 생각을 훤히 꿰뚫어볼 수 있었다. 몸을 옭아맨 힘이 처음보다 약하게 느껴지는 것이 착각일진 몰라도, 지친 상태일 에단이 능력을 오래 지속하는 것은 어려울 듯 보였다. 그러니 뭐든 이용해 제 손을 묶어놓으려는 걸 테다. 꼼짝할 수 없는 이반의 뒤로 돌아간 에단이 이어폰 줄을 이용해 이반의 양 손목을 칭칭 감아 묶었다.
"구속 플레이엔 취미 없는데, 에단."
주의를 흩트리려는 이반의 말에도 꿋꿋이 손목 묶는 것을 끝낸 에단이 이윽고 손을 뗐다. 몸을 포박한 무형의 능력은 여전히 이반의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다음에 보자, 이반… 오늘은 말고. 짐짓 다정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이별을 고한다. 이반의 얼굴에 짜증스러운 기색이 들었으나, 능력에 포박당한 몸은 등 뒤의 에단을 돌아볼 수 없었다. 저를 덩그러니 내버려 둔 에단이 점차로 거리를 벌리는 소리를 귀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멀어지던 에단의 발소리가 사라지고, 서서히 포박된 몸의 주도권이 되돌아온다. 이반은 손목을 묶은 이어폰 줄을 팽팽해지도록 당겼다. 몇 번 힘을 주어 양 쪽으로 벌리듯 당겨내자 얼마 버티지 못한 이어폰 줄이 맥없이 끊어진다. 고작 이어폰 줄로 저를 묶어놓고 사라졌다는 것이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손목이며 팔을 찾아오는 묵직한 통증에 이반이 손을 쥐락펴락, 팔을 가볍게 털었다. 꼭 몸을 심하게 쓴 다음 찾아오는 근육통과 같은 통증이었다. 이것도 에단의 능력이 가져오는 효과일까. 그런 거라면 상당히 성가신 능력이라는 걸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냥 그렇게 보낼 겁니까?]
"설마요. 쫓아가서 끝내야죠."
설령 죽이지 못하더라도 이쪽에 방해가 되도록 둘 생각은 없었다. 이반이 다시금 날개를 펄럭였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을 뿐 더는 사람이라 부르기엔 거리가 있어 뵈는 생김의 남자가 주변의 멎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며 나아가는 광경이 저만치서 보였다. 이반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가 루시퍼의 동조자이자,루시퍼 그 자체임을 알 수 있었다. 도시가 미카엘의 힘에 쉽게 정화되지 않도록 악한 에테르를 퍼트리는 겁니다. 푸르카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메시아가 탄생했다곤 하나 천사들에게로 완전히 승세가 기운 것은 아니라던 말을 떠올린다.
루시퍼가 미카엘을 죽인다면, 승세를 확실히 이쪽으로 가져올 수 있으리라. 어디론가 모습을 감춘 에단을 찾기 위해 이반은 높이 날았다. 하늘을 나는 것은 발각당하기 쉬우니 날개를 쓰지 않고 여전히 땅에 발을 딛고 있을 듯싶었다. 발치에 내려다보이는 아래를 짙은 녹안이 이리저리 훑는다. 어디로 숨어들어기라도 한 것인지 에단의 모습은 쉬이 보이지 않았다. 에단과 대치했던 장소를 가운데에 두고 주변으로 원을 그리며 날았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다른 동조자들이 대치 중인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녹색 머리 쪽이 악마입니다.]
“그럼 저 마스크를 낀 쪽이 천사의 동조자라는 뜻이네요.”
