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작업물

편지

소설 TYPE / 오마카세 / 뮤지컬 더 픽션

골방 by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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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쉬엄쉬엄해. 아주 일중독이야, 중독.”

슬슬 수긍해 줄 때도 됐는데. 그레이는 한껏 기대에 찬 얼굴로 와이트를 바라보았지만, 와이트는 고개를 저으면서 장난스럽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우리 작가님도 일중독 좀 되셨으면 좋겠는데요.”

“난 너한테 중독됐지.”

예에? 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저런 말도 할 줄 아는 분이었나? 평소에 자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아니었던지라, 당장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영 어색하게 들린 게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싫지는 않았지만, 막상 저도 그렇다고 하면 분위기가 오히려 이상해질 것 같아 표정을 지우고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아닌데요.”

그레이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눈썹을 사선으로 기울였다.

“아니, 그냥 그렇다고 해줄 수도 있지. 말을 왜 그렇게 해.”

그가 명백하게 서운한 기색을 보이자 외려 당황한 쪽은 와이트였다. 와이트는 그의 얼굴을 살피려 안경을 올리며 이리저리 고개를 기울였지만, 그레이는 정리된 원고를 공연히 뒤적거리면서 내내 중얼거릴 뿐이었다. 내가 뭐, 진짜 그래 주길 바라서 한 얘긴 아니지만,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받아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와이트는 풀어지듯 웃으며 그의 뒤로 다가가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아유, 농담이에요. 저도 작가님한테 중독됐죠. 안 그랬으면 제가 십 년도 더 된 책 첫 단락을 다 외우고 그랬겠어요? 첫 단락뿐이 아니에요. 어디에 누가 나오고 어떤 말을 하는지 다 꿰고 있는걸요.”

“정말이야?”

여전히 원고 위에만 시선을 고정하던 그레이는 그제야 흘끔 곁눈질하며 물었다. 와이트는 일부러 더 애교 있게 눈을 접어 웃었다.

“당연하죠.”

“그럼 됐고.”

그레이는 슬쩍 끄덕이더니 금세 풀어지듯 웃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와이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남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서운한 감정을 갖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아니라 자신이 될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친밀해졌다고 편집자와의 인간적인 관계를 기대하진 않으니까, 더구나 그에게 자신의 첫인상은 (혹은 지금도) 갑자기 찾아와 주절거리던 이름 모를 팬 중 하나였으니까. 함께 보낸 시간이 아주 의미가 없진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장을 뒤적이는 그레이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뭐 찾으세요?”

“어, 줄 거 있어서.”

“어떤 거요?”

아, 찾았다. 그의 손에 들린 건 깔끔하게 정리된 종이 뭉치였다. 세월이 느껴질 만큼 색이 바래긴 했지만, 정갈하게 쓴 글씨가 보기 좋았다. 와이트는 조심스럽게 첫 장을 넘겼다.

“이게 초판 나올 때 맨 처음 썼던 원고인데,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

와이트는 환하게 웃으면서 원고를 어루만졌다. 《그림자 없는 남자》 초판의 초고라니! 꽤 오래 덮어두었던 팬의 마음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와이트는 차분하게 페이지를 넘기며 읽다 두어 번 접은 종이를 발견했다.

“이건 뭐예요?”

“아아, 그거. 예전에 네게 말한 적 있었지. 블랙과 만난 소년 말이야. 장례미사에 혼자 있던 아이를 생각하면 쓴 거였다고. 처음엔 서문으로 그 소년에게 쓰는 편지를 실을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출판사에서 너무 사적인 내용처럼 느껴진다고 아예 빼버렸어. 그게 여태 아쉬워서 기억하고 있지.”

와이트는 심장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손이 조금 떨렸다. 그레이는 와이트의 어깨를 슬며시 토닥이고는 책상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책장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와이트는 바스락거리는 편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너의 밤은 다만 외로움이 없길 바란다. 때마다 가슴을 죄는 고통까지 가져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가슴 속에서 몰아치는 폭풍우를 그 누가 함께할까. 평생에 걸쳐서도 다하지 못할 이야기가 그 속에서 장미를 피워 너의 마음은 온통 피투성이임을 안다. 나의 이해는 얄팍하고 터무니없어 안다고도 해선 안 되지만, 위로해보겠다는 이기심 하나로 수만 단어의 페이지를 쓴다. 또 한 번 기도하며 종이에 잉크를 쏟아붓는다. 미약하기 짝이 없는 한 줄의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기를.’

“뭐, 출판사의 말도 아주 일리가 없진 않았다고 생각해. 이름도 모르는 소년에게 편지를 쓴답시고 온갖 현학적인 단어를 늘어놓은 것처럼 보였겠지. 내가 허풍을 떨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있어 보이겠다고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낸 게 아니냐고……. 울어?”

한참 말을 잇던 그레이는 와이트의 붉어진 눈시울을 살피며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손수건을 급히 꺼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그레이의 행동에 와이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 괜찮아요, 작가님. 그레이는 눈치를 살피며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진짜 괜찮아?”

“그냥,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단 게 좋아서요. 작가님이 어떤 마음이셨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아서.”

그레이는 그제야 멋쩍게 뺨을 긁적이면서 와이트를 따라 웃었다. 그는 한참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뒤늦게 입을 열었다.

“고마워.”

“뭐가요?”

“알아줘서 고맙다고. 네가 내 소설을 아무리 좋아해도, 내 마음까지 이해해주길 바란 적은 없었거든. 정확히는 없다고 생각했지. 기대한다는 건, 그 사실만으로도 부담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러면 안 될 줄 알았어. 그런데…… 진짜 친구가 생긴 기분이야. 살면서 내내 그런 건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고마워.”

와이트는 편지를 품에 꼭 끌어안으면서 눈을 휘어 웃었다.

“저도요. 저도 고마워요,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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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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