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헌트는 굳은살이 박인 뭉툭한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며 문장을 골랐다. 뭐가 더 좋을까. 혼잣말처럼 흘린 단어들은 허공을 지나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에게 닿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편집자 와이트 히스만은 안경까지 얌전히 벗어둔 채 그레이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레이는 몸을 이리저리 기울이며 와이트의 시야를 벗어나 보려 했지만, 와이
각오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알았던 결말이기에, 어차피 내가 만드는 결말이라서. 신변을 정리하는 일에 더 오랜 시간을 쏟았다. 마음을 정리하는 일에도. 처음에는 이사하는 기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 결국에는 이곳을 떠나는 일이니까. 이사는 누구나 가게 되지 않는가? 게다가 작가는 매 순간 자기가 만든 이야기와
결국 연재가 중단되었다. 편집장의 일방적인 통보와 권위적인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걱정이 앞섰다. 그레이도 머잖아 이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아니, 이미 연락이 갔을지도 모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당장 그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와이트는 신문이란 신문을 모두 사들여 《그림자 없는 남자》에 대한 호평을
작가 그레이 헌트의 작업실 창가에는 시들지 않는 꽃이 있었다. 모든 꽃은 피면 지기 마련이니 항상 같은 모습은 아니었고 주마다 다른 종의 꽃이 같은 화병에 꽂혔다. 이번 주는 연보랏빛이 폭신한 라일락이었다. 쿰쿰한 책 곰팡내만 나던 작업실에 꽃향기가 들어선 건 대략 일 년 전 일이었다. 그레이의 전담 편집자 와이트 히스만이 별안간 사 들고 온 장미 한 송
이제 막 봄이다. 따뜻한 바람이 외투를 벗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잎을 틔우고 꽃을 맺는다. 겨우내 얼어있던 작은 시냇물도 제 모습을 되찾아갔다. 그동안 변하지 않은 건 일 년 전이나 지금이나 타자 소리가 멈추지 않는 그레이 헌트의 작업실뿐인 것 같았다. 그레이는 벌써 다섯 시간째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내내 문장과 씨름하고 있었다. 쉬엄쉬엄하라는
녹음과 통신 기술이 발달하면서 음악 산업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전축만 있으면 아무리 깊은 산속이라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를 향유할 수 있었고 전파가 잡히는 도시에서는 라디오 한 대가 바이닐 백 개의 역할을 해냈다. 공연장은 안방 침대까지 밀고 들어왔고 인간은 비로소 현실이 아닌 소음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이제 막 새벽 다섯 시가 지난 작업실에는
“좀 쉬엄쉬엄해. 아주 일중독이야, 중독.” 슬슬 수긍해 줄 때도 됐는데. 그레이는 한껏 기대에 찬 얼굴로 와이트를 바라보았지만, 와이트는 고개를 저으면서 장난스럽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우리 작가님도 일중독 좀 되셨으면 좋겠는데요.” “난 너한테 중독됐지.” 예에? 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저런 말도 할 줄 아는 분이었나? 평
깜빡 잠이 들었다. 언제 눈을 감았는지도 모르는 새에 아침이 되었다. 그레이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머잖아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와이트는 몸을 일으켜 원고 사이를 뒤적거렸다. “안경 내 책상에 뒀어.” 그레이는 프라이팬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고 말했다. 와이트는 단행본 위에 가지런히 놓인 안경을 집어 쓰고 어깨에 덮인 담요를 만지작거렸다.
잘그락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레이는 귀 뒤에 연필을 꽂아둔 것을 잊었는지 필통을 뒤적이며 또 연필을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와이트는 입술 새를 비집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서랍을 열었다. “작가님, 연필 더 깎아둘까요?” 그레이는 그제야 옆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연필을 꺼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한 자루를 도로 필통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