마스크를 낀 남자가 번쩍이는 칼을 던진다. 이반은 눈을 찌푸린 채 악마의 동조자에게로 날아가는 칼을 살폈다. 쉬이 볼 수 없는 휘광성은 마치 다이아몬드의 것과도 닮아있었다. 공격은 일방적이었고, 악마 쪽에서 반격을 시도하는 듯싶었으나 싸움은 시시하게 끝이 났다. 이반은 이내 이동하는 천사의 동조자를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며 뒤따랐다. 자전거를 타고서 얼마간을 이동하나 싶던 그가 자리에 멈춰섰다. 뭔가를 느꼈거나, 눈치챈 모양이었다. 골똘히 다른 감각에 집중하는 듯했다. 그가 저를 알아차리기 전에 먼저 공격을 하는 것이 옳았다. 이반은 칼을 고쳐 쥐고 추락하듯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두 인영 사이에서 터진다. 그 찰나간에 방패를 형성해 공격을 막은 것은 본능에 의한 방어기제에 가까워 보였다. 천사와 떨어진 동조자가 다시 다가가려는 것을 재차 공격했다. 반짝이는 방패를 교묘히 빗겨나간 단검이 그의 목에 생채기를 남겼다.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반은 저를 쳐내려는 방패를 피해 동조자의 옆구리를 노렸다.
"손님은 초대하지 않았는데요."
웃음기가 담겨 있었으나, 이를 악다문 목소리였다. 방패를 포기하고 칼을 만들어 휘두르는 것에 고개를 젖히며 뒤로 물러선다. 흐트러진 허니 블론드의 머리칼 사이로 각각 색이 다른 오드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집주인인 것처럼 구네요."
비죽인 이반이 손에서 칼을 한 바퀴 돌려 쥐었다. 신장의 차이만을 놓고 본다면 이쪽이 유리했다. 하지만 이반이 가진 것은 단검일 뿐이고, 천사의 동조자가 가진 것은 공수에 활용도가 높은 능력이었다. 하지만 얼핏 보아서는 몸을 쓰는 것에 그렇게 재주가 있는 것 같지 않기도 했다. 어떻게 해볼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반이 불쑥 거리를 좁히며 치고 들어갔다. 정면으로 달려들다 급히 방향을 꺾어 왼쪽을 노렸다. 다이아몬드로 만들어 진 듯한 칼에 단검이 부딪히기가 무섭게 몸을 물렸다 다른 방향으로 찔러들었다. 공격하고, 방어하는 주고받기의 연속이었다. 확실히 이 동조자는 공격하기가 까다로웠다. 칼을 크게 휘두르는 것을 피해 뒤로 훌쩍 몸을 물린다. 그 사이 제 천사와 동조한 동조자는 활의 시위를 팽팽히 당기고 있었다. 검과 방패로도 모자라 이젠 활인가. 작게 혀를 찬 이반이 모습을 감추며 몸을 튼 것과 화살이 옆을 스쳐지나간 것은 아주 간발의 차이였다.
이반은 틈을 주지 않고 달려들어 칼을 든 팔을 길게 그었다. 지나간 궤적을 따라 붉은 핏물이 금세 퍼져나간다. 이후 이어진 것은 에단을 갖고 놀듯이 굴었던 것과 비슷한 공격의 연속이었다. 날개를 이용해 빠른 속도로 치고 빠지거나, 두 다리를 이용해 달려든다. 짧은 칼은 사정거리가 그만큼 짧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그만큼 활용도가 좋았다.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았고, 어떤 각도로든 변칙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 이반은 그 장점을 활용해 마스크를 낀 천사의 동조자를 유린하듯 가운데에 놓고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제가 죽으면 어쩌려고 이러시나. 당신들에게 상식을 기대하는 게 무리였나요?"
"어쩌긴요. 그게 지금 내가 하려는 거라니까. 눈치가 없는 거예요, 멍청한 거예요?"
