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작업물
꽃말
조각글 TYPE / 오마카세 / 뮤지컬 더 픽션
골방 by 찰나
6
0
0
작가 그레이 헌트의 작업실 창가에는 시들지 않는 꽃이 있었다. 모든 꽃은 피면 지기 마련이니 항상 같은 모습은 아니었고 주마다 다른 종의 꽃이 같은 화병에 꽂혔다. 이번 주는 연보랏빛이 폭신한 라일락이었다.
쿰쿰한 책 곰팡내만 나던 작업실에 꽃향기가 들어선 건 대략 일 년 전 일이었다. 그레이의 전담 편집자 와이트 히스만이 별안간 사 들고 온 장미 한 송이가 계기였다. 그레이는 도저히 잘 키울 자신이 없다면서 마당에 심으라 했지만, 와이트는 모두 자기가 책임지겠다며 기어코 작업실까지 화분을 들고 들어왔다.
빳빳한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을 문지르던 그레이는 내리쬐는 햇살에 가늘게 눈을 뜬 채로 물었다.
“이번엔 무슨 꽃이야? 향기가 여기까지 나네.”
“괜찮아요?”
“응, 좋아.”
“라일락이에요. 색이 예뻐서 샀어요.”
“아, 라일락.”
그레이는 창문을 살짝 밀어 올렸다. 산들바람에 얇은 줄기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는 촉촉한 꽃잎을 손끝으로 쓸다 뒤늦게 입을 열었다.
“꽃말이 뭔지 알아?”
와이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글쎄요. 뭔데요?”
“젊은 날의 추억이래. 뭐, 첫사랑 같은?”
그 발화의 방점은 분명 ‘젊은 날의 추억’에 찍혀 있었으나, 와이트는 그 왠지 뒷말을 곱씹고 싶었다. 첫사랑, 첫사랑. 그에게도 첫사랑이 있었을까. 자신이 모르는 시간 속의 그가 새삼스럽게 궁금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