이반은 실소했다. 죽으면 어쩌냐니. 그럼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죽이지 않기 위해 하는 짓으로 보였단 말인가. 저를 찾듯 허공을 훑는 시선이 한 곳에 초점을 두지 못하고 일견 탁했다. 이반은 그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하기로 했다. 몸을 쓰는 것에 재주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했으나 이 천사의 동조자는 제 예상보다 몸을 효과적으로 쓰는 데에 능했다. 쥐고 있던 칼을 없애며 무언가를 뿌리듯 휘둘러지는 손동작에 몸을 띄운 것은 이반이 아닌 푸르카스였다. 서너뼘 쯤 공중에 떠오른 이반이 바닥에서 솟은 날카로운 결정들을 내려다보았다. 발을 꿰뚫리지 않은 것은 간발의 차였다.
“그러게 제대로 찌르지. 겁먹은 줄 알았거든요.”
“지금 꼴을 돌아보고 말하지 그래요?”
“이래서 얻는 게 뭐예요. 같잖은 자기만족?”
“꼭 얻는 게 있어야 해요? 유희죠, 그냥.”
얻는 것이 있어야 하느냐 되묻는 이반의 질문은 진심이었다. 이런 식으로 상처를 입히고, 베고 대치하는 것에서 얻어야 하는 것이 달리 뭐가 있을까. 굳이 뭔가를 갖다 붙이자면 결과적으로 멸망을 이끌어내기 위함이라고 붙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유희를 즐기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이반은 새로운 제 구원을 만난 이후 켜켜이 쌓인 신의 안배들을 하나씩 도려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랬기에 운이 없어 으슥한 뒷골목에서 살해당하는 커플을 방관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에게 병원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음을 알려야 한다는 줄리안의 숨이 다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멀쩡히 숨이 붙은 열 명의 숨을 끊어놓았다. 죽음을 목도할 적마다 하나씩 잘려나가는 신의 안배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것이 이반은 퍽 만족스러웠다.
가볍기 그지없는 이반의 대답에 질렸다는 반응이 돌아온 것 같기도 했다. 확신할 수 없는 이유는 그렇게 느끼는 순간 시위를 떠난 화살이 어깨를 찢고 지나쳐간 탓이었고, 그에 곧장 동조자에게로 달려든 이반이 그의 다리에 단검을 쑤셔 박았기 때문이었다. 날붙이를 단단히 무는 근육의 움직임이 검자루를 통해 선명히 전달되었다. 이반은 동조자의 다리를 찌르고, 팔을 내주었다. 제법 깊게 베인 상처가 피를 울컥이며 뱉는다. 이반은 칼날을 단단히 물고 있는 근육을 찢어발기듯 날을 비틀어 빼냈다. 한 수도 지지 않겠다는 듯 무릎을 꿇는 순간에도 천사의 동조자가 날려 보낸 날카로운 침이 뺨을 아슬하게 스쳤다.
[이정도면 적당히 놀았다고 생각합니다만.]
푸르카스가 나직이 속삭여왔다. 이반도 그의 생각에 동의했다. 두 번이나 베여주었으면 충분했다. 이반은 동조자의 급소만을 노려 공격하기 시작했다. 숨 돌릴 틈 따위는 주지 않았다. 약간의 빈틈만 잡을 수 있으면. 그렇다면 끝낼 수 있다. 이반이 바라던 빈틈의 순간은 예상 외로 빠르게 찾아왔다. 짧은 순간 보인 틈을 향해 단검을 찔러 넣는다. 그러나 가슴을 노리고 파고든 칼끝이 향한 곳은 어깻죽지였다. 어지러움이라도 느낀 듯 비틀거린 탓이었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는군요. 빈정거림이 묻은 푸르카스의 음성이 이반의 머리를 울렸다. 이번이야말로 가슴을 찌르려 검을 빼내자 기다렸다는 듯 방패를 생성해내는 통에 이반은 의지와 상관없이 두어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다가오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의지를 시사하듯 동조자를 둘러싸고 날카로운 침들이 첨예하게 사방을 겨누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천사의 동조자가 쓰러진 자전거를 잡아채듯 올라타 멀어진다. 이반이 다시금 날개를 펼쳤다. 도망가는 것을 또 얌전히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